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청국 조계지에 문을 열었던 ‘스튜어드호텔(怡泰樓이태루)’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두 번째 호텔이다. 최초의 호텔은 대불호텔이다. 스튜어드호텔의 표지석이 인천화교협회 회의청 앞마당에 보관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표지석은 100년이 넘었다. 인천의 역사를 담고 있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표지석에는 ‘華商 怡泰地界’라고 쓰여져 있으며 회의청 앞 마당 수풀사이에 가려져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호텔인 대불에 이어 두 번째 호텔
스튜어드호텔의 원래 자리는 중구 한중문화관에서 올라와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길목이다. 지금 본토(本土)라는 중국집이 있는 자리다. 본토 자리에 있어야 할 ‘怡泰地界’ 표지석이 언제부터 인천화교협회에 보관중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이태루를 운영하던 중국인 양기당(梁紀堂)이 인천화교협회 2대 회장(1919~1928)을 지냈던 인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양기당은 오랫동안 화교협회 회장을 지냈다.이태라는 이름은 세간에는 이 호텔을 운영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져있으나 잘못된 사실이다. 이태는 알려진 것과 달리 상호명이고, 이태를 운영했던 사람은 중국인 양기당(梁紀堂)이었다.초기자료에 따르면 당시 호텔의 아래층은 잡화점으로 위층은 호텔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조선안내’(1891)에는 이 호텔의 객실 수가 3개로 나와 있으나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는 객실수가 8개였다고 적고 있다. 어느 시점인가 건물을 증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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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사진으로 추정되며 오른쪽 3층 건물이 스튜어드호텔이 있던 자리다.(사진 화도진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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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여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저서에 호텔 기록
이태루는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2년 발간된 ‘최근의 인천’을 보면 인천지역 여관의 명단에 ‘이태잔(怡泰棧)’이 수록되어 있다.이태루는 개항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주요 인사들이 숙소로 사용하면서 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의 저자 버드 비숍은 1894년 2월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이곳을 숙소로 삼았다. 비숍은 당시 스튜어드호텔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태호텔은 손님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호텔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이 호텔은 중국인구역의 중심가 끝에 자리했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거리도 한눈에 내려다보였으므로 아주 생동감이 넘치는 위치였다.” 이태루가 언제까지 운영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경인 철도 개통과 함께 일시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랑말과 가마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루 이틀 인천에 묵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서 경영난에 부딪쳤고 결국 폐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이태루가 있던 공간은 일제때 동흥루(東興樓)라는 중국요리점이 들어서있었고, 6.25 전쟁중에는 월미연탄공장의 가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화교들에 따르면 20년 전에는 주류창고로 쓰였었다고 한다.![](http://enews.incheon.go.kr/upload/WebEditor/Others/P1040649.JPG)
인천역사에 관심 있는 관계자들은 ‘怡泰地界’표지석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화교협회 마당에 아무도 관심없는 곳에 놓아둘 것이 아니라 원래 자리에 놓아 역사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 이용남 ‘I-View’편집위원, 인천시 인터넷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