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지금 여기

장백산-1 2014. 9. 17. 12:11

 

 

 

 

 

부끄러운 자기는 없다 / 이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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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안녕하십니까!

불교를 믿는 사람도, 불경을 공부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불교에 약간의 관심을 갖고 이리저리 기웃기웃 거리는 그냥 얼치기 주변인 이라고

봐주십시오. 불멸을 보다가 이해가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글을 씁니다.

생활 속에서 불법을 잊지 않고 행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책 속 질문의 답변 중에

가는 곳마다 '場所'를 生覺지 말고 生覺하는 '生覺의 자리'를 生覺하라.

즉, 거리에 나섰으면 '이 거리에 왔구나.' 하고 生覺하기 前에 여기를 生覺하는

'生覺의 자리'가 '지금 여기' 임을 生覺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生覺하기 以前에

아침을 生覺하는 生覺이 언제인가를 되물어 보라.

위 글에서 生覺하는 '生覺의 자리'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 될지 모르겠지만 미련하고 우둔한 이 사람에게  스님의 가르침을 청합니다.  


답변 :

불도 공부를 처음 접하신 분들에게 사실 ‘生覺하는 자리’를 딱 꼬집어 말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도란 ‘깨달음’ 즉 ‘精神’의 實際的 能力과 범위, 한계 등을 다시 ‘깨달음’을 통해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生覺하는 자리’란 ‘육신’이나 ‘시간’을 超越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종로 3가에 와있구나.’라고 生覺하거나 ‘충무로 3가에 와있구나.’라고 生覺한다 해도

그런 生覺을 하는 生覺의 자리는 變하지 않고 恒常 한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모든 生覺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事實 알고 보면 머리라는 것도 生覺 속에서만 認定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로’라는 것도 ‘生覺’에서 벗어나지 않고 ‘충무로’ 역시 ‘生覺’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生覺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또한 生覺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 現象입니다.

 그러므로 온 宇宙가 오직 ‘깨달음’ 現象일 뿐임을 다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場所(空間)뿐만 아니라 時間도 恒常 ‘지금’이라는 瞬間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물론 時間도 ‘生覺’이라는 것을 벗어나 있지는 않지만 언제나 固定된 時間에

生覺이라는 ‘깨달음’이 作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固定된 그 時間이 바로 ‘지금’입니다.

 

過去를 生覺해도 그 生覺은 '지금' 作動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고

未來를 추측해도 그 生覺은 '지금'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함을.... 이러한 ‘깨달음’의 性質을 말하는 理由는

‘生覺’이란  ‘깨달음’이라는 ‘精神能力’에 依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깨달음’이란 時間과 場所(空間)를 超越하여 움직임이 없다는 것을 傳하려는 것이고

物質的이라는 것에서도 벗어나 있으므로,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기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태어나거나 죽는 것도 아니고,

남이라는 者의 깨달음과 自己라는 資의 깨달음이 따로 나뉘어 있지도 않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

단지 무엇이든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깨닫는 다는 것입니다.

여유롭게 生覺을 하고 한 줄 한 줄 책을 읽어나간다면 ‘깨달음’을 자세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처음 生覺의 方向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얻으면

‘不滅’이라는 책은 온 宇宙와 온 깨달음의 世界를 송두리 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人間이라는 生覺을 벗어나지 못한 중생들의 책 가운데는

이러한 책이 없었다는 것 또한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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