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응화비진분 / 선으로 읽는 금강경 / 무심선원

장백산-1 2015. 11. 25. 11:19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선으로 읽는 금강경/무심선원 

유당 | 2015.11.25. 06:14 http://cafe.daum.net/yourhappyhouse/FkcP/2284     

(금강경)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 반응하여 변화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 없는 아승지 세계에 칠보를 가득 채워서 보시하더라도,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마음을 낸 사람이 금강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남에게 일러주면, 법보시를 한 복이 저 재물보시 한 복보다 더 나으리라.

사구게를 어떻게 남에게 일러주는가?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늘 한결같아서 움직이지 않느니라(불취어상 여여부동/不取於相 如如不動). 무슨 까닭인가? 모든 유위(有爲)의 법(法), 즉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이 세상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경 말씀하시기를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여러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여러 세계의 하늘 사람과 세상 사람과 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들 매우 즐거워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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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가 다시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할 때, 앞에 나온 내용이 반복이 돼서 나오잖아요. 이처럼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데도 이상하게 지루하지도 않고 재미있고 자꾸 관심이 가고 호기심도 생기고 그러한 사람이면 이 공부를 할 만한 사람입니다.

법(法)은 딱 하나입니다. 이것만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 최대한 보여주고 행동으로 최대한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은 法이 아니라 方便일 뿐입니다. 우리가 方便이라고 하는 말, 행동, 개념, 관념, 생각은 法/眞理를 가리키는 도구이잖아요. 나는 물을 정말 마시고 싶은데 주스만 있으니까 주스를 마시는 것입니다. 사실 주스도 물이지요. 주스라는 方便으로 물을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분명한 것은 주스를 물이라고 하질 않지요.

 

그처럼 法을 모르면 물이 필요한데 물(法)을 찾는 대신에 다양한 주스(方便)을 찾게 됩니다. 수많은 주스들(방편들)이 다양하게 하나씩 장점을 가지고 제품으로 만들어집니다. 法은 그 하나 하나의 장점이, 어떤 것들이 나의 몸에 맞을까? 하고 찾는 게 아니라, 그 주스가 모두 물임을 알아서 물을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갈증이 없어지는 것이죠. 

 

이것도 아니, 道(法)을 깨치면 주스도 물이되는가? 아니면 주스를 물처럼 마신다는 말인가? 하고 또 분별심으로 무엇을 찾게 되지만, 지금 '물'하는 이것이나, '주스'하는 이것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물이나 주스가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몸도  물이 70%이지요. 역시 몸이랄 것도 없습니다.

 

인체에 수분이 조금만 모자라도 죽는데, 숨을 몇 분간 못 쉬어도 죽지요. 이 단순한 몸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개념, 지식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러한 자기의 생각 개념 지식에 막혀 자신을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몸보다도 법(法)은 더욱더 단순합니다. 그렇지않아요? 맨날 부처님이 말씀하시잖아요. 이름이 법일 뿐이다, 얻을 법이 없다, 지견도 없다, 느낌도 아니고, 법이랄 것도 없다, 不取於相 如如不動, '相'을 취하지 않으면 늘 여여하다, 변함이 없다, 변할 수가 없지요. '相'을 取하지 않는데 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영원히 늘 이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텅~빈 바탕 이 자리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本來의 모습이고 本來의 性稟이고, 이것이 生命이고, 佛性이고, 근본성품이고, 모든 말을 다 이것에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相'을 取할 수 없는 것이니까.

 

무슨 까닭인가? 모든 유위의 법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모든 유위의 법은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法을 모르면 이렇게 안 됩니다. 이렇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도 결국에는 이렇게 세상을 보는 것이 안 됩니다. 저 히말라야산에 가면 성자가 많다던데, 히말라야에 살면 혹 그렇게 세상을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세상을 보는것은 生覺으로 만든 妄想입니다.

 

우리가 生覺하는 '習', '業'이라는 것은 有爲로 만든 法입니다. 그런 '습', '업'을 있다고 生覺으로 자꾸 만들면 습, 업은 있는 것이 됩니다. 생각, 의식의 힘 덕분입니다. 우리가 그 의식에 계속 밥 즉, 에너지를 주는 것이지요. 그 의식에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앞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난 오쇼 라즈니쉬가, 저녁에는 금식을 해야되는데, 친구들과 산행을 하다가 점심도 못먹고 하도 배가 고파서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안돼서, 저녁을 먹었잖아요. 벌 받았지요. 밤새도록 토하고 물 한 모금도 못 먹었지요. 아니, 같이 더 많이 먹은 다른 친구들은 다 괜찮은데, 왜 자기만 벌을 받는가? 거기서 그는 의문을 품었습니다.

 

또 法을 체험해도 당장에 이렇게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제가 겪고 있는 일이니까요. 비유를 든다면 마치 나무가 한 껍질, 한 껍질 벗겨나가는 그런 것 같습니다. 그 한 껍질 벗겨나가는 동안에 내가 가지고 있던 '相'이 또 發見이 되는 것입니다. 세밀하게, 그전에는 보이지 않던 相들이 자꾸 떨어져 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익숙하다는 표현을 하는데, 익숙해진다는 표현보다는 자신의 견해가 없어지고 '나'라고 할 게 없으니까 내가 만든 유위법(有爲法),즉 '망상(妄相)'이 같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다만 이것뿐입니다.

 

아이에게 술을 억지로 먹이면 안되잖아요. 처음에는 끓인 물을 식혀 먹이고, 주스, 우유 다 먹이고, 다자라서 성인이 되면 술도 먹고싶으면 먹는 것처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면 '모든 有爲의 法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有爲의 法인 이 世上 모든 것들을 저절로 이렇게 이렇게 보게 됩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해서 좀 더 빨리 法을 알고, 더 열심히 해서 法이 명확하고, 더 많이 배워서 法에 대한 지식이 많아지려고 노력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有爲의 法일 뿐입니다. 그렇게해서 남을 가르쳐봐야 결국은 그 가르침이 자신의 業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일러줄 수 있으려면, 적어도 일러줄 '남'이 없어야합니다. 늘, 언제나, 다만 이것뿐이여서 오로지 이것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보여준다는 것도 生覺이죠. 모든 게 다만 이것 뿐인데,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안 들을 수가 없고, 지금 이 순간 여기이 자리, 텅~빈 바탕자리가 다 보고 다 듣고 다 말하고 다 생각하고 있잖아요. 생각을 굴리지 마십시오. 다만 이것, 지금 여기 이 순간 텅~빔 바탕 이 자리뿐입니다.

 

밑에 眞言이 나오네요. 나모바가발제 발라양 바라이다예  암 이리저 이실리 수로다 비사야 비사야 사바하 무슨 말입니까? 眞言이면 眞實한, 진짜 말인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읽을 줄은 아시죠? 이것입니다. 뜻도 풀이하신다고요? 역시 이것입니다. 쓸 줄도 아십니까? 역시 이것입니다. 외울 수 있습니까? 역시 이것입니다. 읽어도 모르겠다고요? 저와 같군요.이 또한 이것입니다. 다만 이것뿐입니다.

글자에 있는 意味를 절대로 찾지 마십시오. 진실은 이 글자에 다 포함되어 있지만 진실은 절대로 모양에 뜻에 相에 色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모양과 뜻을 뺀다면 무엇입니까? 이것입니다.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