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패러다임을 폐기하라"
입력 2016.11.16 19:28[한겨레21]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인터뷰(하) 민주주의 체제를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한 박근혜 대통령
안수찬 편집장과의 대면 인터뷰는 11월10일 오후 2시간여 동안 진행됐고, 이후 송채경화 기자가 전화통화와 전자우편으로 여러 차례 보강했다. 장문의 인터뷰를 3개 기사로 나눠 온라인에 먼저 싣는다. 더 자세한 인터뷰는 다음주에 발행될 1138호에 게재한다. _편집자① 미국 대중의 합리적 선택 ②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라 ③ 박정희 패러다임을 폐기하라
박근혜 정부 탄생은 ‘박정희 패러다임’의 결과
한국의 선거에서 사회적 힘이 정당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 잘 안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어떻게 당선된 거라고 보나.
박근혜 정부는 1960~70년대 박정희 성장모델, 더 넓은 의미에서 ‘박정희 패러다임’이 헤게모니를 가졌기 때문에 나타난 정부다. 한국의 정치·사회 시기 구분에는 두 층위가 있다. 먼저 정치적 수준에서 80년대 민주화라는 하나의 역사적·정치적 격변이 있었다. 그 다음에 90년대 말 IMF 위기로 인해 한국이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따라 하게 되고 이 경제운용 원리를 아주 과격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왔다.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운용 원리, 국가 구조 등은 1960~70년대 박정희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 민주화 이전의 산업화 체제는 박정희 패러다임에 의해 만들어졌다. 민주화 이후에는 경제나 국가의 운용 방식이 민주적으로 전환될 법한데 이 전환의 계기를 우리는 갖지 못했다. 민주화만 됐고 사회운용 원리는 그 (박정희 패러다임의) 연속성상에서 지금까지 지속됐다.
물론 (민주화 이후) 당 대 당 정권교체를 통해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정부한테는 박정희 패러다임의 대안이 되는 국가운영 원리와 경제 원리가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 패러다임에 더해 신자유주의 독트린을 접목시킨 것이 (개혁 정부 시절의) 두 정부의 국가 운용과 경제 운용 원리였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대응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뭔가 변화가 있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원리대로 시장 자율성이 커진다거나 하는…. 신자유주의 독트린대로라면, 국가가 사적 기업이나 사적 시장 영역에 관여를 하거나 국가가 스스로 경제를 운용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모델국가들이라 할 미국과 영국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미국에서처럼 자유주의적인, 또는 유럽에서와 같은 기존의 사민주의적 복지국가에서 발전했던 노동조합을 해체하거나 약화시키기 위해 국가권력이 폭력적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는 권위주의 시대의 개발 독재를 통해 권위주의적 산업화를 추진했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신자유주의를 접목시켰다. 원래 박정희 패러다임의 핵심이 국가-재벌동맹과 노동 배제였기 때문에 이걸 민주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유지한다면, 특별히 국가권력을 이 문제를 위해서 더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그런 것이 었으니까. 그래서 이들 정부를 박정희 패러다임이 만들어낸 ‘발전주의 국가’에 신자유주의를 덧붙인 ‘신자유주의적 발전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국가, 즉 신자유주의를 통해서 발전국가를 지속시키게 된 것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말했던 김대중 정부를 통해서라면, 그것은 커다란 아이러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시기 신선한 충격과 함께 제시됐던 이 말은 탄생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결과는 권위주의적 발전주의를 그대로 두고 거기에 신자유주의를 추가한 것이 됐다.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한다면.
발전주의 시대에는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는 경제정책이) 제조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산업화로 나타났다. 국가가 직접 경제활동을 못하니까 재벌 기업을 국가 정책의 시행자·대행자로 해서 모든 정치·사회·경제적 자원을 여기에 집중했던 것이 과거의 모델이다. 국가의 시장과 사기업을 지휘 총괄하면서 경제 행정관료 체체가 경제운영과 경제성장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를 관치경제라고도 한다. 통치자의 의지와 목표를 집행하는 경제관료 기구가 재벌을 수단으로 해서 경제 발전을 주도한 것이다. 여기서 형성된 게 재벌이고, 국가와 재벌 연합 구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 구조 위에 한국사회가 만들어졌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중요한 다른 측면은 노동의 배제다. 노동자들을 경제 운영과 성장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노사 관계에서 배제했던 것이 박정희 모델의 본질이자, 중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정부 아래에서도 이 모델은 그대로 지속이 됐다.
박정희 패러다임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이 패러다임은 빈곤한 농업사회에서 경제를 발전시켜 가장 성공적인 개발도상국가의 하나로 만들었고, 급기야는 자본주의 선진국 반열에 한국을 올려놓았다는 자부심을 갖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효능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단단한 표의 다수 그룹’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것에 의해 보수 정당의 헤게모니가 관철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요인들이 작용해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당 대 당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정치적 변화말고는 내용적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항하는 투표자들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는 대안적 국가 운영 원리, 경제운영 원리를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도 박정희 패러다임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개혁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 외에 큰 차이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다시 노골화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보수 정부보다 더 나은 능력을 보여주는데 실패했을 때 나타난 정부가 이명박·박근혜 정권이다. 보수 정권이 연속 두 번을 집권했다.
이 가운데 이명박 정부는 그래도 대통령 자신의 성장배경, 가치관, 그리고 사회생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요소들은 사회적, 정치적 자산이 됐고, 그래서 사회와 소통할 수 있었던 보수적 정치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보수였지만 민주적 가치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위해 누구보다 강하게 투쟁하지 않았나.
반면 아주 상당히 본질적으로 보수라고 할까, 경제적 모델로서의 박정희 패러다임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권위주의체제를 신봉하는 그룹들이 있다. 그들은 민주적 가치를 존중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극우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지만, 굉장한 보수 그룹이 있는데 이들이 합쳐져서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켰다.
박근혜 정부는 앞선 정부들에 대한 실망 내지 실패에 근거하여 이명박 정부의 바통을 이어 받았고, 여기에 더해 이른바 ‘박정희신화’를 큰 자원으로 삼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나는 박정희 모델이 부활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통령은 그 아버지의 신화를 현재 민주화된 조건에서 재현하려고 하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정치를 했다. 이것이 가져온 파탄이 박근혜-최순실 사태로 표출이 됐다고 본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에 대한 해결책이라고 할까 대응 방식은 이것이 단순히 한 정권의 헌법 위반이라든가 일탈적 통치체제라고 해석하기 보다는 기존의 60~70년대로 시작되는, 반세기 이상 산업화에 성공하고, 자본주의의 사회구조를 만들었던 박정희 패러다임의 파탄이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시대 변화에 도무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민주화와 공존하기 어려운 패러다임이다. 권위주의 시대에나 가능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제조업 중심의 산업화 시대에서 발전되고 고안된 모델은 민주화 시대에 민주적 가치와 규범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자유무역과 세계적으로 개방된 시장경제, 유연하고 지식·기술 집약적인 고기술 생산체제, 금융이 중심역할을 하는 세계화된 산업구조에서 제조업 산업중심의 경직적·명령적·권위주의적인 경제 운영 방식은 결코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국가와 경제를 운영하는 방식이 얼마나 이 시대에 걸맞지 않은가 하는 점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난 것이 이번 박근혜-최순실 사건이다. 이 점은 이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창조경제추진단, 새마을운동의 재현
박정희 패러다임을 관료 지배, 폐쇄적 밀실결정, 경제발전을 위한 국가 자원의 동원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건가. 그런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부정·부패 요소가 더 커 보인다.
부정부패는 부차적인 부분이라고 본다. 그것은 문제의 현상의 하나이다. 박정희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서도 볼 수 있었듯이, 박정희 패러다임은 모든 국가권력이 대통령으로 통하는 권력의 초집중화와 강력한 국가주의적 가치를 갖는다. 또한 시민사회의 자율성의 약화, 지방으로의 권력분산 억제를 중심 요소로 삼기 때문에 강력한 권위주의적 대통령에 의해 운용되는 국가 운영 체제다. 그리고 이것은 약한 시민사회, 약한 자율성, 다원주의 억제 등과 병행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운영하고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국가중심적인 경제 운영과 더불어 사회를 획일화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사회 하위 레벨까지 하나의 이념과 시스템으로서 조직하고 동원하는 수단을 통해서였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 새마음 운동 등은 이러한 체제를 유지하고 교육하고 교화하고 계몽하는 수단들이었다. 요컨대 이러한 국가운영 구조, 통치 방식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 사회의 자율성과 다원주의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체제를 운영했던 모델, 운영하는 방식, 원리를 일컬어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나타난 박근혜-최순실 사건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박근혜 정부가 나타났을 때 내가 제일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미래창조부의 구성과 조직 형태, 그리고 운영원리였다. 미래창조과학부는 박정희 패러다임이 재현된 하나의 압축적인 시스템으로 보였다.
그 구성을 보라. 지식경제, 교육, 과학기술, 방송정보통신 등을 관장하는 여러 중앙부서들로부터 파견된 행정관료들이 들어와 있다. 몇차례 법이 바뀌면서 최근엔 청와대 정책수석도 여기 들어왔다. 그리고 민간 카운터파트는 전경련을 비롯하여 상공회의소, 경총 등 주요 사용자 단체들이 들어오고 은행도 들어왔다. 처음에는 8개 사용자 단체가 모두 들어왔다가 지금은 3개 남았다. 이들로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이라는 민관공동운영기구가 구성되고, 이들이 이 새로운 부서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새 정부의 국가운영정책을 주도하는 선도적인 중앙부서가 국가관료와 대기업 중심의 사용자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2자간 민관 합동운영주체를 통해 운영된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구조는 2차 대전 이전 일본의 명치유신이후 또는 천황제 파시즘 시기나 유럽의 전간기 독일 또는 이탈리아 파시즘 체제 하에서나 가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명목적으로는 국가, 대기업, 노동 3자 기구였지, 정부관료-대기업 사용자 단체 대표들 2자 기구가 아니었다. 정부의 공적기구는 적어도 명목적으로라도, 기업 대표들이 참여하면 노동자 대표들도 참여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정부는 공공연히 계급지배를 하는 결과가 된다.
미래부는 각 시도 지자체 단위 수준에서 창조경제 시행 기구로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치해서 센터별로 대기업을 붙여서 각 시도군 지방 단위를 형성해서 활동하도록 했다.
새마을운동 내지 새마음운동 사업과 조직형태를 모델로 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직형태와 활동방식은 전경련 부회장인 이승철씨가 공개적으로 했던 말이다. 기자들이 이게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새마을 운동을 모델로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새마을 운동을 다른 형태로 복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의 구조도 이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새마음 운동하고 아주 비슷한 것 같다. 국민체조 프로그램 만들어 온 시도에서 따라하도록 하고…. 이건 문체부가 책임 부서다.
이건 무엇인가.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국가의 공식 기구가 박정희 체제를 운영하고, 이를 떠받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주의 국가라 옛날식으로 할 수 없어서 비선실세라고 하는 최순실이 모든 걸 통괄하는 실질적인 지휘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새마을 운동이 이런 방식으로 민주주의에서 재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비전은 박정희 대통령의 가치와 정치적 사고 속에 있다. 민주주의나 시민사회에 대한 의식과 이해는 상당히 적거나 없다고 본다. 그러니 문제가 안 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헌법에 의해 투명하게 운영되고 국민에 봉사해야 한다. 선거만 했다고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선출된 국가의 수반이 공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책임지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보여주는 통치방식은 전혀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 정치체제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체제를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할 때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여러 번 생각했다.
뭐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이런 형태는 다른 나라에서는 별로 없었다.
투표 때만 민주주의, 당선 뒤엔 권위주의
파시즘이나 나치즘과는 다르다고 보나.
나치나 파시즘은 그것대로 원리가 있는데 이건 그것과 다른 것 같다. <문학과 사회> 지난 봄호에 ‘국민투표식 민주주의’라고 표현해서 긴 글을 쓴 게 있다. 대통령 선출은 온 국민이 다 투표로 하지만, 당선이 된 이후에는 대통령이 책임을 지지 않는 형태다. 그래서 책임의 제도가 작동하지 못하고 기존의 헌법과 법률 위에서 초월적으로 움직이는 체제를 내 나름대로 ‘국민투표식 민주주의라’고 호칭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할 때만 민주주의를 하고 그 다음에는 권위주의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상당히 점잖게 쓴 거다. 이번에 터진 것은 뭐라고 할지 다시 표현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최고 통치자와 공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통령과 공동으로 이런 구조를 만들어서 정부의 중앙 부서를 통해 온 사회를 지배했다.
박근혜 정권은 민주적인 범위에서 통치한 게 아니라 유신체제적 통치 방식을 그대로 이 사회에 재현하려는 방식으로 통치했다. 그러니 이러한 통치방식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이해될 수 있다. 정신교육과 관련된 것이다. 북한과 자꾸 전쟁하려는 분위기로 몰아가려는 대북정책도 (유신체제적 통치방식에) 동반되는 것이라고 본다.
드레스덴 선언이나 ‘통일은 대박이다’ 등의 표현이 최순실의 아이디어라고 하는 것은 ‘연설문을 수정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태라고 본다. 대북정책의 기본 정책을 위한 담론과 패러다임과 관련이 있는데,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완전히 힘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대북 정책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가 전체적으로 이런 구조로 갔기 때문에 박정희 패러다임은 이제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이 사태와 맞물린 헌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했다. 박정희 패러다임 극복이 개헌과 맞물릴 수도 있지 않나.
두 복잡한 사태가 맞물려 더 복잡하게 돼 문제해결이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 개정은 엄청나게 복잡하다. 많은 여야 간 협의와 협상, 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데, 현 시점에서 개헌문제를 다룰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헌이 다뤄지면 졸속적인 개헌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나타난 이슈가 다음 대선에서 중요한 쟁점이 돼 그걸 가지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왜 우린 다른 헌법이 필요한가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개헌 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체제에 대한 분석이나 문제를 보는 방식 등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개헌을 하자는 얘기를 하는지 나는 이해가 안 된다. 헌법을 무작정 바꿔만 놓으면 이것이야 말로 아주 위험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역효과를 낳게 되고 헌정이 혼란에 빠지는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개헌과 관련해 행정부가 통치하는 체제가 실패했으니 의회중심제로 가자는 의견이 있다. 혹은 대통령를 유지하더라도 미국 방식으로 주기와 임기의 문제를 해결해서 중간에 심판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의견도 있다. 책임 정치와 관련된 내용이다. 게임의 룰을 바꾸는 정도의 개헌은 어떤가.
부정적으로 본다. 왜냐면 이번 문제를 마무리 짓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박정희 패러다임을 종결짓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완전히, 싹 씻어낼 수는 없어도 어느 정도로 약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한 변수가 정당이다. 정당체제가 현재 상태로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는 내각제가 들어서든 대통령중심제가 들어서든 제도 때문에 나타나는 (개혁) 효과는 적지 않을까 한다.
제도만 보자면 내각제는 우월한 제도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다. 어떤 사회 정치 구조, 조건속에서 작동하느냐에 따라 더 나쁜 제도가 될 수도 있고 제도의 원래 효과대로 좋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의회중심제는 유럽에서 만들어졌는데,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두 대표적인 생산자 집단인 ‘기업이익을 대표하는 사회집단’과 ‘노동이익을 대표하는 사회집단’이 정당으로 조직된 정당체제를 기반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의회중심제의 한 이념형적 모델이다. 한국에서처럼 계급 개념도 없고 노동자들이 산업적 시민권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기존의 정당 조직에만 이점이 돼서, 기존의 정당 보스들에 의한 통치체제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한국은 국가관료 행정체제가 엄청나게 발달돼 있고 비대하다. 또 검찰을 중심으로 한 사법 행정기구들의 힘이 무척 강하다는 점이 고려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의회중심제가 될 때 그 장점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내각제를 하면서 영국식으로 소선거구 단순다수제로 한다면 내각제 효과를 갖지 못한다. 브렉시트가 통과됐을 때 영국 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소선거구제로 인해 이런 문제가 나타나니 비례대표제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 많아졌다. 한국의 개헌논의에서는 비례대표제를 갖는 의회중심제인지, 단순다수 소선거구중심의 의회중심제인지에 대해서도 이슈가 되지 않고 있다.
지금 한국의 기존 정당 체제는 너무 약하다. (현재 상황에서 내각제가 되면) 보스주의가 뚜렷하게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새누리당에는 보스가 있지 않나. 민주당도 있고. 이런 사람들이 총리가 돼 정당이 그 보스의 뒤를 따라가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각제의 장점이 뭐가 있나.
이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제가 차라리 낫다. 독재의 위험이 있지만 시민들이 개혁자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 있다. 내각제에선 그게 안 된다. 내각제에선 큰 개혁이 어렵다. 내각제는 정당이 잘 정착된 상태에서의 제도로서만 좋다.
개헌 주장은 정치적 욕심 때문
그렇다면 대통령제를 어떻게 보완할 수 있을까.
대통령중심제가 성공한 나라는 미국인데, 미국에서 대통령중심제의 성공 조건은 강한 의회다. 그리고 자율성을 갖는 사법권력이 강하다. 이 두 기관이 받쳐줘야 대통령을 견제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 의회와 사법부는 모두 약하다. 권위주의 때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이런 상태에서 한국은 잠재적인 독재정, 정치학 용어로 ’티러니(tyranny)’라고 불리는 집행부에 의한 전제정이 항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의회가 약해서 대통령이 인사와 예산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예산이 하원에 속해 있는데 미국 예산을 대통령이 어떻게 마음대로 하나. 상원에서는 정부의 주요공직자를 비준하는 권한을 갖는다. 대통령은 추천, 지명만 하지 결정권이 없다. 한국에서는 재정과 예산을 담당하는 기재부가 대통령 권한 하에 있고, 국회의 인사청문회는 형식적인 것이어서 중요 공직자 임명은 사실상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다. 돈과 인사에 대해 대통령이 전권을 갖다시피 하는데, 그 권한이 얼마나 강한가? 오바마의 초기 정부를 보면, 백악관은 민주당인데 하원·상원은 공화당이 다수인 분할 정부였다. 이렇게 되면 공화당이 대통령 임명 인사에 대한 비토권을 갖는 거다.
오바마 집권 초기를 보면, 공화당의 반대로 인해 비어 있는 고위공직이 무척 많았다. 한국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언론이 나서서 정부가 일 안 한다고 압력을 가해서 누구든 앉혔겠지만, 미국인들은 아무 소리도 안 한다. 자리를 비워두고 그대로 행정부를 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권력을 마음대로 다 행사하지 못 하는 거다.
이런 제도들을 비교하면서 한국의 조건에서 뭐가 좋을까를 계산하고 예측해서 제도를 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일기예보도 어려운데 이걸 어떻게 (좋은 제도를) 고르겠는가. 그러니 그런 논의는 결국 제비뽑는 것과 비슷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개헌을 주장하는 모든 주창자들은 정치적인 욕심 때문에 한다고 생각한다.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제도를 변화시켜서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욕심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사회·정치 체제를 민주적으로 하기 위해서 개헌문제를 제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헌을 통해서 정치가 좋아진다는 발상은 별로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개헌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필요하면 고치는 게 제도다. 그러나 우선 지금의 정치적 혼란을 제대로 정리한 다음에, 그 능력을 정당과 국회가 보여준 다음에 하면 되는 것이다. 대선이 남아 있으니 대선 때 이슈로 가져와서 논의를 통해 뭐가 문제인지, 주요 사안들에 대해 정당 간에 어느 정도의 합의를 하고, 그것으로 심판을 받으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덮어놓고 개헌이라고 한다. 뭐가 문제인지 규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뭘 개헌한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최근에 스페인 등에서 온라인 운동에 기초해서 온라인 디지털 에너지를 정당으로 바꾸고 있다. 정당을 구성한 뒤 선거에서 당선시켜 의회, 시장에 진출했다. 기존 정당이 지지부진한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 디지털 정당을 통해 시민을 곧바로 정당까지 이어붙이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유형의 정치조직이 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지만 바람직하지는 않다. 온라인은 나름 장점이 있지만 약점도 있다. 그것은 참여의 편중 현상으로 인해 과다 참여의 문제, 과소 참여의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디지털 디바이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물론 (디지털 정당은) 빨리 소통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비용이 적고 쉽게 소통할 수 있다. 그런 건 장점이다. 그런데 왜 부정적으로 보는가 하면, 지속성과 일상성 속에서 정치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생업에 종사하기에도 너무 힘든 경제적 약자, 소외집단들, 노동자들,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전통적 의미의) 정당 조직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생업이 바쁘면 다른데 신경 쓸 수 없다. 온라인 조직은 피할 수 없이 중산층 중심의 조직이 될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한국이 사회적 약자의 정치적 대표성이 약한데 그걸 개선하는데 기여하지 못할 가능성 크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새누리당이나 청와대 초청으로 국정에 대해 의견을 전달한 적이 있나.
지난 4월 총선 직후 새누리당의 초청을 받아서 한번 간 적이 있다. 총선 이후 새누리당이 소수파가 됐을 때 다선 의원들이 그때 개혁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날 불렀다. 그런데 날 부른 것은 비친박계였다. 정의당에서도 초청해서 한번 이야기했다.
청와대에서는?
이 정부하고 나는 한번도 접촉한 적이 없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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