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방편과 본질

장백산-1 2014. 9. 16. 19:22

 

 

 

 

夢中一如 動靜一如

               

유당 |2014.09.15. 14:33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FkcP/2255   

 

    

 

질문 : 선생님의 修行이야기를 읽고 궁금해서 올립니다.

큰스님들 法門에서는 動靜一如, 夢中一如 그리고 더 나아가서 宿眠一如

(꿈이 없는 깊은 잠속에서도 惺惺함)를 지나가서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선생님의 경우에는 방바닥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 또 산책하다가 깨달음이 일어났다고 하니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산책하시다가 깨닫기 以前에 이미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가 되었었나요?

 

 

답변 : 반갑습니다.

석가모니를 비롯하여, 33祖師와 1700禪師들 가운데

아무도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記錄이 없습니다.

모두들 說法을 듣다가, 혹은 疑問에 빠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다가,

혹은 어떤 일을 당한 瞬間에 문득 깨달았다는 記錄뿐입니다.

<전등록>이나 여타 기록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질문 :

物質的으로 보면 내 몸은 여러 가지 元素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構造物이잖아요.

生覺이란 것도 腦神經網에서 일어나는 電氣的인 혹은 化學的인 作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物質的으로 보면 結局 나라는 主體는 없다고 보입니다.

그러므로 佛敎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라는 말은 쉽게 理解가 됩니다.

그런데 佛敎에서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고

언제나 여여(如如)하다는 말은 전혀 理解되지 않습니다.

 

 

답변 :

반갑습니다.

헤아리고 分別하여 理解하기 때문에 無我와 永遠不變이 서로 相衝되고 모순됩니다.

불교에서 無娥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本來面目이니 自性이니 하여 有我를 말합니다.

불교에서 永遠不變과 如如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世上은 꿈처럼 덧없고 무상(無常)하다고도 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이것이 眞理다>라는 固定된 主張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말들은 다만 우리의 헛된 妄想을 부수어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方便의 말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方便이란, 예컨대 <나>라는 生覺 槪念에 執着하는 사람에게는 無我를 말해주지만,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生覺 槪念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의 本來面目을 찾아라>라고 有我를 말해줍니다.

 

 

마치 개울에서 삽을 가지고 물의 흐름을 防害하는 돌멩이나 흙덩이를 除去하듯이,

方便이란 이처럼 固定된 見解나 觀念을 갖지 못하도록 만드는 道具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言語는 이러한 道具인 方便의 말입니다.

道라는 이름 역시 方便의 말입니다. 돌멩이나 흙덩이가 모두 제거되면 개울물이 自然스럽게 흘러가듯이,

우리에게 있는 온갖 虛妄한 見解  槪念 觀念의 防害物, 온갖 相이 사라지면 根源 本來의 眞實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