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상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나를 제한하여 가두지 않고 활짝 열어 확장시키는 방법

장백산-1 2014. 7. 27. 00:40

 

 

 

 

 

                              마음을 열고 나를 확장하는 방법|영상법문 녹취록

                         꽃돼지 | 2014.07.26. 18:57  http://cafe.daum.net/truenature/N0Zv/203 

 

 

 

 

반갑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는데 부처님께서 가장 중점적으로 法을 설해 주셨던 가르침이 無我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無我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우리는 삶을 살면서 나라는 存在는 이 몸에 限定된 存在로 錯覺을 하고

또한 이 마음 이 生覺에 限定된 存在로 錯覺을 하면서 이 世上 삶을 삽니다.

그렇게 해서 대부분 누구나 無限한 可能性의 自己 能力을 限定 짓고 살아갑니다.

 

나는 요 정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이다. 내 능력은 이 정도고 나는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고

이 정도의 부와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相對方은 어떻다 이렇게 얘기를 하면서 산단 말이죠.

그래서 누구나 無限한 自己 自身의 能力을 작게 이렇게 限定 짓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데

無我의 立場에서 본다면 本來 나라는 自我에는 固定된 實體가 없다는 겁니다.


'이 정도가 나야, 뭐 이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이 나야, 이 몸뚱아리가 나야,  내 IQ, EQ 이런 것들이 나야' 라고

限定지어 生覺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나라는 존재의 實體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大乘佛敎에 오면 '야, 그렇다면 나라는 存在가 없다는 無我인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렇다면 이 無我라는 말을 어떤 用語로 해줘야 좋지 않을까? 그래야 理解하기 쉽지 않을까?' 해서

方便으로써 大我(無限한 나)다, 참나다, 本來面目이다 뭐 이런 말로 설명을 합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大我라는게 뭐냐하면 이 몸 마음 생각 의식에 갇혀있는 이 小我的인 나라는 存在를 超越하는

無限히 擴張된 無限한 可能性의 나가 있다는 말입니다.

宇宙法界와 내가 둘이 아닌 그야말로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無限한 나의 無限可能性,

참나인 부처가 될 수 있는 無限한 可能性 이런 것이 나라는 存在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을  2,500년 前에 부처님께 그런 無限한 可能性이 있었으니

우리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겠지 이렇게만 生覺하고 살 것인가?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죠.
'지금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無我를 實踐하고, 내가 어떻게해서 나라는
어떤 협소한, 축소된

小我的인 나라는 存在에서 벗어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를

具體的인 現實 삶 속에서 實踐할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科學에서 밝힌 몇가지를 잠깐 먼저 설명드리면 世界的인 精神醫學者라고 하는 

스텐리블록이라는 박사는 나를 넓히면 넓힐 수록 苦痛이 저절로 줄어드는 現象을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腦에 頭痛이 왔어요. 그래서 머리가 아프다. 그런 두통이 있는 사람에게

두통을 가만히 觀察하라고 한 다음에 '지금의 네 머리가 요만한 머리가 아니라 1미터로 확장됐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렇게 想像을 시키는 거에요. 그랬더니 조금 더 두통이 감소해요. ' 네 머리가 이제는 이 법당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봐라.' 그 다음에 이 학교만큼 커졌다고 상상을 해보고 이제 점점 더 이 머리를 커졌다라고, 확장되었다고 상상을

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想像을 한 것 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벌써 頭痛이 사라진다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서 발견했다는 겁니다.

즉, 내 腦는 내 머리는 이 뇌나 머리에 限定되었다라고 生覺할 때는 머리가 아팠는데

'나는 여기에 限定된 存在가 아니야. 나는 無限히 擴張되는 存在야'라고 生覺을 바꿨을 뿐인데

그 頭腦의 통증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또 러시아 心理學者 블라디미르 라이코프라는 박사는, 
렘브란트라는 유럽의 유명한 美術家가 있는데요.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다음에 이 사람은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이죠. 이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서

나는 렘블란트라고 想像을 하도록 시켰더니 그 사람이 렘브란트 뺨치는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죠.

 

즉,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才能이 없는 사람이라고  보통 生覺을 하고 삽니다.

어쨋든 최면을 걸었든 아니면 想像을 했든 '나는 그러한 能力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生覺하고 일반적으로 사는데

이렇게 최면을 걸었더니 그 사람이 내 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놀라운 그림을 그렸다는 겁니다.


이 事實은 무엇을 意味하느냐 하면 어떤 原理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내 몸과 마음에 制限된 意識과 마음, 能力을 가지고 世上을 산다고 生覺하지만

그 制限된 의식 마음 능력 그것을 뛰어넘는 어떠한 알 수 없는 더 큰 힘과 可能性과 能力과 智慧를

우리는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라는 것을 意味합니다. 이렇게 비좁은 나에 갇혀있다는 生覺을 擴張해 버리면,

내려놓아 버리면 또 다른 無限한 可能性이 나에게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라이코프 效果라고 해서 自身이 이미 오래 前에 죽은 天才라고 想像을 하면,
상상을 했을 뿐인데 그 천재가 가지고

있던 천재적인 능력이 나에게서도 나온다고 그럽니다. 라이코프효과라고 그러는데 예를 들어 대학생들이 시험보기

前에 나는 대학교수다 이렇게 想像만 해도 성적이 오른다는 거죠.


또 어떤 대학교에서는 東洋人 西洋人이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데

그 교수님이 시험보기 前에 오늘 볼 이 시험은 전통적으로는 동양사람들이 성적을 월등하게 잘 받는다.

서양인들에 비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시험을 봤더니 실제 아무 연관성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동양인 학생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받았다라는 것.


내가 그렇다라고 想像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내 삶에 現實로 드러난다.

마음 하나 생각 하나 바꿨을 뿐인데 생각과 상상을 하나 조금 바꿨을 뿐인데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무얼 의미하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槪念에, 나라는 어떤 몸과 마음이라는 것에

나의 能力을 制限하고 限定해 놓았을 때는 그 정도 밖에 능력을 발휘할 수 없지만

그 나라는 틀을 깨고 터버렸을 때는 無限한 可能性과 能力이 나에게서 드러날 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無我라는 그 自體는 '내가 없다' 이렇게만 우리가 이해할 것이 아니라 無我는

나라는 존재에 가두지 않았을 때 나를 활짝 열었을 때 나의 能力은 無限大로 擴張된다는 겁니다.

事實은 自身의 能力이라는 것도 自己 規定 한정 제한일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 내 능력을 규정시키는 대로 그대로 능력이 규정되는 거에요.


모든 건 三界唯心이고 萬法唯識이라고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는 것처럼 

내 마음에서 내 능력이 어떻다라고  마음 스스로 규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을 뿐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이러한 가능성에 도전하지 않을 거야. 나는 요 정도 밖에 안되니까 요 정도만 하면 돼.'라고

여기는 사람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그 정도의 경험에 경험치로만 가두고 한정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제한하고 가두게되면 우리는 그런 능력의 가능성의 사람밖에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나라는 存在의 가슴을 활짝 열어서 宇宙法界 全切에 있는 大我, 佛性과 내가 둘이 아니게

바뀔 수 있느냐. 즉, 나의 無限한 可能性을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게 중요한 관건이겠죠?
나를 制限하여 가두지 않고 나를 擴張하고 활짝 열어놓는 方法. 몇 가지 方便이 있을 수 있는데요.


첫 번째가 우선 自然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自然과 交感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즉, 우리는 평소에 일상적일 때는 自然이 變化하는 모습을 가슴에 잘 못 담고 살아요.
왜냐하면 할 일이 많고, 바쁘고, 精神없고 하니까, 온갖 내 눈앞에 꽃 한송이가
아름다운 꽃이 있다 할지라도

그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누리고,감동하지 못 할 만큼 가슴을 열지 못하는 거지요.

가슴이 열려있으면 아름다운 꽃이 보일 텐데 보질 못하고 사는 겁니다.

 

법당 앞에 저 꽃잔디가 작년에 비해 올해 더 많이 퍼져서 자라고 있더라구요.

또 이 숲이 지난 달과 지금은 놀랍게 다름니다. 지금의 山을 보면 완전 草綠도 아닌 아주 연초록의,

어떤 초록의 생명들이 막 올라와서 그 어릴 때보다도 아주 그 산의 빛깔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특히 아침 나절이나 저녁 나절에 그 산을  숲을 바라보면요 정말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햇볕에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그런 어떤 놀라운 빛깔들을 가슴 속에 담게 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自然을 가슴에 담기 始作할 때 우리 가슴이 無限히 擴張되는 감정을 느낍니다.


콘크리트 建物 속에서 일하다가 직장 상사 밑에 사람에게, 또 아파트 안에서  갖혀 있을 때는
자식들에게 화도 많이 내고 직장 사람들에게도 막 짜증도 내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산에 가서 등산하는 사람들이 막 짜증내는 거 쉽게 보셨습니까? 짜증 잘안내죠? 등산하는 사람들은 그냥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한단 말이죠.
특히나 저 지리산을 가면 더 그래요. 왜냐하면 거기는 2박3일, 3박 4일 종주를 하다보니까

아예 세속의 생각을 탁 내려놓고 난 어차피 2,3일 동안 산에 있을 거야. 탁 내려놓고 있다보니까 가슴이 열립니다.

 

自然과 하나가 되면 가슴이 열려 있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 너도 나도, 너다 나다라는 分別이 사라지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친구같이 반갑게 느껴지고 그냥 인사하고 싶고 누가 시켜서 그러지 않아도 인사 잘 해요.

아마 여기서는 시켜도 잘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自然 속에 가면 굳이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가슴이 열린다.

우리가 가슴이 닫히면 어떤 일이 벌어지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축소가 되면 어떻게 되냐? 

우리는 항상 가슴이 열렸다 닫혔다 하지 않습니까?

가슴이 딱 닫힐 때는 부하직원이나, 자식 중에 누가 막 떠들고 말을 할 때 그것조차 듣기 싫어가지고 좀 조용히 못하냐고 소리지르고 자식들에게도 소리 지르고 그렇지만 가슴이 확 열려서 뭔가 기쁨에 넘치고 이럴 때는

그 어떤 소란을 피워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이 열린단 말이죠.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미국에서 어떤 초등학교가 그 州 全切에서 성적이 꼴지였는데
불과 한 일년만에 그 주 전체에서 일등이 되었고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 점수가 20% 이상 상승을 했다.
그래 이것이 뭔가 싶어서 조사를 했더니 다른 거는 하나도 바뀐게 없어서
성적이 올라갈 개연성이 없더라는 겁니다.


自細히 알아 봤더니 한가지 바뀐게 있더라는 겁니다. 그게 뭔가 봤더니

그전에 있던 이사하기 전에 있던 학교에 있을 때는 성적이 잘 안나왔다가 학교를 이사하고 성적이 잘나왔는데

다른 점이 뭔가 봤더니 이사하기 전에 학교는 창문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조그만 창문만 있더랍니다.

그런데 이사 간 학교는 넓은 窓門으로 바깥의 自然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학교였더랍니다.

 
그런데다가 이사하기 전에는 그 조그만 창문에 빛이 들어오니까
그것도 커튼을 치고 불을 켜고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창문을 활짝 열고 수업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이 창밖으로 드넓은

자연을 보다 많이 바라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 시험 결과를 가지고 설마 창문 커진거 가지고 성적이 그렇게 좋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캐나다에 있는  엘버타 교육청에서 5개 학교에서 똑같은 실험을 했다 그래요.
그런데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 뿐 아니라 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답니다.
성적만 좋아진 게 아니라 아이들의 키도 더 커지고요.
충치 발생율도 그렇지 않은 학교에 비해서  더 줄었다는 겁니다.


아까 얘기한 학교가 캘리포니아 포커스라는 초등학교라 그러구요.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고등학생들도 과연 가능한가 해서 백한개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이런 실험을 했는데

같은 결과을 얻었으면서 그 결론에 이렇게 나와 있다 그럽니다.

 

아이들이 窓밖으로 자연을 바라봤을 때 창밖에 식물들이 나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리고 자주자주 내다보면 내다볼수록, 그리고 창문이 크면 클수록 대학 진학율도 높아지고, 그뿐 아니라

아이들 성격도 좋아지고 건강도 더 좋아지고 더 드넓은 아이로 성장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것이 自然의 어떤 작은 부분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 할지라도 자연을 자주자주 많이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내 가슴은 더욱 더 넓어지고 작은 것에 집중하는, 작은 것에도 가슴을 여는 그런 것들이 마음에서 연습이 되는 것이죠.


서울에서 보니까 어느 아파트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면 한강을  조망하는데 1억이 더 비싸고

같은 아파트라도 또 이쪽에서 남산이 보이면 또 1억이 올라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아파트 하나를 구한다 할지라도 그야말로 창이 있고 숲이 보이고,
자연이 보이고, 드넓은 이런 곳에서,

드넓은 것을 굽어 볼 수 있을 때  그럴 때 아이들도 더, 뭐랄까 의식도 확장이 되고 가슴이 더 넓게 바뀌고

집안에서 싸움도 좀 덜 일어나고 이러지 않을까요?

 

제가 옛날부터 이런 얘기를 했었을 텐데 내가 이 걸 보고 '아,  내가 이래서 이런 느낌이 들었나' 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어릴 적 부터 항상 자연을 너무 좋아하던 것이 이제 언덕위를 좋아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언덕을 좋아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서 굽어 보는 것을 좋아하고
지리산에 가면 한상 그 윗자락에 올라가면 항상 그 자리에 자릴 펴고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고, 뭐가 있어도 창문이 넓은 곳을 좋아하고
우리 보살님들하고 밥을 먹으러 가도 될 수 있으면 창 넓은 대로 가자고 그렇게 하는 이유가

왠지 모르게 뭔가 그런게 좋은데 그런 것들이 우리 누구나 근원에서는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自然을 바라보고 그런 것 만으로도  우리의 어떤 영감이 깨어나고
나에게 도저히 없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어떤 創意性 이런 것들이 속속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칸트도 보면 매일 한 3시 반쯤 되면 항상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그러고요. 

그 산책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고 그럽니다.


루소나 에머슨이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사람도 항상 산책 속에서 創意性이나 靈感 같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산책을 할 때마다 메모지를 들고 다녔다 그러지요.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意識을 制限시켜 놓았을 때 비좁은 空間에 制限시켜 놓았을 때

우리도 意識도 작은 사람이 되지만 넓은 空間을 보았을 때 意識도 擴張을 하는데요.

 

이런 비유를 들 수가 있습니다.
금붕어들을 작은 어항에 가두어 두면 덩치가 5센치 이상으로 잘 안 큰답니다.
그런데 이 금붕어들을 호수에다가 풀어 놓으면 덩치가 25센까지 커진답니다.

강에다가 탁 풀어놓지 않습니까? 그러면 길게는 1미터까지 크기도 한답니다. 

이를테면 부모님들이 여행을 자식들을 보내거나, 외국 배낭여행을 하고 싶은 사람이
나도 모르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거나  이런 것들도 하나의 이런 것일 겁니다.  

 

내가 비좁은 곳에서 비좁은 空間을 보기 보다는 보다 드넓은 自然을 보고 드넓은 세상을 보고 했을 때

뭔가 모를 어떤 나라는 것에 制限된 마음이 擴張되는 그런 어떤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것처럼 내가 조금 더 自然과 가까이 하고 自然을 많이 바라보고 自然의 소리를 듣고 그랬을 때
내가 擴張되고, 그런 것을 떠나서도 마음이 너무나도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두 번째로는 나라는 生覺 마음 意識을 열고 나를 擴張하는 방법은 뭐냐하면

주변에 나눔과 베품,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내 것만 알고 남에게 주지 않고 꽉 쥐려고 하는 마음 自體가
나를 내꺼 안에다가 限定하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나만 잘 먹고 잘 살자하는  마음 아니겠어요? 근데 내 것을 남들에게 나누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나를 확장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좁은 내가 아니다.
이 세상 전체와 내가 도움을 주는 모든 존재들과 나는

둘이 아니다. 내 마음이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좁은 자기 틀에 갖혀있는 사람은 결코 나를 위해 나를 희생해서 도울 수 없습니다.
물질도 베풀 수 없고 마음도 베풀 수 없다. 사랑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확장되는 것과 같다.

나라는 자아에 나를 가두지 않는 겁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보다 더 사랑해 주고 더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었을 때

내가 확장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나의 無限한 能力이 늘어날 수 밖에 없겠죠.

내 것만 알겠다고 가두는 사람은 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베풀고 나누는 사람은 점점 더 부자가 될 수 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우주 법계가 그 사람은 나라는 틀에 갇힌 사람의 내 복만 받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무량대복을 가져다 쓸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기 때문에.

 

또 세 번째는요. 조금 비슷한데 執着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執着이라는 것이 바로 我執이라고 해서 내 것을 가지겠다라는 집착아니겠어요?

내것을, 소유욕 같은  이런것들을 집착이라고 한단 말이죠.
집착하는 사람들은 곧 내 것만이 내꺼다라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나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는 사람이죠. 그러니까 더 많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執着을 하게 되면 무한한 어떤 가능성과 창의력 같은 것도 상실이 되어버립니다.
성적을 잘 받아야겠다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성적을 더 잘 받을 수가 없게 되고

돈에 대한 집착을 과도하게 하는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 수가 없게 되고,

사람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람을 내가 반듯이 사귀어야 되겠다 .
이런 집착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착의 크기는 상대방을 두렵게 만들거든요.마음이 멀어지게 만들 수 밖에 없거든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좋은데, 나를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매력이 없어집니다.


物質도 다 마찬가지다. 이게 삶의 이치입니다.

모든게 내가 집착하는 것은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마련이다.
집착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그것이 나에게로 더 올 수 가 있다.
그 이유가 집착하게 됐을 때

나라는 小我的인 自己 槪念의 틀속에 갇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착을 내려 놓게 되었을 때 나라는 틀. 나다 너다 하는 分別의 틀이 놓여지고 그랬을 때
無限한 可能性이 나에게 파도쳐 들어오는 겁니다. 더욱 큰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죠.


또 네 번째는요.  이 또한 아주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중요한 얘기인데요
뭐냐하면 내가 세상을 살아간다. 내가 잘 살겠다. 내가 뭔가를 해내겠다.

이런 내가라는 마음을 탁 내려 놓는 겁니다. 그럼  내가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을 佛性이라고도 하고 大我라고도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본래면목 자성청정심이라고도 하고 무한한 이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고,

뭐라고도 이름 할 수 있는 그 主人公, 한 마음, 一心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것 

그러나 그것은 實體가 있는 것은 아닌, 아트만과 같은 어떤 實體的인 것을 얘기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쨋든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우리가 부처가 될 수 있는 무한한 어떤 가능성이 그 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뭐 있다 그래도 어긋나고 없다 그래도 어긋나겠지만 그렇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자리가 있단 말입니다.

 

즉, 아까 우리는 나를 制限 했을 때는 요 정도 능력 밖에 없지만 

나를 제한하는 마음을 놓아 버렸을 때 무한한 능력과 창의성과 직관과 영감이 끊임없이 파도쳐 들어오는 것처럼

그러한 나라는 존재에 갇혔을 때 필 수 있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는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는 그 어떤 가능성이

나에게 있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 불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써 먹을수 있느냐 .

우리가 나로서 살지 않고 불성,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지만, 그 자리에 탁 부합해야지만

그것을 써 먹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가?
내 스스로 나라는 것을 내려 놓고 주인공 자리에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 안에 있는 근원의 자리에 불성이든 한마음이든 주인공이든  그 자리에 내 맡기는 겁니다.

 

완전히 내 맡기고 사는 거에요. 내가 산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돈을 벌었다. 그것도 아닙니다.

잘나도 내가 잘난게 아니고 못나도 내가 못난게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다.

난 이 생에  잠깐 이 껍데기 이 肉身이라는 껍질을 입고 백년도 안 되는 세월동안 잠깐 와서

이 생을 경험하고 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꾸는 자에 불과한데 좋은 꿈을 꾼들 악몽을 꾼들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겁니까?
좋은 꿈을 꾼다고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錯覺을 해서도 안돼고

나쁜 꿈을 꿨다고 해서 내가 별볼일 없는 사람이구나하고 나약해져도 안된다.

좋은 우월감도 다 본래자리에 내 맡기고 열등감도 본래자리에 탁 내 맡기고

나는 그저 지금 이 瞬間瞬間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내 맡기고 그 어떤 고민 근심 걱정할 필요가 없죠.


근심걱정 하는 것은 나라는 生覺,我相,相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가 있기 때문에.
나라는 자아, 아상에 갇혀있기 때문에.
내가 있으면 거기서 두려움이 생기고 괴로움이 생긴다.

사실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게, 나라는 에고와 아상이 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제한돼있죠.


뭐하나 제대로 아는게 사실은 잘 없습니다. 어떻게 분명히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처럼 어리석은 교만한 마음이 없죠,
불교에서는 下心하라고 하는 이유가 아는 게 없습니다. 사실은.


세계에 살아있는 3대 생불이라고 불렸던 달라이라마, 틱낫한, 우리나라의 숭산 큰 스님이 계시는데

숭산 큰 스님의 가르침은 오직 모를 뿐이라는 이 한 마디로 요약이 됩니다. 수행자들에게, 제자들에게

이 생을 사는 데 있어서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안다고 생각하면 어긋난다.


우리가 아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다못해 오늘 법회 끝나고 집에 갈 때 A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B라는 길로 가는 게 좋은지

어디 들렸다 가는 게 좋은지 바로 집에 가는 게 좋은지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알 수 없어요. 바로 A라는 길로 갔는데 그 길로 가다가

교통 사고가 날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리 뒤로 돌아가는 게 나은 거 일 수도 있는데 그 사실을 알 수 없죠. 그냥 맡기고 가는 것이지.

내가 계산해서 머리 굴려서 갈 필요가 없다.


맡기고 가면 우주 법계가 알아서 나를 이끌고 간단 말입니다.

어떤 큰 중요한 결정 앞에 놓여있습니다. 내가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확장하는 게 좋은 지 안 하는 게 좋은 지 어찌 알겠습니까?

확장했다가 망할 수도 있고 안했다가 오히려 더 성공할 수도 있는데,

자식을 A라는 대학에 보내는 게 좋은지, B라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냐하면 저마다 자기의 다르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삶의 길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A라는 길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B라는 길이 틀린 것도 아니고 저마다 자신의 삶이 오는 겁니다.
자신에게는 자기의 삶이 오는 거에요. 그래서 자기답게 사는 것이 이 삶의 목적입니다.


자기답게 살아야 되는데 어디 正確한 옳은 正答이 있겠습니까? 

공무원이 옳다거나 대학교 졸업한 학생이 공무원 하는 게 옳다거나 아니면

사업을 시작하는 게 옳다거나 어떻게 양단의 결론을  내 줄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그 사소한 하나도 결론 내릴 수 없는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모르는 존재입니다.
오직 모를 뿐인 존재들이다.

 

그런데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심을 필 수가 없다는 것이죠.그래서 나는 모른다. 오직 모를 뿐 하고 나는 모르니까

부처님께 나라는 작은 소아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까 부처님께 내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諸法實相이라고 했단 말이죠.지금 이 瞬間에 펼쳐지는 모든 法/現象은 다 實相이다. 참된 모습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우리는 그 순간순간 사는 겁니다. 즉 한 瞬間瞬間 法/現象으로써 現存하는 겁니다.


秒살이라는 곤충도 每 秒 동안 그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해 사는 거에요.

未來에 대한 걱정도 我相에서 오니까  내가 다 根源에 내려 놓고 다 내맡기고 그냥 순간순간을 살면 됩니다.

배고플 때는 그냥 밥을 먹고 배 부르면 안먹고 맨날 하듯이 심심하다고 티비 켜고 스마트폰 보고 맨날 똑같은 삶만을

계속해서 반복할 것이 아니라 그냥 순간순간에 내가 어떤 것을 해야 될 것인지 내 根源에서, 내 마음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이면서 살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겠죠.

 

저는 일년 후에 어떻게 좀 안 좋은 일이 있으니까, 일년 후에 내가 다른 안 좋은 곳으로 가게 됩니다.

아니면  일 년 후에 내가 퇴사를 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부터 고민, 걱정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준비는 해야 되겠죠 . 필요할 때 마음을 내가 의도적으고 써서 내가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해야겠다고

생각을 할 때는 생각을 가져다 쓰는 것이 잠깐 가져다 쓰는 겁니다.

 

그런데 일년 후에 있을 그 두려움 때문에 일년 내내 두려움에 떨 필요는 없습니다.

어찌 알겠어요. 우리는 일년 후에 '내가 이렇게 됩니다. 안 좋아집니다.'라고 생각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일년 후에 좋아질지 안 좋아질지는. 더 좋아질 수 도 있단 말이죠 .

모든 가능성은 언제나 놓여있습니다. 내가 제한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내 앞에 있어요.

制限되고 固定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마음 안에서 나는 언제나 이 生에서 意識을 擴張하겠다.

卽, 三歸依 부처라는 根源의 眞理로 向해 가겠다. 즉, 점점 더 나는 깨달음을 얻어 가겠다라는 自己中心만 있다면

깨달음을 얻어가는 방식이 경험을 통해서 있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한한 다양한 경험을 내가 막진 않겠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겠다. 내 앞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내 마음을 열어 두겠다라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주 법계에서

더 놀라운 일들을 나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 스스로 나의 能力을 制限하지 않으면.


'나는 요 정도 밖에 진급을 못 할 사람이야.' 라고 스스로 制限하는 사람에게는 방법이 없죠.
그러나 더 많은 어떤 방식이든 좋다. 이게 진급의 방식도 좋고 다른 일을 하는 방식도 좋고 그 무엇도 좋다.
하다못해 보살님들이 '왜 제가 오십 육십 칠십이 되었는데 그때 새롭게 영어나 제2외국어나 이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에 도전해 보고 공부해보고 이것도 아름다운 방법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장군분이 전역하면서 중국어를 공부 시작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 분이 전역하면서 저 나이에 중국어를 새로 시작한다는 게 조금 의하했는데

몇 년 있다가 뵈었는데 중국분하고 자유자재로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간동안 나는 이 나이에 뭐했나하고 여러분 보시기에 우스울 그런 생각을 나도 하고 있었는데

저 분은 저 연세에 시작해서 똑같이 몇 년 지났는데 저렇게 놀랍게 하고 계시는구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게 되면 노화도 안온다고 하죠. 腦가 녹슬지 않는다 그럽니다.
腦가 녹슨다는 觀念이 있을 뿐이지 實際 腦는 죽을 때 까지 成長한다고 그럽니다.
요즘 腦科學에서 밝힌 사실입니다. 내 스스로 나는 이제 성장이 멈춘다. 깨달음이 멈춘다라고 가둬놓지만 않으면
나는 이 정도에서 더 나아갈 수 없다라고 가둬 놓지만 않으면 나는 늙었으니 어쩔 수 없다. 이런 생각으로 가둬놓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재생됩니다. 몸의 세포도, 뇌도. 칠십 팔십 되셔서도  히말라야 올라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 분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集團的으로 全 地球的으로 人類 모든 사람의 共通된 意識에
'한 백살 쯤 넘으면 누구나 죽는다'라는 觀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의, 사람들의 壽命도 그 정도로 制限 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깨게 되기 시작하면,

그 깨는 어떤 순간을 맞기 시작하면 전체적으로 이 인류가 갑자기 壽命이 더 늘어날 수도 실제 있습니다.


어떤 큰 病이 있으신 분들, 예를 들어 不治病이라고 알려진 病이 있는데

그 病을 치유할 수 있는 놀라운 신물질이 개발했다라는 기사가 신문에 나기만 했을 뿐인데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신약이 실제 활용화 되지는 않았는데, 그 약이  기사만 났을 뿐인데

그 날짜부터 해서 전 세계적으로 그 병이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 호전이 되기 시작했다라는 결과도 있습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스스로 制限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는 작은 小我 속에 갇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나를 擴張할 때 나를 制限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 놓을 때 보다 自然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보다 이웃 사람들과 나누고 베풀고, 내 것에 대해서 執着하고 所有欲에 사로 잡혀 있지 않고,

나를 내려 놓고 모든 것을 우리의 根源,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삶을 살 때, 그래서 근심 걱정없이

모든지 부처님께서 이끌어 가는 데 무슨 걱정이냐 하고 탁 내맡기고 살 때 우리가 얼마나 무한하게 확장되겠습니까!

 

그리고 이상의 모든 것을 可能하게 하는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바로 冥想을 하고 좌선을 하고 참선을 하고

수행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수행하고 있는 그 순간 나라는 것을 잊게 된단 말이죠.
無我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라는 것을 탁 잊게 되는 순간을 直接 느끼고 體驗하게 되면

그 瞬間에 나라는 것이 탁 내려놓아 진다.


前에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이 사격 선수들이 사격을  할 때 10점 만점에 탁 하고 꽂히는 瞬間에 보면

언제나 명중 直前에 예외없이 頭腦가 번쩍 하는 瞬間이 있었다는 겁니다.

즉, 周波數가 腦의 周波數가 알파파로 瞬間 탁 變했을 때는 어김없이 10점 만점을 맞혔다는 거에요.

그야말로 알파파라는 腦의 周波數 自體가 모든 雜念이나 이런 煩惱妄想들을 完全히 탁 순간 놓여진

깊은 冥想의 意識狀態, 無我의 狀態 그런 겁니다.

 

또 음악가가 됐든 의사가 됐든 경영자나 조종사가 됐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마음이 턱 놓이는, 텅~비어버리는 나란 없다라는, 잡념이 놓여지는 無我의 그런 瞬間을 탁 경험한다고 그래요.


노벨상 수상자의 90%는 꿈꾸는 상태였거나 혹은 冥想하는 중에 놀라운 힌트와 영감을 얻어서

그 놀라운 노벨상이 될만한 업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생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넘어서는

無我에 接觸했을 때 얻게되는 더 놀라운 것이 있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우리는 내 마음이 내 마음의 能力을 스스로  限定하고 制限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 안에는 무한한 나를 확장 할 수 있는, 나를 제한된 공간 속에 가두지 않을 수 있는

무한한 자원들을 우리 마음 안에 가지고 있다.

 

그 무한한 자원을 능력을 어디에서는 내면에 있다, 불성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얘기 하기도 하고
어디에서는 우주 법계에 가득히 충만해 있는데, 우리 뇌는 안테나와 같아서

우주 법계에 있는 무한한 자원을 언제든지 수신해서 쓸 수 있다.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죠. 내 내면에 있다는 게, 밖에 있다는 게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自性佛과 法身佛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안팎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 마음 안에 있다라는 것이고 또한 宇宙法界 全切에 遍滿해 있다라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바로 깊은 어떤 冥想의 상태로서 우주 전체에 遍滿해 있고

科學에서도 나라는 存在가 振動을 할 때 振動이 끝나는 골에서 마루로 바뀌는 그 瞬間의 地点에서는

모든 振動은 宇宙法界 全切에 遍滿하다라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내 몸도 마음도 의식이 한 生覺 일으킬 때 美國에도 가 있을 수도 있고 안드로메다에도 가 있을 수 있다.

우리라는 存在의 根源 本質은 本來부터 宇宙空間과 宇宙萬物에 遍滿해 있는 存在라는 말입니다.
宇宙全切에 遍滿한 充滿한 每瞬間瞬間이 우리 存在에게는 언제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홀로그램이라는, 과학자 들이 뭐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손톱의 때 속에 있는 振動을 읽을 수만 있다면

이 振動이 時間과 空間을 超越해서 宇宙全切에 遍滿하기 때문에 손톱 밑의 때 속에서 지금 안드로메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를 알 수 있고, 2500년 전에, 3000년 전에, 수만 년 전에 地球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라는 存在는 時空을 超越해 遍滿한 그런 存在이기 때문에 一念卽是無量劫이고 九世十世互相卽이라고 하고
또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全切宇宙를 머금었다고 하고, 一卽一切多卽一이라고 하는 법성게 가르침처럼

우리는 여기 몸이나 마음 의식 생각 안에 갇히는 이런 어떤 小我的인 存在가 아니다라고

우리 마음 스스로 그렇게 굳게 믿고 있기만 해도 每瞬間瞬間 無所不在하고 無限한 그 能力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어떤 중요한 발표가 있다, 시험이 있다 할 때 그 직전에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께 탁 내맡기고 '그냥 알아서 하십시오' 하고 탁 내 맡겼을 때,

제가 이자리에 잠시 앉아서 坐禪을 한 뒤에 이 법좌 자리에 올라오지 않습니까?
잠깐 앉아서 언제나처럼. 언젠가 부터 그런 習慣이 생겼었는데 언제나처럼 잠시 앉아서

제 自身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저는 부처님 법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 법을 저는 어떻게 전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다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내 안에 있는 根源에서, 알아서 法을 傳하십시오.

저를 도구로 써서 알아서 우주법계의 진리가 흘러 나오도록 저 자신을 허용합니다.

저 자신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라고요.

 

그리 됐을 때 설법을 하고 나서 내려 왔는데 어느 날은 내가 내 머리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한 번도 힌트를 얻어 본 적이

없던 말들을 이야기하고 내려오는 그런 때를 발견하거든요. 그건 제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머리속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무한한 차원의 어떤 것들과 우리는 언제나 접촉할 수 있고 이것이 뭐 대단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고 누구나 日常的으로 修行者로 하는 것이 可能합니다.

 

그래서 宇宙全切에 遍滿하고 無限한 能力을 지닌 위대한 여러분 自身을

지금까지 살아오던 삶의 습관, 삶의 방식, 제한된 나라는  존재, 여기에 가두어 두지 마시고

지금까지 가두어 놓았던 모든 것을 완전히 열어 놓고 나라는 존재를 활짝 열고

無限한 意識의 擴張이 可能하게끔 나를 宇宙全切에 許容하시기 바라겠습니다.

 

법상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