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돌아온 9살 은석이가 현관문을 들어서며 엄마를 부른다. “엄마, 목 말라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주는 엄마와 은석이가 작은 실랑이를 벌인다. “아니, 맹물 말고 시원한 콜라주세요.” “목마르면 물을 마셔야지 콜라는 안 좋아.” “물은 맛없어서 싫단 말이야.” “알았어, 콜라 줄게.” 물이 좋다는 엄마와 콜라를 원하는 은석이는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엄마가 양보를 한다. 아이들은 왜 건강에 좋은 순수한 맹물보다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탄산수나 이온음료에 길들여져 가는 걸까?
개발로 맑은 물 갈수록 사라져 탄산음료 고집하는 아이에게 포기말고 물 의미 알려나가야
마트의 상품진열대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무색의 비슷비슷한 물병들에 비해 근사하게 늘어서 있는 화려한 용기들, 이 안에 먹음직스런 색깔의 음료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여 어른도 피해가기 어려운 상황을 어찌 아이들이 매혹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물처럼 맛있고 좋은 것은 없다는 사실은 갈증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물은 인체를 구성하는 중요 요소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의 열 달을 양수라는 물속에서 성장하고 생명을 유지한다. 이는 곧 인류의 태초 생명이 물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Thales)가 이를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고 표현했듯이 인간과 지구를 구성하는 물 비율이나 성분은 같다. 즉 성인의 몸에서 약 73%, 아기는 약 82%가 체액이니 인체의 약 2/3가 수분인 데 지구상의 육지와 바다의 비율도 이와 같다. 지수화풍의 사대요소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에서 물의 성분은 혈액 침 오줌과 같은 수분으로 저장되어 있다가 인체의 소멸과 함께 근원인 자연의 수분상태로 되돌아간다. 물의 순환은 마치 인체 내의 동맥과 정맥의 순환작용처럼 자연과 인간을 통해서 되풀이 된다는 점이 인간과 지구가 서로 공존하며 조화롭게 살아가야할 이유다.
예전에는 어딜 가도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려 목이 마르면 두 손으로 흐르는 냇물이나 계곡물을 떠 마시곤 했었는데 문명과 개발은 우리 국토의 맑은 물을 오염시켜 이젠 정수하지 않으면 마실 수 없게 되었다. 그 대신 우리가 오염시킨 물을 다시 정수하느라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비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우리는 발전이라고 하니 옛 추억이 새삼 멀게만 느껴진다.
부처님은 중생의 무지로 인한 해악을 ‘앙굿따라니까야’의 ‘바라문의 품’에서 이렇게 지적하셨다.
“바라문이여, 어리석음으로 인해 미혹하고 어리석음에 정복되고 마음이 사로잡히면, 자신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타인의 이익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합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면 지혜로운 판단은 사라져 모두를 해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그런 어리석음을 배우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되며 서로를 이익 되고 더불어 살도록 안내해야 한다. 이때 토론식 대화는 매우 유용하다. “물과 인간의 관계는? 깨끗한 물과 오염된 물의 차이는?” 등 질문만 가지고도 부모와 자녀는 많은 대화를 나누며 아이에게 물의 소중함과 왜 물을 깨끗이 사용해야만 할까를 깨우쳐줄 수 있다. 물은 자정능력이 있어 사람들이 버리는 각종 오염물도 묵묵히 수용, 정화하지만 오염수치가 정도를 넘으면 물은 감당을 못해 병이 드니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들도 따라 병든다.
불교의 자비정신은 이들 생명들을 가엾이 여겨 매일 아침 목어(木魚)를 쳐서 물속에 사는 여러 생물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덜어주는 사찰의식으로 승화시켜 실행한다. 이런 자비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어 깨끗한 물 관리와 물속에 사는 생명체를 귀히 여기는 인격을 가꾸도록 돕는 사람이 부모다.
황옥자 동국대 명예교수 hoj@donggu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