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苦에서 벗어나는 수행의 실천 핵심

장백산-1 2014. 7. 22. 03:42

 

 

- 고(苦)에서  벗어나는 修行의 實踐  核心강의|영상법문 녹취록

 

지난주에 내 드린 숙제는 좀 해보셨읍니까? 다음 주까지 다 해 오세요? 한 주 기회는 드리겠읍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제가 지금 이 瞬間에 이제 하는 것이 冥想이다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뭔가 확실하지 않다고 느낀다고 할까요 그러다 보니까  이걸 여전히 왜 해야되는지도 모르겠고

하면 이번에는 어떤 이익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뭐 이런 분들이 또 아직 계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먼저 드리고 또 工夫를 이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보통 그 佛敎는 뭐랄까 本性을 찾아가는 自己의 本來자리를 찾는 것을 禪에서는 見性이라고 하고

自己의 性稟자리를 본다  이렇게 表現을 합니다. 근데 이 本來性稟(本性)자리가 뭐냐?

우리는 本來性稟, 自性, 主人公, 本來面目, 本性 등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이것들 이 이름에 대해서 엄청난 幻想같은 生覺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은 나는 도저히 엄두를 내지 못할 무언가라고 錯覺을 하고 있고

또 내가 그것을 얻으려면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 아닌가 이렇게 生覺하면서 살고 있읍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저를 보고 있죠, 저를 이렇게 보고 있읍니다.

또 이렇게(죽비를 치며) 소리가 나면 그 소리를 지금 듣고 있죠 그죠. 보고 있고 듣고 있읍니다.

냄새가 나면 냄새를 못 맡는 사람 없잖아요 다 맡고 있고,  또 맛을 봐도  다 맛을 알고 보고 있읍니다.

손으로 이렇게 뭐 감촉을 느낄 때 감촉을 느낀다는 事實을  다 알잖아요. 그죠

冥想을 하다 보면 生覺이 일어나는데 生覺이 일어나는 事實을 안다는 말이죠 본다는 말이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 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이 일어나는, 그런 事實을 아는, 그걸 누가 합니까?

그걸 누가 하냐고 묻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아 그걸 하는 자리가 있구나.

그걸 하는 자리가 있어서 그것을 本性이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또 生覺을 합니다.

그거 맞죠 그걸 이렇게 얘기하니까 야! 도대체 그걸 하는 자리가 뭘까. 

보는 자리가 뭘가 보는 놈이 누굴까 보는 놈을 찾고 듣는 놈이 누군지를 찾는게 불교 공부잖아요.

참나를 찾는거라고 배웠잖읍니까? 찾았습니까? 안 찾아진다고 여기고 또 이거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고

참나 그것을 찾으려면 엄청난 수행과 노력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이제까지 우리는 배워왔읍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그 뭐랄까 치열한 修行이야기를 듣고

수없이 많은 精進의 이야기를 듣고 눕지도 않고 가부좌를 틀고 몇시간씩 앉아서 三昧에 들여야 하고

그래도 이 얻을까 말까하는 超人的인 어떤 힘이 있고 精進力이 있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그런 걸로 우리는 지금까지 참나를 이해해왔고 배워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뭐랄까 禪의 本質은 요즘 우리가 배워오기로 이런 式으로 좀 變質된것처럼 느껴지는데요.

왜냐하면 그런 것이 修行이라면 엄청난 修行力을 갖춘 사람만이 하는 것이 修行이라면

또 禪房에 있는 스님들이 막 일주일 동안 눕지도 않고 장좌불와를 해가면서 이 그야말로 오래앉아 있기

내기를 하는 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만약에 修行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패배감을 맛보겠읍니까

야 내가 범접할 수 없는 것이 道구나 깨달음이구나, 나와는 相關없는 게 깨달음이구나 그렇게 生覺하게 된단 말이죠

지금 韓國 佛敎가 가고 있는 方向이 어쩌면 그런 方向일 수 있읍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絶望的입니다.

修行이라는 것은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고 나는 修行하기에 根機가 그렇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말이죠

 

 

근데 그런 修行이 禪의 本質이 아닙니다.

그 禪師 스님들이 얘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렇게 막 힘들여 修行하라는 얘기가 없어요.

修行할 것도 없다고 얘기하지 道를 깨닫는 거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 보다 쉽다.

세수할 때 코를 안 건드릴 수 있어요? 세수할 때 코를 안 건딜고 어떻게 세수를 합니까?

그러니까 늘상 세수할 때는 항상 코를 만질수밖에 없는겁니다.

그러니까 그 말은 道라는 것은 恒常 그렇게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이고

恒常 그 깨달은 바와 함께 있는 것이고 眞理와 함께 있는 것이고 本性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니 따로이 道를 求하지 마라. 언제나 우리는 道 속에 살고 있다. 깨달음 속에 살고 있다.

열심히 이 벽돌을 갈아가지고 그걸 간다고 거울이 되느냐?

修行한다고 앉아있는다고 그게 道가 되느냐? 깨달음이 얻어지느냐? 라고 禪師 스님들은 얘기를 했단 말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지금은 그런 게 道가 아니라고 生覺했지만 原來 禪의 根本은 그런 겁니다.

禪 修行은 그렇게 뭐 그렇게 人爲的인 作爲가 들어가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제가 하는 얘기를 明確히 들으시려면 그리고 제대로 修行을 하시려면

지금 제가 하는 얘기를 잘 들으셔야 되는데, 잘 듣는다는 건 뭐냐면 지금까지 배워왔던 佛敎, 지금까지

배워왔던 修行, 거기 그것에 對한 固定觀念을 다 내려놓지 않고서는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들리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疑心만 들고 어떤 스님들은 다 그렇게 얘기 안했는데 스님을 보니 좀 젊어보이는데

저 노스님들이 하는 그 얘기가 맞지 젊은 스님이 뭘 좀 工夫했다고 그게 맞겠습니까? 이럴 수도 있고요. 

그렇게도 알 수 있고 또 저기서는 이렇게 배웠는데 왜 다르게 얘기합니까? 이렇게 들을 수도 있는데

듣고 보면 제가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經典에 있는 말이고, 또 禪師 스님들이 했던 얘기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變質된 잘못된 가르침을 지금까지 배워왔던 事實을 돌이키자는 얘기지 다른 얘기가 전혀 아닙니다.

異常한 特別한 얘기를 하는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 지금까지 배워온 것들을 탁 내려놓아야지만 내가 말하는 소리의 眞意가 들려요

다 내려놓고 아주 單純하게 들어보면 된다는 말이죠. 아까도 말씀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죽비를 치며) 소리를 듣죠? 듣잖습니까? 근데 듣고 있죠(죽비를 치며)?

이게 이 소리가  안들리는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다 들었읍니다.

듣는(죽비를 치며) 이것이 本性이고 듣는 이것이 참나다. 뭐 本性이다 참나다 하는 말도 이름뿐인 方便의 말이지만

듣는 이것이 바로 本性이고 참나다 라는 말이죠. 여러분이 안 들은 적이 있습니까?

보고 보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듣고 듣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이걸로 듣지 않은 적이 없어요

이걸로 새소리를 듣지 않은 적이 없고 감촉을 느끼면서 아 이 감촉이구나하고 알지 목한 경우가 없습니다.

그죠, 그럼 그 자리가 바로 道고 그 자리가 바로 내 本性이다.라고 하면 좀 아시겠습니까?

아시겠어요 모르시겠어요 근데 모르겠다는 生覺이 있는 겁니다. 듣는 이걸 (죽비를 치며) 왜 이걸 몰라요?

소리가 들리는데 듣는다는 걸 내가 알아차리고 있고 듣고 있잖습니까 (죽비를 치며)?

근데 왜 여러분들이 듣는 이것을 모른다고 하는지 아십니까?

깨달음은 한낱 이따위 소리를 듣고 이소리를 듣는 이것이고, 듣는 이것이 道라고 하다니

듣는 이것을 道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런 生覺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모른다고 그럽니다.

 

 

이제부터 좀 풀어서 얘기하면, 우리가 어떤 소리를 듣고, 뭔가를 보고, 접촉하고, 만지고, 그러고 나면

最初의 알아차림이 있죠 그죠  最初로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 뭔 소리가 들렸구나 하고 알죠 그죠

이 컵을 보고서 그냥 처음 이걸 눈앞에 갑자기 그냥 자고 일어나자 마자 갑자기 눈 앞에 딱 들이대면

뭔가하고 깜짝 놀라고 뭔가가 앞에 있구나 이 정도로 알아차리겠죠. 그죠

근데 이것은 뭐 컵이라고 하는데 이거를 갓난아기 앞에다가 떡 같다 놔도 애가 눈을  이렇게 뜨고 있다

갑자기 뭔가 눈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흐흥하며 깜짝 놀라지 않습니까? 그죠

갓난애도 알죠 갓난애보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컵이라고 알야요 몰라요 컵이라고 말을 못하죠

뭔가 알아차릴뿐이지 그게 뭔지 解釋하거나 分別하지 않죠 근데 뭔가 눈앞에 딱 나타났구나는 압니다. 그죠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알아요, 저 새소리도 들리고.. 저 새는 알까요 모를까요.

새는 눈앞에 뭐가 턱 나타나면 깜짝 놀라 도망가죠 그죠

새 귀에 살금살금 다가가서 (죽비를 치며) 딱하면 새가 깜짝놀라 도망가지요

새도 이 소리를 듣는다는 事實입니다. 갓난애기도 듣고, 여러분도 듣고, 저도 듣고,

이 듣는 性稟은 모두가 다  똑같죠. 듣는 性稟 그 自體는 모두 똑같습니다.

是非 分別하기 以前 解釋하고 比較 判斷하고 槪念짓기 以前에 最初로 아는 마음은 다 똑같단 말이예요.

그런데 사람마다  諸各己 對相을 接하고는 解釋을 다 다르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죽비나 佛象을 보고 우리들은 佛象을 딱 보자마자 아 그냥 처음엔 딱 알아차림만 있는데 아는 마음만 있는데

그 다음에 最初로 아는 마음 여기에 生覺이 일어나죠,  過去로 가서 옛날서부터 내가 보아왔던 부처님의 相을

떠올리고 아! 부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참 경건한 분이고 좋은 분이고 이런 온갖 이미지, 모습, 相를 떠올립니다.

근데 기독교 신자 같으면 佛象을 딱 보자 마자 어후 하고 좀 하나님을 저 십자가에 박힌 예수님을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푸근하게 느끼지는 않을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불자들과는 다르게 느낀다는 말이죠.

佛象을 딱 보고 나서 마음속에 좀 어떤 사람은 기분 안좋은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 이후에 佛象을 볼 때 여기 계시는 많은 분들께서 부처님을 볼 때 마다

이 죽비를 볼 때 이 죽비소리를 들을 때 똑같은 게 있고 다른 게 있읍니다.

다른 게 뭐냐하면 分別하고 解釋하는 마음은 다 다르죠. 佛象을 보고 分別하고 解釋하는 마음은  다 다릅니다.

이 佛象을 보고 야 相號가 圓滿하시구나 하면서 환희심을 느끼는 분도 있는가 하면

야 내가 다니는 절의 부처님상보다 좀 못생기셨다 하고 느낄 수도 있고

佛象에 對한 저마다의 生覺과 判斷으로  제각기 다 다르게 解釋한단 말이죠

 

 

우리는 六根, 六境, 六識을 배웠읍니다.

六根 즉, 눈 귀 코 혀 몸 뜻이 바깥의 色 聲 香 味 觸 法과 接觸할 때 여기서 六識이 일어난다고 그래요.

그  六識은 分別識/分別心입니다. 分別心, 모든 對相을 나누고 分別해서 解釋하는 마음이죠.

六識이라는 分別하는 마음은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나서 바로 본다는 事實을 알아차리는 그 最初의 마음이 아닙니다.

눈으로 뭔가를 보고난 후에 내 마음이 내 알음알이대로 判斷 分別 解釋하는 마음이 眼識이고,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判斷 分別 解釋하는 마음이 耳識이고, 그렇게 알음알이 分別識이 일어나기 前에

그 分別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前에 分別心이 일어나기 前에 最初로 그냥 아는 마음은 누구나 모두 다 똑같죠.

석가부처님이든, 예수님이든 , 기독교 신자가 됐든 불교 신자가 됐든지 간에 똑같이 뭔가가 눈 앞에 탁 나타났을 때

最初로 보이는 뭔가가 있구나 하고 最初로 알아차리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죠

죽비소리를 듣던 목탁소리를 듣던 최초로 딱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독교 신자가 첫 딱 치는 소리를 듣고서

뭔 소리가 들렸구나 하는 들었구나 하는 최초로 알아차리는, 分別心이 일어나기 以前에 소리를 듣는 性稟은

누구나 똑같단 말이죠. 근데 불자는 목탁소리구나 하고 分別 判斷 解釋을 해가지고 좋은 소리다 이렇게 분별하고,  

아주 편협한 타종교 신자들이라목탁소리를 딱 듣고 목탁소리구나 하고 아이하며 기분 나쁜 생각을 낼 수도 있다는

말 입니다.

 

 

그러나 소리가 들리는 同時에 最初로 아는 마음의 作用, 아는 마음의 作用, 그 作用에서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죠.

이 世上 그 누구도 소리를 듣고 最初로 아는 마음의 作用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얘기 하니까 視覺障碍人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은 그 뭐 本性을 알지 못하겠네요. 아니 시각장애인은 귀로 들리지 않습니까?

손으로 감촉하고 접촉하지 않습니까. 접촉을 다 모른다 할지라도 生覺을 하지 않나요 生覺은 한단 말이예요.

生覺을 알아차리는 것도 最初로 그 生覺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눈귀코혀몸뜻이

色聲香味觸法과 接觸할 때, 識/마음에 分別心이 일어나기 前에 뭔가 아는 最初의 마음의 作用이 있죠 그죠,

그것이 바로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은 좀 뭐랄까 理解하기 쉽게 말한다면 方便으로써 바로 그것이 本性이다

바로 그게 참나라고 합니다. 

 

 

근데 여러분은 모든 對相을 接했을 때 最初로 아는 마음,그걸 그것을 참나라고 自己 本性이라고  生覺하면서

살았왔습니까? 지금까지 아니죠, 여러분은 이 몸이 참나라고 生覺하고  이 몸이 참나라고 錯覺하고 살아왔고

내 돈, 내 名譽, 내 權力, 내 地位가 참나라고 生覺하고 살아왔고, 뭔가를 보고 그것을 分別 判斷 解釋하는 마음,

대상을 나누고 分別하는 그 마음이 그게 내 生覺이다 내 判斷이다 하고 生覺했읍니다. 내가 옳다라고 生覺했어요.

내 生覺이 옳다라고 이렇게 生覺했어요. 佛象을 보고 부처님은 거룩하다는 그 生覺이 옳다고 生覺해 왔어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불교 아카데미에 와서 工夫하니까 참 좋다고 딴 친구한테 가서 얘기합니다.

야  아카데미 가니까 참 좋더라, 아 法相스님 說法이 참 좋더라 그렇게 얘기를 했더니 그 옆에 친구가

야 뭐 불교 얘기를 해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얘기겠어 그거 좀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어 다 사람이 하는 얘기니까

다 똑같지 그렇게 얘기하면, 여러분이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렇지 않아 이건 정말 좋아 만약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렇게 이제 얘기는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生覺과 觀念 槪念으로 우리들은 모든 대상들을 理解를 하고 있죠. 그죠. 生覺과 觀念 槪念 이것을 이제 金剛經에서는 이라고 그러죠.

여러분이 아카데미에 오면 좋다라는 相을 지은 것에 불과한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아카데미에 오면 좋다라는 生覺을 옳은 生覺이라고 生覺하고 있죠.

옳은 生覺이라고 執着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옳은 生覺이야 라고.

옳은 生覺이란 건 뭔 말이예요. 내 生覺이 옳다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들의 生覺을 固執할 때가 많죠. 많은 게 아니라 恒常 그러고 살죠.

 

 

아이가  인스턴트 식품을 자꾸 먹는다 게임을 자꾸 한다. 그리고 우리는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하니까

 이 아이에게 이걸 먹이면 안된다고 生覺 하고 내 아이가 자꾸 이렇게 게임을 하면 안된다고 生覺을 하니까

그 生覺이 옳다고 執着을 하니까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하니까 아이한테  막 화내고 뭐라고 하는것 아니겠어요.

그 生覺이 100%로 옳습니까? 그 생각이 엄밀히 따져서 절대적으로 옳습니까?

아이는 絶對的으로 게임을 하면 안됩니까? 아니죠.

예를 들어 딴 친구들은 다 게임해서 함께 소통하고 자기네들끼리 친구가 되어서 게임 얘기를 하는데

우리 애만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게임 얘기를 못하니까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면 그 아이가 왕따가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적당히 할만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단 말이죠. 예를 들면 그런데.

우리들은 내 生覺을 가지고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하니까.근데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한다는 건 뭐예요.

내 生覺이 옳다고 生覺하고 내 生覺으로 내 生覺을 붙잡고 집착하는 겁니다.

옳고 그르고를 나눠서 내 生覺으로 내 生覺이 딱 옳다고 生覺하는 거예요.

이것을 金剛經에서는 我相/我執/我見이라고 했단 말이죠.

이런 式으로 우리의 마음 의식은 이 世上/삶/현실을 만들어 왔읍니다. 槪念을 만들어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相이 打破된 자리, 金剛經에서 말하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는 모든 相이 相이 아님을 보는 자리, 바로 그 자리가 最初로

이 소리를 (죽비를 치며) 듣기만 하는 本來性稟자리입니다. 들을 땐 들을 뿐 그 이상 解釋하지 않고 判斷하지 않고

分別하지 않고,  먹을 때는 먹을 뿐인, 그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 認識으로써 分別하고 解釋하지 않는 그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 좋고 나쁘고를 分別하지만 않으면 洞然히 明白히 드러나는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 입니다.

 

 

問題가 되는 것은 뭐냐하면, 그냥 보는 行爲 그 自體가 眞理인데

그냥 보는 행위가 뭐 문제가 될 게 있읍니까. 근데 對相을 보고 나서 이렇다 저렇다 좋다 나쁘다 이렇게 나누어 놓고

좋은 건  執着하려 하고 싫은 건 去否하려 하고 밀쳐내려고 집착하니까 거기서부터 괴로움(苦痛)이 생기죠.

좋은 것은 더 많이 갖고 싶은데 더 가지지 못해 괴롭고, 싫은건 밀쳐내고 싶은데 밀쳐내지지 않으니까 괴롭죠.

근데 좋다 싫다라고 判斷하고 解釋하는 거 그거는 우리들의 妄想일 뿐이었다. 虛妄한 生覺이라는 幻想, 相일

뿐이었다는  事實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괴로워하는 問題들은 全部 다 虛妄한 生覺이라는 幻想, 相일 뿐입니다.

괴로워하는 그 문제들은 固定된 實體가 아닌 虛妄한 妄想 分別心일 뿐이다.

그래서 절에서 늘 分別心 妄想을 버리라고 하는 게 그거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分別 妄想 아닌 게 없다는

말입니다. 經典을 보고 이 경전이 있습니다. 經典을 보고 야 眞理구나 라고 生覺하면서 거룩한 마음을 냈어요.

이 마음 이건 分別 妄想입니까 아닙니까. 이 또한 固定된 實體가 없는 虛妄한 分別 妄想일 뿐예요. 왜?

이 경전을 보자 마자 最初로 그냥 아는 마음자리, 分別 判斷 解釋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以前의 그 자리가

眞理의 자리인데, 좋다라고 生覺하면 그 생각 자체가 分別心이니까.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평생 한마디 말도

설한 적이 없고, 경전에도 執着하면 안된다.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것도 좋다고 執着하는 마음은 안된다.

 

 

그러니까 여러분에게 진짜는 뭐냐 여러분 마음 안에 있는 그 중에 가짜는 다 가짜일 뿐이고

진짜는 뭐겠어요. (죽비를 치며) 이 소리를 듣는 자(聽法底人), 소리를 듣고 最初로 아는 마음 입니다.

뭔가 볼 때 最初로 탁 보고 아는 마음, 그것이 앎이고 그것이 眞實한 자리이다.

그것이 아닌 나머지 모든 것은 全部 다 虛妄한 分別 妄想 生覺이라는 幻想, 相일 뿐이다. 相일 뿐이다.

冥想을 가르치면서 지켜보라(觀察)고만 한단 말이예요. 지켜보라고 하죠.

生覺을 지켜보고, 呼吸을 지켜보고, 눈에 보이는 걸 지켜보고, 귀로 들리는 그 소리를 지켜보라고 한단 말이죠.

왜 지켜보라고 하겠습니까? 지켜본다는 말의 核心은 뭐예요. 分別없이 본다는 것이 核心이라고 말씀드렸죠. 그죠.

分別 없이 지켜볼 때 그것이 바로 그냥 탁 보기만 하는 最初로 그 보고 아는 마음, 앎의 자리입니다.

一切의 分別 妄想 生覺이 介入되지 않은 그 최초의 아는 마음자리입니다.

 

어떤 사람을 보더라도 아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싫은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똑똑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뭐 이런 것들로 分別하는 그건 있는 그대로 본게 아닙니다.

그렇게 나누어 보는 것은 最初로 아는 마음, 本性에서 보는 게 아니고, 참나 자리가 보는 게 아니고

虛妄하고 迷惑한 分別 妄想의 마음으로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은 대상을 分別 判斷 解釋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죠.

제가 소리를 들을 때 解釋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소리의 波動으로 들으라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그게 소리를 들을 뿐 들으면 들을 뿐이지 그 소리 파동에 解釋하고 判斷하지 않고 그냥 들어 보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듣는 그자리, 보는 그자리, 맛 보는 그자리, 맛 보고 이게 막 좋다 나쁘다 分別하지 않고 그냥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은 그냥 그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가 보고, 맛 보고, 냄새 맡고, 한단 말이죠.

그냥 그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 그것이 道로 가는 길인데, 그것이 道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自體가 다.

그 自體가 깨달음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깨달음/道/부처/진리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깨달음 아닌 곳에서 부처 없는곳에서 道 아닌 곳에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道 깨달음 眞理 부처인 참나를 끄집어 내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요? 없어요.

여러분은 언제나 道고 깨달음이고 眞理고 부처이고 이 眞實을 아는 일은 세수하다 코만지는 것만큼 쉽죠.

그러니까 들을 때 듣는 그자리, 그것이 道인데, 그게 깨달음인데, 그게 眞理인데, 그것이 부처인데,

볼 때 보는 그것이 道고,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중생들 마음은 쉽게 보는 걸 싫어해요.

(죽비치며) 들을 때 듣기만 하면 되는데, 듣고 나서는 이게 무슨 소릴까?

이 소리는 좋다 이 소리는 나쁘다. 이건 불교에서 하는 거니까, 좋은 얘기다 이건 뭐 안좋은 소리다.

이 사람은 잘났다 못났다 등등... 複雜하게 固定된 實體가 아닌 虛妄한 온갖 解釋과 分別 妄想을 하기를

좋아한단 말이죠.

 

그러나 佛敎는 너무 單純하고 너무 簡單한 겁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러니까 너무 쉬운 것을 너무 쉽게 보라고 하는 것인데

우리가 불교가 어렵다고 하는 理由는 지금까지 우리는 한번도 그렇게 쉽게 불교를 접해본 적이 없어요.

 

世上을 對相을 삶을 어렵게만 봐 왔지. 解釋해서만 보고 判斷해서만 보고 分別 妄想을 가지고만 보고

過去를 가지고서 現在를 解釋하고 未來를 가지고 現在를 解釋하면서만 봐 왔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세상 삶 대상을 본 적이 없다 보니까. 있는 그대로를 보라니까 

아 도저히 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머리에 든게 많은 사람일수록 잘 안된단 말이예요.

 

 

어린 아이들일수록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죠. 虛妄한 分別 妄想 生覺이라는 幻想이 별로 없으니까.

그냥 엄마가 앞에서 막 혼내고 막 때리고 해도 한 오분도 안되가지고  다시 아무일이 없었던 것처럼

막 얘기한단 말이예요. 증오심 같은 게 없단 말이죠. 엄마한테,

어른들은 그런 소리를 듣고 나면은 막 원수가 돼 가지고 다시는 안보겠다고 生覺하는데

어린 애들은 그런 生覺이 없는 거예요. 친구하고 싸우고 나서도 얼마 안있다가 금방 풀어지고

하루종일 막 뛰어다니면서 친구들하고 하루종일 놀아도 우리들 처럼 저녁 때 밥 먹으면 잘 뿐이지

그러고 나서 저녁 때 와가지고 아 내가 놀기만 하고 생산적인 일은 하지도 않고

뭔가 돈되는 일도 하지도 않고 내가 왜이렇게 살았을까. 이런 生覺이 없단 말이죠.

그냥 놀면 놀 뿐입니다. 놀면 놀 뿐이고 재미있으면 재미있을 뿐이고 괴로우면 괴로울 뿐이예요.

기분 나쁘면 울 뿐입니다. 어른들처럼 기분 나쁜데 울고 싶은데 울지 않고 억지로 기어이 기어이 참았다가

집에 가서 울고 아니면 앙심을 품고 이런일이 없단 말이예요. 미우면 그자리에서 미워져야되요.

때리고 싶고 그런겁니다. 그냥 그뿐이라. 아이들은.

 

 

眞理를 말할 때 스님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뭐 多樣한 方法을 쓰죠. 근데 도대체 理解할 수 없는 方便을 쓰죠.

眞理/참나/깨달음/최초로 아는 마음자리를 뜰앞에 잣나무라고 그랬다가, 호떡이라 그랬다가, 똥막대기라 그랬다가,

손가락을 탁 들어보이기도 한단 말이예요. 왜 그랬겠습니까?

虛妄한 固定된 實體가 아닌 生覺으로 解席하고 判斷하고 分別하지 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봐라.

그러니까 누구야 하고 부르는데 '네' 하고 돌아서자마자 턱 깨달았다. 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를 觀察者 意識이 되어서 모든 對相을 觀察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 最初의 아는 마음자리와

함께 같이 있는 겁니다. 그자리에서 삶을 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諸法實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니까 아 그게 眞理이군요.

그러니까 虛妄한 生覺으로 判斷 分別하고 妄想을 일으키는 것 이거 全部 다 잘못된 것이군요.

이렇게 生覺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虛妄한 固定된 實體가 아닌 生覺 槪念 觀念 이미지 想像 幻想인,

相이라는것의 범주가 어디까지 일까요?

 

죽비도 相이고, 여러분도 相이고, 虛妄한 固定된 實體가 아닌 生覺 槪念 觀念 이게 다 相이고,

生覺을 일으켰다 하면 全部 다 相이죠, 보고 나서 分別을 일으켰다면 全部 다 相이고,

듣고 나서 分別을 일으켰다면 全部 다 相이고, 좋다 나쁘다 判斷하면 全部 다 相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이 相 아닌 게 없지싶을 정도며 일어나는 生覺 모두가 相입니다.

無心이 아닌 모든 것이 相이니까. 그러니  相아닌 것이 어디있어요?

인제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아 相이라는 것은 나쁘 것이군요.

相을 깨부수어 없애버려야 내가 이제 참나가 되는 것이군요.알겠습니다. 이제 제가 알겠습니다.

그래가지고 어떤 式으로 修行을 하느냐하면 이제부터 戰鬪的으로 鬪士가 됩니다. 그래가지고

내안에 있는 生覺을 깨부수기 위한 아주 싸움닭처럼 막 氣를 쓰고 막 그냥 용감한 무사가 되어가지고

生覺이 일어나면 그 生覺을 무찌른단 말이죠.

 

 

生覺을 무찌르고 심지어 저 어디 요상한 저 무슨 수련하는 센터 얘기를 들어보니까 全國的으로 엄청많은

수련센터가 있는데 거기서는 막 몆주만 修行하면 곧 부처를 뛰어넘는다고 그랬답니다.

몇십만원 갖다 내고서 앉아있으면. 거기서 뭘 하는가 봤더니 佛敎에서도 我相을 打破하라고 하지 않느냐

나라는 生覺은 全部 다 打破해야된다. 그러니까 나라는 生覺, 我相을 죽여야된다. 그래서 生覺으로 나를

막 칼로 난도질을 하는 想像을 하라고 그러고, 막 몸을 다 칼로 찢어 최대한 악날한 想像을 해서 나를 죽이는

想像을 해라. 그러면서 뭐 저 버스 밑에서 끌려가다가 몸이 가루가 되어 죽는 想像을 하고

심지어 子息에 對한 執着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자식을 床에 올려놓고서 칼로 난도질 하는

면도칼로 도려내는 想像을 해라 그래야지만 我相을 打破할 수 있다. 이딴 식으로 가르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요. 我相을 打破하라는 槪念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이 世上은 緣起空性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보이는 것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恒常 다

虛妄한 固定된 實體가 아닌 본마음의 그림자(幻影)인 虛想 幻想 妄想이라고 했단 말이예요.

그러니까 妄想은 다 버려야 되는 것이구나 라고 錯覺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生覺으로 막 몸을 난도질을 하죠.

아주 危險한 發想이죠. 내가 生覺으로 만들어 낸 것은 언젠가 내게 돌아옵니다. 因果應報의 法則에 따라서. 

 

 

그런데 여러분, 生覺이 일어날 때 觀察하라고 하니까 보통은 사람들이 어떻게 生覺하느냐 하면

生覺이 일어나면 잘못된 것이고 生覺이 일어나지 않으면 훌륭한 것이다 聖스런 것이다. 이렇게 生覺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生覺이 일어날 때 觀察者 意識이 되어 그 生覺을 바라봐라.

바라보는 것 그 自體가 成功이지 生覺이 많이 일어나는 게 失敗가 아니다.

生覺이 일어나는 것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라고 말했단 말이죠.

왜 그럴까요? 生覺이 일어나는 것이 問題일까요? 妄想이 일어나는것이 問題일까요? 그건 問題가 아니다.

現實은 그것 自體로 實相이다. 諸法實相이다. 이 世上 모든 存在는 그대로 實相이다 眞理다.

나에게 괴로움이 생겼다면 그 괴로움은 그것 自體로 實相입니다. 그 괴로움은 문제 상황이 아닙니다.

 

 

삶에서 많은 問題가 생길 때 그게 이제 分別 妄想하는 虛妄한 마음때문에 일어나는 문제잖아요. 그죠

그러다 보니까, 아 절에서 그건 分別 妄想이라고 했어. 分別 妄想만 끊으면 그게 바로 道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問題를 없애야돼. 나에게 問題가 나타났으니까, 문제를 어떻게 없앨까? 이렇게 生覺합니다.

이렇게 生覺하는 건 錯覺이다. 問題 그 自體가 바로 實相인 줄 알아야 됩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問題가 일어났다는 것은 問題로써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問題에 대한 解決策으로써 일어나는 것이고, 문제에 대한 答으로써 일어나는 것이죠.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문제가 일어날 때, 우리가 하는 방식대로 문제를 없애려고

싸움닭처럼 문제와 싸우기 시작하면 그 문제가 없어집니까? 안 없어집니다.

문제를 없애려고 기를 쓰고 싸우면 안 없어집니다. 없애려고 기를 쓰면 안없어져요.

왜 그 問題는 싸워이기기 위해 登場한 問題가 아니고 實相으로써 삶/現實에 登場한 것이기 때문에

問題가 登場한 目的이 答으로써 登場한 거란 말이예요.

 

 

우리는 問題에 대한 答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삶의 答을 찾고 있잖아요. 깨달음을 찾고 있잖아요.

問題는 그 自體가 깨달음으로써 登場한 겁니다. 우리에게 答을 주기 위해 登場한 거지,문제를 주기 위해

등장한 게 아닙니다. 그 말은 뭐예요. 그 問題 自體가 答이다. 그건 뭔 얘기입니까? 問題 自體를 去否해서는

안된다.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問題가 일어나는 그 自體는 問題가 아닙니다. 문제가 일어나는것 가지고 문제다 라고 解釋하는게 문제지.

그냥 문제가 일어나면 그걸 그대로 許容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實相의 자리와 契合되는 것이고, 참나의 자리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解釋하고 判斷하고 없애야 된다고 生覺하고 그러죠.

 

 

여러분 삶에 뭔가가 登場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 뭔가가 登場했어요.

그 뭔가는 問題 狀況이 아닙니다. 그 뭔가 自體가 答이지,

그것 自體가 答이라는 얘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問題 自體가 答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問題와 싸우고 투쟁하는 삶이 내려놔지겠죠. 저절로.

내 삶에 登場한 무엇이든지 그 自體가 答이고 그 自體가 眞理니까, 그 自體가 부처로 드러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그것을 거부하는 마음 自體는 뭐겠어요 바로 判斷 分別 妄想하는 마음입니다. 그 去否하려는 마음이

妄想이지, 그 일 自體가 問題가 아니다. 이것이 問題라고 生覺하는 마음이 問題지.

여러분 人生에서는 問題가 한번도 登場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를 無能하다, 나는 修行도 못한다. 아렇게 生覺했겠지만,

여러분은 단 한번도 無能한 적이 없고, 無能할 수도 없고,

내가  자신을 無能하다고 生覺하고 判斷하고 解釋하는 그 마음만 없으면 無能함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분 마음이 여러분 마음 스스로를

얼마나 抑制해 왔고 限定시켜 왔고 마음 스스로를 얼마나 괴롭혀왔고 마음 스스로를 얼마나 無能하다고 여겨왔고

마음 스스로를 얼마나 자존감 떨어지게 만들어왔습니까. 그런 나는 없는데(無我), 나는 언제나 完全한데, 그러니까

마음 스스로 分別 判斷 解釋하지만 않으면 判斷하고 分別 解釋하지만 않으면 그 自體가 그대로 眞理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거의 受容해라 받아들여라 觀해라 맨날 이 얘기만 합니다.

그러니 어떤분은 스님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십니까 그럽니다. 眞理가 맨날 달라지면 맨날 다른 얘기를 하겠지요.

眞理는 맨날 똑같은 건데 그런데 왜 맨날 똑같은 얘기만 하십니까? 이말은 뭐예요.

나는 다 안다 난 그 얘기 다 압니다. 그얘기 말고 좀 쌈박한 얘기 해주세요. 이런 生覺을 한단 말이죠

 

 

받아들이라는 그 얘기만큼 더 이상 쌈박할 수 있는 얘기가 이 世上 宇宙天地에 어디 있습니까

받아들임 그게 바로 眞理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 삶에 登場하는 모든 요소 요소들을 가지고 問題 삼을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고 그냥 여러분은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에서 自由로워지기만 하면 됩니다.

 

여기에서 가장 우리들에게 修行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問題가 뭐냐하면, 뭡니까?

깨달아지지 않는다. 觀을 해도 뭔가 확 드러나는 게 없다. 觀을 하면 뭔가 進拓이 있어야 되는데 진척이 없다.

깨달음이 없다. 이게 갑갑한 게 아니겠어요. 이게 다  妄想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라고 여기는 그 마음이 妄想입니다.

깨달음/진리는 한번도 없었던 적이 없으니까 (죽비를 치며) 아 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우리가 항상 쓰고 있는 말이 眞理/깨달음인데 그게 어디 없습니까. 내가 몰라서 없다고 生覺할 뿐이지,

언제나 우리는 깨달음/眞理와 함께 있다. 이렇게 말하니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법당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께서 저한테 質問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화랑 호국사 법당에서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이렇게 이미 화랑 호국사 법당에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여기 좀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라고,

이미 그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눈으로 보면서 어떻게 하면 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집안 방 안에 들어 앉아 있으면서 어떻게 집으로 갈 수 있을까요. 하고 찾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뭐만 안하면 됩니까. 分別 判斷 解釋만 하지 않으면 언제나 最初로 아는 그 마음자리 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 삶의 目的은 깨달음을 얻는 것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가 있습니까. 그 깨달을 道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金剛經에 계속 나오잖아요.

얻을 法이 없다. 얻을 法이 없다. 傳해 줄 法도 없다. 傳할 法도 없다.라고.

眞理라는 게 없습니다. 眞理를 내 마음이 眞理라는 사실을 빨리 깨달아야 하는 것이지. 깨달아야 할

그 마음도 없는데, 내가 없는데 깨달을 내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每瞬間  最初로 아는 마음자리,

알음알이만 있을 뿐이지.

 

 

여러분은 過去 前生에 前生의 여러분과 지금의 여러분은 생김새 모양도 다르고

태어난 나라도 다르고 뭐 어쩌면 남녀 성별도 다를 수도 있고 前生엔 아프리카에서 남자로 살다가

지금은 한국의 여자로 살을 수도 있고, 그런데 前生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 달라졌어요?

아니면 十生前 二十生前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달라지지 않은 건 뭐예요.

最初로 아는 마음, 그  아는 마음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最初로 아는 마음자리는 그 때도

뭔가가 옆에서 쿡찌르면 아픈 것을 알고, 누구냐 물으면 탁 對答하고 했단 말이죠.

對相을 接하고 最初로 아는 마음자리 그자리는 涅槃經에서 말하는 常樂我淨으로

恒常하고, 恒常 즐겁고, 恒常하는 나라는 것이 있고, 恒常 깨끗하고 淸淨한 그자리는 그렇단 말이죠

變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인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또 不變하고 恒常하는 나라는 實體가 있구나 이렇게 生覺합니다. 

그러나 나라는 實體는 없다(無我). 그러니까 깨달음을 求하려고 하면 바로 어긋나는 거예요. 求하려고 하면...

그러니까 대부분의 道人들이 깨달음을 얻으신 스님들이 뭐라고 얘기하시냐 하면

미친듯이 道를 찾아 나섰고 미친듯이 修行을 했고 修行을 通해서 깨달으려고 미친듯이 努力을 했음에도

도저히 道를 깨달아지지 않아서 도저히 뭔 짓을 해도 아무리 용을 써도 되지를 않아서

초인적인 그냥 精神力을 발휘해서 精進을 해도 되지를 않으니까 화딱지가 나가지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팽개쳐버렸다. 깨달음이고 뭐고 道고 뭐고 다 모르겠다고 하고 내팽개치는 瞬間 깨달음이 道가 그 자리에서

드러나더라. 깨달음/道를 찾고 있는 동안은 깨달음은 오지 않습니다. 이미 와 있는 것을 찾으니까, 이미 그 自體가

깨달음, 道인데, 그 自體를 찾으니까. 어떻게 그것을 다시 볼 수가 있겠어요. 道 깨달음은 새로 만들어지거나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데 그냥 언제나 如如한 언제나 한결같은 언제나 그냥 지금 이 자리에 그러할 뿐입니다.

 

 

밥 먹을 땐 밥 먹을 뿐이고, 여러분 슬플 때, 남들 질투날 때, 외로울 때, 괴로울 때, 남들이 날 무시할 때,

나한테 욕할 때, 그 때는 앞에 말한 그것들이 道가 아닌 것 같잖아요. 그 때도 그런 모든 것들이 다 道 속에 있는 道다'

슬플 땐 슬퍼만 하면 됩니다. 解釋하지만 말고 그냥 슬픔 그 自體를 받아들이고 슬픔 그 自體를 許容하는 겁니다.

그렇게 受容 許容함이 道 속에 머무는 겁니다. 슬픔은 왜 왔습니까. 答으로 왔단  말이예요.깨달음 自體로써 온겁니다

眞理로써 온겁니다. 슬픔 속으로 들어가서 슬픔을 許容하고 받아들이고 슬픔을 바라다보면 그 슬픔 속에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슬픔 그 自體가 眞理다. 슬픔 그 自體가 眞理니까 슬픔을 去否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되죠.

슬픔과 하나가 되야죠.

 

 

修行者는 화도 내면 안되고 슬퍼해도 안되고 우울해도 안되고 生覺을 일으켜도 안된다 라는 말은

이건 다 虛妄한 錯覺입니다. 妄想이고. 修行者에 對한 우리의 意識이 지은 相, 깨달은 者에 대한 相일 뿐이지

修行者 한테도 모든 느낌 感情 生覺 欲望이 다 일어납니다, 깨달은 사람에게도...

석가부처님도 목건련과 사리불이 먼저 涅槃에 들었을 때 아 허전하구나 허전해 하셨단 말이예요.

외로워하시고 그냥 외로워 할 뿐입니다. 그냥 석가부처님은 그냥 외로울 때 외로워 할 뿐이예요. 그 이상이 아니고.

다시 말해 道人이 우리와 다른 점은 두 번째 화살을 안맞는다는 겁니다. 道人도

첫번째 화살을 안맞을 수는 없어요. 이 肉身을 가지고 있는데 첫번째 화살도 안맞습니까. 맞습니다.

 

 

여러분 저 담배가게 聖者 마하라지인가요. 어떻게 죽었어요. 담배가게 聖者는 맨날 담배만 피우던 聖者입니다.

聖者예요. 聖者. 그런데 맨날 담배만 피우던 聖者라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가지고 肺癌인가 담배를 하도 많이

피워서 그 病으로 죽었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죽어서 道人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 그는 道人이다. 그 사람이

우리와 다른 점은 우리가 肺癌에 걸리면 아 담배를 많이 피워서 肺癌에 걸렸구나 하면서 이 썩을 놈 나같은 놈은

정말 죽어야 돼 쓸모가 없어 이러면서 아!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하느냐 내가 죽으면 내 자식은 어떻게 하고 돈은

어떻게 하고 내가 죽으면 죽음 이후는 얼마나 괴로울까등등  온갖 想像과 妄想속에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겁니다.

그냥 肺癌 걸리면 그냥 肺癌 걸릴 뿐  癌이 걸리면 그냥 癌이 걸릴 뿐입니다.

왜 實際로 癌이 걸려도 잘 살다 죽는 사람이 癌을 發見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연세드신 분 돌아가신 분 나중에 부검을 해보면 이분이 癌을 오래 前부터 달고 있었다는 얘기를 해요.

癌이 있을 때 癌을 手術해가지고 떼어내 없애려고 生覺할 필요가 사실은 없습니다.

癌이 있어도 우리는 그냥 살 수 있어요. 더 키우지 않고서 癌과 함께 살 수 있어요.

癌 그 自體를 許容할 수 있습니다. 왜? 癌은 問題로 온 게 아니고 그 자체가 答으로 온거니까

나의 意識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答으로 온거니까. 아무 問題 삼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醫士들이 쓴 책에 보니까 癌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癌을 治療하려고

放射能을 쐬면서 방사능 치료하면서 抗癌濟 쓰면서 治療 過程에서 죽은 사람이 훨씬 많다.

實際 癌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겁니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요. 醫士들이 그렇게 얘길 한단 말이죠.

 

 

아프면 아플 뿐이예요. 그런데 우리 마음은 그냥 아플 뿐이 아니고 그 아픔에 온갖 生覺과 妄想을 한단 말이예요.

未來가 걱정된다면 그것도 妄想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오직 '지금 여기'서만 살 뿐인데.

未來가 어떻게 될지는 우리로서는 전혀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없으면 자식이 어떻게 살까. 밥은 어떻게 먹을까.

내가 밥 안해주면 밥도 하나 안먹는 아이인데 어떻게 할까 하지요. 여러분 없어도 잘 삽니다. 내가 없어서 안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식들이 내가 있어야지만 잘 산다고 生覺하지만 어쩌면 그런 生覺이 자식을

망치고 있을 수 있어요. 애들 가만 놔두면 잘 사는데 사실은 우리 중생의 마음에서 判斷 分別 解釋하면서 자식들을

바라보면 애들을 항상 망칠 수 밖에 없죠. 本然의 天然 性稟을 우리가 亡치는 일을 하고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걸 안할 수는 없어요. 그것도 法이니까.

 

 

그러니까 이 얘기를 듣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일어나는 모든 일이 問題가  될 것이 없지요.許容하면 됩니다.

근데 받아들인다는 거 許容한다는 게 뭐예요. 알아차린다(觀)는 겁니다. 알아차린다는 것은 分別하지 않는다는

겁니다.그리고 더 重要한 것은 分別 判斷 解釋하지 않고 알아차린다는 것이 自悲의 實體입니다.

자비와 사랑의 實體입니다. 分別 判斷 解釋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眞正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自息을 判斷 分別 解釋해서 자식이 성적 잘 받아오면 막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성적 나쁘게 나오면 야단치고 때리고 이건 사랑이 아니예요. 分別하는 짓이기 때문에 欲望이고 愛欲이지.

그래서 大部分의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비로써 사랑하지 않고 愛欲으로써 대합니다.

眞正한 사랑은 자식이 나쁜 짓을 하든 좋은 짓을 하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욕을 하든 뭔짓을 해도

그냥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辱을 하는 것을 혼내더래도 내가 화나서 혼 내지 않고 너무 사랑하니까

이 아이를 바꿔 주는 싶은 마음에 혼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어있는 마음으로 혼내는 겁니다.

내가 이 화난 마음이 얼굴에 차서 이 화에 막 넘어가서 혼내는 게 아니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혼내게 됩니다.

할 건 다하는 겁니다 곧 그 瞬間에 應해서. 그러나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은 人生이라는 것은 언제나 如如하게 그러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절에 오면 절에 올 뿐이고 가면 갈 뿐이고 햇볕이 뜨거우면 뜨거울 뿐이고

남편이 돈을 적게 벌어오면 적게 벌어올 뿐이고  적고 많은 것도 없죠. 그냥 이 월급 받아왔을 뿐이고

설사 남편이 진급을 못했으면 못했을 뿐이고 직장에서 짤렸으면 짤렸을 뿐입니다.

그냥 아무 일도 없습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단지 내가 生覺으로 問題 삼기 前까지는 그냥 그러할 뿐이지,

그냥 그러할 뿐이지. 아무 일이 없다. 회사를 잘린 것은 答으로써 온 겁니다. 眞理로써 온 겁니다.

實相으로써 온 겁니다. 회사에서 잘린그걸 許容하는 마음만이 그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것만이 許容하는 것만이 그 瞬間에 함께 있는 것만이, 그걸 보고 存在한다고 그래요.

being이라고 그래요. 그것과 함께 存在하는 것만이 아플 때 아픔과 함께 存在하고 화날 때 화와 함께 存在하고

딴 性質을 내도 괜찮습니다. 질투해도 괜찮습니다. 서러워해도 괜찮아요. 외로워해도 괜찮아요.

그게 왜 問題입니까. 그걸 去否하는 마음이 問題고, 이런 것들이 있으면 안된다고 生覺하는 마음이 問題고

나는 이렇게 이런 옹졸한 마음이 있으니까 나쁜 놈이야 나는 쪼잖은 사람이야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이야 하고

스스로 判斷하고 分別하는 마음이 問題지 그 自體는 아무 問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 世上 그 누구에게도 잘보일 필요도 없고

여러분 自身에게 있는 그대로써 보이면 되는 것이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소리를(죽비를 치며) 듣는 그자리, 最初로 아는 마음자리와 하나 되겠습니까?

들을 때는 들을 뿐으로써 알아차리고 볼 때는 볼뿐으로써 알아차리고

그 알아차림이야말로 眞理니까. 아는 그 自體가, 알아차림 그 自體가, 그게 바로 부처니까.

그게 바로 진리 깨달음이니까. 그냥 알뿐 입니다. 다른 건 하나도 할 게 없어요.

 

 

여러분 自身을 결코 탓하지 마십시요. 修行의 進拓이 안되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안되는 그 自體로서 아름답고 안되는 것 그 自體로 答입니다.

내 性格이 나쁘면 나쁜 그대로 괜찮습니다. 막  애써서 노력하여 고치려고 하지 말고

나쁜 性質머리 그 自體를 受容하면 됩니다.여러분은 過去에 잘못이 있어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어요.

여러분 마음 속에 과거에 아주 잘못한 記憶이 있습니다. 뭔가 누군가에게 상처 준 기억이 있습니다.

정말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과거에 그 잘못한 것 때문에 내가 나 自身을 抑壓하고 괴롭히고 너는 그것 뿐이 안된다고

욕하고 너는 행복해서는 안되는 놈이야 라고 억압했던 그 마음만 내려놓으면 그그러면 아무 相關이 없어요.

그때 그 괴로운 狀況이 일어난 것 조차 眞理로써 온 것이지 그걸 탓하지 않으면 괜찮다 이 말입니다 

한낱 分別하지 않으면 이것이 眞正한 容恕예요. 여러분은 過去를 온전히 眞正으로 容恕를 해야만 온전히

지금 이 瞬間을 알아차리는 意識의 힘이 커집니다. 안그러면 過去의 트라우마로 現在를 걸러서 解釋하게 만드니까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도 저 사람이 나를 배신할 수 있다라는 마음을 投映해가지고

그 사람을 判斷하고 解釋해요.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알아차림 즉, 은, 지금 이 瞬間을 許容하는 것은

그 分別 判斷 解釋을 딱 中止하고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는 거잖습니까.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治癒가 일어납니다. 內面的인 治癒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알아차림을 하고 마음을 觀察하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 무슨 精神 異常에 걸린 사람, 幻想에 빠져있는 사람 精神 異常者, 몸에 病이 있는 사람,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사람, 全部 다 트라우마가 다 解決됩니다.

지금 心理治癒에서 이 불교의 알아차림으로 수없이 많은 이런 心理的인 問題를 解決한다고 박사논문 엄청 많이

쓰고 있어요. 박사논문을 써야 쓰는 게 아니라 불교에서는 늘 하던 건데 부처님이 2500년 전부터 하던 건데.

 

그래서 정말 重要한 事實은 나는 아무 잘못이 없고 나의 과거는 내가 탓하지 않는 이상 아무 잘못이 없고

그 누구도 나를 탓하지 않습니다. 탓할 수도 없고 탓한다면 탓하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나를 辱한다. 그거 神經쓸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辱할 自由를 줘야되요.

辱하는 그건 그 사람 일이니까. 내 문제가 아닙니다. 그걸 탓하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내 마음이 괴롭습니까.

그 사람을 바꿔야되는데 내가 그 사람을 바꿀 수 있어요? 못바꿉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내버려두고

辱해라 괜찮다 辱해라 니 맘대로 辱해라 내버려두고 내 마음 안에서만 容恕가 일어나면 宇宙法界가 容恕합니다.

내 마음 안에서만 容恕가 일어나면. 宇宙法界의 眞理의 屬性이 容恕에 있어요.

 

 

宇宙法界가 왜 그리 容恕하겠어요?  내가 내 過去를 떠올리면서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죽일 놈이야 하고 심지어

누구를 죽였다 할지라도 내가 내 스스로 떠올리면서 그 心理的 抑壓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기왕에 한 명 죽였는데 어차피 나는 더러운 놈이고 나는 나쁜 놈이니까, 앞으로 계속 그래도 되 하고

더 나쁜 짓을 더합니다. 이거는 참된 治癒가 아니예요. 그런데 이 工夫에서는 어떻습니까?

내가 過去에 정말 잘못을 했는데, 잘못한 놈으로 罪意識을 가지라고 그럽니까? 아니예요.

그냥 지금 이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만 봐라. 過去의 잘못한 나로 보지마라.

그냥 지금 이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만 봐라. 나는 지금 이자리에서 罪人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다.

그냥 지금 이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하나의 存在일 뿐이다. 지금 이자리에 存在하는 한 명의 存在일 뿐이다.

이렇게 自身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過去의 罪人으로써 나를 보지말고 지금 이 자리 있는 

지금 이 瞬間의 나의 存在로써 지금 있는 그대로 許容하고 받아들이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觀察하라는 말도 어찌보면 일종의 分別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分別하지 말고 보라는 그 얘깁니다.

뭐 막 特別난 유별난 修行이고 이런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判斷 分別 解釋하지 않으면 自動的으로

지 마음으로 혼자 分別하니까 그런 마음을 자꾸 지켜봐라 하는 얘기를 하는 말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뭘 하면 되요?

每瞬間瞬間 주어진 삶을 判斷 分別 解釋하지 않고 그냥 그냥 삶을 受容 許容하면서 잘 사는 겁니다.

잘 산다 못 산다 할 것도 없이 每瞬間을 온전히 許容하면서 受容하면서 그냥 살면 됩니다.

辱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그냥 그냥 사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그게 바로 修行입니다.

 

 

그래서 修行 잘 하려면, 받아들이면 修行이 잘 되고 받아들이면 삶의 모든 問題가 解決됩니다.

삶에 登場하는 그 問題는 問題로 온 것이 아니라, 答으로 왔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問題야 하고 問題 삼지 않으면

問題 그것은 答으로써 機能을 하기 始作합니다. 그래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許容하면 答이 나옵니까?

받아들이고 許容하면 答이 나옵니다. 解答이 나온다. 모든 問題는 그 問題를 去否하는데서 始作되기 때문에

그 問題를 받아들이고 許容하면 그 問題가 解決이 됩니다. 삶의 모든 問題가 解決이 됩니다.

받아들이고 許容만 해도 解決이 됩니다. 알기만 해도 알아차리기만 해도 아는 게 받아들이는 거니까,

觀察하는 게 받아들이는 거니까, 觀察하는 게 사랑하는 거니까, 사랑하기만 해도 解決이 된다. 이말과 똑같아요.

 

 

제가 前에 그 말씀을 드렸나 모르겠어요. 세분의 스님이 함께 살다가 毒草가 든 飮食을 먹고 세분의 스님이 전부

죽어가기 直前으로 그런데 病院에 갔더니 아주 시골 절이라 시골 病院이라 이게 解毒濟가 하나밖에 없다 한명

먹을 것 밖에 없다는 거예요. 셋이 나눠 먹으면 셋이 다 죽는다. 아 實際로 있었다는 일 입니다. 

근데 이들 세분의 스님이 끝까지 난 안먹겠다고 난 이제 죽어도 된다고 너나 먹으라고 너가 먹으라고

절대 나는 안먹겠다고 안먹겠다고 끝까지 그래가지고 셋이 같이 그냥 한 병을 하나도 안먹고 셋이 차를 타고 절에

돌아와가지고 앉아서 坐禪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픈 걸 지켜보면서.

 

그런데 그 다음 날 病院에서 기절초풍을 하더래요. 이 사람들은 백프로 죽었어야된다. 근데 그 세분 중에

한 분 스승이 되는 스님이 서로 미루는 걸 보고 너가 먹어라 너가 먹어라 하는 걸 보고 아 우리는 살았구나 하는

마음으로 절로 돌아와서 마음을 觀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때 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사랑하는 마음은 모든 걸 살리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에 니가 먼저 죽고 내가 살고 니가 죽어야 내가 잘 살게 되는 이런 我相이 完全히 내려놔지고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니까, 그런 마음이 우리를 살린다는 確信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그 病, 毒草를 잘못먹고 아픈 것을 온전히 許容하고 온전히 사랑하고 그것을 그냥 받아들이고

관찰했다는 겁니다. 온전한 受容 許容이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게 바로 온전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受容/許容, 觀察은 다르지 않습니다.러니까 그 중에 아무 거나 하나만 해도 된단 말 입니다.

진정한 사랑만 해도 깨달음/道고, 진정한 사랑만 해도 治癒가 되고, 알아차림/觀察만 해도 治癒가 일어나고,

아픈 몸을 觀察하기만 해도 治癒가 되고, 아픈 現實을 받아들이고 許容하기만 해도 治癒가 일어납니다.

 

 

自然治癒에 관한 유명한 책에서도 제가 읽었습니다. 自然治癒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데,

가장 重要한 점은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病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治癒가 빨리 되고

그 病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治癒가 늦게 일어나더라.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내내  사랑, 受容/許容, 觀察 이 얘기만 합니다. 이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고 맨날 똑같은

얘기라고 生覺하면 그렇게 生覺하는 건 여러분들 自由意志이지만 이 말이 내 마음에 얼만큼 와닿을 것인지.

여러분 제가 똑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여러분이 오늘 듣는 얘기하고 일년 뒤에 듣는 얘기는 전혀 다릅니다.

만약 근데 똑 같다면 똑 같이 들린다면 여러분이 아 내가 다 안다는 病, 錯覺에 빠져있구나.

다 안다고 하는 偏見을 가지고 보고 듣고 있다는 그 말 입니다.

사랑, 受容/許容, 觀察 이 말은 나날이 새로운 法門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