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 이 일.

장백산-1 2016. 11. 6. 17:18

서장 대강좌 제 1 - 4 강

 

조칙으로 쌍경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윈오의 訃音(부음)이 왔다. 은사 스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왔다는 말입니다. 선사는 스스로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그렇지요. 꼭 거기까지 안 가도 스승이 돌아

가셨다면 스스로 자기 있는 자리에서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小參法門(소참법문)이지요. 저녁에 법문을 

하는데, 자기도 한 회상을 가지고 있고, 또 제자들도 많은데 자기 법사 스님이 열반 하셨다는데 한 마디 

없을 수가 없지요.

 

불교는 이 生死解脫(생사해탈)의 문제가 第一의 課題입니다. 생사해탈이 제일 과제라고요. 깨달음도 생사

를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이거든요. 깨달음과 생사해탈은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一大事因緣(일대사인연),

이 일. 그냥 이 일이라고 그래요. 이 일이라고 하면 깨달음. 생사해탈 문제가 다 포함 되어요. 그래서 여기

서 이 중요한 문제를 이 기회에 말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 정말 야무지게 들으시기 바래요. 어떤 스님

이 장사 스님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장사 스님에게 묻되 ‘남전 스님이 돌아가심에 남전 스님도 훌륭한 스님

입니다. 개인 인적사항은 여러분들이 알아서 공부하시고. 남전스님은 어디를 향해 갔습니까?’ 중요한 문제

지요.

  

남전 스님이 돌아가신 것은 놔두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죽은 후 어디를 향하여 갔습니까? 경전에 혹시 나와 

있는 이야기 없어요? 우리의 제일조사 석가모니 부처님은 돌아가신 뒤에 어디를 향해 갔는가? 이 물음에 

어느 누가 한 사람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장사가 대답하기를 여기 대답이 나옵니다. ‘동쪽 마을에서 노새가 되고 서쪽 마을에서 말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道 잘 공부한 사람이 그냥 보통 사람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축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축생이 되

었다는 표현이지요. 그 스님이 장사스님에게 묻기를 ‘그 뜻이 뭡니까?’ 하니까 장사 스님이 대답하기를 축생

이 되었으니까 ‘타고 싶으면 타고 내리고 싶으면 내린다’고 하였다. 축생은 그렇지요. 타고 싶으면 타고, 내

리고 싶으면 내리고... 축생의 삶이란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한꺼번에 묶어서 이야기합시다. 죽음과 삶의 문제입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를 행장에서 짚고 있

어요. 네 가지 인데...


경산 같으면 곧 그렇지 않겠다. 경산은 대혜 스님 자신이죠. 만약 어떤 스님이 묻되 자기 법사스님. ‘원오 

선사가 돌아가심에 어느 곳을 향하여 갔는가?’ 사찰에서는 이런 식이 관례입니다. 누가 죽으면 그 죽음의 

根本을 들춰서 제대로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기기서 한수 더 뜹니다.  ‘아비지옥을 향해

갔다.’ 자기 법사스님이 아비지옥을 향하여 갔다고 말합니다. 법제자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 뜻이 무엇입

니까?’ 라고 물으면 아비지옥에 갔으니까 ‘배고프면 구리를 먹고 목마르면 쇳물을 마신다.’고 하겠다. 지옥

생활이 그거니까요. 지옥에는 쌀로 밥하는 것 필요 없어요. 그것이 안 통해요. 지옥에서는 끓는 구리가 밥

입니다. 끓는 구리물. 끓는 쇳물이 식사라고요. 당연지사입니다. 너무 평범한 일이라고요. 또 저 앞에서 축

생이 됐다. 소나 말이 되었을 때 타게 되면 타고, 짐을 싣게 되면 싣고, 그냥 가게 되면 그냥 가는 이것이 

보통 축생의 삶입니다. 축생의 당연한 짓입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요. 똑 같습니다.

  

‘도리어 구원(救援)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하기를 ‘구원할 사람이 없다.’ 고 하겠다. ‘왜 그렇

습니까?’ ‘구원 이것이 이 늙은이(원오 스님)가 일상생활에서 차 마시고 밥 먹는 일이다.’하겠다. 이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고 佛子가 이 생과 사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이런데서 견해를 확실하게 세울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그 전에 어느 사찰에서 신도회장님이 불교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이 참 많아요.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

로 알고 있는 질문을 하더라고요. 어떤 큰스님, 그때 큰스님들이 돌아가시는 것을 많이 봤어요. 그 스님이 

돌아가신지가 벌써 몇 십 년이 되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서 교화를 한다느니 

어쩌느니 그렇게 질문을 하는데 그 큰 스님 지금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과거에 수많은 道人들이 지금 한 

번이라도 그 道人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서 지금 이렇게 내가 교화를 하노라는 사람이 있느냐? 고 묻더라

고요.

  

지금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전생소급 하는 최면술 걸어서 비정상적인 그런 식으로 

우리가 견강부회해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순리적으로 자연스럽게... 禪의 7大 精神이 있었지

요? 저절로 그러함, 즉 自然이에요. 저절로 그러함, 自然이 禪佛敎의 特徵입니다. 그리고 偉大함입니다. 

죽어서 없으면 그냥 죽어서 없는 그대로입니다. 죽어서 어디를 향해 갔는지 무슨 因緣으로 다시 이 세상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있는지를 지금 알 바가 아닙니다. 글쎄 그것을 알면 우리 생활이 조금 달라질까요

? 그것을 알아서 생활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가지고는 크게 보탬이 안 돼요. 상당히 보탬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축생이 되고 지옥에 갔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道人이 죽어서 축생이 되고, 지옥에 갔다. 이대로 있는 액

면 그대로 우리가 봅시다. 축생도 되고 지옥에 갈 수도 있지요. 축생이 되고, 지옥에가서 그렇게 살면 그

냥 그 축생의 삶, 지옥의 삶 그대로입니다. 축생이 되어 살아도 그 축생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니까 사람 中心으로 생각해서 아이고 축생이 되면 되느냐고 그렇게 생각하지요. 축생이 되어 보라고요. 

얼마나 좋은지.. 축생도 그대로 살만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 하니까 축생의 삶, 지옥의 삶이 이상

하지요. 지옥도 살만합니다. 인간 입장에서 축생과 지옥을 보니까 축생과 지옥이 아주 고통스럽고 힘 드

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旣存의 地獄이라고 하는 觀念은 사람들을 선도하기 위해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별의별 方便의 말이 많지만

  

사실은 모든 生命의 根源의 立場에서 가차없이 표현한다면, 지옥의 삶도 그 나름의 삶이요. 축생의 삶도 그 

나름의 삶이요. 성인의 삶도 그 나름의 삶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석가모니 같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석가모니 같이 될 필요도 없고 되지도 않고요. 各者(각자)가 각자의 본래모습 을 아는 것을 成佛이라합니다. 

사람들 모두가 여기 올라와서 저처럼 강의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이치는 있을 수가 없잖아요.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임을 받았으니 이 소임 다 하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앉아서 들

으면 듣는 역할 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완전무결 하지요. 완전무결합니다.

  

제가 어느 날, 저 혼자라고 생각 하니까 세상 편하더만... 아파도 이 세상 모든 것이 아픈 것이다. 比較 않으

니까... 건강할 때도 비교 안하고, 다른 사람들 건강한 사람들 비교 안하고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마음 전부 다 놓아버리니까요. 놓아 버리면 놓아져요. 전부 다 놓아 버리니까 아주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그냥 나 혼자. 나 혼자라고 하는 事實. 진짜 혼자는 외롭지 않습니다. 외롭다고 生覺하는 것은 相對的으로 

生覺했을 때, 혼자라서 외롭다고 착각하는 것이지 진짜 완전히 혼자 絶對的인 境地에 들어가면 외롭고 그런 

것 없어요. 말을 하자니 편하다고 그러지, 절대적인 경지에서는 편한 것도 아니지요. 안 편한 것은 더욱 아

니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참 민감한 문제이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가 불교를 접하면서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 그것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니까 물었을 것 아닙니까? 과거

부터 죽은 이후의 문제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온데로 갔다고 어느 분이 말씀하셨는

데 그 온데가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지요. 전설에 의하면 도솔천 內院宮이라고 그랬지요. 그것은 傳說이고. 

온데로 갔다는 말은 정답은 정답입니다.


그렇지만 모르겠어요. 죽어서 어디로 가도 상관없어요. 어디로 가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대단히 위험천만한 

말이면서 중요한 말이고, 지금 여기 있는 대로는  그대로 이야기입니다. 절대 달리 설명 아니 해요. 그것이 

세 번째 문제이고, 그 다음에 귀양살이를 상당히 했어요. 제가 대혜 스님께 부러운 점이 부처님 신도보다도 

당시의 지성인들 정말 최고의 지성인들을 거의 망라해서 대혜 스님의 신도가 됐다. 그러다 보니까 정치인들 

하고도 휩쓸리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15년 동안 귀양살이도 했던 이야기가 쭉 있습니다.

 

15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나서 돌아왔습니다. 효종원년에 명월당에 있었는데, 하루 저녁에는 대중이 별 

하나가 절 서쪽으로 떨어지는데, 그 흐르는 빛이 밝은 것을 보았다. 대혜 스님이 약한 아픈 증상을 보이다

가 8월 9일에 대중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내일 갈 것이다.” 하더니, 이날 저녁 五鼓(오고)에 손수 임금께 

드리는 글을 쓰고 아울러 대중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이것 보세요. 당신이 돌아가시며 임금께 글을 써야할 정도로 사회적인 비중이 높았던 분입니다. 그 당시의 

사대부들. 최고의 지성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고 그 들을 가르치고 교화 했다고 하는 것 참 누구도 이런 스

님 같은 사람은 없었어요. 신수 스님 같은 이가 다섯 명의 천자의 존경을 받았어요. 王師(왕사) 같이 모셨어

요. 그런 존경을 받았어도 대혜 스님 같은 이런 신도는 없었어요. 대혜 스님은 대단한 분입니다.

  

요현 스님이 임종게송을 청하니 선사가 크게 써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열반송의 문제입니다. 행장에서 네 

가지 문제를 제가 짚었는데 마지막으로 열반송의 문제입니다. 이런 명 열반송은 세상에  없습니다.


生也祇麽(생야지마)며 死也祇麽(사야지마)어늘 有偈無偈(유게무게) 是甚麽熱(시삼마열)고.

사는 것도 그저 그렇고 죽는 것도 그저 그렇다. 임종게송이 있든 없든 뭘 그리 마음 쓸일이 있는가?

熱자는 마음 쓰는걸 말합니다. 안달 하는 마음. 요현이라는 스님이 “아이 스님, 우리 체면도 있지 열반송

(임종게) 하나 남기고 돌아가십시오. 그래야 장례식 할 때 써 붙일 것 아닙니까?” 이것이 그 때도 있었는데 

지금도 계속 있네요. 지금도... 지금도 열반송이 없으면 조작으로 지어서라도 붙여놔요 또...

  

열반송이다 해서 그거 짓느라고 어떤 장례식에 가면 저 보고 지어 달라고 생혼이 나는 수도 있고 그래요. 

하하하 이때에 8백 몇십 년 전에 요현 스님이라는 이가 다 죽어가는 스승 스님보고 게송하나 써 내라고, 

써 내라고 안달하고 이러고 있는 겁니다. 대혜 스님 통장이라도 많이 가지고 있었던가... 통장이라도 가지

고 있었고, 밭문서 집문서라도 가지고 있었던가 뭘 그리 열반송을 얻어 내려고 졸라요. 그 쯤 되면 삶이라

는 것도 그저 그렇고, 祇麽(지마)라는 말이 그저 그렇고 그렇다는 뜻입니다. 죽음 이라고 하는 것도 그저 

그런 겁니다. 지금 이 죽음의 순간에 와서 삶이니 죽음이니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삶과 죽음 거기에 

부속품 그야말로 딸린 부속품 중에서도 눈에 띄지도 않는 부속품인 그 까짓  열반송 그것 하나 게송이 

있든 없든 뭘 그리 안달하는 마음이냐. 내가 지금 숨을 거둘 판에...  뭘 그리 그깐 임종게를 내 놓라고 

하느냐. 참 근사 하지요. 참 멋진 게송입니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아주 재미있는 열반송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무 말이 없어”라는 열반송이 있어

요. 그 열반송이 왜 생겼느냐? 스님이 돌아가신 겁니다. 상좌들이 여럿이 모였어요. 가장 가까운 상좌 보고, 

네가 열반송 하나 얻어 내라, 얻어 내라고 옆에서 자꾸 조르니까 지키고 있어요. 뭐 나오기를 기다리며 지

키고 있는데, 거의 돌아가실 무렵입니다. 옆에 다른 제자들이 물었어요. “야 뭐라고 했느냐?” 하니까

“아무 말이 없어” 라고 그러니까 그 다음 사람이 얼른 외워서 스님 열반송이 “아무 말이 없어” 하하하하하

근사하지요. 그런 열반송도 있습니다. 게송 써내라니까 지금 죽기 바쁜데 언제 말할 겨를이 있나요. 그래 

아무 말이 없거든요. “아무 말이 없어” 이러니까 “아무 말이 없어”라고 했는 줄 알고는 “아무 말이 없어”라

고 했다고... 열반송의 문제 재미있지요. 우리 집안에 아주 특유한 풍속이면서 재미있고 또 좋은 일입니다.

  

저는 아까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했으니까 저도 열반송이 있어요. 제가 이것을 보다가 문득 하나 지었어요. 

아예 오늘 공개 해 버리지요. 죽는 거야 언제 죽든지 그 까짓것 무슨 상관있나요?

"육신이라는 장난감 그 동안 잘 가지고 놀았다. 이제 버리고 간다. 시자야 그만 갖다 태워라."

이것이 저의 열반송입니다. 괜찮지요. 이거요. 죽을 고비 안 넘기면 이런 말 못해요. 나중에 진짜 죽을 때

는 제가 정신이 없어서 못 쓰니까  하하하하 죽을 때는 못 쓰니까 지금 미리 이렇게 공개적으로 알려 놨으

니까 저의 열반송을 못 찾아서 애 먹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하고 75세 법랍 58년에 돌아가셨지요. 임금이 애도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시호를 내리기를 普覺

(보각)이라 하고 탑명은 普光(보광)이라고 하였다. 이 스님의 어록이 80권인데 대장경 속에 들어가요. 대

장경 속에 들어가서 세상에 유행하게 됐고, 이 서장은 워낙 우리 공부 지침서로 뛰어나기 때문에 살아생

전에 출간이 됐고, 당나라를 거쳐서 송나라 때니까 교류가 빈번한 때 이므로 지금부터 불과 8백 4~50년 

된 때이니까요. 바로 우리나라에 도입이 되어서, 普照 스님께서 이것을 스승으로 또는 벗으로 삼고, 정혜

결사를 하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오늘 지금 이 순간 까지 최고의 선불교 지침서의 원조로 이렇게 인기

가 높고,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통해서 선불교의 바른 길을 가야된다고 생각하고, 인재개발원에서 이런 

것을 아주 시기적절하게 교재로 선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