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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나의 근원은 어떤 존재인가?

장백산-1 2015. 6. 3. 16:35

 

 

 

 


자성, 나의 근원은 어떤 존재인가? |선어록과 마음공부
 

법상 | 2015.06.02. 22:16 http://cafe.daum.net/truenature/SArJ/1   

 

 

 

 

 


자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함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생멸이 없음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스스로 완전히 구족되어 있음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성이 본래 스스로 동요함이 없음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성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해 낸다는 것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육조단경]

 

육조 혜능스님께서 오조 홍인스님에게 금강경 법문을 듣다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구절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으시고는 一切의 모든 法이 모두 自性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아시고

이와 같이 오조깨 말씀드렸다.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

하기자성본불생멸(何期自性本不生滅)

하기자성본자구족(何期自性本自具足)

하기자성본무동요(何期自性本無動搖)

하기자성능생만법(何期自性能生萬法)

 

自性은 우주만물, 우리의 본래 성품을 의미한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그 '나'는 누구라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우리의 이해와 알음알이, 논리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헤아리고 측량하고 분별할 수 없는 것이 '나'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있지도 없지도 않은 '이것'을 方便으로 指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육조는 '이것'을 이름하여 '自性'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自性本自淸淨!

'나'라는 것의 本來的인 性稟, 卽 自性은 스스로 本來 淸淨하다.

자성은 본래부터 텅~비어 깨끗해서 티끌이나 망상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다.

 

탐진치 삼독에서 벗어나야 해탈이라고 하고,

번뇌와 분별망상에서 벗어나야 깨달음이라고

方便으로 말해지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의 本來 自性은

삼독도 번뇌망상도 분별도 없는

本來부터 텅~비어 청정하고 깨끗한 성품이다.

 

그렇기에 삼독과 분별망상을 닦아 없앨 필요가 없다.

애써서 수행을 통해 닦고 닦아 청정해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본래 텅~비어 청정하고, 본래 깨끗한 것을 더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번뇌망상과 분별을 타파해야만 本來 깨끗한 自性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닦아내지 않고, 티끌 번뇌의 먼지를 털어내지 않더라도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 모습 있는 그대로,

티끌 번뇌가 끊임없이 들끓어 오르는 바로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

본래 청정인 것이다.

 

번뇌망상과 자성청정은 둘이 아니다.

번뇌망상을 버려야 청정한 본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번뇌망상 그대로가 자성청정인 것이다.

 

自性本不生滅!

자성은 스스로 본래 생멸하지 않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죽고,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사람도, 동물도, 모든 생명도 태어나고 죽어가며,

문명도, 나라도, 물건도, 나무와 꽃도 생겨났다가 사라지며,

생각, 감정, 느낌, 욕망, 마음, 의식, 의지, 의도, 화, 번뇌 또한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진다.

세상 모든 것들(諸法)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겉모습에서 볼 때 그렇게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 처럼 보일 뿐

本來 自性은 스스로 전혀 생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생멸하는 그대로 생멸하지 않는 것이다.

 

생겨나고 멸한다는 분별하는 허망한 마음의 착각이 있을 뿐이지

본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自性本自具足!

자성은 본래부터 스스로 완전히 구족되어 있다.

하나도 모자라거나 부족한 것 없이 언제나 완전하다.

 

우리의 생각에는 나라는 존재는 부족한 것도 많고, 모자란 것도 많고,

완전해지기 위해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아 보인다.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성격도 더 좋아져야 하며, 더 지혜로와 져야 하고,

무엇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나아지고, 좋아지고, 벌고, 쌓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구족되어 있다.

정말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완전해져야 한다고,

더 많이 벌어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 나는 이렇게 완전하게 있지 않은가.

生覺과 觀念이 없다면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이렇게 있는 것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한가?

 

모든 것은 根源에서 완전히 갖춰져 있다.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그저 지금 여기 이 자리 있는 이대로 존재하면 될 뿐.

 

自性本無動搖!

자성은 본래 스스로 움직이거나 흔들림이 전혀 없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해 움직이고 행위하느라 바쁘다.

마음은 계속해서 요동친다. 작은 경계에도 깜짝 놀라 이리저리 헤메이고,

하루에도 셀 수 없이 계속해서 마음은 원숭이처럼 날뛰고 나댄다.

 

그러나 그렇게 끊임없이 요동치는 마음 가운데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것' 자성이 있다.

파도가 끊임없이 요동치더라도 심연은 언제나 고요하듯이

우리의 자성은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다.

움직이는 그것 그대로가 움직임 동요 없는 자리와 둘이 아니다.

 

自性能生萬法

자성은 스스로 세상 모든 것을 능히 창조해 낸다.

 

세상 모든 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상 만물이 제각각 다 다르게 보여지고 느껴지지만

사실 세상 그 모든 것들은 전부가 다  '이것'  '지금 여기 이 자리' '자성' 하나일 뿐이다.

一卽多 多卽一!

 

이것이 이 세상 모든 것들, 만법을 다 창조해 냈지만 단 하나도 창조해 낸 바가 없다.

이것은 만법을 다 만들어 내면서도 언제나 아무 일이 없다.

 

꿈 속에서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세계가 펼쳐지고 있을지라도

꿈을 깨고 나면 사실은 꿈 속 그 모든 것이 한바탕 꿈 속의 일이듯,

우주만물, 현실, 삶, 현상세계는 다만 自性, 이것이 꾸는 꿈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方便으로 이름을 붙여 보자면, 自性이다.

 

나는, 자성은,

본래부터 스스로 텅~비고 깨끗하여 오염되지 않으며,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이 구족된 완전한 존재이며,

움직임 없이 고요한 텅~빈 바탕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낸 근원이다.

 

자성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그대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것'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이것'이며,

느껴지고 생각하고 욕망하며 의식하는

그 모든 것이 '이것'이다.

 

번뇌와 분별망상이 그대로 깨끗한 자성이며,

나고 죽는 모든 것이 그대로 불생불멸의 자성이며,

부족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완전히 구족되어 있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들이 곧 고요한 적정이며,

만들어진 모든 것이 사실은 만들어 진 바가 없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분별망상이 곧 무심이며,

번뇌가 곧 깨달음이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가 그대로 이미 완전한 부처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있는 이대로를 제외하고

또 다른 완전한 나를 찾으려 하지 말라.

번뇌망상과 오염을 없앤 청정한 또 다른 완전한 나는 없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있는 이대로가

그렇게 찾아왔던 바로 '그것' '자성' '참나'이다.

 

이렇게 목전에 환히 드러나 있는

바로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여기 이 자리 있는 이대로가 그대로 그것이다.

 

더 이상 찾을 것은 없다.

 

지금 여기 당장에 바로 이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