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 신심명 14

장백산-1 2014. 10. 26. 22:59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 신심명 14           

 

 

 

글쓴이 김기태 

어느 화창한 봄날 책을 한 권 사기 위해 시내에 있는 불교서점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매주 한 번씩 2년 가까이 계속 해오던 道德經 강의를 거의 마무리할 때쯤 되자 어느 분이 다음번엔 金剛經을 강의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해서, 오랫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꺼내어 읽어보는데, 생소한 불교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 우선 그것들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강의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아 시간을 내어 불교용어 사전을 사러 갔던 것입니다.

 

     “무슨 책을 찾으십니까?”
    조금 깐깐하고 예리하게 생긴 중년의 주인이 서점을 들어서는 저를 보자마자 약간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불교용어사전』을 사러 왔습니다.”
그러자 너무나 잘 아는 책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구석진 곳으로 가서 검은색 표지의 두꺼운 사전 한 권을 꺼내어 들고 제 앞에 가져다주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진열대 위에 펼쳐 놓고 이리저리 뒤적이며 잠시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서점 주인이 말을 건네어 왔습니다.
     “왜 그 책을 찾으십니까?”
    “아, 예…. 함께 공부하는 분들이 金剛經을 강의해 달라 하셔서 미리 책을 한 번 읽어보니,

     모르는 용어들이 많이 나와서요.”

 

    그런데 갑자기 서점 주인이 약간 짜증 섞인 투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불교용어도 모르면서 어떻게 金剛經을 강의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조금 느닷없어 하면서도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대답했습니다.
“말의 뜻은 반드시 말을 통해서만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이나 용어는 몰라도 그것이 가리키는 참뜻은 언어나 문자를 통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 대사가 일자무식꾼이었으면서도 어느 선비의 글 읽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한 瞬間 문득 깨달음을 얻었듯이 말입니다…….”

 

저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서점 주인이 이번엔 화를 버럭 내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내, 당신 같이 말하는 사람들 많이 봤어! 뭐 하나 알았다 싶으면 금세 남을 가르치려 드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돼먹지 않은……!” 서점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멱살을 잡을 듯한 기세였습니다. 저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는 가만히 책을 덮고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서점을 나왔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분의 소개로 ‘아봐타코스’라는 자기개발 프로그램의 마스터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요즘에는 어떤 강의를 하십니까?”
    “『중용(中庸)』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의자를 당겨 앉으며 말했습니다.
    “그래요? 요즘 제가 무척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中)’이라는 것인데, 선생님이 마침 

   『중용』을 강의하고 계신다니 잘 되었습니다. 하나 물어보십시다. ‘中’이 무엇입니까?”

 

“‘中’이란 이 쪽도 아니요 저 쪽도 아니며 그렇다고 가운데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을 달리 表現하면, 이 쪽도 ‘中’이요 저 쪽도 ‘中’이며 가운데도 ‘中’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곳이 ‘中’이요 온갖 것이 다 ‘中’이라는 말이지요.”  그러자 그 분은 조금 뜻밖이라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것 참 묘한 말이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다시 俗世로 내려오는 길에 맨 처음 마주친 수행자가 있었습니다. 그 수행자는 산길을 내려오는 석가모니가 비록 모습은 초췌했지만 뭔가 범상치 않은 사람임을 느끼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보아하니, 공부를 좀 하신 분 같습니다. 스승이 누구십니까?”

 

 

석가모니는 그윽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나는 일체지자(一切知者, 모든 것을 아는 자)요 일체승자(一切勝者, 모든 것을 이긴 자)일 뿐 스승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수행자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듯 석가모니를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고는 그만 지나쳐 가버립니다. 말하자면, 그는 ‘스승이 없이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부처[佛陀, Buddha, 진리를 깨달은 사람]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승찬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54.
    究竟窮極 不存軌則
    구경궁극 부존궤칙
    마지막 끝까지 결코 格式을 두지 말라.
 
구경(究竟)이나 궁극(窮極)은 같은 뜻으로 쓰였는데, ‘끝까지’, ‘끝내’라는 말입니다. 궤칙(軌則)은 법칙(法則) 혹은 격식(格式)을 말합니다. 마지막 끝까지 格式을 두지 말라는 것은 어떤 틀 관념도 만들지 말라,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고 定하지 말라, 상(相) 혹은 觀念을 만들지 말라, 어떤 見解도 가지지 말라, 어디에도 머물지 말라 등의 뜻입니다. 승찬 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도(道)나 眞理 혹은 깨달음은 결코 “이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眞理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거나 “眞理를 얻기 위해서는 오직 이 길밖에 없다.”라거나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格式을 만드는 것이고 軌則을 세우는 것일 뿐 眞理와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金剛經五家解(금강경오가해)』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佛不在色聲 亦不離色聲 불부재색성 역불리색성
    卽色聲求佛 亦不得見    즉색성구불 역부득견
    離色聲求佛 亦不得見    이색성구불 역부득견
 
    부처는 색과 소리에 있지 않고 또한 색과 소리를 떠나 있지도 않다.
    색과 소리를 따라서 부처를 구해도 또한 얻을 수 없고
    색과 소리를 떠나서 부처를 구해도 또한 얻을 수 없다.
 
즉, 眞理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길 없는 길’이라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길’은 없는데 분명히 도달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이 瞬間 이미 到達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요?

 

 
    55.
    契心平等 所作俱息
    계심평등 소작구식
    마음에 계합하면 평등하게 되어 하는 일이 모두 쉬어진다.
 

계합(契合)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서로 조금도 틀림이 없이 꼭 들어맞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계합하면’이라는 말은 곧 ‘지금 이 瞬間 내 안에서 올라오는 이 마음과 하나가 되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가 되어 每 瞬間 있는 그대로 存在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道요 깨달음 眞理라는 것입니다.

마조 스님이 “此心卽佛(차심즉불, 이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말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울할 때 우울할 뿐 그것 以外에 다른 것을 願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道요, 외로울 때 그냥 그 외로움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며, 초라할 때 그 초라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냥 그 초라함으로 存在하는 것이 바로 眞理요 또한 完全한 自由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每日 每 瞬間의 이 日常 속에서 經驗하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온갖 感情 느낌 生覺들이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요 ‘眞理의 마음’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따로 찾을 것이 없고 求할 것이 없으며 얻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이대로이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이미 到達해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 瞬間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마음에 契合하면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일 뿐 本來 다른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취사간택(取捨揀擇)하는 마음이 永遠히 사라지게 됩니다. 비로소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모든 생각 마음 의식

느낌 감정들에 대해 平等하게 되어 삶이 참 가벼워지고 즐거워지게 됩니다. 自己 自身과의 싸움도 끝이 나서

마음이 참 平和롭고 고요해지며, 어디를 가고 어느 瞬間에 있든 흔들리지 않는 마음 ― 흔들리는 것도 내 마음이요 흔들리지 않는 것도 내 마음이라는 自覺에서 비롯된 무분별(無分別) 혹은 무간택(無揀擇)의 마음―으로 眞正 기뻐하며 感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56.
    狐疑盡淨 正信調直
    호의진정 정신조직
    여우같은 의심이 깨끗이 사라지면 올바른 믿음이 알맞고 바르게 된다.
 
과연 이것이 全部일까?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이 하찮은 日常이 어떻게 불법(佛法)일 수 있는가? 늘 흔들리는 이것이 정녕 부동(不動)이라는 말인가? 웃고 울고 슬퍼하고 기뻐하며 우울해하고 긴장하고 硬直되며 不安하고 쩔쩔 매기도 하는 이것이 어떻게 完全한 自由이며 眞理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生覺하며 ‘그 以上의 것’을 찾고 求하는 마음이 바로 ‘여우같은 疑心’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라고도 말합니다만, 우리는 그렇듯 ‘지금’을 믿지 못하는 바로 그 마음으로 因해 있는 그대로의 自己 自身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그것 하나가 깨끗이 사라질 때 우리 안에는 비로소 올바른 믿음[正信]이 서게 됩니다. 同時에 우리 안팎의 모든 삶이 소생(蘇生)하게 되어 眞實로 自由롭고 幸福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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