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의 주례사 [금고옥조]입니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장백산-1 2014. 5. 21. 14:29

 

 

 

 

12인연 / 숭산스님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
숭산 스님

무명(無明)이란 밝지 못한 마음, 가려진 마음이다.

밝지 못한 마음, 無明心이 일어나면

本來 밝고 깨끗한 自己(淸淨心)을 잊어버리고 바깥 境界에 動搖하게 된다.

 

어떤 처녀가 한 농군을 보았다.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고 직분도 좋고 가문도 좋았다. 남이 알까 남 모르게 사랑하고 싶은 衝動心이 일어났다.

 

 

“아, 저런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남몰래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싶습니다.’ 상대방도 그 편지를 받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 언제 한 번 만납시다.” 그렇게 해서 만나고 나니 마음이 더욱 通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저 남자 저 여자를 어떻게 내 愛人을 만들까 하는 生覺에서 눈·귀·코·혀·몸 뜻을 지속적으로 接觸하였다. 받아들이는 것이 따뜻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서는 좋지 않은 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것은 다 버리고 좋은 점만 사랑하였다. 사랑하다보니 통째로 갖고 싶었다. 그래서 結婚式이라는 것을 하였다. 그랬더니 뜻밖에 거기서 아이를 배더니 아이가 태어났다. 그래서 좋아서 어찌나 기쁘던지 “어허둥둥 내 사랑아 - ” 하고

먼저 사랑하던 애인 이상으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기쁘게 길렀다.

 

그랬더니 나이가 드니 점점 노쇠해지더니 병이 들고 갖가지 고통거리가 생겨 슬픈 정경을 바라보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괜히 왔다 가는구먼 -.” 그때사 깨달았다. “낳아도 안 낳아도 상관없는 것. 내 가슴만 이렇게 찢고 간다.”고 후회하였다.

 

이것이 12因緣이다. 最初의 一念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보는 最初의 一念, 그것이 無明이다.

남자라는 것을 보지 않았으면 그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남자를 보았기 때문에

그 最初의 한 生覺 [無明]에 의해서 편지를 쓰는 행(行)이 이루어지고,

피차가 서로 알게 되는 식(識)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좋아한다는 명색(名色)이 붙고, 눈·귀·코·혀·몸·뜻(六入)으로 [接觸]하여 그 좋은 것을 받아들여〔受〕 사랑하고〔愛〕,

사랑하다보니 아주 자기 것을 만들어〔取〕 한 살림을 차리고〔有〕 한 살림을 차려 살다 보니 아이를 낳았다〔生〕. 난 것이 어느새 늙어〔老〕 병들고〔病〕 갖가지 고통사를 연출하다가 그만 죽어버리니〔死〕 그것이 人生이었다. ‘차라리 한 生覺을 일으키지 아니하였다면 이런 結果는 없었을 것’하고

後悔를 하여도 그때는 이미 소용이 없었다. 어떤가?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어디 인생뿐이던가? 이 世上 모든 것이 이렇게 되어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 生覺도 하지 말고 그냥 바보처럼 살라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無明에 의해서 일으키는 結果는 이렇지만 명(明)에 의해서 일으키는 일은 이런 結果가 없다. 밝고 맑은 마음 [淸淨心]에는 取하고 버리는 것[捨]도 없고, 예쁘고 미운 것도 없고, 나고 죽는 것도 없으므로

淸淨心 그 속에서 일어나는 萬 가지 行事는 生死와는 關係가 없다. 그러므로 佛敎의 日常生活은 명(明)의 생활이요, 智慧의 생활이다. 明·智慧가 없는 생활은 苦痛의 생활이다. 明에 의한 삶은 설사 苦痛이 온다 하더라도 그 고통이 苦痛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늙든지, 죽든지, 병들든지 상관이 없다. 늙으면 늙어서 좋고 병들면 병들어서 좋은데 工夫하고 죽으면 죽어서 敎訓을 남긴다.

諸佛菩薩들이 죽어서 ‘선명(善名)’을 남긴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러면 그 無明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 갑자기 바람처럼 생기는 것이므로 ‘홀연무명(忽然無明)·무명풍(無明風)’이라 말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면 波濤가 생긴다. 한 波濤가 생기면 萬 波濤가 생긴다.

그래서 일파자동만파수(一波磁動萬波隨)라고 하지 않는가?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런데 꼭 시키는 것과 같거든, 그것은 神이 시키고 鬼神이 장난한 것이 아니고 前生에 맺었던 인연력(因緣力)이 通한 것이고, 欲心이 動한 것이다. 똑같은 사람을 보는데도 좋은 사람이 있고 싫은 사람이 있거든, 다 이것도 因緣 때문이야. 그래서 불교학자들은 이 12인연을 시간적으로 3세에 배대하여 無明· 行· 識은 過去 前生의 業力에 의해서 일어난 果報요, 名色· 六入· 觸 ·受· 愛· 取· 有까지는 今生에 맺어 일어난 因緣이며, 生· 老· 死· 憂· 悲· 苦· 惱는 未來의 結果다. 이렇게 하여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를 組織하였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心理學的인 側面에서 無明을 맹목적인 삶에 비유하여

目的 없이 눈에 띄이는 대로 執着된 생활을 한 結果를 이 12因緣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고, 하나의 人生을 生理學的인 面에서 설명하여 놓은 사람도 있다. 예컨대, 父母님들의 盲目的인 사랑은 無明·行·識이요, 어머니 胎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精神과 肉體가 分離되고, 눈·귀·코·혀·몸·뜻이 생겨 世上에 태어나는 것은 名色·六入·觸이며,

태어나서 온갖 것을 받아들이고·갈애하고·취하여 자기의 소유를 만드는 것은 受·愛·取·有며, 다시 제2의 生命을 낳아 늙고 병들어 죽게 한 것은 生·老·死·憂·悲·苦·惱다. 이렇게 설명한 이도 있다. 어쨌든 12因緣은 이 世上 萬物이 時間 속에서 어떻게 成·住·壞·空하고 生·住·離·滅 하느냐 하는 問題를 提起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十二因緣을 만드는 것은 自己의 마음이다. 콩을 갖다가 두부를 만들 때 갈아서 간수를 치고 엉기게 하여 순두부를 만들어 놓고

두부 틀을 들이대는데, 그 틀을 둥글게 할 것이냐 모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만드는 사람의 마음 여하에 달린 것이다. 두부를 만들어 놓고 나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쁘다·밉다· 잘 생겼다·못 생겼다 하지만 結局 그 놈이 뚝배기 속에 들어가 보글보글 끓다가 입 속에 들어가면 진국만 다 흡수되고 나머지 찌거기는 똥이 되어 화장실에 배설된다. 虛妄한 일이지, 그러니 無常하다고 않는가? 그러나 그 無常 속에서 이 世上은 이루어진다. 그러니 그 無常함 속의 世上도 우리가 우습게 生覺하니까 우습지 멋있다고 生覺하면 또 멋있다.

그러니까 이 世上 모든 것이 곧 生覺이고 마음이다. 마음에 속지 않으려면

無明心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