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12연기-④ 識

장백산-1 2015. 10. 27. 20:00

 

 

 

                     12연기-④ 識--무명 속에서 살아야 하는 생명체가 만든 개념

                     이진경 교수  |  solaris0@daum.net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무한속도로 변하는 세계에서 생명체가 생존을 위해서는 동일한 것 분류·판단해야

식은 생명체가 삶을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낸 의지

 

대기도, 물도, 빛도, 온도도 無常한 變化의 흐름이고 신체의 움직임 또한 그러하다. 무한 속도로 변화한다.

무한 속도로 변화하는 세계, 그것은 말 그대로 카오스이다. 이 카오스로부터 사는 데 필요한 어떤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변화 속에서 반복되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그걸 단서로 반복되는 것 인근에 있는 것들을

포착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연의 변화를 되돌아오는 계절의 반복으로 파악하고, 비슷한 모습

으로 되돌아오는 것들을 ‘같은 동물’로 파악한다. 되돌아오는 것들을 연결하며 우리는 변화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통해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하며 살 길을 찾는다. 이는 무한 속도의 변화를 감속시키는 것

이다. 유한의 속도로 바꾸고 그 유한의 속도마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다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마다 하나의 像을 만들고 그림을 그려 보여주며 거기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는 이후에

유사한 상황을 만났을 때 판단의 情報 자원이 된다. 生命體들은 모두 나름의 방법으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것들을 하나로 묶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며, 그렇게 포착된 것들을 분류하고 연결할 것이다. 반복적으로

만나는 것들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무상한 속도를 적절하게 감속하거나 고정시키며 얻는 그때그때의 판단이나 그 자원이 되는 情報들을

식(識)이라고 한다. 혹은 그런 判斷이나 識別의 作用을 識이라고 한다. 識이란 無明의 카오스에 對處하면서

살려는 意志가 때로는 減速시키고 때로는 固定시켜 찾아내고 만들어낸 秩序다. 그렇지만 그것은 만들어지는

순간 무한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 무상한 세계와는 분리된 정지된 세계고, 변하는 무명의 세계와 거리를 둔

고정된 질서다. 따라서 그것은 실상의 어떤 요소들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실상과 분리된

것이란 점에서 ‘無知’를 함축한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점에서 必然的인 無知고 有用한 無知다.

 

識이란 無明 속에서 살아야 하는 生命體의 이 不可避한 意志와 行動으로 因해 發生한다. 무명의 세계 속에서

움직이고 헤엄치고 걷고 달리며, 장애물을 피하고 먹이를 찾고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놈을 알아보고 도망

치는 행동 속에서 형성되는 判斷能力이고 識別能力이다. 그런데 無明과 行을 條件으로 하여 發生하게 되는

이 識은 흔히 말하는 6識이 아니다. 6識은 6處(6入)를 條件으로 한다. 6처 없는 6식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12緣起에서 6處는 識 다음에 오는 名色을 條件으로 하여 存在한다. 따라서 識은 6處  以前

識이고 6識 以前의 識이다. 6處 以前의 識이란 대체 무엇인가? 약간 다른 얘기처럼 보이겠지만, 여기서

하나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2연기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생명체에 해당되는

것일까? 12연기에서는 육처가 있고 愛着과 執着이 있으며, 生死의 觀念이 있기에, 일단 生命이 없는 것,

6識이 없는 것들에겐 적용하기 어렵다. 기쁨과 슬픔의 感受 作用이나 愛着 같은 作用이야 動物에게선 대개

發見되는 것이지만 有와 無, 生과 滅의 觀念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植物이라면 어떨까? 식물에겐 감각기관이 따로 없지만 6식과 비교되는 감각작용은 존재한다.

빛을 향해 가지를 뻗고 다투는 것을 보면, 애착이 있음도 분명하다. 그런데 유와 무, 생사와 생멸의

관념이 있을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지각이나 촉각 등은 있지만 意識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

는데, 意識과 結附된 신체기관인 腦가 없다는 점에서 없을 거라는 추측이 지금은 더 설득력을 가질 것

같다. 그렇다면 유무나 생사의 관념이 있다고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의 과학적 지식을 활용한다고 해도 12연기가 적용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정확히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눈은 ‘중생’,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을 향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12연기를 衆生 全切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微生物이나 細胞的인 수준의 認識能力은 물론

식물이나 동물의 그것조차 알려진 바가 거의 없던 시대에 설해진 가르침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고통의 이유를 통찰하고자 했기에, 당시

로선 알려져 있지 않아서 명확히 말할 수 없었지만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의 행과 식에 대한 어떤

直觀的 洞察이 담겨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無明을 條件으로 하는 行도 그랬지만, 이를

특히 잘 보여주는 것은 六處 以前의 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다.

 

無明을 條件으로 살기 위해 무언가를 行하려 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박테리아나 아메바에서부터

곰팡이 같은 균류, 양치식물과 현화식물 같은 식물들, 그리고 인간과 다른 동물들 모두에 해당되는 것

이다. 따라서 行을 條件으로 發生하는 識은 이런 多種多樣한 衆生들 모두와 關聯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감각기관이나 그것의 작용이 있기 以前에 등장하는 識, 어쩌면 불합리해 보이고 6處의 作用을 다시 말

하는 듯 보이는 이 槪念은, 6처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의 識의 作用 一般을 지칭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식과 6처의 작용으로서의 6식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아귀나 아수라는 잘 모르겠지만,

박테리아나 아메바, 혹은 식물들조차 눈 귀 코 등의 6根이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6根이 없기에

識이 없다고 한다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識이 없다면 植物이 어떻게 때를 알아서 꽃을 피우고

잎을 떨굴 것이며, 혐기성 박테리아는 어떻게 酸素가 없는 곳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나 동물의 경우에도, 6식을 갖는 것은 유기체 수준에서다. 그러나 유기체만 識을 갖는 건 아니다.

細胞들도 나름의 識을 갖고 있으며, 세포 안에서 활동하는 세포소기관들, 심지어 유전자 안의 뉴클레오

티드들조차 識을 갖고 있다. 이 識들은 동물의 신체에 속하지만 6根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하는 識이다.

 

살아있는 것들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움직이려 하는 限, 그 자체론 알 수 없는 무명의 세계를 알려는

의지가 발동하게 마련이고, 그 알려는 의지에 따라 나름의 識을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行을 조건으로

발생하는 識은 인간이나 동물 ‘以前’의 識이고, 인간의 경우에도 세포적인 층위나 분자적인 층위에서

작동하고 형성되는 微視的인 識이다. 동물적인 유기체의 존재를 假定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가장 一般

的이고 가장 包括的인 의미에서의 識이다. 6處 以前의 識이란 최소한 미생물이나 세포적 수준에서 존재

하는 識의 作用, 따라서 6처나 6근을 갖지 않은 상태에서 작동하는 識의 作用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에

게도 존재하며(6식 이전의 식이고, 세포적 수준의 식이 그것이다) 인간 아닌 중생들에게도 존재하는

확장된 개념의 識이고 미시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識인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