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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桓檀古記) 5 - 태백일사 1

장백산-1 2015. 1. 13. 21:53

 

 

 

 

환단고기 (桓檀古記) 5 - 태백일사 1  | 역사 사료

솔롱고 |2013.09.08. 22:12

태백일사(太白逸史)

- 이맥(李陌) 지음 -

 

삼신오제본기

三神五帝本紀

 

表訓天詞云大始上下四方曾未見暗黑古往今來只一光明矣自上界却有三神卽一上帝主體則爲一神非各有神也作用

則三神也三神有引出萬物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不見其形體而坐於最上上之天所居千萬億土恒時大放光明大發神玅

大降吉祥呵氣於包萬有射熱以滋物種行神以理世務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대시(태초)에 위․아래․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三神)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上帝)시라.

주체는 곧 일신(一神)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 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千萬億土)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祥瑞)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시어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未有氣而始生水使太水居北方司命尙黑未有機而始生火使太火居南方司命尙赤未有質而始生木使太木居東方司命

尙靑未有形而始生金使太金居西方司命尙白未有體而始生土使太土居中方司命尙黃

 

아직 기(氣) 있기 前먼저 물을 낳게 하여 태수(太水)로 하여금 북방에 있으면서 사명(司命)으로서 검은色

관장케 하시고, 아직 기(機) 있기 전에 먼저 불을 낳게 하여 화(太火)로 하여금 남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붉은色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질(質)도 있기 전에 먼저 나무낳으시더니 태목(太木)으로 하여금 동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푸른色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형(形)이 있기에 앞서 먼저 금을 낳아 태금(太金)으로

하여금 서방에 있으면서 白色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체(體)도 생기기 전에 먼저 흙을 낳더니 태토(太土)로

하여금 중앙에 있으면서 노란色을 관장케 하니라.

 

於是遍在天下者主五帝司命是爲天下大將軍也遍在地下者主五靈成効是爲地下女將軍也

 

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오제(五帝)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를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이라 한다.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五靈)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를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한다.

 

稽夫三神曰天一日地一日太一天一主造化地一主敎化太一主治化

 

생각컨대 저 삼신을 천일(天一)이라 하고 지일(地一)이라 하고 태일(太一)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造化)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敎化)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治化)를 주관하느니라.

 

稽夫五帝曰黑帝曰赤帝曰靑帝曰白帝曰黃帝黑帝主肅殺赤帝主光熱靑帝主生養白帝主成熱黃帝主和調稽夫五靈

曰太水曰太火曰太木曰太金曰太土太水主榮潤太火主鎔煎太木主營築太金主裁斷太土主稼種

 

생각컨대 오제(五帝)는 흑제(黑帝). 적제(赤帝). 청제(靑帝). 백제(白帝). 황제(黃帝)를 말하나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낳아 기름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를 주관한다. 또 생각컨대 오령(五靈)은 태수(太水). 태화(太火). 태목(太木). 태금(太金). 태토(太土)라

하나니, 태토는 크고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於是三神乃督五帝命各顯厥弘通五靈啓成厥化育日行爲晝月行爲夜候測星曆寒署紀年 漁區出船以守海

農區出乘以守陸

 

이에 삼신(三神)은 곧 오제(五帝)를 감독하고 명령하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오령(五靈)으로 하여

기르이루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대를 기록케 하니라.(고기잡이는 배 띄워 다를 지키고, 농사에는 수레를 내어 땅을 지키니라.)

 

大矣哉三神一體之爲庶物原理而庶物原理之爲德爲慧爲力也巍湯乎充塞于世玄玅乎不可思議之爲運行也

 

도다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만물<庶物>의 원리 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然庶物各有數而數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理而理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力而力未必盡厥庶物也庶物各有無

窮而無窮未必盡厥庶物也住世爲生歸天爲死死也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有死必有生有生必有名有名必有言有言

必有行也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庶物>의 수(數)를 가졌으나 수(數)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理>를 가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힘<力>을 가졌으나

힘<力>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

무궁함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면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譬諸生木有根必有苗有苗必有花有花必有實有實必有用也譬諸日行有暗必有明有明必有觀有觀必有作有作必有功

也則凡天下一切物有若開闢而存有若進化而在有若循環而有

 

이를 산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가 있으반드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으며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나니라. 이를 또 태양의 움직임에 비유컨대, 어둠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살핌<觀>이 있고, 살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고,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룸<功>이 있나니 대저 천하일체의 물건은 개벽을 쫓음으로써 존재하고, 진화를 닮는 일 있음

으로써 존재하며, 순환에 닮음 있음으로써 존재하느니라.

 

惟元之氣至玅之神自有執一含三之充實光輝者處之則存感之則應其來也未有始焉者也其往也未有終焉者也通於一

而未形成於萬而未有

 

유원(惟元)의 기(氣)와 지묘(至妙)의 신(神)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 곳에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 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에 통하여 만 가지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大辯經曰惟天一神冥冥在上乃以三大三圓三一之爲靈符者大降降于萬萬世之萬萬民一切惟三神所造

 

《대변경》에서 말한다.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三大)와 삼원(三圓)삼일(三一)을 가지고 이를

영부(靈符)로 하여 크게 내리시사<大降>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체는 오로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니라.

 

心氣身必須相信未必永劫相守靈智意三識卽爲靈覺生三魂赤因其素以能衍形年魂

 

심(心)․기(氣)․신(身)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반드시 영원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영(靈)․지(智)․의(意) 삼식(三識)은 곧 영(靈)․각(覺)․생(生)의 삼혼(三魂)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라

형(形)․년(年)․혼(魂)을 넘치게 하느니라.

 

嘗與境有所感息觸者而眞妄相引三途乃岐故曰有眞而生有妄而滅於是人物之生均是一其眞源性命精爲三關關爲

守神之要會性不離命命不離性精在其

 

일찍이 境界에 따라서 느끼고(感), 숨쉬고(息), 접촉함(觸)이 있으니, 참됨(眞)과 망령됨(妄)은 서로 삼도(三途)

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도다. 때문에 이르기를 참 있음으로써 살고, 망 있음으로써 멸하니라고 했느니라.

이에 사람과 사물의 생겨남은 다같이 그 참된 근원을 <하나(一)>로 하느니라. 성(性)․명(命)․정(精)을 삼관

(三關)이라 하나니 관(關)수신(修身)의 요회(要會)라 하느니라.

성(性)은 명(命)을 떠나지 않고, 명(命)은 성(性)을 떠나지 않나니, 정(精)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心氣身爲三房房爲成化之根源氣不離心心不離氣身在其中

 

심(心)․기(氣)․신(身)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이라 한다.

기(氣)는 심(心)을 떠나지 않으며, 심(心)은 기(氣)를 떠나지 않나니, 신(身)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感息觸爲三門門爲行途之常法感不離息息不離感觸在其中

 

감(感)․식(息)․촉(觸)을 삼문(三門)이라 한다. 문을 행도(行途)의 상법(常法)이라 한다. 감(感)은 식(息)을

떠나지 않으며, 식(息)은 감(感)을 떠나지 않으며, 촉(觸)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性爲眞理之元關心爲眞神之玄房感爲眞應之玅門究理自性眞機大發存神求心眞身大現化應相感眞業大成

 

성(性)을 진리(眞理)의 원관(元關)이라 하고, 심(心)은 진신(眞神)의 현방(玄房)으로 하고, 감(感)을 진응(眞應)

의 묘문(妙門)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性)에 의해 진기(眞機)를 크게 발하나니, 신(身)을 분명히 하고

심(心)을 구한다면 진신(眞神)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所驗有時所境有空人在其間庶物之有虛粗同體者惟一氣而己惟三神而己有不可窮之數有不可避之理有不可抗之

力有或善不善報諸永劫有或善不善報諸自然有或善不善報諸子孫

 

조짐에는 때가 있고 만남에는 장소가 있으나 사람은 빔(虛)과 참(粗)이 사이에 있느니라.

만물은 이에 있는 바, 동체인 것은 일기(一氣)뿐으로, 다만 삼신(三神)뿐이니라. 추궁치 말아야 할 이치가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할 도리가 있으며, 거스르지 말아야 할 기능이 있나니,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겁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자연에 보답하고, 혹은 선(善)․불선(不善)이 있어 이

자손에 보답하느니라.

 

經云人物同受三眞惟衆迷地三妄着根眞妄對作三途父道法天眞一无僞師道法地勸一无怠君道法人協一无違

 

경(經)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三眞)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리고,

진(眞)과 망(妄)이 어울려 삼도(三途)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高麗八觀記三神設云上界主神其號曰天一主造化有絶對至高之權能無形而形使萬物各通其性是爲淸眞大之體也

 

《고려팔관기》에 삼신설(三神說)이 있나니, 가로대「상계(上界)의 주신은 그 호를 천일(天一)이라 하나니,

조화(造化)를 주관하시며 절대지고의 권능을 갖고 계신다. 무형으로써 형을 삼으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性)을 통하게 하시느니라. 이를 청진대(淸眞大)의 체(體)라 한다.

 

下界主神其號曰地一主敎化有至善惟一之法力無爲而作使萬物各知其命是爲善聖大之體也

 

하계(下界)주신은 그 호를 지일(地一)이라 한다. 교화(敎化)를 주관하며 지선유일(至善唯一)의 법력이 있어

하는 없이 만들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명(命)을 알게 하니, 이를 선성대(善聖大)의 체(體)라고 한다.

 

中界主神其號曰太一主治化有最高無上之德量無言而化使萬物各保其精是爲美能大之體也然主體則爲一上帝非

各有神也作用則三神也

 

중계(中界)의 주신은 그 호를 태일(太一)이라 한다. 치화(治化)를 주관하며 최고무상의 덕량(德量)을 가지고

말없으면서 교화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정(精)을 보전하게 하니, 이를 미능대(美能大)의 체(體)라 한다.

 

故桓仁氏承一變爲七二變爲六之運專用父道而注天下天下化之神市氏承天一生水地二生火之位專用師道而率天

下天下効之王儉氏承徑一周三徑一匝四之機專用王道而治天下天下從之

 

한인씨(桓因氏)는 한 번 변화하여 칠(七)이 되며, 두 번 변하여 육(六)이 되는 운을 받아 오로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 천하가 이에 교화된다. 신시씨(神市氏)는 천일(天一)의 생수(生水)와 지이(地二)의

생화(生火)의 자리를 계승하여 오로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씨(王儉氏)는 지름이 둘레를 한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機)를 받아 오로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

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五帝設云北方司命曰太水其帝曰黑其號曰玄玅眞元其佐曰桓仁在蘇留天是爲大吉祥也東方司命曰太木其帝曰靑

其號曰同仁好生其佐曰大雄在太平天是爲大光明也南方司命曰太火其帝曰赤其號曰盛光普明其佐曰庖犧在元精

天是爲大安定也西方司命曰太金其帝曰白其號曰淸淨堅虛其佐曰治尤在鉤和天是爲大嘉利也中方司命曰太土其

帝曰黃其號曰中常悠久其佐曰王儉在安德天是爲大豫樂也

 

《오제설(五帝說)》에서 말한다.

「북방의 사명(司命)을 태수(太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흑(黑)이니 그 호를 현묘진원(玄妙眞元)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한인(桓仁)이라 하고 소류(蘇留)의 하늘에 계시며, 이를 대길상(大吉祥)이라 한다.

동방의 사명을 태목(太木)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청(淸)이니 그 호를 동인호생(同仁好生)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대웅(大雄)이라 하며 태평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광명(大光明)이라 한다. 남방의 사명을 태화(太火)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적(赤)이니 그의 호를 성광보명(盛光普命)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포희(庖犧)라 하고 원정

(元精)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안정(大安定)이라 한다. 서방의 사명을 태금(太金)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白)이니 그의 호를 청정견허(淸淨堅虛)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치우(治尤)라 하고 구화(鉤和)

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大喜利)라 한다. 중방의 사명은 태토(太土)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황(黃)이니

그의 호를 중상유구(中常悠久)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왕검이라 하며 안덕(安德)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예락(大豫樂)이라 하느니라.」

 

五帝注曰五方各有司命在天曰帝在地曰大將軍督察五方者爲天下大將軍督察地下者爲地下女將軍也龍王玄龜主善

惡朱鵲赤熛主命靑龍靈山主穀白虎兵神主刑黃熊女神主病

 

《오제(五帝)의 주(注)》에 말한다.

「오방(五方)에 각기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帝)라 하고 땅에서는 대장군(大將軍)이라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천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龍王玄龜)는 선악을 주관하며, 주작적표(朱雀赤熛)는 목숨을 주관하며, 청룡령산(靑龍靈山)은 곡식

주관하며, 백호병신(白虎兵神)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여신(黃熊女神)은 병을 주관한다.」

 

三神山爲天下之根山以三神名者蓋自上世以來咸信三神降遊於此化宣三界三百六十萬之大周天其體不生不滅其用

無窮無限其檢理有時有境神之至微至顯神之如意自在終不可得以知也其迎也僾然而如有見其獻也愾然而如有聞其

讚也欣然而如有賜其誓也肅然而如有得其送也恍然而如有慊是爲萬世人民之所以認識追仰於順和信悅之域者也

 

삼신산(三神山)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 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닐으시고 삼계(三界)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 360만의 큰 둘레의 하늘은 그 체(體)가 불생불멸

이시며 그 용(用)이 무궁무근이나, 그의 법식과 이치는 때가 있으며 장소가 있으니 신의 지극히 자상하고

지극히 현명하여 여의자재(如意自在) 하심은 끝내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를 맞이함에는 흡사 눈앞에 보이는

듯이 하고, 그 바치는 일은 문득 들리는 바 있는 것 같이 하고, 그 찬탄함에는 기꺼이 하사 받음이 있는 듯이

하고, 그 서약함에는 숙연하여 얻는 것이 있는 듯 하며, 물건을 바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바침이니,

이렇게 만세인민이 인식추앙(認識追仰)하여 모두가 다 기쁘게 믿는 것이다.

 

三神惑說有以三爲新新爲白神爲高高爲頭故亦稱白頭山又云蓋馬奚摩離之轉音古語謂白爲奚謂頭爲摩離也白頭

山之名亦起於是矣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삼(三)은 신(新)이 되고 신(新)은 또 백(白)으로 되며, 백(白)은 신(神)이 되고 신(神)은

고(高)가 되고 고(高)는 바로 두(頭)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개마(蓋馬)는 해마리(奚摩離)의 전음(轉音)이다.」라고 했다. 고어에는 흰 것을 해(奚)라 하고

두(頭)를 마리(摩離)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에서 생긴 것이다.

 

人類之祖曰那般初與阿曼相偶之處曰阿耳斯它亦稱斯它麗阿也日夢得神啓而自成昏禮明水告天而環飮山南朱鵲來

喜水北神龜呈瑞谷西白虎守嵎溪東蒼龍升空中有黃熊居之天海金岳三危太白本屬九桓而蓋九皇六十四民皆其後也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한다. 처음 아만(阿曼)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사타(阿耳斯它)라 한다.

또 사타려아(斯它麗阿)라고도 한다. 어느 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에 알린 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山南)의 주작(朱雀)이 날아와서 즐기고, 수북(水北)의 신구(神龜)

가 상서(祥瑞)를 나타내고, 곡서(谷西)엔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키고, 계동(溪東)엔 창룡(蒼龍)이 하늘로 승천

하고, 가운데 황웅(黃熊)이 있었다.

천해(天海)․금악(金岳)․삼위(三危)․태백(太白)은 본디 구한(九桓))에 속한 것이며 9황(皇)의 64민(民)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然一山一水各爲一國群女群男亦相分境從境而殊國別積久創世條序後無得究也久而後有帝桓仁者出爲國人所愛

戴曰安巴堅亦稱居發桓也蓋所謂安巴也堅乃繼天立父之名也所謂居發桓天地人定一之號也自是桓仁兄弟九人分

國而治是爲九皇六十四民也

 

그러나 일산일수(一山一水)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 한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條序)의 뒤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桓仁)이란 분나타나셔서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하고 거발한(居發桓)이라고도 하였다. 이른바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이고, 거발한이라 함은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호칭이다. 이로부터 한인(桓仁)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皇) 64민(民)이라 한다.

 

竊想三神生天造物桓仁敎人立義自是子孫相傳玄玅得道光明理世旣有天地人三極大圓一之爲庶物原義則天下九

桓之禮樂豈不在於三神古祭之俗乎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사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道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天)․지(地)․인(人) 삼극(三極)은 있었고, 대원일(大圓一)은 이것이 萬物의 原理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九桓))의 예악(禮樂)이 어찌 삼신고제(三神古帝)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傳曰三神之後稱爲桓國桓國天帝所居之邦又曰三神在桓國之先那般死爲三神夫三神者永久生命之根本也故曰人

物同出於三神以三神爲一源之祖也

 

전(傳)에서 말한다.

「삼신의 후(後)를 일러 한국(桓國)이라 하니 桓國은 天帝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되,「삼신은 한국의 선대(先代)에 있었고 나반(那般)이 죽어 삼신(三神)이 되셨으

그 三神이라 함은 永久生命의 根本이라.」고 하였으니,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 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桓仁亦代三神爲桓國天帝後稱那般爲大先天桓仁爲大中天桓仁與桓雄治尤爲三皇桓雄稱大雄天治尤爲智偉天乃

黃帝中經之所由作也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大先)의 천(天)이라 하고, 한인을 대중

(大中)의 천(天)이라 하고, 한인․한웅․치우를 삼황(三)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大雄)의 천(天)이라 하고,

치우(蚩尤)를 지위(智偉)의 천(天)이라 한다. 곧《황제중경》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三光五氣皆在視廳感覺而世級日進攢火焉發語焉造字焉優勝劣敗之相競始乎起耳熊族之中有檀國最盛

 

삼광오기(三光五氣)가 모두 시청 감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

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雄族) 가운데 단국(檀國)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王儉亦自天而降來御于不咸之山國人共立爲檀君是謂檀君王儉也生而至神兼聖圓滿統合九桓三韓管境復神市舊

規天下大治擧世視同天神自是崇報之禮永世不替者也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서 구한(九桓))의 삼한관경(三韓管境)을 모

통합하였다. 신시(神市)의 옛 규칙을 회복하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 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崇報)의 예(禮)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게 되었다.

 

蓋九桓之族分爲五種以皮膚色貌爲別也皆其俗就實究理策事而求其是則同也夫餘爲俗水旱兵疾國王有責忠邪存

亡匹夫同歸是其一證也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깔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色族如黃部之人皮膚稍黃鼻不隆頰高髮黎眼平靑黑白部之人皮膚晢頰高鼻隆髮如灰赤部之人皮膚銹銅色鼻低而端廣顙後傾髮捲縮貌類黃部之人藍部之人一云風族又棕色種其皮膚暗褐色貌猶黃部之人也

 

색족(色族)은 어떤 것일까? 황부인(黃部人)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

오고 머리털은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白部人)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

은 회색이며, 적부인(赤部人)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

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藍部人)은 풍족(風族)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깔의 인종

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

 

三韓古俗皆十月上旬國中大會築圓壇而祭天祭地則方丘祭先則角木山像雄常皆其遺法也祭天韓必自祭其禮甚盛可

知也是日遠近男女皆以所産薦供鼓吹百戲是俱衆小諸國皆來獻方物珍寶環積邱山蓋爲民祈禳乃所以繁殖管境而蘇

塗祭天乃九黎敎化之源也自是責禍善隣有無相資文明成治開化平等四海之內莫不崇飾祀典者也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땅에 제사지냄을 방구(方丘)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지냄은 각목(角木)이라 하나니, 산웅상(雄常)의

상(像)을 만듦은 모두 그 유법(遺法)이다.

하늘에 제사지냄에 있어서 반드시 한(韓)(임금)이 몸소 제 지내니 그 예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멀리 가까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산한 것을 바치고는 북 치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기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인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관경(管境)번식케 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蘇塗)의 제천(祭天)

은 구려(九黎)를 교화하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힘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祝兒之生曰三神祝禾之熱曰業山爲群生通力之所業爲生産作業之神故亦稱業主嘉利發願岱土曰土主大監發願家

宅曰成造大君亦歲成嘉福之神也墓園漁獵戰陣出行皆有祭祭必擇齋以利成也蘇塗之立皆有戒忠孝信勇仁五常之

道也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三神)이라 하고 벼가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業)이라 하였다.

산(山)을 군생통력(群生通力)의 장소라 하고 업(業)을 생산작업의 신(神)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도 한다. 집터에 발원하면 토주대감(土主大監)이라 하고 집에 발원하면

성조대군(成造大君)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이루는 신이다.

묘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 때, 길을 떠날 때, 모두 각각 제(祭)가 있으니 제(祭)는 반드시 날짜

를 골라 재(齋)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라.

 

蘇塗之側必立扃堂使未婚子弟講習事物蓋讀書習射馳馬禮節歌樂拳搏並術釗六藝之類也

 

소도(蘇塗)가 서면 언제나 계(戒)가 있나니 바로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오상(五常)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扃堂)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사내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히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 가지

기예를 말한다.

 

諸邑落皆自設三老三老亦曰三師有賢德者有財施者有識事者皆師事之是也又有六正乃賢佐忠臣良將勇卒明師德友

是也又殺生有法上自國王下至庶民須自擇時與物而行之一不濫殺自古夫餘有馬不乘禁殺放生者亦其義也故不殺宿

不殺卵是擇時也不殺幼不殺益是擇物也重物之義可謂至矣

 

모든 부락에서는 스스로 삼로(三老)를 모셨으니, 삼로는 또 삼사(三師)라고도 한다. 어진 덕을 갖춘 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 자, 지혜를 갖춘 자가 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사사함이 이와 같다.

또 육정(六正)이 있는바 곧 현좌(賢佐), 충신(忠臣), 양장(良將), 용졸(勇卒), 명사(名師), 덕우(德友)가 그들

이니라. 또 살생에 법이 있으니, 위론 국왕으로부터 밑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스스로 때와 물건을

가려서 했다. 그리하여 살생을 함에 있어 첫째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나니, 옛부터 부여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깃든 짐승은 죽이지 않으며 알을 품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그 번식할 때를 가려서 죽이지

않기 때문이라.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림은 그 짐승의 종류를 가림이라.

물건을 중하게 여김이 이처럼 지극했다 할 것이니라.

 

源花稱女郞男曰花郞又云天王郞自上命賜鳥羽冠加冠有儀注時封大樹爲桓雄神像而拜之神樹俗謂之雄常常謂常

在也

 

원화(源花)는 여랑(女郞)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花郞)이라 하며 또 천왕랑(天王郞)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는다. 모자를 쓰는 데에도 의식이 있다.

주해에 이르기를「때에 큰 나무를 모시어 한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라.

 

河伯是天河人那般之後也七月七日卽那般渡河之日也是日天神命龍王召河伯入龍宮使之主四海諸神天河一云天

海今曰北海是也

 

하백(河伯)은 천하(天河)의 사람으로 나반(那般)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나반이 강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게 명하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신을 주관케 하시느니라.

천하는 다른 이름으로 천해(天海)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北海)가 바로 그것이다.

 

天河注曰天道起於北極故天一生水是謂北水蓋北極水精子所居也

 

천하의 주에 가로되「천도(天道)는 북극(北極)에서 일어났다.

고로 천일(天一)의 물을 낸다. 이를 북수(北水)라 한다.」라고 했다. 대저 북극(北極)은 수정자(水精子)가 기거

하는 곳이다.

 

 

환국본기

桓國本紀

朝代記曰昔有桓仁降居天山主祭天神定命人民攝治群務野處而無蟲獸之害群行而無怨逆之患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적에 환인(桓因)이 계셨나니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천산(天山)에 사시면서 천신제사지내고, 백성에겐

목숨을 정하시고, 모든 일을 두루 다스리시니 들에는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 무리와 함께 행하시니

원한을 품거나 반역하는 일 또한 없어졌느니라.

 

親疎無別上下無等男女平權老少分役當此之世雖無法規號令自成和樂循理去其病而解其冤扶其傾而濟其弱一無憾

且怫異者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 하지도 않았고, 늙은이와 젊은이의 일을 구별했으니, 이 세상에 법규가 없었다 하지만 계통은

저절로 성립되고 순리대로 잘 조화 되었도다. (다른 해석) 질병을 없게 하고 원한을 풀며 어려운 자를 도와

일으키며 약자를 구제하니, 원망하고 일부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

 

時人皆自號爲桓以監群爲仁仁之爲言任也弘益濟人光明理世使之任其必仁也故五加衆交相選於大衆以必求業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호를 한(桓)이라 하고 감군(監羣)을 인(仁)이라 불렀다. 인(仁)이란 임(任)이란 말이니

널리 유익한 것으로 사람을 구제하고<弘益濟人> 세상을 이치대로 밝히는 것<光明理世 : 광명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은 이를 반드시 어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

때문에 오가(五加)의 무리가 서로 바꿔가면서 대중에게서 뽑힘은 반드시 업(業)을 구하기 때문이다.

 

故愛憎有別各以其所心主辨之而自擇其所求鵠惟在九桓爲公大同歸一焉者則亦當自較得失無一人異然後從之諸衆

亦不敢遽下獨術以處之蓋處衆之法無備有患有備無患必備豫自給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있음은 각각 마음먹는 바에 따르는 법이니, 그 마음을 잘 판단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

정곡선택하기 때문이라. 생각컨대 구한(九桓)에 사는 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모두 함께 하나뭉쳤던 것도

역시 마땅히 스스로 득실을 선택하매 한 사람도 딴 의견이 없었던 것이니, 그런 후라야 이에 따르게 됨이라.

여러 대중도 역시 감히 갑자기 한쪽으로 편향치 않으며 오직 꾀로써 이에 대처하느니라.

대저 무리에 대처하는 법은 무비(無備)면 유환(有患)이며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니라. 반드시 예비하고

자급할지니라.

 

善群能治萬里同聲不言化行於是萬方之民不期而來會者數萬衆自相環舞仍以推桓仁坐於桓花之下積石之上羅拜

之山呼聲溢歸者如市是爲人間最初之頭祖也

 

선군(善羣)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 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環舞)하며 저절로 한인을 추대하여

한화(桓花)가 피어난 돌무지 위에 앉으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하고 환호 소리 넘쳐흐르니 귀의하는

자가 성시를 이루었다.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三聖密記云波奈留山之下有桓仁氏之國天海以東之地亦稱波奈留國也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摠言桓國

分言則卑離國養雲國寇莫汗國勾茶川國一群國虞婁國一云畢那國客賢汗國勾牟額國賣勾餘國一云稷臼多國斯納

阿國鮮卑爾國一云豕韋國一云通古斯國須密爾國合十二國是也天海今曰北海

 

《삼성밀기(三聖密記)》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桓因)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天海)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桓國)이요, 갈라서 하면 곧 비리국(卑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또는 필나국

(畢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또는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

아국(斯納阿國), 선비이국(鮮椑爾國)(또는 시위국(豕韋國), 통고사국(通古斯國)이라 함.), 수밀이국(須密爾國)

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天海)는 지금의 북해(北海)라 한다.」

 

密記注曰蓋馬國一云熊心國在北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二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

北五百里稷臼多國或稱賣句餘國舊在五難河後爲瀆盧國所破遂移于金山居之勾茶國本艾蒜所産也艾煎服以治冷

蒜燒食以治魔也

 

《밀기(密記)》의 주(註)에서 말한다.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 하니 북개마(北蓋馬) 대령(大嶺)의 북쪽있으며 구다국(句茶國)

으로부터의 거리가 2백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 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백리에 있고, 직구다국(稷臼多國) 혹은 매구여국(賣句餘國)은 옛 오난하(五難河)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瀆盧國)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金山)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句茶國)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써 냉을 치료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朝代記曰昔有桓國衆富且庶焉初桓仁居于天山得道長生治身無病代天興化使人無兵人皆力作以勤自無飢寒也傳赫

胥桓仁古是利桓仁朱于襄桓仁釋提壬桓仁邱乙利桓仁至智爲利桓仁或曰檀因傳七世歷三千三百一年或曰六萬三千

一百八十二年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풍족하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람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근면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赫胥) 한인, 고시리(古是利) 한인, 주우양(朱于襄) 한인, 석제임(釋帝任) 한인, 구을리(邱乙利) 한인에 전

하여 지위리(智爲利) 한인이르니 혹은 지위리 한인은 단인(檀因)이라고도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다.」

 

桓國有五訓神市有五事所謂五訓者一曰誠信不僞二曰敬勤不怠三曰孝順不違四曰兼義不淫五曰謙和不鬪

所謂五事者牛加主穀馬加主命狗加主刑猪加主病羊加一作鷄加主善惡

 

「한국(桓國)에 오훈(五訓)이 있으며 신시(神市)엔 오사(五事)가 있나니, 이른바 오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 것,

둘째, 공경 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

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 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이른바 오사(五事)란 우가(牛加)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혹은 계가(鷄加)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이라.」

 

桓國注曰桓者全一也光明也全一爲三神之智能光明爲三神之實德乃宇宙萬物之所先也

 

한국의 주에서 말한다.

「한(桓)은 전일이며 광명이라.<全一也光明也> 전일(全一)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朝代記曰古俗崇尙光明以日爲神以天爲組萬方之民信之不相疑朝夕敬拜以爲恒式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太階者光明之所會三神之攸居人得光以作而無爲自化朝則齊登東山拜日始生夕則齊趨西川拜月始生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 산에 올라가 해가 처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녁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先是桓仁生而自知化育五物敷演五訓主治五事五加衆皆勤苦使至善修行開心光明作事吉祥住世快樂桓仁高御上

上天惟意懇切百途咸自和平時稱天帝化身而無敢叛者九桓之民咸率歸于一

 

이에 앞서 한인께서 태어나시어, 절로 다섯 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 가지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다섯 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오가의 무리는 모두 어려움을 참고 부지런하여 잘 배워 지닌 끝에 마음의 빛을 얻어 상서로운 일만들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었더라. 한인께선 높고 높은 하늘에 오르사 홀로 생각하시며 차분히 온갖 일을 다스리시니

모두 절로 화평하였다. 때에 천제로서 몸을 나타내시니 감히 따르지 않는 자 없어 구한(九桓)의 백성이 모

하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시본기

神市本紀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紀)에서 말한다.

「환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 자리를 가짐을 보시곧 고시례(高矢禮)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 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 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한웅천왕은 또 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出納獻替)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찍이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 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에 나갔는데

갑자기 튀는 한 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치고

말았다. 이에 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흐트러져 연결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하여 다시 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듣기로 <남해도(南海島)의 낭하리(郎河理) 계곡 및 경박호(鏡珀湖)의 선춘령(先春嶺)과 저 오소리

(烏蘇里)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

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 짐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

데도 불편하였다.

이에 우사(雨師) 왕금영(王錦營)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소․말․개․독수리․돼지․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雲師) 육약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治尤)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들 중 치우(蚩尤), 고시, 신지의 후손들<苗裔>이 가장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

(九冶)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刀戟)․대궁(大弓)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 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의 여러 족속들은 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夷)는 큰 것(大)으로부터, 활(弓)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춘추(春秋)》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戎狄)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 한웅께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밀하게 전제(剪除)의 뜻을 가졌다. 그때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츰 달라져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라 하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오로지 약탈만을 일삼았고 곰은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거부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번도 뜻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녀의 여왕(熊女之君)은 한웅에게 신덕(德)이 있다 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神戒之氓>이 되게 하시기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들이시고 아들을 낳하였다. 호랑이는 종내 깨우칠 수 없는

지라 이들을 사해로 쫓아 버렸다. 한족(桓族)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庶子部)에 한웅이라는 대인

(大人)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金岳)․삼위(三危)․태백(太白)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

한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業)은 이미 이루어진 듯 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서 하늘의 뜻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 사도(師道)를 세워서 세상을 이대로 교화(在世理化)하자손 만세의 큰 귀감이 되도록

할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은 신단(神壇)의 나무 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神市)라 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

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 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在世理化>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한다.

때에 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데 이웃하여 같이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기도하며 또 한웅에게 청하기

원컨대 변화하여 천계의 백성<天戒之氓>이 되게 하소서」라하였다. 한웅은 이에 신비한 주문을 외

환골이신(換骨移神) 하도록 하면서 신이 내리물건으로써 신령스러운 삶을 얻게 하였으니, 바로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라. 이에 경계할 바를 말하니,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 평등을 이루어 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

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곰과 호랑이의 양가는 모두 이를 얻어 이를 먹고 조심하기 3․7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추위․

아픔․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하고 한웅의 약속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

하고 조심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끝내 천업(天業)에 함께 할없었다.

이것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고집세고 어리석고 강정하여 저들과 더불어 혼인하는 자가 없었고, 항상 신단수 밑에

여럿이 모여 아기를 가져 낳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한웅은 임시로 화하여 한이 되어<假化爲桓> 관경

(管景)을 얻고 그와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松花江)

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朝鮮三韓)이라 하고리(高離),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의

옥저(沃沮), 동․북의 부여(夫餘), 예(濊)와 맥(貊)은 그의 관경이었다.」

 

신시(神市)의 세(世)에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이 있었다.

 

첫 회의 날엔 천신(天神)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月神)에 제사지내고,

3회 날에는 수신(水神)에 제하고,

4회 날에는 화신(火神)에 제 지내고,

5회 날에는 목신(木神)에 제하고,

6회 날에는 금신(金神)에 제지내고,

7회 날에는 토신(土神)에 제 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듦은 이에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

(甲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六癸)는 신시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癸)를 처음으로 시작한다.

계(癸)는 계(啓)요 해(亥)는 핵(核)이니, 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癸)를 소라(蘇羅)라하고, 갑(甲)을

청차이(淸且伊)라 하고, 을(乙)을 적강(赤剛)이라 하고, 병(丙)을 중림(仲林)이라 하고, 정(丁)을 해익(海弋)

이라 하고, 무(戊)를 중황(中黃)이라 하고, 기(己)를 열호수(烈好遂)라 하고, 경(庚)을 임수(林樹)라 하고,

신(辛)을 강진(强振)이라 하고, 임(壬)을 유부지(流不地)라 했다. 해(亥)를 지우리(支于離), 자(子)를 효양

(曉陽), 축(丑)을 가다(加多), 인(寅)을 만량(萬良), 묘(卯)를 신특백(新特白), 진(辰)을 밀다(密多), 사(巳)를

비돈(飛頓), 오(午)를 융비(隆飛), 미(未)를 순방(順方), 신(申)을 명조(明條), 유(酉)를 운두(雲頭), 술(戌)을

복(皆福)이라 한다.

 

신시(神市)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 산에는 길도 없고 못에는 배도 다리도 없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나무들과 풀들이 자란 곳에는 짐승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은 서로 어울렸고 새의

둥지에서까지 놀면서 서로 의지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셨으니 그 피와 고기를 항상 쓸 수 있었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에 편리한 대로 다 되었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백성은 살아도 일 같은 것을 모르고, 걸어다닌다 해도 특별한 목적지도 필요 없었으니, 길을 가되 한없이 편안

했고 사물을 보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담담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뒤이어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

하더니 소박한 것은 리 하게 되고, 절름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빈둥빈둥하는 이도 있게 되어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가는 자는 이랑을 다투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다투지 않고 이를 얻게 되면 장래에 궁핍을 면키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

참으로 이러했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

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

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일찍이 험상궂게 일그러질 날이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 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

것인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 번 전하여 태우의(太虞儀)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조식보정(調息保精)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長生久視)의 술(術)이다.

아들 열 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多儀發) 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太皥)라 하니 또는 복희씨(伏羲氏)

라고 한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 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祭天)

하고 괘도(卦圖)를 천하(天河)에서 얻으시니, 그 획(劃)은 세 번 끊기고 세 번 이어져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妙)가 있고 삼극(三極)을 포함하여 변화 무궁하였다.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雨師)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

에 옮겨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나란히 그 이름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佩)․관(觀)․임(任)․기(己)․포(庖)․이(理)․사(姒)․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羲族)의 옛 거처있다. 임(任)․숙(宿)․수(須)․구(句)․

수유(須臾)의 여러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大辯經)》에서 말한다.

「복희(伏羲)는 신시(神市)로부터 나와 우사(雨師)가 되었다. 신룡(神龍)의 변화를 보고 괘도(卦圖)를 그리

신시의 계해(癸亥)를 바꾸어 갑자(甲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女媧)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았다.

주양(周襄)은 옛 문자에 하여 처음으로 육서(六書)전했다.

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신농(神農)은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少皥)와 함께 모두

고시(高矢)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穀麻藥石)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楡罔)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백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어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 힘 또한 갖추지

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 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河朔)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楡罔)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 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

(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도개(釛鎧)․모극(矛戟)․대궁(大弓)․호시(楛矢)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

(?鹿)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 해 동안에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웅거하여 구야(九冶)로써 수금(水金)과 석금(石金)을

개발하여 예과(芮戈)와 옹호(雍狐)의 창을 만들어 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洋水)

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때에 유망은 소호(小昊)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

으로 도망치유망과 함께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관자(管子)》가 말하는 바의「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

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 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有熊)이라는 벌판에서 계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움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兗)의 회대(淮岱)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함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雲笈軒轅記)》라는 책에 <치우(蚩尤)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蚩尤天皇은 더욱더 군대의 힘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 바 10년 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

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뒤에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

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神市)를 본 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남(指南)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당(宗黨)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쳐서 헌원의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

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蚩尤飛)라 하는 자가 있어 불행하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었다.《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芮?)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淮岱)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 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광열(光烈)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금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 관향성

(關鄕城)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疋絳)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 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이르되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있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나니>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상서(尙書)》여형(呂刑)에서는「고훈(古訓)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氣)를 빼앗긴 탓」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訓)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계명

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顓頊)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神市開天)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王儉)은 감군(監羣)이

셨다. 웅씨의 비왕(椑王)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九域)을 통일하고 관경(管景)으로 삼한(三韓)

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檀君朝鮮)이라고 한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서쪽 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뒤에 갈고(葛古) 한웅이 있었는데,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천왕(慈烏智天王) 한웅에 이르렀다. 자오지 한웅은 귀신같은 용맹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九冶)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 함께 떠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蚩尤)라 하더라.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마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 차례 천병(天兵)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

하여 회대의 사이에 웅거했다. 헌원황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鹿)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

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吳)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高辛)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신시씨(神市氏)는 전(佺)으로써 계(戒)를 닦고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다. 이른바, 전(佺)이란

사람이 스스로 완전이라 여기는 바를 쫓아 능히 그 성품에 통하이로써 참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靑邱)씨는 선(仙)으로써 법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경(管境)을 가르친다.

선(仙)이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따라 명(命)을 알고 이로써 선(善)을 넓힘이다.

조선씨(朝鮮氏)는 종(倧)으로서 왕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화(禍)를 공동으로 책임지게 하였다.

이른바 종(倧)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라 여기는 바에 따라 능히 정신을 잘 지키고 이로써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佺)은(虛)하면서도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仙)은 밝음에 있으면서도 땅에 근본을 두며,

종(倧)은 건전하면서도 사람에 근본을 둔다.」

 

주(注)에서 말한다.

「한인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天)은 곧 큰 것이요, 하나이다. 한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하니 왕은 곧

황(皇)이며 제(帝)이니라.

단군(檀君)은 또한 천군(天君)이라 하니, 제사를 주재하는 우두머리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監羣)이며 관경

(管景)의 우두머리이다. 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한(桓)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檀)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구한(九桓)을 말하는 것이다. 한(韓)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三韓)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

(雲師)라 한다. 가(加)는 곧 가(家)이다. 오가(五加)를 하자면, 우가(牛加)는 곡식을 주관하며,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며,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는 선악을 주관한다고

다. 백성은 64종족이 있었고 무리는 3,000이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보낸 것을 개천(開天)이라 한다. 개천(開天)은 고로 능히 서물(庶物)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虛)와 같은 것이다. 인간세상을 구한다함을 개인(開人)이라 한다. 개인(開人)은 때문에 능히

인간 세상의 일을 순환시킨다. 이는 혼(魂)의 구연(俱衍)을 뜻한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개지(開地)라

한다. 개지(開地)는 때문에 능히 세상의 일들을 개화(開化)한다. 이는 지혜를 함께 닦음이라.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倍達天國)진산(鎭山)이라 한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산맥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써 능히

그와 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쪽에 치우쳐 압록강 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祖宗)을 곤륜산(崑崙山)이라 떠들어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小中華)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거늘. 그런데 동방의 뭇 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삼국유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天池)란 한웅씨가 구름 타고 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찍이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 즉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위서(魏書)》의 물길전(勿吉傳)에「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라고 했는데 위(魏)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고 했다. 범․표범․곰․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고 길을 가는 이마다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 가지고 가게 되니, 이는 아마도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 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神州興王)의 영지(靈地)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蘇塗祭天)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경(崇敬)도 역시 이 산

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神)의 교화로 목욕하듯 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찍이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 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은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桓檀) 한 줄기의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 자 없으며, 신시에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傳誦)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의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神風)과

성속(聖俗)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 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神聖理化)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신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명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 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

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燕)나라 제(齊)나라의 바다 위에 괴상도사의 얘기도 나왔다.

대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

하다는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삼신산은 봉래(蓬萊) 방장

(方丈) 영주산(瀛州山)으로 발해 바다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쪽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뿐 보이는 것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 개의 섬에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箂徑)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閣)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洲島)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솟는 곳이라.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上帝)인 것이다.

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金剛)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

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漢拏)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封禪書)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찍이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仙人) 및 죽지 않는 약은 그곳에 있다 하며, 그곳의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

황금과 백은(白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仙家書)》엔 가로대「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

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 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괄지지(括地志)》가

말하는 바「새․짐승․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되돌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

,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녀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두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시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삼신의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서 말한다.

「제(齊)의 풍속에 8신(神)의 제(祭)가 있다. 8신(神)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陽主), 음주

(陰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천(天)은 음(陰)을 좋아한다. 고로 천(天)을 제사함

에는 반드시 높은 산의 밑인 작산 위에서 한다. 곧 하늘을 태백산 기슭에서 제사 지내는 유법인 것이다.

땅은 양(陽)을 좋아한다. 그래서 땅에 제사지낼 땐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지냄은 역시 곧

천(天)을 참성단(塹城壇)에서 제를 지내던 습성이라 할 것이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三神은 天地萬物의 祖上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

(武神)으로서 용강(勇强)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의 조종(祖宗)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모든 귀신들을 부른다.

이로써 태시(太始)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가 되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奄)․람(藍)․양(陽)․개(介)․우(隅)․래(萊)․서(徐)․회(淮)의 8족(族)이 자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8신(神)의 설은 8족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번성하던 설이 되었다.

 

유방(劉邦)은 동이(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豊沛)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흔고(釁鼓)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월에 패상(灞上)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

하고 즉위하여 한왕(漢王)이 되었던 바 이로 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東皇太一)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

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하기 이와 같았다.

 

진나라의《천문지(天文誌)》는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

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통지(通志)》씨족략(氏族略)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倉頡)은 고신(高辛)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淮北)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

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연나라 제나라의 선비들이 신비하고 괴상스러운 소리에 탐닉한 지도 역시 오래 되었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산을 찾았으니, 진한 때의 송무기

(宋無忌)․정백교(正伯僑)․극상(克尙)․이문자고(羡門子高)는 최후의 무리로서 즉 연나라 사람들이요,

문성오리공(文成俉利公)․손경(孫卿)․신공(申公)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이다. 옛날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때문에 역시 성은 강(姜)이다. 대저 치우는 강수(姜水)에 살았다. 아들들을 모두 강씨라고

한 것이 아닐는지?

강태공(姜太公)은 제나라를 통치하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못(天帝池))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역시 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8신(神)의 풍속이 이 땅에 더욱 번성하였다.

후세엔 그 땅에 도술을 즐기는 자가 많이 배출되어 신선 사상과 도가의 사상을 섞어서 널리 퍼뜨리고 또 다듬

었으니, 바로 강태공이 이를 장려함이라. 일찍이《음부경(陰符經)》의 주를 만들어 자부삼황(紫府三皇)의 뜻을

조술하였다. 그런즉 연나라 제나라 선비들이 어찌 괴상스럽고 신비스런 말들을 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의 법과《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은 태자 부루(扶婁)로부터 나와서 우사공(虞司空)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주왕(紂王)에게 말했다함은 역시《황제중경》과 오행

치수설인 것이니, 대저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으로부터 전해진 법일지라.

 

《밀기(密記)》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지석(支石)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祭夕壇)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

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城壇)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天壇)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고 나무를 심어 토단

(土壇)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한다. 지금 승도(僧徒)들이 혼동하여 제석(帝釋)을 단이라 부르는 것은 곧

옛 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숨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三侍郞)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侍從郞)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觀雜記)》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業)이라 하고, 교화하복종하게 함을 주관하는

자를 랑(郞)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伯)이라 한다. 즉 옛날에 시작된 신도

(神道)이니 모두가 영(靈)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종 적중하기도 한다.

지금 혈구(穴口)에 삼랑성이 있는바, 성은 곧 삼랑이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던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大雄)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僧徒)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

혹은 말한다. 옛날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장사지낼 정놓은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

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 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버드나무․소나무․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중고시대(中古時代)

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크기․넓이․폭․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의 벽과 바깥쪽의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陵墓)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삼한관경 본기

三韓管境 本紀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雲師)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君)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로(長老)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工匠),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

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熊氏)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한웅 말기에 소전(少典)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웅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다른 지파<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

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 한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

에 책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자가 천 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椑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되,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했는,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馬韓世家) 상(上)

 

곰 무리과 범 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환(苗桓)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환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神市)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積)

을 하나로 하고, 음(陰)은 십거(十鋸)를 세우고 양(陽)은 무궤(無匱)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

<一積而陰立 十鋸而陽作 無匱而衷生>

봉황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환역(桓易)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부(天符)의

유의(遺意)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

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 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았다.

그 글에 가로되「일신(一神)은 충(衷)내리고 <一神降衷> 성(性)은 광명으로 통하니 <性通光明> 세상에 있으

면서 이치 따라 교화하여 <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한다<弘益人間>」고 했다. 이때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의 웅상(雄常)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

(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여 이를 징벌코자 하여 크게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

(大同府)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의 대인(大人)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되,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 뿐으만세를 위하고 공동

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自性求子 降在爾腦>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

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숨어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나를 위해서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되

 

道의 대원(大原)은 三神에서 나오나니 道란 道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道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道는 아닌 것입니다.

道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경우)에 따르는 것이이에 道의 귀함이 있는 것이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道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틀(機)은 내 마음의 기틀에서, 땅의 모양은 내 몸의 모양에서, 사물의 주관(宰)은 나의 기(氣)의 주관

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

인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물을 낳은 이치요, 性稟이 明에

通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불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서 교화를 폄은 마음다스림이니 바로

인삼(人三)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

라고 하니, 임금께서는「옳을시고 그 말씀이여!」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馬韓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되,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治亂)은 정치에 나타

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馬韓)은 글을 올려 가로되,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聖主)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無能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무오 B.C.2283)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을 혈구(穴口)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B.C.2280)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熊伯多)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盧德利 : 2대)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弗如來 : 3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부루 12년 임자(B.C.2229)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七回)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참고)

이듬해(계축년 B.C.2228)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B.C.2225)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우게 했다. 경신년(B.C.2221)에 도전(稻田)을 일구

고 기해년(B.C.2182)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다.

 

단군 가륵(3세, 기해년 B.C.2182~계미45년 2138) 제3년(신축 B.C.2180) 불여래(弗如來)가 죽고 아들

두라문(杜羅門 : 4대)이 즉위했다. 을사년(B.C.2176)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큰 근본은 내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어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를 성취할 수가 없으며,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기울어져 엎어지게 되나니, 임금님의 마음은 위태로워지고 뭇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질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잘 통찰하여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을 것이며, 이를 어기지 않은 후에야 마침내 한결 같음을 얻으

리라.

 

중심이 잡힌 한결같은 도<惟中惟一之道>란, 아비는 자애롭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롭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스럽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함이다.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배움을 닦고 업을 익히며, 지혜를 열고 능력을 드러내어 널리

유익케 하고, 서로 근면하여 스스로 이루되 만물을 열어 평등케 함이다.

천하를 맡음으로서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고 나라 법을 준수하며, 각기 그 맡은 바 직책을 다하고 부지런

함을 권장하여 산업을 보전함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시에는 몸을 던져 의(義)를 온전하게 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용감히 나아가 만세 무강한 복을 도움이다. 임금과 나라 사람 모두가 이를 적절히 새겨 변함없도록 할

것이로되, 모두가 완전하게 이루고자 하는 지극한 뜻이니 공경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두라문(杜羅門)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乙弗利 : 5대)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近于支 : 6대)

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을유년(B.C.2136)이다. 경인년(B.C.2131)에 장정 30인 파견

하여 선박을 수(薩水)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년(B.C.2109)에 (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 10월에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閱兵)하도록 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

조의(皂衣)를 하사하여 가관(加冠)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B.C.2107)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乙于支 : 7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弓戶 :

8대)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杜羅門)의 동생인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

 : 9대)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B.C.1993)단군 우서한(于西翰)은 백아강에 머무르

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區)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一乘)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魯乙)제임인년(B.C.1939)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阿火 : 10대)가 즉위

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道奚)가 바야흐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나라의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B.C.1864)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沙里 : 11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阿漢)의 을묘년(B.C.1806)

에는 사리가 죽었으니 동생 아리(阿里 : 12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古弗帝)의 을유년(B.C.1716)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曷智 : 13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代音帝)의 무신년(B.C.1633)에 갈지의 아들 을아(乙阿 : 14대)가 즉위하였다. 기유년(B.C.1632)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餘乙帝)의 신미년(B.C.1550)에 아들 두막해(豆莫奚 : 15대)가 즉위하였다.

임신년(B.C.1549)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外任)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B.C.1472)에 아들 독로(瀆盧 : 16대)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固忽帝)

의 경오년(B.C.1371) 아들 아루(阿婁 : 17대)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B.C.1323)에 동생 아라사

(阿羅斯 : 18대)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B.C.1286)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즉위(B.C.1285)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

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馬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馬韓)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버렸다. 전제(前帝)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

국보를 전하여 제(帝)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B.C.1285)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

고자 하는 자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 19대)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

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

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친히 다스리니 그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

이다. 삼한(三韓)이 모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

(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

조선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

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로되「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에 아들 아실(阿實 : 20대)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阿闍 : 21대)가 즉위했다. 기묘년(B.C.1122 ?)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19 ?) 아들 서여(胥餘)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31)에 아들 아화(阿火 : 22대)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병술년(B.C.995)에 동생

아사지(阿斯智 : 23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휴(摩休)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

(阿里遜 : 24대)이 즉위하였다. 아리이 죽으니 아들 소이(所伊 : 25대)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

(B.C.934)에 아들 사우(斯虞 : 26대)가 즉위했다. 무자년(B.C.933)에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B.C.737)에 아들 궁홀(弓忽 : 27대)이 즉위하더갑인년(B.C727)에 협야후(陜野侯)

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東杞 : 28대)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多勿)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

(多都)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아들 사라(斯羅 : 30대)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迦葉羅 : 31대)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加利 : 32대)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에 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

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B.C.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典那 :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

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 : 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孟男 :

35대)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王)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왕(秦王) 정(政)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芮)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회대(淮岱)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제요도당(帝堯陶唐)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虞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효제(孝悌)가 먼저이다.

9년 홍수를 당해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황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순임금과 약속하고 초청

하여 도산(塗)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司空)인 우(禹)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虞 : 舜)를 낭야성(琅耶城)에 두어서 이로써 구

분정(九黎分政)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서경(書經)》에서 말하는 바의「동순(東巡)하여 망제(望祭)를

마침내 동쪽의 왕<東后>을 찾아 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辰國)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

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巡狩)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렀다.

순(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朝覲)하네 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番韓)이라 하고 부(府)

를 험독(險瀆)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蚩頭男 : 1대)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

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겸직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B.C.2321)에 요중(遼中)에 열두 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險瀆)․영지(令支)․탕지(湯池)․용도․거용․

한성․평․대방․백제(百濟)․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琅邪 : 2대)가 즉위하였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可汗城)개축함으로써 예상

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B.C.2267)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 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四岳)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泰山)에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회(淮)와 대(岱) 지방의 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鋸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九黎)를 도산에 모으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虞貢)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禹貢)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B.C.2238)에 아들 물길(勿吉 : 3대)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B.C.2187)

아들 애친(愛親 : 4대)이 즉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道茂 : 5대)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B.C.2098)에 아들 호갑(虎甲 : 6대)이 즉위하였다.

정축년(B.C.2084)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계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達門)의 기축년(B.C.

2072)에 아들 오라(烏羅)가 즉위했다. 갑신년(B.C.2017)에 하나라왕 소강(小康)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B.C.2015)에 아들 이조(伊朝 : 8대)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阿述)

병인년(B.C.1975)동생 거세(居世 : 9대)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B.C.1960)에 아들 자오사(慈烏斯 :

10대)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B.C.1946)에 아들 산신(散新 : 11대)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B.C.1893)에 아들 계전(季佺 : 12대)이 즉위했다.

경인년(B.C.1891) 명을 받아 삼신의 단을 탕지산(湯地山)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安德鄕)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B.C.1864) 아들 백전(伯佺 : 13대)이 즉위했고,

백전이 죽은 뒤 을미년(B.C.1826)에 중제(仲弟) 중전(仲佺 : 14대)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B.C.1770)에

아들 소전(少佺 : 15대)이 즉위했다. 갑오년(B.C.1767)에 장군 치운(蚩雲)을 파견하여 탕(湯)을 도와 걸(桀)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B.C.1766)에 묵태(墨胎)를 파견하여 탕임금의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B.C.1727)에 아들 사엄(沙奄 : 1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棲韓 : 17대)

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B.C.1664)에 아들 물가(勿駕 : 18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

(B.C.1660)에 아들 막진(莫眞 : 19대)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B.C.1614)에 아들 진단(震丹 : 20대)

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太戊)가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B.C.1608)에 아들

감정(甘丁 : 21대)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蘇密 : 22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B.C.1588)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北亳)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何亶甲)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沙豆莫 : 23대)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죽으니 계부 갑비(甲飛 : 24대)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B.C.1441)에 아들 오립루(烏立婁 : 2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徐市 : 26대)

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B.C.1393)에 아들 안시(安市 : 27대)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奚牟羅 : 28대)가 즉위(B.C.1352)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素胎) 5년(B.C.1333)

우사(雨師)의 소정(小丁 : 29대)을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高登)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

뛰어났기 때문에 제(帝)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 왕 무정(武丁)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

하매 고등이 이듣고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索度)에 이르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番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크게 개혁하였다. 은나라 왕 무정(武丁)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徐于餘)를 폐하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

에 돌아와 사냥꾼 무리 수 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蓋天齡)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사람을 보내 서우

비왕(椑王)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徐于餘 :

30대)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B.C.1282)에 진조선은 천왕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되「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

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법(禁八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며,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笞刑)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스스속죄하하면 공표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 올리니 어질고 겸양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신축년에 은나라 왕 무제(武帝)가 번한을 거쳐 천왕께 글을 올리고 방물을 바쳤다.

 

병신년(B.C.1225)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B.C.1224)에 아락(阿洛 : 31대)이 즉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B.C.1184)에 솔귀(率歸 : 32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B.C.1137)에 임나(任那 : 33대)가

즉위하였다. 신미년(B.C.1130)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天壇)을 동교(東郊)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냈다.

무리들이 둥글게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진정으로 천단(天壇)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皇運)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B.C.1105)에 동생 노단(魯丹 : 34대)이 즉위하였다. 북막(北莫)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路日邵)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B.C.1092)에 아들 마밀(馬密 : 35대)

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B.C.1074)에 아들 모불(牟弗 : 36대)이 즉위했다.

을해년(B.C.1066)에 감성(監星)을 두었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B.C.1054)에 아들 을나(乙那 : 37대)가 즉위하였다. 갑오년(B.C.1047)에 주나라 왕

하(瑕)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B.C.1014)에 마휴(麻庥 : 38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B.C.1012)에 동생 등나

(登那 : 39대)가 즉위했다. 이극회(李克會)가 말씀 올려서 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B.C.983)에 아들 해수(奚壽)가 즉위하였다. 임인년(B.C.979)에 아들 물한(勿韓)을 파견

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三聖墓)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常春)의 가(朱家)의 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B.C.942)에 아들 오문루(奧門婁 : 41대)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B.C.894) 아들 누사(婁斯 : 42대)가 즉위하더니 무인년(B.C.883)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

(登屼)과 작은아들인 등리(登里)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라.

항상 터럭 같은 작은 일로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마오.

말(馬)도 오히려 같은 구유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 줄을 이루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자잘한 말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B.C.866)에 아들 이벌(伊伐 : 43대)이 즉위하였다. 병신년(B.C.865)에 한수(漢水) 사람

왕문(王文)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B.C.842)에 상장(上將) 고력(高力)을 파견, 회(淮)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신유년(B.C.840)에 아들 아륵(阿勒 : 44대)이 즉위했다. 병인년(B.C.835) 주나라의 이공(二公)

이 사신을 보내와 특산물을 바쳤다. 아륵이 죽으니 을축년(B.C.836)에 아들 마휴(麻혹은 麻沐 : 45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B.C.785)에 아들 다두(多斗 : 46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축년(B.C.752)에 아들 나이(奈伊 : 47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미년(B.C.722)에 아

차음(次音 : 4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676)에 아들 불리(不理 : 49대)가 즉위했고,

그도 죽을사년(B.C.676?)에는 아들 여을(餘乙 : 50대)이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갑술년(B.C.647)에 엄루

(奄婁 : 51대)가 즉위했다. 무인년(B.C.643),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아들 감위(甘尉 : 52대)가 즉위했고, 그가 죽으

무신년(B.C.613)에 아들 술리(述理 : 53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무오년(B.C.603)에 아들 아갑(阿甲 :

54대)이 즉위하였다. 경오년(B.C.591)에 천왕은 사신 고유(高維)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像)을 나누어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B.C.618)에 고태(高台 : 55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蘇台爾 : 56대)가

즉위(B.C.574)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B.C.556)에 아들 마건(馬乾 : 57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B.C.545)에 한(天韓 : 58대)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인년(B.C.535)에 아들 노물(老

: 59대)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B.C.520)에 아들 도을(道乙 : 60대)이 즉위했다.

계미년(B.C.518)노(魯)나라 사람 공구(孔丘)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 이이(李耳)에게 예를 물었다.

이(耳)의 아비의 성은 한(韓)이요, 이름은 건(乾)이니 그의 선조는 풍(風)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阿踰佗)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켰다.

도을(道乙)이 죽고 병신년(B.C.505)에 아들 술휴(述休 : 61대)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B.C.471)에 아들

사양(沙良 : 62대)이 즉위하였고, 사양이 죽고 무자년(B.C.453)에 지한(地韓 : 63대)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B.C.438)에 아들 인한(人韓 : 64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B.C.400)에 아들

서울(西蔚 : 65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B.C.375)에 아들 가색(哥索 : 66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B.C.341)에 아들 해인(解仁 : 67대)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山韓)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B.C.340)에 아들 수한(水韓)이 즉위했다. 임오(B.C.339) 연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安村忽)을 공격했다. 또 험독(險瀆)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須臾)의 사기후(箕詡)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서 싸움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 2한(韓)의 병력

과 함께 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薊城)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라가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B.C.323년)에 수한(水韓)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箕詡 : 69대, 수유족)가 명을 받아 군령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하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番汗城)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箕煜 : 70대)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B.C.290)에 아들 기석(箕釋 : 71대)이

즉위했다. 이 해 각 주(州)와 군(郡)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 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

이었다. 기묘년(B.C.282) 번한이 교외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B.C.276)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B.C.251)에 아들 기윤(箕潤 : 72대)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232)에 아들 기비(箕丕 : 73대)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箕丕)는 종실의 해모수(解慕漱)

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려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

은 생각컨대 기비(箕丕)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箕準 : B.C.221)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194)에 떠돌이 도적 위만(衛滿)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 고조선의 삼 단계 도읍시대

 

1.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시대 : 초대 단군왕검~21세 소태(蘇台)(B.C.2333~1286 : 1048년간)

2. 백악산 아사달(農安․長春) 시대 : 22세 색불루(索弗婁)~43세 물리(勿理) (B.C.1285~426 : 860년간)

3. 장당경(開原) 시대 : 44세 구물(丘勿)~47세 고열가(古列加) (B.C.425~B.C.238 : 188년간)

신시 때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있었는데 대호(大皥)와 동문으로 학

 

 

소도경전본훈

蘇塗經典本訓

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로 저(渚)와 풍산(風山) 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祭天)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大一) 그 극(極)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良氣)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三一)은 그 체(體)는 일(一)이요, 그 용(用)은 삼(三)이라.

혼묘(混妙)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體)와 용(用)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大虛)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神)의 형상(像)이고

대기(大氣)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神)의 화(化)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 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衷)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圓覺)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 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圓)은 일(一)이 되어 무극(無極)이고

방(方)은 이(二)가 되어 반극(反極)이며

각(角)은 삼(三)이 되어 태극(太極)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一神)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性)은 광명(光明)에 통(通)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은 이를 신시(神市)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桓易)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때에 복희(伏羲)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

신룡(神龍)이 해를 쫓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 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桓易)을 만들었다.

한(桓)은 곧 희(羲)와 같은 뜻이고 역(易)은 옛날 용(龍)자의 본 글자다.

자부선생은 발귀리의 후손이다. 태어나면서 신명하여 道를 얻어 날아 오르사, 일찍이 해와 달을 측정하여 이를

정리하고 다음으로 오행(五行)의 수리를 따져서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니, 이것이 七星曆의 시작

이다. 뒤에 창기소(蒼其蘇)또 그 法을 부연하여 이로써 오행치수의 법을 밝혔다.

이 역시 신시황부(神市黃部)의 중경(中經)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인(虞人) 사우(姒禹)는 회계산(會稽山)에

이르러 조선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자허선인(紫虛仙人)을 통해 창수(蒼水) 사자(使者) 부루를 뵙기를 청하여

《황제중경(黃帝中經)》을 받으니 바로 신시황부의 중경이다. 우(禹)임금이 이를 취하여 쓰니 치수에 공이

있었다.

한역(桓易)의 체(體 : 모습, 외형)는 원(圓)이며 용(用 : 쓰임)은 방(方)이다. 모양 없음으로부실(實)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理)다. 희역(羲易)의 체(體)는 방(方)이며 용(用)은 원(圓)이다. 모양 있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體)이다. 지금의 역(易)은 서로 체(體)이면서 용(用)이니, 스스로 원(圓)이면서

원(圓)하고, 스스로 (方)이면서 방(方), 스스로 각(角)이면서 각(角)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命)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圓)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虛無의 공(空)일 뿐이니

어찌 체(體)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體)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體)로 한다.

대개 天下의 事物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 있는 것은 곧 모두 수(數)를 가진다. 수(數)가 있으면 곧 모두 힘(力)을

가진다. 이미 수(數)가 다고 말함은 곧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區別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事物은 말(言)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言)

이 없으면 곧 없는 것이다.

 

《천부경》은 천제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神誌) 혁덕(赫德)

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고운(崔孤雲) 치원(致遠)은 역시 일찍이 신지(神誌)

의 전문(篆文)을 옛 비석에서 보고 다시 이를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本朝)

에 이르러 뜻을 오로지 유가(儒家)의 글에 두더니 다시 조의(皂衣 : 皁의 속자)와 더불어 의논하여 보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라! 때문에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天 符 經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鋸無匱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

衍萬往萬來用變不同

本本心本太陽昂明人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

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다.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을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없는 하나가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완성되면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이 새로운 하나가 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뭍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을 하고 사람과 만물은 성장․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과 사람이 원래의 근본상태, 형상화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쳐 우주만물이 완성되며,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움직임도 다함도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힌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참고)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義)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삼청궁(三淸宮)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名華)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神市)

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推演)하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神仙陰符)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진나라 이래로 도가(道家)의 무리들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鍊丹服食)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方術)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는 망했지만 역시 회사(淮泗)의 출신이기에 평소 진나라을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들어가지 않았다.

본의 기이(紀伊)에 서불(徐巿)이라는 제명(題名)의 각자가 있다. 이국(伊國)의 신궁(新宮)에는 서불(徐巿)의

묘지요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巿)은 복(福)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일신고》는 본디 신시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

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조화(天神造化)의 근원과 세상사람들

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그 일(一)에는「허공은 일(一)로 함께 시작되지만 같지 않고, 일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끝을 같이 함이 없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한 가운데 항상함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 이(二)에서는「일신(一神)은 헛 것은 가고 실재가 나타나서 모든 것을 주재하는 듯하나 삼신(三神)이 대제

(大帝)로서 실로 공이 있음이라」하였으며, 그 삼(三)에서「천궁(天宮)은 진아(眞我)의 거처하는 곳이라.

만 가지 착함을 스스로 갖추어 영원토록 쾌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사(四)에서는,「세계의 뭇별은 해에

속해 있으니 든 백성들과 큰 인물들이 여기에서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그 오(五)에서는,「사람․물건은

같이 삼신(三神)에게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대아(大我)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은《삼일신고》를 가지고 도가의 제사지낼 때 올리는 말씀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국(桓國)은 한웅으로부터 개천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고(神誥)를 조술하였으며,

산하를 널리 개척하였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오호라, 신시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熊)․호

(虎)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천신을 위해, 홍익(弘益)의 뜻을 높이 하고, 아래로는

사람 세상(人世)을 위해 무고(無告)의 원(怨)을 푸나니 이에 사람은 절로 하늘에 순종하여, 세상엔 거짓과

망령됨이 사라지니, 하는 바 없이도 절로 다스려지고 말없어도 절로 교화되었다.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여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굴복함을 귀하게 여겼으며 목숨을져 남의 위급을 구제하였다.

이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고루 나누어졌지만 또 권리를 평등하게 하였다.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의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백(和白)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

으며, 힘을 모일을 쉽게 하였고 직업을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이와

어린아이도 똑 같이 복과 이익을 누였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어 재판하는 일도 없었으며 나라들끼리 서로

침입하여 빼앗는 일도 없었으니 이를 일러 신시태평지세(神市太平之世)라고 한다.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허공(36자)

 

帝曰爾五加衆아 蒼蒼이 非天이며 玄玄이 非天이라 天은 無形質하며 無端倪하며

 

제왈이오가중 창창 비천 현현 비천 천 무형질 무단예

 

無上下四方하고 虛虛空空하야 無不在하며 無不容이니라.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제 가로되,「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라고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形)과 바탕(質)이 없으며 첫끝(端)과 맞끝(倪)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하며 속은

텅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51자)

神은 在無上一位하사 有大德大慧大力하사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生天하시며 主無數世界하시고 造兟兟物하시니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纖塵無漏하며 昭昭靈靈하야 不敢名量이라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聲氣願禱하면 絶親見이니 自性求子하라 降在爾腦시니라.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천궁(40자)

天은 神國이라 有天宮하야 階萬善하며 門萬德하니 一神攸居오

천 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일신유거

 

群靈諸哲이 護侍하니 大吉祥大光明處라. 惟性通功完자라야 朝하야 永得快樂이리라.

군령제철 호시 대길상대광명처 . 유성통공완 조 영득쾌락

 

천은 신국이라, 천궁(天宮)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군령(群靈)과 선관((諸哲)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세계(72자)

 

爾觀森列星辰하라 數無盡하고 大小明暗苦樂이 不同하니라.

이관삼열성신 수무진 대소명암고락 부동

 

一神이 造群世界하시고 神이 勅日世界使者하사 轄七百世界하시니 爾地自大나 一丸世界니라.

일신 조군세계 신 칙일세계사자 할칠백세계 이지자대 일환세계

 

中火震盪하야 海幻陸遷하야 乃成見象하니라.

중화진탕 해환육천 내성현상.

 

神이 呵氣包底하시고 煦日色熱하시니 行翥化游裁物이 繁殖하니라.

신 가기포저 후일색열 행저화유재물 번식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

니라. 일신께서 뭇 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日世界)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 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일신께서 김(氣)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을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167자)

人物이 同受三眞하니 曰性命精이라 人은 全之하고 物은 偏之니라.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 인 전지 물 편지

 

眞性은 無善惡하니 上哲이 通하고 眞命은 無淸濁하니 中哲이 知하고

진성 무선악 상철 통 진명 무청탁 중철 지

 

眞精은 無厚薄하니 下哲이 保하나니 返眞하야 一神이니라.

진정 무후박 하철 보 반진 일신

 

惟衆은 迷地에 三妄이 着根하니 曰心氣身이라 心은 依性하야 有善惡하니 善福惡禍하고

유중 미지 삼망 착근 왈심기신 심 의성 유선악 선복악화

 

氣는 依命하야 有淸濁하니 淸壽濁妖하고 身은 依精하야 有厚薄하니 厚貴薄賤이니라.

기 의명 유청탁 청수탁요 신 의정 유후박 후귀박천.

 

眞妄이 對作三途하니 曰感息觸이라 轉成十八境하니 感엔 喜懼哀怒貪厭이오

진망 대작삼도 왈감식촉 전성십팔경 감 희구애노탐염

 

息엔 芬蘭寒熱震濕이오 觸엔 聲色臭味淫抵니라.

식 분란한열진습          촉 성색취미음저

 

衆은 善惡淸濁厚薄을 相雜하야 從境途任走하야 墮生長消病歿의 苦하고

중 선악청탁후박 상잡 종경도임주 타생장소병몰 고

 

哲은 止感하며 調息하며 禁觸하야 一意化行하야 返妄卽眞하야 發大神機하나니 性通功完이시니라.

철 지감 조식 금촉 일의화행 반망즉진 발대신기 성통공완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三眞)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三妄)이 뿌리를 내렸고

진(眞)과 망(妄)이 서로 삼도(三途)를 지었다.

가로되 성품(性)과 목숨(命)과 정기(精)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 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上哲)이 통하고, 참 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고, 참 정기는 두터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되 심(心)과 기(氣)와 신(身)이라. 심(心)이 성(性)에 의지하녀 선악(善惡)을 이루나니 선(善)은 복(福)이

되고 악(惡)은 화(禍)가 된다. 기(氣)가 명(命)에 의지하여 청탁(淸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심(心)이 정(精)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厚薄)을 이루니라. 두터움(厚)은 귀(貴)하고

엷음(薄)은 천(賤)하다.

가로되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 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두려움․슬픔․성냄․탐함․싫음

이요, 숨쉼에는맑음, 탁함,․추위․더위․ 마름․습기요, 부딪침에는 소리․빛․냄새 맛․음탕․닿음이니라. 뭇 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境途)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

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達門) 때의 사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 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제천(上古祭天)의 참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신지비사(神誌秘詞)》를 가지고 도참(圖讖) 성점(星占)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數)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口訣)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저울대는 부소량(扶蘇樑)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 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 조선이 도읍

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이다. 또「저울의 추오덕지(五德地)라

함은 번한의 옛 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湯池堡)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

(大洞江)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熊伯多)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 가지 형석(衡石)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함께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 복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이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 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南海縣) 낭하리(浪河理))의 암벽에 신시(神市)의 옛 조각

있다. 부여(夫餘) 사람 왕문(王文)이 쓴 바의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內文)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환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殷學 : 갑골문자)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

진저!

 

《유기》에「신획(神劃)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과 같

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곧 그 획은 직일(直一)과 곡이(曲二)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管制)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대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神人)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참된 가르침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

에 있고 노유(老幼)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義)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理化)의 한 길이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되「대시(大始)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氣)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氣)는 곧 극(極)이다.

극(極)은 즉 무(無)다. 저 하늘근원은 곧 삼극(三極)을 꿰뚫어 허(虛)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宮)곧 빛이 모이는 곳, 만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一神)은 능히

그 허(虛)를 체(體)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一氣)는 즉 천(天)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中一)의 신이 있어 능히 삼(三)이

된다. 삼신(三神)은 곧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의 신이다. 일기(一氣)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造), 가르치고(敎), 다스리(治) 삼화(三化)의 신이 된다. 신(神)은 기(氣)이고 기는 곧 허(虛)이며,

허는 즉 일(一)이다. 때문에 땅에는 삼한(三韓)이 있으니 진(眞)․변(弁)․마(馬)의 삼경(三京)의 한(韓)이다.

한은 곧 황(皇)이며 황은 대(大)이다. 대는 곧 일(一)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三眞)이 있다. 성(性)․명(命)․정(精)

의 삼수(三受)의 진(眞)이라 한다. 진(眞)은 즉 충(衷)이고, 충은 곧 업(業)이고, 업은 곧 속(續)이며,

속은 즉 일(一)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眞)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一)은 즉 삼(三)이라고 하는 것은 선(善)에 대합(大合)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一)

로 되돌아오는 미(美)이다. 곧 성(性)의 선(善)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命)의 청(淸)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精)의 후(厚)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眞)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 한다.

이 물듦을 망(妄)이라 하고 선(善)을 불식(不息)이라 한다. 그 식(息)을 악(惡)이라 하고 청(淸)불산(不散)이라

한다. 산(散)을 탁(濁)이라 한다. 후(厚)를 불축(不縮)이라 한다. 축(縮)을 박(薄)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執一含三> 이유는 곧 그 기(氣)하나로 하며 그 신(神)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會三歸一> 하는 이유는 역시 신(神)을 셋으로 하고 기(氣)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는 자의 체(體)는 일기(一氣)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智)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그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모두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會)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시(神市)엔 산목(算木)이 있었고 치우(蚩尤)에게 투전목(鬪佃目)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書算)이 있었다.

그 산목(算木)이라 하는 것은 一二三≣ l ⊢⊩⊪llll- X이다. 또 전목은 이다. 단군 가륵 제2년 삼랑(三郞) 을보륵

(乙普勒)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加臨多)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이태백전서(李太白全書)》의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北鎭)으로부터 적국인(狄國人)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

(新羅國)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吳越)에 이르렀다.

월씨(越氏)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東國寒松亭)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境浦)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 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왜(倭)․진(辰)․여국(餘國)은 혹은 횡서(橫書)하고 혹은 결승(結繩)하고 혹은 계목

(楔木)한다」고 있다. 오로지 고려만이 영법(穎法)을 모사했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模刻)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찍이 신지의 옛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을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

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전하기를「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紫府)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蚩尤)에게는 화서(花書)가 있어, 투전문(鬪佃文)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伏羲)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흑수․청구․

구려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夫餘) 사왕문(王文)은 처음 전문(篆文)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획을

없애고 새로 부예(符隸)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나라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隸法)을 한수(漢水)에서 얻었고,

또 그 획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 형으로 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八分)이다. 진나라 때 왕차중(王次仲)은

또 해서(楷書)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王文)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神市)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삼일신고》의 구본에는 분장(分章)이 없고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1장에 허공, 2장에 일신,

3장에 천궁, 4장에 세계, 5장에 인물이라 했다. 저 허공을 하늘의 질량이라 하고, 일신을 하늘의 주재(主宰)라

하고, 천궁을 하늘의 조화를 갖춘 곳이라 하고, 세계를 만세라 하였다. 인물은 곧 시(市)이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元勳)이다. 대저 태백진교(太白眞敎)는 천부(天符)에 근원하여 지전(地轉)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和白)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責禍)보다 선한 것이 없다.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이 없고, 지전을

취하여 게으름이 없고, 인정에 합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하의 공론이 어찌하여 한 사람인들 아니라 할

있으리요? 신고(神誥)의 오대(五大) 지결(旨訣)도 역시 천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신고도 역시 천부 가운데

하나의 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자(字)의 근원이 오래됨을 알았다. 글자의 의미는 크고도 크도다.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牧隱) 이색(李穡) 휴애(休崖) 범세동(范世東)은 모두《천부경》을 주해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一字)라 할지라도 정주(程朱)에 합치지 않으면 뭇 화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유가(儒家)의 예봉은 바야흐로 번득거린다. 저 천경(天經)과 신고(神誥)의 가르

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가 있으리요?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라 하거나 공수(供授)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頭列)이라고한다.

무리를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백호통소의(白虎通疏義)》에서는 조리(朝離)라 했고《통전악지(通典樂志)》에서는 주리(侏離)

라 하였고《삼국사기》는 도솔(兜率)이라 했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를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 때 어아(於阿)의 악(樂)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 풍습으로,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가로대, 대조신(大祖神)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고로 태양으로써 의상(儀象)을 삼고,

광열로써 공능(功能)으로 삼고, 생화발전(生化發展)으로써 마음을 삼고, 화복보응(禍福報應)으로써 정의

(正義)로 삼는다. 이때부터 풍속은 참전(參佺)으로 계(戒)를 가졌다, 예복에도 법칙이 있었으니 의관한 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잘 쏘는 자는 반드높은 자리를 얻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짐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가상의 악귀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조심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 하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스스로 여러 목숨 가진 것들을 가까이하여 교화하였다. 안으로는 닦고 겉으론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천천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 손가?

 

옛날에는 제천에 무천(舞天)의 악(樂)이 있었다.《요사(遼史)》예지에 말하는 바요천(繞天)과 같은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 제사는 반드시 먼져 생을 상징시켜 평상시 살아있을 때처럼 정성을 드리려고 한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은 곧 친견을 표하려 하는 의식이다.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開原)이며 역시 평양

(한반도의 평앙이 아님)이라고도 한다.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

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권관경(分權管境)의

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침입

이래 전화가 여러 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治化)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고 다스림을 크게 바꾸고자 하여, 천제묘의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달도록 하였다. 3․7일을 기한으로 연령순으로 서로 술을 마시면서 서로 권하여

덕화를 이루자는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 모임을 구서지회(九誓之會)라 하였고, 그 때 서로 맹세한 내용을

 ‘구서지문(九誓之文)’이라 하였습니다.

한 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집에서 효도를 다하라. 집에 부모 처자가 있으니 정성스런 마음으로 공경하고 헤아려 우애있게

하고, 성심으로 제사를 받들어 한 뿌리 근본에 보답할 것이며, 손님을 공손히 접대하여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고, 자제를 가르침에 게으름이 없도록 하여 영재를 기르니, 이 모두가 인륜교화의 큰 덕목이라.

이 같은 효와 자비와 순종과 예<孝慈順禮>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두 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모름지기 형제 사이에는 우애 있도록 힘쓰라. 형제란 한 부모에서 나뉜 바이니, 형이 좋아하는 바는 아우도

좋아하고 아우가 싫어하는 것은 형도 좋아하지 않는다. 사물대하여 좋고 싫음은 나와 남이 같을 것이니,

나의 몸에서 사물에까지, 가까운 것에서 소원한 것에까지 미쳐야 하느니라. 이 같은 도리로서 향리와 나라를

헤아리면 향리와 나라가 흥할 것이며, 천하에 미치면 천하가 교화될 것이라. 이 같은 우애와 친목과 어짐과

헤아림<友睦仁恕>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세 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모름지기 스승과 벗에는 믿음을 다하라. 스승과 벗은 도와 법이 서는 곳이니, 덕과 의를 서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여 학문을 세우라. 사업의 성취는 두 스승과 벗의 힘이로다. 이 같은 믿음과 진실과 성실과 근면함

<信實誠勤>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 절하여 맹세한다.

모름지기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라. 나라는 선왕이 세우신 바요 백성들이 먹고사는 곳이라. 국정을 쇄신하고

나라의 부를 늘리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널리 펼쳐 국세를 굳세게 하고 역사를 빛냄은 모든 나라의 미래상

이라. 이같은 충성과 의로움과 기개와 절개<忠義氣節>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다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모름지기 뭇 사람들에게 겸손을 다하라. 뭇 사람들은 곧 천제의 백성으로 나와 세 가지 참됨<三眞>을

받았으니 주체상의 근본이요 국력의 원천이라. 위가 겸치 않으면 아래가 떠나고, 우측이 겸손치 않으면 좌측

벗어나고, 앞이 겸손치 않으면 뒤가 물러가고, 아래가 겸손치 않으면 위가 싫어하고, 좌측이 겸손치 않으면

우측이 떨어지고, 뒤가 겸손치 않으면 앞이 소원해지리라. 이제 겸손하고 양보하고 서로 존중하여 무리를 모아

힘을 통하면, 밖으로는 업신여김이 그칠 것이요 안으로다스림을 이루어질 것이로다. 이 같은 겸손과 양보와

공경과 삼가함<遜讓恭謹>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여섯 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모름지기 정사는 밝게 알도록 힘쓰라. 정사란 다스림과 혼란에 관계되는 바이니, 풍백(風伯)은 약속을 세우고,

우사(雨師)는 정치를 베풀고, 운사(雲師)는 형벌을 행하고, 각기 직권있으니 서로 침범하여 넘어서지 않는

도다. 이제 식견이 고매해지고 언로(言路)를 널채택하고 기예를 연마하고 경험을 두루 쌓아 가면, 나라 일은

고르게 될 것이요, 백성의 살림살이는 펴질 것이로다. 이 같은 밝음과 앎과 결단과 식견 <明知達見>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일곱 번째 절하여 맹세하여 말하길,

모름지기 싸움터에서는 용맹하도록 하라. 싸움터란 나라의 존망이 결정나곳이니, 나라가 없다면 임금과

아비가 깍은 나무 인형이 될 것이고, 주인이 서지 않는다처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리라. 일에 응하고 사물에

접함이 모두 나의 길이 아님이 고, 세상에 가르침을 전함이 또한 나의 일이 아님이 없도다. 나라 없이 살고

주인 없존재함이 정녕 나라있어 죽고 주인 있어 삶을 마치는 것과 같겠는가. 이제 나를 비우고 희생하는

풍조가 확연하고, 규제와 정숙함으로 무리가 스스로 잘 다스려지고, 상과 벌이 반드시 바르고 공평하게 행해

지고, 나와 남이 또한 신의로서 서로 도우니, 뭇 사람들을 양육하고 능히 많은 사람을 복되게 하리라.

이 같은 용기와 담력과 위엄과 의협<勇膽武俠>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여덟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모름지기 몸가짐이 청렴하기를 힘쓰라. 행동이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이 저절로 어두워지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통하리니, 치우쳐 사사로운 이익을 쫓으면 반드시 습한 병을 앓을 것이고 독선적으로 교만해

지면 반드시 부패할 것이다. 어리석게도 스스로 만족하니 자신과 남을 해치고 인습이 돌아 쌓이면 그 곳에

빠져 구제받지 못하라. 이 같은 청렴과 곧음과 고결함과 맑음<廉直潔淸>을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아홉 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모름지기 맡은 일에는 의로움을 다하라. 사람이 맡은 바 일을 하여 일을 성취하는 데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하나라도 의롭지 못함이 있다면 순식간에 극진함을 잃게 되어 업신여김을 당하고 헐뜯겨 무너질

것이고, 만약 정의롭다면 공신력을 리니 누가 업신여기고 헐뜯고 침탈하겠는가. 의로움이란 무리의 힘이

일어나는 바이고 바른 기운이 나오는 바탕이니, 거두면 한 몸에 갈무리 될 것이고 펼치면 천지에 그득할

이라. 이 같은 바름과 의로움과 공평함과 도리<정의공리>를 어찌 닦지 않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 공동의 이익에 힘쓰며, 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 공덕(公德)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잡고 스스로 예의 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 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揖)을 한 후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揖)은

이를 가리켜 취(聚)라 한다. 마음을 모아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順)이다. 기(氣)를 순(順)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俳)는 헌(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獻)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

(叩頭)라 한다. 고두(叩頭)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찍이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이를《참전계경》이라 했다.「대시(大始)에 철인(哲人)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사(事)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條)가 있나니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

보(報)․응(應)이라 한다. 성(誠)은 충심(衷心)이 발하는 것으로서 진실(眞實)에서 나오는 정성(精誠)을 관장

하는 곳이라, 6체(體) 47용(用)이 있고, 신(信)은 천리의 필합(天理之必合)으로서 인사의 필성(人事之必成)이라,

5단(團) 35부(部)가 있다. 애(愛)는 자심의 자(慈心之自然)으로 인성의 본질(仁性之本)이다.

6범(梵) 43위(圍)가 있다.

제(濟)는 덕의 겸선(德之兼善)으로서 도가 잘 미치는 것(道之賴及有)이라, 4규(規) 32모(模)가 있다. 화(禍)는

악이 부르는 것(惡之所召有)이다. 6조(條) 42목(目)이 있다. 복(福)은 선의 여경(善之餘慶有)이다.

6문(門) 45호(戶)가 있다. 보(報)는 천신(天神)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惡人以

禍報) 선인에 보하는 데 있어서는 복으로 한다(善人以福有).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應)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惡受惡報)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善受善報有). 6과(果)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으나 척강(陟降)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戒)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經)을 삼고 5사를 위(緯)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

(弘益濟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佺戒)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보냐?」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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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오제(五帝) : 넓히고 나타냄

171).오령(五靈) : 기르고 이룸

172).경(經) : 여기서 경(經)은 삼일신고(三一神誥)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73).거발한(居發桓) : 개국시조에게만 사용하는 특별한 이름으로서 신앙적 의미가 내포된 신격화된 호칭이며,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호칭이다. 온 누리에 크게 밝은 천제한인.

174).「친소(親疎)의 구별이 없었고, 상하 차등이 없었으며, 남녀가 평등하였고 노소는 일을 나누었다. 세상에 법규는 없었지만 계통이 스스로 이루어져 조화롭고 즐거웠으며, 이치대로 되었다.」

 

<대한국사>

175).월지국(月支國) :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천왕(天王)인 진한(辰汗)을 보좌한 비왕(裨王)인 번한(番汗)과 마한(馬汗)은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지 못하고 달님의 아들이라 칭하였는데, 달님의 아들을 한자로 적으면서 달님은 달(達) 또는 월(月)로, 아들은 지(支,氏)로 각 적었다. 그 때문에 달님의 아들을 월지(月支.月氏) 또는 달지(達支.達氏)라 불렀고, 달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월지국(月支國) 또는 달지국(達支國)이라 불렀다. 위 월지(月支)라는 말은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에도 사용되었다.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한 후 사용된 월지(月支)라는 말은 마한(馬韓)

이라는 뜻이지 비왕(裨王)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기 흉노전에 나오는 월지(月氏)는 해님의 아들을 칭하지 못한 무리들이다. 목지국(目支國)은 오기(誤記)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76).안파견 : 7세 지위리 한인을 말한다.

177).천계의 백성<天戒之氓> : 삼국유사에는: 願化爲人로 표현되어 있다.

178).송화강(松花江) : 흑룡강성 하얼빈에 있는 완달산(完達山)을 말한다.

179).조선삼한(朝鮮三韓) : 辰韓, 番韓,韓.

180).신시개천(神市開天) : 開天은 한웅의 배달국 건국을 가리키며, 현재의 개천절은 뒤의 단군조선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181).감군(監羣) : 혹은 ’대감(大監)‘이라 하여 백성들을 보살피고 감독한다는 의미로서 배달국에 속해 있던 여러 제후국우두머리를 말하며, 단군은 단국의 왕검이라는 뜻이다.

182).갈고(葛古) 한웅 : 10세 한웅. 독로한(瀆盧韓)이라고도 한다.

183).동이(東夷)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동이(東夷)를 풀이하는 말 가운데 <군자불사(君子不死)>라는 말이 곧 신선불사(神仙不死)라는 말이다. <설문(說文)>의 이(夷) 자 풀이는 다음과 같다. 夷 東方人也 : 이(夷)는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다.

ㅅㅅ弓ㅅㅅ大 : 활 궁(弓)자와 큰 대(大)자에서 따온 글자이다.

與古文仁同 : 옛 글의 인(仁)과 같은 글자이다. 夷者仁壽 : 이(夷)는 어질고 오래 살며

有君子不死之國 : 죽지 않는 군자가 있는 나라이다.

188).마한(馬汗, 馬韓) : 마한(馬汗)은 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동쪽 지역을 다스린 비왕(裨王)의 명칭으로 말(馬) 임금이라는 뜻이다. 말(馬)을 넣은 칭호는 고구려(高究黎) 때도 사용되었는데, 사서에는 마려(馬黎), 마리(摩離), 마여(麻餘) 등으로 적혀 있다. 위 마(摩. 麻)는 마(馬)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고, 여(餘. 余)는 무리라는 뜻인 여(黎.與)를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며, 이(離)는 여(黎. 與) 대신에 사용된 글자이다. 고기에는 마한(馬韓)이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비왕(裨王)인 마한(馬汗)이 마한(馬韓)으로도 적혀 있다.

② 한반도를 한(韓) 또는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③ B.C. 194년 이후에 한반도에 세워진 마한(馬韓)이라는 나라 또는 마한의 통치자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B.C. 194년 이후 한반도에 세워진 마한(馬韓)이라는 나라를 살펴본다.

첫째, B.C. 194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앗기고 지금의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韓) 무리들을 공파(攻破)한 후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불렀다. 둘째, B.C. 194년에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마한을 세운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들이 한(韓) 무리들의 반격을 받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서 홍성(洪城) 금마(金馬)에 수도를 두고 나라 이름을 계속 마한이라 불렀다. 이 마한(馬韓)은 A.D. 9년에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셋째, 홍성 금마(金馬) 마한(馬韓)이 멸망하였을 때 금강(錦江) 이남 지방의 소국(小國)들이 뭉쳐 마한연맹(馬韓聯盟)을 만든 후 익산(益山) 금마(金馬)에 수도를두고 나라이름을 계속 마한이라 불렀다. 이 마한은 A.D. 205년에 구태백제(九台百濟)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한반도에서 마한(馬韓)이라 불린 지역은 B.C. 194년 이전에는 한반도 전지역이었고, 성 금마 마한 때는 한수(漢水) 이남 지역이었으며, 익산 금마 마한(馬韓) 때는 금강(錦江) 이남 지역이었다. <삼국사기>에는 마한연맹(馬韓聯盟)

이나 마한왕(馬韓王)이 모두 마한(馬韓)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전후 문맥을 보고 마한(馬韓)이 마한연맹(馬韓聯盟)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마한왕(馬韓王)을 가리키는지 판단해야 한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89).삼랑성(三郞城) : 강화군 길성면에 있는 고성

192).단군 부루 : 2세 단군, 신축년 B.C.2240~무술58년 2183

193).임자12년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단군세기>

207).단군 마휴(摩休) : 29세, 무인년 B.C.943~신해34년 910

208).협야후(陜野侯) : 배반명(裴幋命)

209).왜(倭) : 고대에 남해안, 서․남해 섬, 대마도, 일본열도 등지에 거주한 토착민을 말한다. 정 나라 이름이 아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倭) 지역에 거주한 토착민, 만주나 한반도에서 이주한 무리들이 왜(倭) 지역의 토착민을

정복하고 세운 소국(小國), 왜(倭) 지역에 있던 소국(小國)의 주민들을 군사로 사용한 마한연맹(馬韓聯盟)이나 구태백제(九台百濟)가 모두 왜(倭)로 적혀 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나오는 왜(倭)를 전부 토착민으로 보지 말고 왜(倭)가 어경우를 가리키는지 전후 문맥을 보고 판단해야 된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 구주왜(九州倭) : B.C. 194년경에 지금의 경상도 지방으로 이주한 진․변한계 무리들 중 일부는 다시 구주(九州)로

이주하여 수십 개의 소국(小國)을 세웠는데, 사학자들은 고대에 구주에 거주무리들을 총칭하여 구주왜(九州倭)라

불렀다. 이 구주왜는 A.D. 97~103년경에 가야계(加耶系)인 일향국(日向國)이 중심이 되어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 :

邪馬壹聯盟?)이라는 소국연맹(小國聯盟)을 만들어 일본열도를 지배하였다. 이 야마대연맹은 A.D. 205~208년경부터 A.D. 238년까지 구태백제(九台百濟)에 복속하였다. 그 뒤 A.D. 390년에 대화(大和) 지방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후부터 대화왜(大和倭)에게 일본열도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다가 A.D. 400~479년까지 광개토왕이 대마도에 설치한 임나연정(任那聯政)에 복속하였다. 그 뒤 A.D. 488년에 대화(大和) 지방에 인현조(仁賢朝)가 세워진 후부터 다시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다가 A.D. 522년부터 698년까지 일시 대화왜(大和倭)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면서 그 우두머리의 칭호를 다시 천황(天皇)이라 칭하였으나, 7세기 말경부터 다시 대화왜(大和倭)에 복속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13).진왕(秦王) 정(政) : 진시황(秦始皇)을 말한다.

215).구려분정(九黎分政) :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중국의 회대(淮岱) 지방에 둔 분조(分朝)이다. 배달국(倍達國) 때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동부와 북부 지방을 점령한 후 회대(淮岱) 사이에 웅거(雄據)하였다. 그 뒤 왕검(王儉)이 배달국 지역에 왕검조선을 세운 후 지역을 3분하여 만주중앙은 진한(辰汗)이, 연해주, 한반도,

대마도, 구주 동쪽은 마한(馬汗)이, 중국북부지방과 만주남부지방 등․서․남쪽은 번한(番汗)이 각각 스리고,

중국동부에 있는 회대 지방에는 분조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 분조를 구려분정(九黎分政)이라 불렀다. 구려분정의 치소는 산동성 제성현 동남쪽에 있는 "낭야성(琅耶城)"이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16).삼보(三寶) :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황거종(皇鋸宗)의 보물 3가지를 말한다.

217).구려(九黎) : 일명 夫餘, 고대 우리 민족은 온 세상 또는 아주 넓은 지역을 가리킬 때 9 또는 8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였는데, 9는 중앙과 8방(方)을, 8은 중앙을 뺀 8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구려(九黎), 구주(九州), 구지(九地), 8대주(八大州) 등은 온 세상 또는 아주 넓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온 세상을 9방으로 보고 하늘나라를 구천(九天)이라 부르고 지상세계를 구지(九地)라 불렀는데,

구려(九黎)는 자신들의 조상(祖上)이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왔다고 믿은 무리(黎)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즉 구려(九黎)는 고대에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등지에 살면서 해와 달을 천제(天帝)로 숭배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뒤에 구려(九黎) 앞에 "高"자를 붙여 나라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삼국유사> 마한(馬韓) 편에는 구려(九黎)가 구이(九夷)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에는 구려(九黎)가 부여(夫餘) 또는

구환(九桓)으로 적혀 있다. 구려(九黎)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고대에 구려 무리들이 사용한 용어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고대의 구려 무리들은 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天帝)이라 믿었고 해님을 환인(桓因)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고, 달님을 월지(月支, 月氏)라 불렀다. 이들은 늘에 환한 하늘나라(桓國)가 있다고 믿고, 이 하늘나라에는 하늘나라 임금님인 해님(桓因, 上帝)과 비왕(裨王 : 보조왕)인 달님(月支, 月氏) 및 신하(臣下)인 수많은 별님(星君)들있으며, 낮에는 해님이 다스리고 밤에는 달님이 다스리며, 인간의 출생, 생사, 질병 등 인간만사와 가뭄, 비, 천둥, 바람 등 자연현상은 하늘나라 임금님(天帝)의 뜻에 따라 별님(星君)들이 각각 나누어 맡아 다스린다고 믿었다. 이들은 하늘나라 임금이 온 세

지배한다믿은 결과 지상세계의 임금, 고관, 장군들은 해님, 달님, 별님의 아들이라 믿었다. 임금은 해님의 아들인 용(龍)이, 비왕(裨王)은 달님의 아들인 천마(天馬) 또는 봉황(鳳凰)이, 위대한 장군이나 고관은 별님(星君)의 아들이 각 지상세계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하였거나 또는 사람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독립국의 최고통치자는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였고, 천제(天帝)에 대한 제사는 최고통치자가 주관다. 또 재해가 생기면 지상의 임금이 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하늘을 관측하는 담당자를 두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였으며, 큰 별이 떨어지면 임금, 고관 또는 장군이 죽는다고 믿었다.고기(古記)에는 천해(天海)의 동쪽 땅도 환국(桓國)으로 적혀 있고, 그곳의 임금도 환인(桓因)으로 적혀 있다. 이는 고대의 구려 무리들이 해가 뜨거나 지는 곳도 하늘나라일부로 보고, 하늘나라 임금(桓因)이 밤에는 천해의 동쪽 땅에서 쉬다가 아침이 되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정사를 돌본다고 믿은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기(古記)에는 구려(九黎) 무리들이 하늘나라(九天, 不, 高)에서 내려온 무리(黎 餘)라는 뜻인 구려(九黎, 句麗), 구환(九桓), 부여(不黎, 夫餘) 또는 고려(高黎, 高麗) 등으로 적혀 있고, 이주하기 전에 살던 곳이 하늘나라(天界)로 적혀 있으며, 구려 무리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는 것이 하강(下降)으로 적혀 있고, 구려 무리들이 새로 이주한 땅이 구야(九邪) 또는 구주(九州)로 적혀 있으며, 구야 지역의 추장(尊長)이 구간(九干)으로 적혀 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천해의 동쪽에 살던 무리들 중 일부는 갑자년(B.C. 3897)에 인의 아들 환웅과 같이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로 남하하여 배달국을 세웠고, 무진년(B.C. 2333)에 왕검(王儉)이 구려(九黎) 무리들을 통합하여 배달국 지역에 조선(朝鮮 : 왕검조선)을 세웠다. 구려(九黎)의 역사는 7명의 환인(桓因)이 다스린 환국(桓國), 18명의 환웅(桓雄)이 다스린 배달국(倍達國), 47명의 단제(檀帝)가 다스린 왕검조선(王儉朝鮮) 순서로 이어졌다. <출처 : 고기론 본 한국고대사>

 

224).천왕 : 31세 단군 등올(登兀, 정해년 B.C.874~신해년 B.C.850)을 말한다.

226).천부경중 2회 이상 쓰인 문자(12종) : 숫자 5종, 문자 7종

11회 : 一, 8회 : 三, 4회 : 二, 無, 本, 3회 : 天, 地, 人, 2회 : 始 七 萬 終

1회만 쓰인 문자(33종) : 숫자 5종, 문자 28종 합계 : 45종(숫자 10종, 문자 35종)

227).이국(伊國 : 일명 南夫餘 또는 九台百濟) : 구태(九台)는 장춘(長春) 동북쪽에 위치한 구태(九台)에 수도를 두고 부여왕으로 재위한 사의 이름인데, 위(尉)자를 성으로 사용하여 위구태(尉九台)라 불렀다. <사(北史)>에는 "仇台"로 적혀 있다. 위구태(尉九台)는 A.D. 204년 10월에 장춘(長春) 방면의 부여 무리를 이끌고 처남인 공손강(公孫康)이 지금의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帶方郡)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그 곳을 근거지로 하여 다음해 A.D. 205년 7월에 온조백제(溫祚百濟)와 마한(馬韓)을 복하였고, A.D. 205~208년경에 야마대연맹(邪馬臺聯盟)과 가야(加耶) 일부 지역을 속시켰으며, A.D. 313~316년경에 유성(柳城)에서부터 북평(北平)까지 서지방과 양자강하류 중국 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이 구태백제(九台百濟)를 부여 무리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라는 뜻으로 남부여(南夫餘) 또는 부여 무리들이 세운 나라라는 뜻으로 이국(伊國)이라 불렀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구태백제를 멸시하여 이잔(利殘)으로 적혀 있고, 구태백제가 서․남해 도서지방과 일본열도왜를 군사로 사용하였다고 구태백제 군사가 왜(倭)로 적혀 있다. 고기(古記)에는 구태백제 무리가 본주(本州)의 이세(伊勢), 대화(大和) 등지로 이주하여 세운 자제(子弟)의 나라 즉 후국(侯國)의 명칭이 근국(根國)인 구태백제의 이름을 따서 이국(伊國)으로 적혀 있다. 이 "伊"는 "黎, 餘, 與"처럼 부여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구태백제의 치소(治所)는 웅진(熊津)에 있었고, 구태백제와 온조백제, 일본열도왜와의 관계는 구태백제가 종주국(宗主國)이었고, 온조백제와 일본열도왜가 후국(侯國)이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구태백제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온조왕 시기에 이미 멸망한 비류백제와 A.D. 204년 10월경에 세워진 구태백제를 혼동하여 비류백제가 일본열도, 중국 동해안지방, 요서지방으로 진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28).진왕정(秦王政) : 진시황을 말한다.

229).불리지(弗離支) : 고주몽의 아버지 고모수(高慕漱)의 본명

230).을파소(乙巴素) : 고구려 산상왕 때의 재상.

231).성(性)․명(命)․정(精) : 삼진(三眞)

233).심(心)․기(氣)․신(身): 삼망(三妄)

234).어아의 노래 : 어아가(於阿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