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나'라는 생각의 형성

장백산-1 2014. 1. 8. 01:08

 

 

 

 

 

그런데 感受가 나라고 여기고, 나의 것이 감수라고 여기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다고 여기고, 감수 가운 내가 있다고 여긴다.

 

수행승들이여, 그렇게 여기는 行爲形成이다.

 

그런데 形成은 무엇을 原因으로 하고 무엇을 根據로 하고 무엇을 原泉으로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無明에 닿아 생겨난 感受에 接觸되면 渴愛가 생겨나고 그것에서 形成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形成도 無常하고 條件지어지고 緣起되는 것이다.

 

渴愛도 無常하고 條件지어지고 緣起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면 지속되는 煩惱를 끊을 수 있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4], 244 전재성 역주)

 

 

形成 () 12緣起의 無明 다음의 두 번째로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形成이라는 것은 身口意에서 어떤 모양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감수가 나라고 여기고 나의 것이 감수라고 여기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다고 여기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긴다]라는 본문의 뜻을 자세히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즉, 우리는 일정하지 않은 여러 곳에서 '나라는 生覺'을 일으킨다(形成). 때로는 우리가

어떤 느낌을 느끼면 바로 느끼는 그 순간 []를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때로는

명상에 들어 느낌을 관찰하며 느낌은 내가 아니고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나라고 생각하므로

느낌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때는 내 마음 가운데 느낌을 볼 수 있으므로

[ 느낌]은 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또 생각하기를 느낌이 있을 때만

나의 존재를 알 수 있으므로[느낌 가운데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네 가지 상태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사람도 상황마다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조용히 앉아서 철학적으로 숙고하여 한 생각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매 순간마다

네 가지 중에 하나로 나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순간순간 나를 인식하는 것이 형성이다.

그러나 이 네 가지의 경우가 찰나도 쉬지 않고 이어져서 恒常 우리가 를 느끼고 살지만

모두 無常한 것이요 條件 지어져 나타나는 것이다.

 

단지 드물게 가끔 나타나는 외부의 현상과는 달리 우리가 깨어있는 때에는 언제나 우리의 의식활동이

이러한 형성을 잠시도 쉬지 않기 때문에 나에 대한 집착은 강한 것이요 알기 힘든 어리석음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잘못 생각하여 매 순간 나라는 인식을 벗어나는 어떤 경지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지는 다름 아닌 감수로 생긴 또 하나의 형성(어떤 경지에 대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지혜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들은 어떻게 분명히 아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나아가거나 물러설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앞을 보거나 주변을 볼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사지를 굽히거나 펼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옷이나 발우나 가사를 지닐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대변 소변을 볼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하며,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깨어있고 말하고 침묵할 때에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것을 수행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분명히 안다.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마음에 새겨 분명히 알고 방일하지 않고 성실하게 정진할 때에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이, 또는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이 생겨나면 그는 이와 같이 나는 즐거운

(괴로운, 또는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것은 조건적이지 무조

건적이지 않다. 그것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 접촉(, 또는 감수)을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 접촉(, 또

는 감수)는 무상하고 형성된 것으로 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무상하고 형성된 것으로 조건적으

로 생겨난 접촉(, 또는 감수)을 조건으로 생겨난 즐거운 감수(괴로운 감수, 또는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감수)가 어떻게 항상할 것인가?

그는 接觸(, 또는 감수)하여, 무상을 관찰하고, 괴멸을 관찰하고, 소멸을 관찰하고,

멸진을 관찰하고 림을 관찰한다. 그러므로 접촉(, 또는 감수)에 관한 貪慾의 경향을 버리게 된다.

 

(빠알리대장경[쌍윳따 니까야] [7], 40-46, 재성 역주)

 

앞의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관찰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관찰

話頭 들듯이 들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으라는 말은 아니다. 理致는 밖을 향해서만 알아서는

힘이 없는 까닭에, 자신의 마음에 모든 것도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모든 마음의 作用

24 관찰한다는 것은 관찰하는 주체관찰되는 대상인 마음의 작용을 체험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뒤에 설한 智慧에 있는 것이다. 즉 그러한 感情

몸 또는 접촉을 조건으로 생긴 것인데 그 조건이 되는 몸이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로부터 비롯된 일체의 마음의 작용도 무상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이 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누구나 조금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알고 이해할 수 있는 이러한 법을 무엇 때문에 24시간 부지런히 행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머리로만 안 것은 안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알고 있다. 이 말은 잘못 생각하면

[체험으로 알아야 안 것이다]라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체험이라는 것도 무상한

 법이다. 즉 그 체험도 몸과 접촉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명제에

어리석어서 사람은 수행과 지혜에 혼동을 보이는 것이다.

 

부처님이 제시한 이 지관의 수행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말로서 쉽게

알수 있는 이 법을 듣고도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하므로 (흔히 상근기는 말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고 한다) 그러한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감각 등 마음의 작용에서

헷갈려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고 이어서 어리석은 행을 하므로 직접 자신의 행동을

일으키는 그 모든 마음의 작용을 관찰하여 깨닫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안 따른다]고 그러나 자세히 대화를 하여보면

머리로도 모르는 경우에 몸이 안 따른다. 체험이 무상한 것임을 잘 아시는 붇다가 체험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것은 사람들이 앎과 체험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는 데로 행동하게 되어있다. 자세히 생각해보라. 우리의 모든 행동의

근원은 우리의 생각이 주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행이 바뀌는

것이다. 체험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하나의 요소요, 앎도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요소이다.

 

 

[세존] 아난다여, ……. 접촉이 생겨나면 감수가 생겨나고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한다.

감수의 소멸로 이끄는 길은 이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이다. 그것은 곧

올바른 見解, 올바른 思惟, 올바른 言語, 올바른 行爲, 올바른 生活, 올바른 正進, 올바른 마음새김,

올바른 集中이다. 감수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거움과 만족 그것은 감수의 유혹이다. 감수는 무상한 것이

고 괴로운 것이고 변괴하는 것인데 그것은 감수의 위험이다. 감수에 대한 탐욕과 욕망을 제거하고 버리면

그것은 감수에서 벗어남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나는 이어서 모든 形成된 것의 사라짐 (또는 그침 또는 고요함)에 관해서 설한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희열이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공간이 무한한 무한 공간의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는 현상에 대한지각이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의식이 한 없는 무한 의식의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는 무한공간의 경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그치고, 요하고),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무한의식의 경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그치고, 고요하고),

지각하는 것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의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는 무소유의 경지에 대한

자각이 사라진다(그친다, 고요하다).

지각과 감수가 소멸한 상수멸의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는 지각과 감수가 사라진다 (그친다, 고요하다).

번뇌가 부수어진 수행승에게는 탐욕도 사라지고 분노도 사라지고(그치고, 고요하고) 어리석음도 사라진다.

(그친다, 고요하다)

 

形成된 것이란 우리가 認識하는 모든 境界와 想像의 世界 등을 말한다. 12緣起의 形成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우리의 無明으로 因하여 우리는 다양한 우리 나름의

主觀的 世界를 만들고 산다. 또 우리의 주관적 세계라고 하지만 그것들의 일부는 다른

사람과 相互 交流하면서 생긴 의미들이기에 共有하는 槪念들도 있어서 서로 意思疎通도

되는 것이다.

 

여하간 12연기의 형성이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어리석어서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주관적 세계와 개념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위의 여덟 가지 바른 길에 의해서

그치고 고요해지고 사라지게 할 수 있으니 이 그치고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어리석음이 쉰다는 의미이. 즉 깨달은 것이다.

 

이제 第一禪定에서 상수멸의 경지까지 차례로 선정의 경지를 말하여 어리석음으로 생긴

[형성]의 그침 사라짐 등을 알게 되고 결과적으로 어리석지 않게 되어 탐욕 분노 등의

원인인 번뇌에서 해방됨을 설한다.

 

이 뒤 부분의 설을 불교의 수행자들이 잘못 이해하여 주구장창 가부좌를 틀고 틀어 앉아

경험하고자 하는 세계인데 문제는 이러한 단계에서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체험하려

한다는 것이다. 즉 止觀 중에 지에만 치우친 생각이다. 관인 지혜가 부족한 사상이다.

바른 길인 팔정도를 살펴보면 우리는 바로 정한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八正道란 올바른 生活로, 바르게 集中할 시간을 얻어서, 멍청이 集中만 하지 말고 잘

思惟하고, 이러한 過程을 꾸준히 正進하여, 바른 見解를 얻는 것이며, 그 얻은 바 바른 견해를

 다시 잘 마음에 새기고, 바른 언어와, 행,을 하는 바른生活을 하는 것이다.  

 

이제 뒤의 인도의 요가와 비슷한 선정의 이야기는 시대적으로 필요한 방편설이다. 이미

이러한 사상은 기존의 인도사상에 있었던 것으로 붇다가 새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체험을 통한 세계를 언어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는 세계(初禪定),

사유와 숙고를 하지 않는 세계(2禪定),

내부로부터 일어나는 기쁨이 없는 세계(3禪定),

밖으로부터 오는 기쁨이 없는 세계(4禪定),

현상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는 세계(四無色定),

공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진 세계(空無邊處定),

모든 의식이 없는 세계(識無邊處定)

소유의 집착이 끊어진 세계(無所有處定),

생각이 끊어진 상태에서 만 가지의 모양도 아니고 모양이 아님도 아닌 것을 아는 세계(非相非非相處定),

신심이 고요하고 아집을 벗은 세계(滅盡定)로 나누어 논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붇다는 진리를 설한 것이다.

 

이제 글의 내용 중에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사라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경험의 세계이라면 네 번째 선정에서 모두 호흡이 끊겨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호흡이 사라진다는 것은 호흡을 멈춘다는 것이 아니고 호흡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는 상태가 영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어떤 집중의 상태에서

그러한 상태를 일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상태는 선정 등 어떤 특별한 수행을 할 때만 오는가?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호흡을 의식하지 않고 보내는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차례로

[언어가 사라지고]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고]

[희열이 사라지고]

[호흡이 사라지고]

[현상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무한공간의 경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무한의식의 경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무소유의 경지에 대한 지각이 사라진다]

[지각과 감수가 사라진다]

[어리석음도 사라진다]

이렇게 사라지고 그치고  고요해진다는 의미는 무슨 뜻일까?

 

모든 것은 선정 중에 체험할 수는 있는 현상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범위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관적인 어리석음의 세계는 모두 우리의 무명으로 인한 [형성]의 과정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으로 체험하는 세계라 하더라도 우리일상의 세계에서 형성한

 주관적 세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선정을 통해 경험하는 어떤

세계이던 생각으로 해볼 수 있는 상상의 세계이던 모두 우리의 의식이 어리석음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형성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형성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완전한 것을

 다시는 어리석지 않은 해탈을 얻었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現代의 佛家에서는

哲學的 想像인 形成의 世界와 自身을 我로 固執한 體驗의 世界를 다른 것으로 區別하는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체험을 특별히 강조하는 논리가 앞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체험]이 체험이 아니고 그 이름이 체험임을 깨닫지 못한 소견이

바탕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은 체험과 생각 가능한 세계의 형성을 다르게 본 것이 문제는 아니다.

이러한 차별이 나은 현대불교의 실상이 문제인 것이다.

 

붇다의 思想이 완전한 깨달음을 최상의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소수의 몇 사람만을 위한 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붇다의 사상은 내가 보기에는 깨달음이 최상의 목표가 아니며 오히려

世上의 極樂化가 最上의 目標라 보는 것이 옳다. 즉 팔정도의 바른 생활 언어 행을 통한

人類의 解脫이 目標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불교를 이해한다면 개인적인 체험의 수행만을 강조하는

불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오히려 체험에 앞서 지혜가 강조되는 종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個人的인 解脫을 중요시하여 수행만을 강조하는 현대 불교의 입장은

위에 예시된 9가지 禪定을 체험하여 어리석음을 소멸하고 해탈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체험에 앞서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란 이러한 것이다.

[體驗이란 無常한 것이다. 사람들의 行爲의 原因은 生覺이며, 그 生覺의 原因은 앎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러한 생각을 유발하는 앎에서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데 바로 그러한

어리석은 생각智慧로써 對置할 수 있는 것이다. 깊은 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조금씩

시간을 내어 염불 참선, 명상 등을 병행하여 마음을 가라 앉히고 좀 조용히 붇다의

가르침을 올바로 사유하면 누구나 쉽게 이치를 알 수 있다.

 

비록 안 이치가 아직은 체험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바른 앎을 마음에 올바로 새겨 일상의 삶을 바른 언어와

생활로 이끌면서 지속해 나간다면 나의 생각이 올바로 바뀌어 나가고 나의 가정을 바로 세워 나가며 우리

가 소속한 사회가 밝게 되어 갈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 나 홀로 깊은 진리를 다 깨달아보아도 세상이 바뀌어

있지 않으면 그 깨달은 세계는 나 홀로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일상의 깨달음은 비록 아직 깊지 않아도 안 만큼 내가 변하고 주의가 변하는 것이니

진실한 길이고 빠른 길이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격한 고행이 아닌 일상적인 인간의 고뇌에 대하여 조용히 사색하기 시작

하였다.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 두 번째 커다란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러한 평온한

색에서 마침내 깨달음과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9[불교와 인도사상], 139,

동국역경원(미카엘 케리터(Michael Carri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권오민),

 

붇다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전문적인 요가에 의해서도 아니고 전념(專念: 집중된 마음) 의한 체험에서도

아니다. 조용한 사색에 의해서 깨달음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큰 것이다.

 

명상의 상태는 결국 두 가지 이유에서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첫째, 그러한 상태는 단지 일시적인 상태이며, 오직 현세에서만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다른 법문(맛지마 니카야(Majjhima Nikaya) III 234-5)에서 보다

분명한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는데, 여기서 붇다는 어떤 숙련된 명상가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명상의 상태

머무를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상태는 일시적인 것이며, 끝내는 소멸되고 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법문에서는 (Majjhima Nikaya) III 236-7) 스스로 그러한 명상의 상태를 통하여 궁극적이고도

확실한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명상가라 할지라도 실제에 있어서 전혀 다른 엉뚱한 것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사실상 반대로 달려가고 있으며, 번민과 고독한 육체적 안락 아니면 기껏해야 육체를 여

(명상의) 기쁨이나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닌 단순한 감정 사이를 무의미하게 지향하고 있을 뿐

이라고 하였다.

 

. ( 9[불교와 인도사상], 174, 동국역경원

(미카엘 케리터(Michael Carri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권오민),

 

대개 현대의 한국불자들이 수행이라고 하며 하는 것들이 이것을 벋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할 그 무엇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즉 지혜의 부족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전혀 다른 방법, 이를테면 오래 시간에 걸친 명상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고와 감정의 질적인 변화에 의해 획득지어지는 것이다. .

 

( 9[불교와 인도사상], 175, 동국역경원

(미카엘 케리터(Michael Carri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권오민),

 

불교의 초기경전에 정통한 학자는 붇다의 말씀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케이스 토마스는 붇다의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道聖諦: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법)

첫째 팔정도, 둘째 명상, 셋째 지혜로 보고 설명한다. 이 중에 명상과 지혜에 대한 설명을 보자.

 

통찰력 있는 명상은 매일매일, 매 순간순간마다 내적인 성찰이나 명확한 인식, 자기주변의 상황이나 자신

의 경험,그리고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 등에 대한 지각 등, 이 모두에 대한 보편적인 마음가짐을 요구하기

때문에 결코 한적한 곳에 앉아서만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세번째 방법인 지혜는 경험을 적절하게 지각하는 새로운 방법을 요구한다. 이러한 새로운 지각의 양상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매우 간단한 것인데, 붇다에게 있어서 이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와 상호 의존하

는 공생연기(共生緣起), 즉 연기의 교설을 통하여 보는 것을 의미한다.

 

( 9[불교와 인도사상], 212-213, 동국역경원

(미카엘 케리터(Michael Carri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권오민),

 

이렇게 세 가지가 均衡을 이루고 이행되어야 깨달음에 가까이 간다.

단지 가부좌를 하고 틀어 앉아서 화두만 들고 24 보내는 것은 外道의 명상인 것이다.

 

우리들은 어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킴으로써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붇다에게 있어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기 자신의 이익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 9[불교와 인도사상], 229, 동국역경원

(미카엘 케리터(Michael Carrithers,, Oxford University Press, 1983), 권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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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살로메|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