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참사람, 인불사상(人佛思想)

장백산-1 2015. 11. 2. 13:33

 

참사람 결사문 [서옹 큰스님] | 무비스님의 인불사상(人佛思想)


佛乘 | 조회 26 |추천 0 | 2015.10.12. 23:42

 


[참사람 결사문]


세계 인류 여러분!

과학문명이 붕괴에 직면하고 인류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현대를 "참사람 원리"로써 극복하여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를 이룩합시다. 현대는 과학문명시대입니다. 이 과학문명에 기초적 원리를 제공해 준 철학자는

데카르트인데, 그는 모든 것을 疑心하였습니다. 그러나 疑心하는 自己는 存在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이 의심하는 자기, 卽 思惟하는 自己는 모든 認識 中에서 최초이면서 가장 확실한 인식이라고 하였습

니다. 이 의심하는 자기를 데카르트는 精神, 卽 意識, 卽 理性, 卽 悟性으로서 참으로 存在하는 것이라고 했습

니다.

 

그러면 이 이성이 확실한 존재라고 한다면, 이 이성이 명석판연하게 인식하는 물질도 역시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데카르트는 이 物質의 屬性을 延長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자연을 기하하적으로 처리

할 수 있다는 근대 자연과학적 입장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사유하는 정신과 정신에서 延長하는 물질만이 확실히 존재하는 실체로 여기어졌습

니다. 르네상스 이후 중세 기하학이 극복되고 인문주의가 개화함으로써 자연을 목적론적으로 설명하지 않

고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면서 人間은 自然의 主人이 되고 自然은 下人으로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물질은

암암리에 인간의 지배 意志와 깊은 비밀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지배한다는 이 의지는 인간의

欲望的 意志라고 할 수 있습니다.

 

쇼펜하우어는 觀念哲學者 헤겔에 反立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世界理性이 아니라 盲目的意志라고

했습니다. 이 맹목적 의지는 칸트가 말하는 이성적 의지가 아니라 生存하려는 欲望, 卽 自己 生命을

後世에 존손시키려는 욕망이니 食欲과 性欲을 말한다고 하겠습니다.

 

19세기말 포이에르바하는 플라톤에서 헤겔까지의 理性哲學을 非判하면서 人間을 움직이는 基本 原動力은

理性이 아니라 欲望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에서 니체가 포이에르바하에서 마르크스가 포이

에르바하에서 마르크스가 나오게 됩니다. 現代는 쇼펜하우어와 포이에르바하에서 始作된 欲望哲學의 지대한

影響을 받고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依食住에 대한 欲望을 人間의 主要한 欲望이라고 생각했으며 니체는 그 欲望의 本質은 權力欲이

라고 했습니다. 그 뒤에 프로이드가 나와서 기본적 욕망은 性欲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에서 槪括한 바와 같이 西洋文明은 理性的 人間에서 欲望的 人間으로 轉落하여 야만으로 복귀하고 있습

니다. 인류가 다시 야수적인 본능생활로 복귀하여 야만적인 투쟁의 결과로 초래될 수 있는 비극적 종말을 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現代文明의 病根을 치유해서 새 歷史를 創造할 수 있는 것이 人間主義를

超越한 '참사람주의'라고 確信합니다.

 

自覺한 사람의 참모습인 참사람은 有物에도 有心에도 無意識에도 하느님에도 부처에도 拘束받지 아니하여

전연상이 없이 一體相을 現成하나니, 현성함으로써 현성한 것에나 현성하는 자체에도 걸리지 아니하여 空

的으로는 廣大無邊한 世界를 형성하고 時間的으로는 永遠無限한 歷史를 창조하는 絶對主體의 自覺입니

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自覺이지 外部知覺의 對相으로도 內部知覺의 對相으로도 覺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自體가 그 自體에서 覺하는 能動的 主體입니다. 현대사회를 주장하고 있는 욕망철학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 인류는 멸망이냐 생존이냐 하는 문명사적인 限界狀況에 直面해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참사람주의"로써 이 상황을 활연히 타개하여 새로운 문명의 지평을 열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現代文明의 病根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그 치유책을 말해 보겠습

니다.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을 설명하는 중심원리는 이성이 아니라 욕망이며 그것은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곧 욕망이라 하게 되면 인간사회는 弱肉强食의 원리가 지배하게 되어 타락하게 되니 이것이

현대의 절망적 위기의 최대 화근입니다. 참사람 입장에서는 欲望的 人間이나 理性的 人間을 生死를 免할 수

없는 生死的 生命으로 봅니다. 이 생사적 생명이 절대 부정되어 크게 죽어서, 다시 절대 긍정되어 크게 살아

나는 데에 영원의 생명이 소생하는 참사람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이 경우 크게 죽음이나 크게 살아남은 모두

의 자각적 경험입니다. 이 경험은 시간적 공간적 경험이 아니라 時空을 超越해서 時空의 根源이 그 스스로

이룩하는 經驗이기에 主體的, 先驗的 經驗이라 하겠습니다.

 

이 참사람 生命觀은 시간, 공간을 초월한 영원의 생명관이니, 모든 인간, 모든 생물 나아가 대자연은 영원의

생명으로서 모두 절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과 대자연을 존중하고 보호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르네상스를 즈음하여 중세기 神律性에서 解放되어 人文主義적 자유를 누리며 역사를 창조

왔습니다. 그 結果, 현대에는 과학력, 집단력, 정보력의 과도한 발달로 오히려 인간이 거기에 結縛되어

主體性을 상실하게 되고, 자기 정신을 잃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참사람은 일체의 한정을 絶하고 형상을 絶할 뿐만 아니라 무한의 자기부정을 자유로 하는 것이므로 無라고

도 합니다. 이 무한의 자기부정 하는 無에서 무한의 능동적 적극성이 나오므로 주체라고 합니다. 이 주체는

무한히 자기 부정하고, 무한히 자기 실현하여 一切中에 자유자재하게 활동합니다. 이 根原的 主體的 참사람

은 세계를 형성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작용을 합니다. 능동적 주체로서 참사람은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

자재합니다. 우리가 이 참사람으로 살 때에 이 참사람은 현대 과학문명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인간생활은 번잡번망하기 짝이 없으며, 全 地球的으로 欲望哲學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욕망

대로 살아간다면 秩序가 파괴되고 社會가 혼란하게 됩니다. 더구나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家庭까지 파괴

되고 있으니 인류의 미래는 참으로 우울한 빛깔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사람 주의로 세계를 건설하고,

역사를 창조한다면 멸망에 직면한 인류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참사람의 근본구조는 인류를 관통하고 있는

보편적 일(一)과 개별적으로 분열되어 있는 다(多)가 서로 상호필수적인 계기로 되어 있습니다.

 

참사람은 일(一)과 다(多)가 불이일체(不二一體)이면서 거기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게 일다일여

(一多一如)하면서 역사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 참사람은 私心과 私利私欲이 없어, 진실하고 공명정대하

면서 한량없이 자비심이 저절로 우러나옵니다. 이러히 참사람 사회는 서로 信義를 지키고 서로 尊重하며

서로 도와 평화스러운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현대의 최대문제는 지구환경의 파괴와 생태계의 오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산성비라든가 오존층

파괴라든가 사막의 증대화라든가 공기오염, 강과 바다의 수질오염 등은 인류의 생존에 위협을 줄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과학문명의 원리바탕이 되고

있는 서양철학이 人間에 依한 自然 支配를 合理化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사람 입장에서는 인간과

대자연을 不二一體이며 永遠의 生命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과 자연환경의 關係에 대해 과거 조사 스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삼조승찬(三祖僧璨) 스님은 신심명(信心銘)에서 말씀하시길,

"진실 여여한 진리의 세계에서는 나도 없고 남도 없어라. 빨리 相應하고져 한다면 오직 '둘이 아니다'라고

하리. 둘이 아니고 모두 하나 뿐이니 포용하지 못할 것이 없구나." (眞如法界는 無他無自라 要急相應인댄

唯言不二니 不二皆同하야 無不包容이니라)


영가조사(永嘉祖師)는 증도가(證道歌)에서

"마음거울 밝게 비추어 걸림없으니 그 빛이 온 누리에 두루 하였네. 그림자인 삼라만상 지금 여기에 나타난

중에 한 덩이 둥근 광명 안팎이 없이 비추네."(心鏡明 鑑無碍하야 廊然瑩徹周沙界라 萬象森羅影現中하니

一顆圓明 非內外로다)


임제조사(임제조사)는 임제록에서

"광명이 온누리에 사무쳐 만법이 일여하다." (光透十方하야 万法一如니라)

"마음법은 형상이 없어 온누리를 꿰뚫어 통한다." (心法無形하야 通貫十方이니라)

"비로자나부처님세계에 들어가서 곳곳에 국토를 다 나투니라." (入毘盧遮那法界하야 處處皆現國土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조사 스님들은 참사람에게 있어서 인간과 대자연은 불이 일체요. 영원의 한 생명체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이 입장에서 인간이 대자연을 잘 보호하고 존중한다면 지구환경파괴와 생태계오염을 막을 수 있고

나아가 전 지구를 청정불국토(淸淨佛國土)로 장엄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 세계평화문제는 인류가 멸망하느냐 생존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물까

지도 전멸하느냐 생존하느냐 하는 절대적 위기의 문제입니다. 現代人들은 世界史를 發展의 觀點에서 보고

있는 듯합니다. 現在는 언제든지 모순대립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 모순대립이 무제한적으로 투쟁해 지양되

어 나가는 것을 이른바 발전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강력히 주장하는 것은 변증법적 목적론적 역사

관입니다. 그러한 경우 진실한 평화는 성취할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는 있을 수 없고 항상 미래

에 쟁취될 수 있다고 기대될 뿐입니다.

 

그런데 참사람에 있어서 平和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現在입니다. 여기에서 대립모순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 예로써 가정의 사랑을 들 수 있는데, 한 가정의 사랑은 미래에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恒常

바로 지금 여기 現在에 있으며, 여러 가지 가정문제 해결의 원동력이 됩니다. 가족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이것을 투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가정파탄이 올 터인데 가정애의 바탕에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絶對愛는 神만이 가지고 있고 인간은 신의 절대애에 依持하여 人人愛를 인간들

끼리 실천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인애는 신의 절대에에서 파생된 이차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사람은 절대애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本來로부터 慈悲의 主體입니다. 神의 絶對愛는

신과 인간간의 不平等한 主從的 關係를 前提로 하고 있지만, 참사람의 참사랑은 橫的 넓이의 平等이며,

縱的 깊이의 平等입니다. 참사람은 그 자체가 내용적, 실질적으로 광대심원한 공간과 같이 절대유일하면

서도 보편적 평등함입니다. 이와 같이 橫과 縱으로 平等한 것이 참으로 平等의 慈悲이며 無緣의 大悲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縱의 慈悲는 大安心의 境地이니 絶對根源的 人間의 主體입니다.

현재 세계는 세계화를 부르짓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국가라고 하는 것은 凡世界的인 根據에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는 별개의 입장에서 성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위한 국가가 아니라 도리어 국가

를 위한 세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가지상주의가 되어 만약 국가간의 이해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는 결국 국가이기주의로 나아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이기주의적 국가를 간섭하고 조정할 수 있는 초국가적 국제연합같은 것

이 있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에는 초국가적이라고 하는 국

제법도 국가이기주의의 한계 내에서만 효력을 발생할 뿐 최후에 가서는 권위를 갖지 못하고 결국 유린당

하고 맙니다. 세계와 국가의 관계는 전체와 개체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이상적인 조화를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세계 평화가 항상 위협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초국가적 기관이라고 하는 國際聯合은 현재의

'국가'라고 하는 것이 의연히 존속하고 있는 한, 量的으로는 모든 국가를 한데 엮어 놓았을 뿐, 質的으로는

개별국가의 국가이기주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채 오히려 국가이기주의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초국가적 기관은 현재의 국가들이 한 번 전일적 일(全一的一)로 돌아가서 전체적 일(全體的一)의 가운데로

해소해 버리는 근본적 부정이 있지 아니하면 본질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개별국

가가 절대주체로 되어 있었지마는, 이번에는 역으로 세계가 주체가 되어서 그 세계의 자기 한정으로 된 자

치기관 같은 것이 내부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어서 그것이 이른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국가'로 형성되

어져 나와야 합니다.

 

참사람은 절대적 주체로서 본래로 자비의 주체이며, 미래에 도달하는 자비가 아니라 즉금의 현재인 것입니

다. 그래서 참사람은 자비를 동기로 해 행위하게 됩니다. 인간의 참모습은 本來로 참사람이니, 모든 人間이

慈悲로 行爲할 때 이 地球는 종횡무진하게 자비의 網으로 包容된 세계가 됩니다. 그래서 이 현실세계의 폭력

성, 잔악서 실로 극악살벌한 공기를 일전하고 절대애인 자비로서 서로 포용하는 우애로운 세계를 건설합시다.

 

모든 사람들이 본래로 참사람이지마는 실지로는 참사람으로 전화되지 못하고 있다 하더래도 참사람다웁게

순응해서 행동함으로 세계평화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봉건제의 이념이었던 神中心主義가

붕괴하고 神信仰에서 人間信仰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곧 인문주의 시대가 도래하여 인간과 이성, 진보의

관념이 근대를 지배하는 신념이 되었습니다. 현대의 진보에 대한 신념은 과학의 발전에 의해 더욱 지지되고

있습니다. 생산력의 증대, 교통, 통신, 정보력의 비약적 발전으로 현대인은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고 신앙하

고 있습니다. 과학을 발전시킴으로 인간은 무한히 진보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근대주의자, 시민주의자, 미래주의자는 진보의 신념으로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지성인은 진보적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보수적'이라는 말은 '반동적'이라는 의미와 같게 되어- 반동이란 곧 진보와 반대되는

말로써- 악의 의미를 띄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의 후에 출생한 사람보다 뒤에 출생했다는 이유로

현명하다는 것이 진보사관의 논리적 결론이라 할 것입니다.

 

현재의 젊은이들이 나이 먹은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존경하지 않는 것은 이것을 反影하는

풍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과 이성의 진보의 신념을 가지고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신과학

운동가(New Age Science), 환경보호주의자(Green Power), 탈근대주의자(Post- modernist)를 비롯한 다

수의 지성인들이 주장하는 바 분명한 사실이 되고 있습니다.

 

結論的으로 인류역사는 역사창조 원리가 어떠한가 또 거기에 따르는 역사창조가 어떠한가에 의해서 興할

수도 있고 亡할 수도 있으며 發展할 수도 있고 退步할 수도 있습니다. 인류가 훌륭하게 잘 살려면 인간주의

도 초월하고 신의 노예로부터도 자유로이 해방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하고 活發한 無碍自在하며 融通

無邊한 참사람주의로 새 역사를 창조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참사람을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참사람에게도 걸리지 아니하며 호호탕탕(浩浩蕩蕩) 자유자재하게

되지는 못했더라도 참사람 誓願대로 순응해서 새 인류역사를 창조하여 진실하고 행복한 세계를 건설합시다.

 

----------

 

참사람 서원


첫째, 무상무주(無相無住)의 참 나를 깨달아 자비생활(慈悲生活)을 합시다.

둘째,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유자재하여 세계인류가 평등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역사를 창조합시다.

셋째, 자기와 인류와 생물과 우주가 영원의 유일생명체(唯一生命體)이면서 각각 별개이므로 서로 존중

하고, 서로 도와서, 집착함이 없이 진실하게 알고 바르게 행하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세계를 건설합시다.

 

---------

 

참사람 운동


1. 참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1995년 초겨울에 서옹 스님은 '참사람 결사문'과 '참사람서원'을 발표했다. 거기서 서옹스님은 참사람을

"자각한 사람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이렇게 부연했다. "참사람은 唯物에도 唯心에도 無意識에도

하느님에도 부처에도 구속받지 아니하며 전연 상(相)이 없이 일체상을 현성(現成)하나니, 현성함으로써

현성한 것에나 현성하는 자체에도 걸리지 아니하여 공간적으로는 광대 무변한 세계를 형성하고 시간적

으로는 영원 무한한 역사를 창조하는 절대주체의 자각(自覺)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스님의 설명으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스님은 되풀이해서 참사람을

설명한다. 직접 참사람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方便을 써서 우회적으로 참사람을 설명하기도

한다. 현대의 인간이 사는 현대문명의 병근(病根)을 설명한 것도 바로 그런 方便의 하나일 것이다.

 

서양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신이 만들어 놓은 존재이기 때문에 신에 의존해 종속적으로 살면 된

다고 생각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세계와 우주를 설명하는 데에도 유일절대자인 하느님의 존재를 내세

우면 간단하기도 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고 지배하는데 그냥 하느님만을 믿고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가 개화하고 인간의 이성이 크게 중시되면서 사정은 조금 달려졌다. 神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意志라도든가 欲望이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세계역사를

창조하는 것으로 믿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것으로 모두 완전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성욕이건 권력욕이건 명예욕이건 간에 인간의 욕망을 앞세우면 결국

투쟁이 불가피하고 그것은 또 비극적 종말이 기디릴 뿐이다.

 

참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성적 인간이건 욕망적 인간이건 상관없이 생사를 면할 수 없는 생사적(生死的)

생명일 뿐이다. 이에 반해 참사람은 생사를 극복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모습이다. 그러나 생명극복의 모습

은 시간적 공간적 경험이 아니라 주체적 선험적 자각적 경험이다. 그 생명관은 모든 인간, 모든 생물 나아가

대자연을 영원한 생명체로 인식하고 절대적 존엄성을 가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입장이니 만치 참사람은 과학력(科學力) 집단력(集團力) 정보력(情報力)등에 속박되어 주체성을 상실

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 정신을 잃어서도 안된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한정을 끊고 자신마저 자유롭게 부정

할 수 있어야 한다. 그ㄸ대 사람은 능동적 적극성을 가진 주체가 된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실현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참사람을 구조적으로 보면 인류를 관통하는 보편성인 일(一)과 개별성인 다(多)가 서로 상호 불이일체(不二

一體)이면서도 거기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일다일여(一多一如)하면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니 참사람은 사리사욕이 없고 진실하고 공명정대하며 한량없는 자비심을 갖는다. 서로 신의를 지키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도와 평화로운 세계를 이룩하게 된다. 그러니 인간이 인간을 속이고 죽이고해치는 범

죄와 전쟁과 수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환경파괴와 생태계 오염과 같은 인간과 자연간의 부조화와

마찰이 있을 수 없다. 인간과 대자연이 불이일체 곧 둘이 아닌 하나의 몸이며 영원한 한 생명이니 인간이

자연을 훼손하고 죽이는 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그런 참사람의 세계는 청정불국토(淸淨

佛國土)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대인은 세계사를 발전의 관점에서만 본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세계의 모순대립이 무한정 투쟁을

통해 지양되어 나가는 것을 발전이라고 하면 진실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변증법적 목적론적 요구를 가지

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곳에서 진실한 평화가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참사람에 있어서는 평화는

바로 지금 여기 이 자이 이 순간 현재에 있기 때문에 진정한 평화가 늘 있게 마련이다. 평화는 미래에 약속

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구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뿐더러 참사람은 절대애(絶對愛)의 주체이며 자비(慈悲)의 주체다. 기독교에선 절대애는 신(神)만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인인애(隣人愛)는 절대애에 기초한 인간사이의 사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참사람의 참사랑은

절대 유일하며 보편적 평등성을 갖는 주체적 사랑이다.

 

절대평등과 대지혜에서 나오는 자비심은 오로지 인간의 주체적 사랑일 뿐이다. 이렇게 참사람이 자비를 바탕

으로 행위하면 이 지구는 종횡무진으로 자비의 망(網)으로 둘러싸이 세계가 된다.폭력과 잔학이 지배하는 세

계는 가고, 우래롭고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참사람은 이렇게 자유자재로 활발발 무애자재(無碍

自在)하며 융통자재(融通自在)하게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참사람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명과 번뇌에 싸여 참된 자신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본래부터 자신이 참사람임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참선수행은 바로 자신이 참사람임을 깨닫는 데 목적이 있다.


2. 참사람의 연원

 하지만 서옹스님은 이때 처음으로 참사람을 거론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74년 10월에

서옹스님은 "서옹연의 임제록(西翁演義 臨濟錄)"에서 참사람에 대해 여러 번 되풀이해서 언급하고 있었

다. 그 책의 서(序)는 거의 참사람을 정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하다.

 

[장하고 위대합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든지 본래로 차별없는 참사람입니다. 이 참사람은 어떤 것입니까?

참사람은 눈 깜짝하지 아니하되 본래로 선과 악, 또는 이성을 초월하여 생사도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거기에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근본원리라든가 신이라든가도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도 없습니다. 여기

에는 무한한 자기부정(自己否定)만이 지속합니다...]

 

이같은 설명에서 보듯이 '참사람'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사람이로되

그냥 사람이 아닌 '참' 사람이란 이야기다. '참'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참사람이라 하면

'참으로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참사람'은 서옹스님이 처음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 이 책에서 서옹스님은 분명히 말한다.

"참나(眞我)는 절대 이율배반을 탈피한 자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 진실재(眞實在)인 참나,

진실재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한다. 임제스님이 말한 無位眞人

이다. 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임제(臨濟)스님은 일찍이 '무위진인(無位眞人)이란 말로서 참사람을

설명하고 있다. 그 근거를 "임제록(臨濟錄)"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임제스님이 대중에게 법문하시되

"붉은 몸 덩어리 위에 한 地位 없는 참사람이 있어서(赤肉團上 有一無位眞人) 항상 너희의 얼굴 門으로

드나든다. 아직 증명할 만한 근거를 깨닫지 못한 이는 주의하여 자세히 보아라"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어떤 것이 차별없는 참사람입니까(如何是 無位眞人)"하고 묻자 임제 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그 스님의

멱살을 움켜잡고 "일러봐라! 일러봐라!" 다그치니 그 스님이 망설이거늘 임제 스님이 밀쳐버리면서 말하되

"차별 없는 참사람이 이 무슨 말라비틀어진 똥덩어리인고" 하시고는 곧장 방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위에서 보듯이 서옹 스님의 참사람은 임제 스님의 무위진인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임제스님의 무위위진은

그 자신만의 전유물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각기 표현한 말은 다르되 그 의미는 한가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깨달음을 위해 1천 700공안을 들고 일로 정진한 일체의 조사들이 바로 그 한가지를

찾아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서옹스님은 이 책에서 역대조사들이 말한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6조 혜능(慧能)스님은 견성

(見性)을 역설하면서 성자(性字)를 많이 사용했다. 신회(神會)스님과 종밀(宗密)스님은 지지일자중묘지문(

知之一字衆妙之門)이라고 해서 지자(知字)를 말한 것은 性字보다 동태성(動態性)이 있다 하겠다. 마조(馬祖)

스님에 와서는 즉심즉불(卽心卽佛),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말해서 성(性)보다 作用의 뜻이 있는 心字

(心字)를 많이 사용했다.

 

마조스님부터 할 또는 방을 쓰고 손으로 때린다든가 발로 찬다든가 하는 대기대용(大氣大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백장(百丈), 황벽(黃檗)까지는 心字를 많이 사용했다. 임제스님에 이르러서 인자(人字)를 많이 사용

하게 되었으니 人字는 성과 지와 심보다 구체적이고 행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임제스님은 그 人을

無位眞人, 무의도인(無依道人), 무사인(無事人), 청법저인(聽法底人), 승경저인(乘境底人)이라고 말하며 보통

으로 말하는 人間과는 다르게 사용했다.

 

그러니까 서옹스님의 참사람은 임제스님의 무위진인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이다. 혜능의 견성한 사람,

마조스님의 마음을 깨친 사람, 백장과 황벽스님의 평상심을 가진 사람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참사람의 始源은 석가모니부처님에 이른다고 할 것이다. 혜능의 견성은 사실은

열반경(涅槃經)의 불성론(佛性論)에 그 근거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열반경은 佛身常住, 常樂我淨,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등을 설한 경전이다. 부처님법의 적극적 측면이 강조된 경전이다.

그 중에서 특히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思想은 불교의 根本思想이자, 다른 종교와 구분

되는 핵심적 사상이다. 일체의 생명 가진 것은 모두가 부처의 性稟(佛性)을 구비하고 있다는 위대한 선언

이다. 석가모니부처만이 부처의 성품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 가진 자가 하나도 빼지 않고 부처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만이 깨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一切 衆生도 성불할 수

있는 佛性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련해 원효스님은 "열반경종요"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범부와 성인은 그 성품의 차이가

없지만 그러나 범부와 성인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 다만 어리석은 자는 다른 것으로 보지만 지혜있는 사람

은 다르지 않음을 요달한것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은 부처와 중생을 구분하면서 스스로 자유와

평등을 잃고 평화를 포기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부처와 중생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는 이들이 다르지 않다

는 것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스스로 부처의 성품을 갖추었음을 알아채면 그는 이제 부처

이다. 그것을 혜능 스님은 견성(見性)이라고 했던 것이라고 볼 수있다. 이는 부처님 자신이 명상을 통해 깨

달음을 얻고 나아가 여러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한 내용의 핵심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부처님 탄생사에

나오는 이야기와도 결코 다른 내용이 아니다.

 

아기 부처님은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7步를 걸으며 한 손가락은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손은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一切皆苦 我當安之이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는 석가모니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人間存在의 尊貴性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밝히고 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고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수행을 통해 뒤늦게 부처가 되신 것이 아니라 부처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중생이 곧 부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태어남의

순간에서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 까지 지속적으로 잇고 있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따라서 서옹 스님도 "부처님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한 것은 '참나'의 인간선언입니다.

'참나'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이웃과 인류는 나와 同體가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