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二元性이라는 마음의 病

장백산-1 2014. 10. 20. 12:13

'이원성(二元性)'이라는  마음의 병(病)- - 글쓴이 : 김기태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병(病)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의 根本 屬性이기도 해서 어느 누구도 그 病이 病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病으로 인해서 수많은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이 초래되고, 想像할 수도 없을 만큼의 生命 에너지를 빼앗아 가버리기에 그 病은 分明 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自己 自身과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恒常 둘로 나누어 하나는 버리게 하고, 다른 하나는 취(取)하게 하는 마음 속의 病, 그것이 바로 이원성(二元性)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원성(二元性)이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여기 커다란 칠판이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 세로로 직선 하나를 그어보십시오. 그 線은 짧은 것입니까, 긴 것입니까? 또 點 하나를 찍어 보십시오. 그 點은 높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까, 낮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까? 동그라미 하나를 그려 보십시오. 그것은 큰 圓입니까, 작은 圓입니까? 직선, 점, 동그라미 어느 것이든 하나만 있기에 그것은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니며, 높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낮은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며, 큰 원도 아니고 작은 원도 아닙니다. 그냥 ‘그것’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번엔 조금 전에 그린 그 직선 옆에 길이가 같지 않은 다른 직선을 하나 그어 보고, 높이가 같지 않은 다른 점을 찍어 보며, 크기가 같지 않은 다른 원을 하나 그려 보십시오. 그러면 대번에 그냥 ‘그것’이었던 처음의 직선은 길거나 짧아지고, 그냥 ‘위치’만 있던 처음의 점은 높거나 낮아지며,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던 원은 크거나 작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대성(相對性) 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동안 없었던 相對性이 갑자기 생겨버린 것이지요.

 

그러나 비록 그렇게 처음의 ‘그것’ 옆에 다른 直線과 點과 圓을 그림으로써 길다-짧다, 높다-낮다, 크다-작다는 相對性이 생겨버렸지만, 原來의 ‘그것’은 여전히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것,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것,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것임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처음 하나를 그렸을 때의 ‘그것’의 속성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것은 다만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그것’일 뿐인데, 그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하고 언제나 길다-짧다, 높다-낮다, 크다-작다 등의 相對的인 分別과 比較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게 하는 인간들의 마음의 病, 그것이 바로 이원성(二元性)의 병(病), 분별심, 분별의식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유명한 말로 원효 대사가 깨달음을 얻는 過程을 보면 마음의 病인 二元性  이 事實을 보다 分明하게 알 수 있습니다. 원효는 45세 때 의상과 함께 신라를 떠나 당나라로 佛法을 공부하러 갑니다. 두 사람은 몇날 며칠을 걸어 충청도 어느 산골에 이르렀을 때, 날도 어두워지고 몸도 많이 지쳐 어떻게든 하룻밤 묵고 갈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문득 감실(龕室) 같은 것이 눈에 들어와 두 사람은 거기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는데, 새벽녘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원효는 손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잡히는 바가지의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십니다. 얼마나 시원한지! 비록 잠결이지만, 몇 날 며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걸어온 길이었는데 그 모든 피로와 갈증을 단번에 씻어 주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기까지 한물이었던지!

 

그렇게 편안한 마음이 되어 다시 잠이 든 원효는 아침이 되어 날이 훤하게 밝았을 때, 자신이 몸을 누인 곳은 감실이 아니라 사람의 뼈가 굴러다니는 오래된 무덤이며, 마신 물은 해골바가지에 있던 썩은 물이라는 사실을 認識하게 됩니다. 그 순간(瞬間) 원효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격심한 구토를 하게 되고, 그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스러워하던 중 어느 한 瞬間 갑자기 원효는 그의 삶에 완전(完全)한 비약(飛躍)을 가져다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해골에 담긴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 썩은 물인데, 어제 밤에는 그토록 달디 달던 해골에 담겨있던 썩은 물이 오늘은 어이하여 이토록 구역질을 나게 하는가? 그렇구나! 어제 밤과 오늘 사이에 변한 것이 있다면 오직 내 마음 뿐이다. 진리(眞理)는 결코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다!” 그리곤 그 깨달음의 순간(瞬間)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심생고종종법생 심멸고감분불이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우삼계유심 만법유식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

我不入唐

아불입당

 

마음이 일어나니 온갖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감실과 무덤이 둘이 아니구나!

또한 삼계가 오직 마음(心)뿐이며 만법이 오직 식(識)뿐이로다.

마음  밖에 법이 없거늘, 어찌 따로 법을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로 가지 않겠노라.


말하자면,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이나 똑같은 썩은 물이었는데, 원효의 마음이 해골에 담겼던 그 썩은 물을 한번은 ‘깨끗하다’고 다른 한번은 ‘더럽다’고 분별(分別)을 함으로써 마음 스스로 고통을 받았던 것이지요. 즉 ‘깨끗하다’ ‘더럽다’함은 事物에 實在하는 현상이 아니라 원효의 마음이 만들어낸 二元的인 分別心일 뿐인데, 바로 그런 分別心로 인해 마음에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이 생겨났다는 事實을 깨닫게 되면서 원효의 意識은 문득 깨어납니다. 비로소 오래된 마음의 病인 이원성(二元性)의 세계, 분별(分別)의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이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면서 참된 大自由를 얻게 된 것, 해탈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二元性의 分別은 바깥 對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自身을 向해서도 똑같이 行해집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우리가 每 瞬間 느끼는 온갖 感情, 느낌, 生覺들은 칠판에 그린 하나의 直線, 點, 圓과 같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것’일 뿐이요, 해골에 담긴 물과 같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것’일 뿐인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고 항상(恒常) 二元性의 틀, 분별심을 통해서 그것들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기쁨 슬픔, 미움 사랑, 분노 자비, 불안 평화, 개운함 찝찝함, 외로움 상쾌함, 긴장 경직, 당당함 비굴함, 바쁨 심심함, 즐거움 우울함, 기분좋음 기분나쁨, 강박 이완, 우유부단 분명함, 게으름 성실, 무지 지혜 등등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때 그때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이원성의 감정들이요, 모양과 빛깔만 조금씩 다를 뿐 모두가 ‘나’의 느낌들이며, 더구나 그 하나 하나가 살아 있기 때문에 경험하게 되는 소중한 生命 에너지들인 것을, 우리는 그렇게 하나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을 어김없이 둘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즉, 기쁨 사랑 자비 평화 당당함 분명함 즐거움 성실 지혜 등은 ‘좋은 것, 바람직한 것, 얻고 싶은 것,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나누고, 슬픔 미움 분노 불안 외로움 긴장 경직 우유부단 강박 우울 등은 ‘나쁜 것, 초라한 것, 수치스러운 것,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분별하고 구분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둘로 나누어 놓으면 필연적으로 우리 마음은 또 ‘좋은 것’은 끊임없이 취하고 구하고 얻으려 하고, ‘나쁜 것’은 너무나 싫어하며 버리려 하고 못견뎌하고 괴로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二元性 自體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虛構), 환상(幻想)인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 二元性이 가리키는 대로 우리 自身을 둘로 나누니, 이를 어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은 또 어찌 하구요. 버리고 싶은 것들은 얼른 버려지지 않아서 괴롭고, 얻고 싶은 것들은 빨리 얻어지지 않아서 괴로우며, 버리고 취하는 자신의 노력과 수고와 몸부림은 또 언제 끝날지를 모르니 이 또한 너무나 아득하고…….


아닙니다. 나는 그냥 ‘나’일 뿐이요, 내 안의 모든 감정들 또한 그냥 있는 그대로의 ‘그것’일 뿐, 좋다-나쁘다, 잘났다-못났다, 됐다-안됐다의 이원성, 相對性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每 瞬間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絶對)한 存在로서 살아가고 있답니다. 아, 우리는 언제쯤 그러한 우리 自身의 實相을 볼 수 있게 될까요.


다행히 이러한 眞實에 눈을 뜬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미 부처고, 眞理이며, 自由요, 모든 것이다.”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스님인 지공화상(誌公和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衆生不解修道 便欲斷除煩惱

중생불해수도 변욕단제번뇌

煩惱本來空寂 將道更欲覓道

번뇌본래공적 장도갱욕멱도

一念之心卽是 何須別處尋討

일념지심즉시 하수별처심토

 

사람들이 도를 닦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니, 곧장 번뇌만 끊어 없애려고 한다.

번뇌는 본래 텅~비어 고요한데, 도를 가지고서 다시 도를 찾으려 하는구나.

한 순간의 마음이 바로 이것 도인데, 무엇 때문에 다른 곳에서 도를 찾으려 하는가?

 

若言衆生異佛 迢迢與佛常疎

약언중생이불 초초여불상소

佛與衆生不二 自然究竟無餘

불여중생불이 자연구경무여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하면, 깨달음(佛)과는 늘 까마득히 멀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면, 저절로 남김없이 완전한 열반이리라.

 

또 인도의 영적 스승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른바 깨달음의 意識 狀態란 뭔가 새로운 것을 얻거나 멀리 있는 어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이렇게 存在하고 또 恒常 存在해 왔던 그대로 그냥 存在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다만 참되지 않은 것을 참되다고 아는 허망한 그 生覺, 망상(妄想)을 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病인 二元性을 벗어나 우리 모두가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게 될 때, 自己 分裂이 끝이 나고,自身과의 싸움도 끝이 나고, 영혼의 메마름과 목마름도 끝이 나고, 방황도 끝이 나고, 고통도 끝이 나고, 의문도 끝이 나고, 추구도 끝이 나고, 아! 사랑과 自由와 平和와 幸福과 永遠의 삶이 始作됩니다.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다른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의 本來의 자리인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단 한 瞬間도 떠나본 적이 없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로 필자는 오늘도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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