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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드 호텔’ 100년 넘은 표지석 찾았다

장백산-1 2016. 11. 13. 17:46
‘스튜어드 호텔’ 100년 넘은 표지석 찾았다
국내 두번째 호텔, ‘華商 怡泰地界’ 새겨 있어
  

인천 청국 조계지에 문을 열었던 ‘스튜어드호텔(怡泰樓이태루)’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두 번째 호텔이다. 최초의 호텔은 대불호텔이다. 스튜어드호텔의 표지석이 인천화교협회 회의청 앞마당에 보관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표지석은 100년이 넘었다. 인천의 역사를 담고 있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표지석에는 ‘華商 怡泰地界’라고 쓰여져 있으며 회의청 앞 마당 수풀사이에 가려져 있어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존재를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 호텔인 대불에 이어 두 번째 호텔
스튜어드호텔의 원래 자리는 중구 한중문화관에서 올라와 차이나타운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길목이다. 지금 본토(本土)라는 중국집이 있는 자리다. 본토 자리에 있어야 할 ‘怡泰地界’ 표지석이 언제부터 인천화교협회에 보관중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이태루를 운영하던 중국인 양기당(梁紀堂)이 인천화교협회 2대 회장(1919~1928)을 지냈던 인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것으로 추측한다. 양기당은 오랫동안 화교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태라는 이름은 세간에는 이 호텔을 운영했던 사람의 이름으로 알려져있으나 잘못된 사실이다. 이태는 알려진 것과 달리 상호명이고, 이태를 운영했던 사람은 중국인 양기당(梁紀堂)이었다.
초기자료에 따르면 당시 호텔의 아래층은 잡화점으로 위층은 호텔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조선안내’(1891)에는 이 호텔의 객실 수가 3개로 나와 있으나 1933년 발간된 ‘인천부사’에는 객실수가 8개였다고 적고 있다. 어느 시점인가 건물을 증개축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때 사진으로 추정되며 오른쪽 3층 건물이 스튜어드호텔이 있던 자리다.(사진 화도진도서관)

비숍여사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저서에 호텔 기록
이태루는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운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2년 발간된 ‘최근의 인천’을 보면 인천지역 여관의 명단에 ‘이태잔(怡泰棧)’이 수록되어 있다.
이태루는 개항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주요 인사들이 숙소로 사용하면서 더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의 저자 버드 비숍은 1894년 2월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이곳을 숙소로 삼았다. 비숍은 당시 스튜어드호텔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태호텔은 손님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호텔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이 호텔은 중국인구역의 중심가 끝에 자리했지만 일본인 거류지의 중심거리도 한눈에 내려다보였으므로 아주 생동감이 넘치는 위치였다.” 

▲ 길 정면에 보이는 것이 스튜어드 호텔이다

이태루가 언제까지 운영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경인 철도 개통과 함께 일시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랑말과 가마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서울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루 이틀 인천에 묵어야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면서 경영난에 부딪쳤고 결국 폐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태루가 있던 공간은 일제때 동흥루(東興樓)라는 중국요리점이 들어서있었고, 6.25 전쟁중에는 월미연탄공장의 가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화교들에 따르면 20년 전에는 주류창고로 쓰였었다고 한다.







인천역사에 관심 있는 관계자들은 ‘怡泰地界’표지석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화교협회 마당에 아무도 관심없는 곳에 놓아둘 것이 아니라 원래 자리에 놓아 역사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글 이용남 ‘I-View’편집위원, 인천시 인터넷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