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初期佛敎)에서 본 마음(心) - - - 각묵 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1. 들어가는 말
흔히들 말하기를 불교는 마음(心)의 종교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음을 깨쳐 성불한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一切唯心造).’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심리학(心理學)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초기불교(初期佛敎)에서는 과연 마음(心)을 어떻게 정리(整理)하고 있을까.
먼저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아(無我, anatta, 實體 없음)를 근본(根本)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무아(無我)는 불교를 특징짓는 말로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반야/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을 망라한 모든 불교의 핵심(核心)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뜨만이니 자아(自我)니 대아(大我)니 진아(眞我)니 하는 무언가 변(變)하지 않고 영원(永遠)한 실체(實體)가 '나'라는 存在나 世界 안에 혹은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개념(槪念, 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인정(認定)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만일 우리가 마음(心)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無我)를 역설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마음(心)이니 자아(自我)니 대아(大我)니 참나(眞我)니 하며 심지어는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 사용하는 여래장(如來藏)이나 불성(佛性) 등의 가르침 조차도 무언가 존재(存在)의 배후(背後)에 불생불멸(不生不滅)로 存在하는 불변(不變)하는 固定된 實體인양 상정(想定)하고 여래장(如來藏)이나 불성(佛性)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佛敎)라고 잘 못 理解하는 불자(佛子)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홍법사 대중강의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다고 발제자는 이해한다. 발제자는 이제 몇 가지 측면에서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 이 主題를 소화해내고자 한다.
2. 마음의 사전적 의미
먼저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마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우리말 '마음'의 의미(意味) 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사람의 몸에 깃들여서 지식 ·감정 ·의지 등의 정신활동을 하는 것,또는 그 바탕이 되는 것. 예: 마음의 양 식이 되는 책.
② 거짓 없는 생각. 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③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일어나는) 기분. 느낌. 예: 홀가분한 마음.
④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하여) 속으로 꾀한 뜻. 예: 마음을 고쳐먹다.
⑤ 심정(心情). 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다.
⑥ 사랑하는 정. 예: 그에게 마음을 두다.
⑦ 성의. 정성. 예: 마음을 다하다. (준말)맘.
한편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마음'의 意味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精神’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엄밀(嚴密)하게 말해서 ‘마음’은 ‘精神’에 비해 훨씬 個人的이고 主觀的인 의미로 쓰이는 일이 많고, 그 의미 內容도 애매하다. 심리학(心理學)에서 말하는 ‘의식(意識)’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肉體나 物質의 相對的인 말로서 哲學上의 ‘精神’ 또는 ‘理念’의 뜻으로도 쓰이는 막연한 槪念이 되었다.
다음 백과서전에서는 마음, 한자(漢字) 심(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原來 思惟器管을 가리킨다.〈맹자〉의 고자(告子) 편에서 “心의 機能은 生覺하는 것이다”(心之官則思)라고 하였는데, 心은 보통 人間의 意志·主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客體와 相對되는 槪念으로 사용되었다.
그 리고 백과사전들에서는 중국 철학자들의 용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 혹은 심(心)라는 用語는 참으로 多樣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多樣한 사람에 의해서 多樣한 뜻으로 定義되고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말 마음 혹은 한자어 心만을 가지고는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마음에 대한 이 정도의 지식을 바탕으로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定義)하는가를 살펴보자.
3. 마음은 대상(對相)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單語에 해당하는 불교용어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문으로 옮긴 心 ․ 意 ․ 識의 범어(산스크리트어) 원어(原語)를 살펴보면, 심(心)은 citta(Sk. citta)이고, 의(意)는 mano(Sk. manas)이며, 식(識)은 viññāṇa(Sk. vijñāṇa)이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경전들에서는 주로 生覺하는 그 自體를 나타내는 術語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生覺을 管掌하는 器管 혹은 機能 [根, indriya]이나 感覺場所 [處, 入, āyatana]의 槪念으로서만 나타난다. 識으로 옮긴 viññāṇa(vi분리하여+√jñā, to know)는 여섯 感覺場所(六內入處]와 여섯 對相(六外入處)이 만날 때 일어나는 6가지 알음알이(六識)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경전들에서는 이렇게 心․ 意․ 識의 用處가 다르다 할 수 있다.
여러 初期經에서는 ‘안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을 定義하고 있으며, 다른 몇몇 경전들에서는 “마노로 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 - S.v.451)”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노[意]를 通해서 法(對相)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對相을 思量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attho - DhsA.63)”라고 定義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同意語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 셋을 같은 것이라 한결같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完全히 同意語로 쓰인다. 그리고 마노[意]는 對相을 아는 기능[根, indriya] 혹은 장소[處, 入, āyatana]의 意味로 쓰이지만 對相을 안다는 것으로는 心, 意, 識 이 셋은 同意語로 쓰인다.
마음은 단지 對相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對相을 아는가? 이를 精密하게 說明해내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음(心)은 여러 心理現象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서 마노(意)를 通해서 對相을 안다. 마음이 對相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心理現象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하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7가지 心理現象과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害로운 心理現象 14가지와 有益한 心理現象 25가지의 總 52가지 心所法(心理現象)을 들고 있다. 특히 마음이 對相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곱 가지 心理現象들의 作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7가지 마음부수(附隨)는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瞬間)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7가지 마음부수(附隨)란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感覺接觸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 觸)의 機能이 없으면 마 음은 결코 對相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 受)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對相을 經驗할 수 없다.
셋째, 認識(saññā, 想)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對相을 認識할 수 없다.
넷째, 意圖(cetanā, 意思/意志)가 없다면 마음은 결코 對相을 알려는 어떤 作爲도 行할 수가 없다.
다섯째, 集中(ekaggatā, 心一境, 定)이 없으면 그 對相에 마음을 固定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느 程度의 注意 集中이 없으면 對相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生命機能(jīvitindriya, 命根) 卽, 生命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作意) 卽, 注意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對相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機能)뿐인 마음은 이 일곱 가지 心理現象들의 도움을 받아서 ‘對相을 아는 機能’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임금(王)이라면 일곱 가지 심리현상(마음부수)들은 최측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일곱 가지 가지 심리현상(마음부수)들은 항상(恒) 마음과 같이 일어나고 마음과 같이 사라진다.
4. 마음은 오온(五蘊 : 색 수 상 행 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나'라는 存在를 오온(五蘊)의 和合 혹은 오온의 가합(假合) 또는 오온의 무더기로 理解하고 있다.
'나'라는 存在는 어떠한 獨立되고 不變하는 固定된 實體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몸(물질, 色, rūpa)의 무더기(蘊, khandha)와 느낌(受, vedanā, 情緖的이고 感情的인 측면)의 무더기와 생각(想, saññā, 理性的이고 知的인 측면)의 무더기와 여러 心理現象들(行, saṅkhāra, 오온의 문맥에서는 恒常 복수로 나타나며 느낌과 생각을 除外한 모든 精神作用을 뜻함)의 무더기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受와 想과 行들의 도움으로 對相을 아는 機能을 하는 것)의 무더기가 함께 뭉쳐져 있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중에서 알음알이의 무더기[식온(識薀)]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心王)'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는 마음(citta/viññāṇa)과 精神(名, nāma)을 正確하게 區分해서 사용하고 있다. 精神은 受蘊, 想蘊, 行蘊, 識蘊, 卽, 느낌의 무더기, 생각의 무더기,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인데 정신(精神) 가운데서 대상을 아는(요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음알이(識)이라 하고 마음(心)이라한다. 마음(心 - 識 알음알이)는 느낌(受)과 생각(想)과 심리현상들(行)들의 도움으로 對相을 아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인간의 精神的 領域 가운데서 단지 對相을 아는 것을 뜻할 뿐이지 마음이 우리의 精神領域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初期佛敎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제 이처럼 心理現象들(마음附隨들)의 도움으로 마노(意)를 通해서 對相을 아는 것으로 定義되는 마음의 重要한 性質을 초기경전에 준해서 살펴보자.
5. 마음은 무상(無常)하다.
먼저 分明히 해야 할 사실은 마음을 비롯한 諸法(有爲法)은 無常하다는 것이다. 初期經을 통해서 마음의 무상함을 살펴보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生覺하는가? 物質(색/色)은 恒常한가 無常한가?” “無常합니다, 세존이시여.”
“無常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無常하고 괴로움이고 變하기 마련인 것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觀察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生覺하는가? 느낌(受), 생각(想), 욕구 의도(行)들, 알음알이(識)은 恒常한가 無常한가?” “無常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여.”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觀察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M26, M109)
“자매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無常하며, 變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無常해서 變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永遠하고, 永續的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變하는 法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옳지 않습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無常하여 變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無常하여 變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 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안의 感覺場所들은 永遠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條件을 반연하여 그에 相應하는 느낌들이 生겨나고, 條件들이 滅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滅하기 때문입니다.”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이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는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洞察智)로 봅니다.”(M146)
6. 마음은 찰나생(刹那生, 찰나에 일어나고)하고․ 찰나멸(刹那滅, 찰나에 사라진다)한다
이 처럼 마음(알음알이)을 위시한 모든 法들은 無常하다. 그래서『증지부』에서는 특히 마음의 無常性을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法도 이렇듯 빨리 變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變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의 이 無常을 洞察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이다. 無常을 통찰할 때 우리는 苦를 절감하고 實體 없음(無我)을 體得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한결같게 이 無常 ․ 苦 ․ 無我를 解脫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하였으며 각각 무상(無相)解脫, 무원(無願)解脫, 공(空)解脫이라 불렀으며『화엄경』「정행품」등에서도 이 無相. 無願. 空․은 거듭 강조되어 나타난다.
마음을 위시한 諸法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카나(khaṇa, 刹那, 瞬間)로 정착이 된다. 찰나(刹那)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가장 큰 特徵 가운데 하나는 存在를 法들의 흐름(santati, 相續)으로, 刹那의 連續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위시한 法들은 일어나고 사라짐, 그것도 刹那生․ 刹那滅의 문제이다. 그것은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대승(大乘)에서도 많이 인용하는「가전연경」(S12:15)에서도 世上의 일어남을 보기에 없다하지 않고 世上의 소멸을 보기에 있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중(中)의 見解라고 하고 있다. 刹那는 초기불교의 도처에 나타나는 無常의 가르침과 法들의 일어남, 사라짐, 머문 것의 變化함이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흐름, 變化, 無常性, 刹那를 除去해버린 수행이 다름 아닌 사마타수행 혹은 삼매수행(三昧修行)이다. 삼매는 變하는 對相에서 變하지 않는 表象(nimitta, 니밋따, 이것은 法이 아닌 槪念에 속함)을 取해서 거기에 集中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특히『청정도론』18장부터 22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위빳사나는 變化와 無常을 注視하는 수행이다. 變化와 無常을 觀察해 들어가서 刹那를 만나고 이런 刹那生․刹那滅하는 法을 內觀하는 수행법이다. 諸法의 찰나생․찰나멸을 直視하여 每瞬間 무너지고 있는 法의 無常이나 法의 苦나 法의 無實體性을 直視하여 무너짐(解體)의 智慧(bhaṅga-ñāṇa)로써 ‘나’니 ‘내 것’이니 하는 存在의 속박(束縛)으로부터 벗어나 諸行에 대해서 평온(우뻬카, 捨)을 유지하는 지혜를 개발해서 道와 果를 증득하는 체계를 위빳사나수행이라 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刹那)는 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法을 洞察하는 위빳사나와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刹那)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게 된다. 刹那란 어떤 實體가 있는 것이 아니라 瞬間的인 흐름 그 自體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자가 사용한 아찰나(sub-moment)라는 술어는 서양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주석서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비담마에서는 아찰나(亞刹那)란 단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아찰나라는 단위를 인정한다면 다시 아찰나를 구성하는 아아찰나(亞亞刹那)를 인정해야 하고 다시 더 짧은 단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은 法의 無常․ 苦 ․無我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法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면서 존속하는 최소단위가 찰나이고 이것은 위빳사나의 대상이다. 그래서 법은 찰나(刹那)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7. 마음은 흐름이다
마음이 찰나생 ․ 찰나멸한다 라면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展開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초기경의 비유를 살펴보자.
“찟따여, 예를 들면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凝乳, curd)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ghee)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제호]가 되는 것과 같다. 우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응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 때에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
응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생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정제된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최상의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우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응유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D9)
이러한 마음의 상속(相續)은 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 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 이렇게 쉼 없이 상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根本原因인 갈애(渴愛)와 無明으로 代表되는 貪慾 ․ 성냄 ․어리석음(貪瞋癡) 三毒心이 다할 때 까지 거듭해서 흐르는[相續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佛敎學者)들이 無我라면 輪廻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答이 바로 이 마음의 흐름(마음의 상속)이다. 불교에서는 輪廻를 흐름으로 파악한다. 탐 ·진 ·치로 대표되는 수많은 心理現象들이 용틀임하며 흘러가는 것이 輪廻요, 바로 중생의 삶의 현주소이다. 이런 흐름을 편의상 과거 ·현재 ·미래나 전생 ·금생 ·내생이라는 틀로 부르지만 과거 ·현재 ·미래나 전생 ·금생 ·내생이라는 틀 그것은 實際로는 每刹那의 흐름일 뿐 過去 ·現在 ·未來나 전생 ·금생 ·내생이라는 實相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金剛經』에서는 過去心도 不可得이요, 現在心도 不可得이요, 未來心도 不可得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금강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마음의 흐름(citta-dhāra, 心流注, 18장 현장 역, 구마라즙은 心으로 옮기고 있음)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唯識에서도 아뢰야식(阿賴耶識)의 轉變을 흐름(srota)으로 因刹那의 消滅과 果刹那의 일어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튼 초기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에서 공히 마음은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지 결코 固定되고 不變하는 마음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8. 마음은 반드시 對相이 있다 - 對相이 없이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마음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상[對相(ārammaṇa)]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對相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눈과 形相을 條件[연(緣)]으로 눈의 알음알이[眼識]이 일어난다. … 마노(意)와 法을 條件[연(緣)]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이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8 등)
그리고 마음의 상속함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對相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마음(識)은 크게 여섯 가지로 일어난다. 모양(혹은 색깔)이 對相이 될 때는 눈의 알음알이[眼識]이, 소리가 對相이 될 때는 귀의 알음알이(耳識)이, 같이 하여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意(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이 일어난다.
한편 아비담마에 의하면 意識(마노의 알음알이)의 對相은 ① 感性의 物質(pasāda-rūpa) ② 微細한 物質(sukhuma-rūpa) ③ 이전의 마음(citta) ④ 마음부수들 ⑤ 열반 ⑥ 개념(paññatti)의 여섯 종류라고 한다. 이 여섯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이 여섯은『아비담마 길라잡이』319-321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여섯 가지 혹은 12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對相으로 하여 내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每瞬間 살펴서 害로움을 일으키는 對相은 피하고 利로움을 일으키는 對相을 向해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혹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통해 해로운 업(業)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業)을 일으키도록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9. 마음은 연이생(緣而起, 條件發生)이다.
연기(緣起) 혹은 연이생(緣而生)은 세 번째 논강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초기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도반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緣)으로 눈의 알음알이(眼識)이 일어납니다. 눈 형상 눈의 알음알이 이 셋의 和合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緣)으로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認識하고(sañjānāti, 想) 認識하는 것을 生覺하고(vitakketi, 尋) 生覺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papañceti, 戱論)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根據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들에서 그러합니다.
도반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耳識)이 일어납니다. … 코와 냄새를 조건(緣)으로 코의 알음알이(鼻識)이 일어납니다. 혀와 맛을 조건(緣)으로 혀의 알음알이(舌識)이 일어납니다. 몸과 감촉을 조건(緣)으로 몸의 알음알이(身識)이 일어납니다. 마노와 법을 조건(緣)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이 일어납니다.
“도반 사띠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 이 못됩니다. 세존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반 사띠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方便으로 알음알이는 條件 지워져서 일어남[緣起]한다고 설하셨습니다. 條件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설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는 그 비구들과 더불어 반문하고 대꾸하고 대화하였지만 그 삿된 견해를 완강하게 국집하고 고집하여 주장하였다.
“도반들이여, 저는 세존께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건너가고 윤회한다.'라고 설법하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 사띠를 데리고 세존께 가서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사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삿된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참으로 나는 많은 方便으로 알음알이는 條件 지워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條件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부덕을 생기게 하는구나.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그대는 긴 세월을 이익됨이 없고 괴롭게 될 것이다.” <중략>
“비구들이여, 마치 무엇이든 그것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그것에 의해서 用語가 생기나니 장작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用語가 생기고 지저깨비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지저깨비불이라는 用語가 생기고 짚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用語가 생기고 소똥을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用語가 생기며 왕겨를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用語가 생기며 쓰레기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엇이던 그 條件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에 依해서 用語가 생긴다.
눈과 형상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귀와 소리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귀의 알음알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코와 냄새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코의 알음알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혀와 맛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혀의 알음알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몸과 감촉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몸의 알음알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마노[意]와 법들을 條件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이라는 用語가 생긴다.” <중략>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고 나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생고피생/此生故彼生). 卽, 無明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識)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 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老死),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상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형상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心解脫과 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 느낌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取着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보고서, … 몸으로 감촉[觸]을 닫고서 … 마노로서 法을 分別하여 알고서 사랑스러운 法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法에는 혐오(嫌惡)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取着)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有]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老)과 죽음(死),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M38)
“왓차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條件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條件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내 앞에서 붙고 있는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燃料를 條件으로 붙고 있습니다.’라고.”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꺼진 그 불은 꺼진 後에 어떤 方向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그것은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하여 타올랐던 불은 그것을 다 써버리고 다른 연료를 供給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M72)
10. 고정불변(固定不變)한 마음은 없다
이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봤듯이 불교에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없다. 마음은 無常하고 實體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條件發生, 緣起)일 뿐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고정불변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外道)의 아뜨만(자아/自我) 이론이 되어버린다.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들의 무상(無常0과 고(苦)와 무아(無我)를 설하는 가르침이며 그래서 무상 ․ 고 ․ 무아 혹은 무상․ 무아․ 열반은 三法印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발제자가 마음은 무상이라고 하고 찰나생 ․ 찰나멸한다고 하고, 연이생이라 하고,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마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냐.’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하고 싶은 말은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생 찰나멸하고 흐름이며 연이생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말은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은 찰라찰라 흘러간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根本 原因인 渴愛와 無明, 貪瞋癡 三毒心이 있는 限, 우리가 意圖的 行爲(業)를 계속해서 짓는 限, 마음은 이러한 것을 條件으로 하여 쉼없이 連續的으로 持續的으로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限) 중생의 삶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이다. 갈애가 다 할 때 마침내 이러한 흐름은 끝이 나게 되며, 이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 하고 반열반(般涅槃)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마음의 무상이나 찰나생찰나멸이나 실체 없음을 강조하여 설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實體가 없기 때문에 每刹那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처해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11. 무상․ 고․ 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解脫)이다
그러면 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위시한 諸法의 무상․ 고․ 무아와 연이생(緣而生, 緣起)을 강조하셨는가? 무상․ 고․ 무아와 연이생(緣而生, 緣起) 이것을 통찰해야 해탈․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탈․ 열반은 무상이나 고나 무아의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주석서들은 강조하는 것이다.
초기경들에서는 오온(五蘊)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서 오온에 대해서 염오․ 이욕․ 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는 경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存在(5蘊․ 12處․ 18界)에 대한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열반을 강조하시기도 한다. 이처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마음을 위시한 一切法의 무상, 고, 무아, 연이생 등을 강조하신 것은 이러한 諸法의 보편적인 특징에 사무칠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계합하고 그것과 하나 되려는 발상을 가지면 그것은 觀念놀음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결코 해탈․열반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金剛經』은 자아[我相]니 영혼[壽者相]이니 인간(진인, 人相)이니 하는 것을 단지 산냐(saññā, 相, 想)일 뿐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론송 삼제계로 잘 알려진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시가명 역명중도의에서도 인연소생법, 즉 제법의 연이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득해야 공과 중도를 철견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유식에서도 식을 의타기로 이해하며 식전변을 연이생과 찰나생․ 찰나멸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몇 가지 초기경을 인용한다. “비구들이여,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서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탐하는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적대하는 잠재성향을 없애버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지한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서 무명을 버리고 영지를 일으키고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있다.”(M148)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에 눈에 집착하지 않고 형상들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미혹하지 않고 달콤함을 찾지 않으며 머물 때에 미래에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이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버려진다. 그의 육체적인 곤란이 버려지고 정신적인 곤란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성가심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성가심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열병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열병도 버려진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린다.”(M149)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어떠한 물질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洞察智로서 보아야한다. 어떤 느낌이든 … 어떤 인식이든 … 어떤 심리현상[行]들이든 … 어떤 알음알이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알음알이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洞察智로서 보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염오하고 느낌에 염오하고 생각에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염오한다.” “염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 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存在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取着이 없어져서 煩惱들로부터 해탈했다.(M109)
“보라, 아난다여. 그 모든 形成된 것[行]들은 지나갔고 消滅하였고 變해버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形成된 것들은 無常하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形成된 것은 견고(堅固)하지 않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形成된 것들은 安息을 주지 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모든 形成된 것[諸行]들은 염오하여야 마땅하며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하여야 마땅하다.”(D17)
한편 初期經들을 理解하는데 가장 바른 지침서로 알려진『淸淨道論』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일어나고 사라짐을 파악하여 흐름[相續]이 解體될 때 無常의 特相이 自己의 性稟에 따라 나타난다. 계속되는 압박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행동거지가 드러날 때 괴로움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견고함이 해체될 때 무아(無我)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 ① 無常이란 무더기 다섯 가지[五蘊]가 無常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變하는 性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變하는 것이 無常의 特性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짐이라 불리는 形態의 變化(ākāra-vikāra)가 [無常의 特相이다]. ② “無常한 것은 괴로움이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 가지가 괴로움이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압박받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압박받는 形態가 괴로움의 特相이다. ③ “괴로운 것은 무아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은 無我다. 왜 그런가? 支配力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支配力을 행사할 수 없는 形態가 無我의相이다.”(청정도론.21.3-5)
12. 무상․ 고․ 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먼저『청정도론』22장을 인용한다.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觀察로 일어날 때 [믿음, 삼매, 통찰지]의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무상이라고 [형성된 것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行]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포(恐怖)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空으로 나타난다.(Ps.ii.48)” 그들은 表象 없음, 願함 없음, 空함이라는 세 가지 解脫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없는 해탈(無相解脫)을 얻는다.
② 편안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 해탈(無願解脫)을 얻는다.
③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無我)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空)한 해탈(空解脫)을 얻는다.(Ps.ii.58)”
이처럼『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들에서는 무상․ 고․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無常은 무상(無相)解脫을 실현하는 관문이고, 苦는 무원(無願)解脫을 실현하는 관문이며, 無我는 공(空)解脫을 실현하는 관문이다. 이 以外에는 解脫․ 涅槃을 實現하는 方法이 없다. 그래서 法의 세 가지 特相인 無常․ 苦․ 無我를 洞察하는 것을 般若라고 하며 위빳사나라고 定義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정해진 열반이나 자아나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진리를 상정하고 그것을 체득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과 하나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觀念이나 相놀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해탈과 열반은 아닌 것이다.
13. 맺는 말
이상으로 간략하게 초기경에서 언급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음은 無常한 것이고, 그래서 괴로운 것[苦]이고,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찰나생 ․ 찰나멸로 규정하고 있으며 심찰나(心刹那)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런 전통은 유식(唯識)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이러한 無常한 마음의 生滅은 緣而生(緣起, 조건발생)이다. 마음은 모두 條件에 의해서 일어나고 條件이 소멸할 때 소멸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며(所緣緣) 앞 심찰나에 조건지워져서(等無間緣) 일어난다. 한편 마음은 과거의 심찰나에서 지은 업(業)의 결과로도 일어나는데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르며 이때 일어난 마음을 이숙식(異熟識, 과보의 마음)이라고 아비담마와 유식에서는 부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불변하는 실체를 세우면 그 순간 그것은 觀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리 그 實體 혹은 本體와 하나 되는 것으로나 그것을 直觀하는 것을 설해도 그것은 이미 觀念的인 것(산냐, 相, 想)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 열반을 체득하는 길은 오직 마음을 비롯한 一切法(有爲法)이 無常이요 苦요 無我요 緣而生일 뿐임을 이해하고 이러한 것을 지금 여기 내 안에서 분명하게 볼 때 실현되는 것임을 초기경들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에서 살펴본 마음은 無常이요 苦요 無我이다. 無常은 찰나생․ 찰나멸로 정리가 되고, 無我는 연이생(연기)의 다른 이름이며, 苦는 사성제의 고성제로 정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의 흐름일 뿐이며 마음에 不變하는 實體란 없다. 만일 固定不變이요 永遠한 마음이 있다고 生覺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집착(執着)이요 삿된 見解이다. 집착과 삿된 견해가 남아있는 한 깨달음도 해탈도 열반도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 정리 Crazy people | 2006.02.23 1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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