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ㆍ‘대리사회’ 출간한 대리기사 김민섭씨
ㆍ지난해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출간 후 그조차 그만둬
ㆍ‘대리 대통령’에 국민 분노…스스로 사유해야 ‘삶의 주체’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만난 첫 손님은 저를 ‘아저씨’, 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를 ‘사장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작년까지 제 호칭은 ‘교수님’이었죠. 재직증명서조차 뗄 수 없는 시간강사면서도 ‘교수’라는 호칭에 정규직 교수가 된 것과 같은 허상에 빠져 살았더라고요. 그 허상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대리인간’이 됩니다.”
지난해 시간강사의 열악한 현실을 폭로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출간한 뒤 시간강사를 그만둔 김민섭씨(33)가 카카오 대리기사가 됐다.
지난 5월 말부터 대리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씨는 타인의 운전석에서 마주친 ‘세상’ 얘기를 모아 <대리사회>(와이즈베리)를 새로 펴냈다.
지난 9일 경향신문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씨는 “호칭은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든다”면서 “우리는 누군가의 욕망을 대신 수행하는 ‘대리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불과 얼마 전까지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 강사였다. 그가 2014년 9월부터 온라인 커뮤니티에 시간강사의 고충을 토로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글은 총 조회수 200만회를 넘기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대리사회>는 지난해 12월 대학을 나온 김씨가 대리운전을 시작한 후 페이스북과 다음 스토리펀딩 “우리 모두는 ‘대리인간’이다”에 연재한 글을 묶어서 펴낸 것이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대학에서 교수도 아니고 학생도 아닌 경계인으로 보낸 8년이란 시간은 타인의 욕망을 대리한 시간이었어요.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해주는 게 노동의 본질이지만, 그 앞에 ‘대리’라는 이름이 당당히 붙은 건 대리운전밖에 없잖아요. 대리운전을 택한 건 저의 지난 시간을 규정할 수 있는 노동이라는 의미가 컸습니다.”
‘세상’이란 더 큰 연구실에서 대리기사가 된 김씨는 사회를 ‘타인의 운전석’으로 규정한다. 그는 “우리 모두 스스로 삶의 주체라고 믿지만 실은 타인의 운전석에 앉아 있는 대리기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대학에서 밀려나고서야 깨달았다”고 말했다.
“대리운전을 하면서 세 가지 ‘통제’를 경험했습니다. 우선 운전에 필요하지 않은 모든 ‘행위’의 통제. 사이드미러나 백미러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도 그대로 두고 몸을 적응시켜야 합니다. 에어컨을 작동시키거나 라디오의 주파수를 조절하는 일 역시 안되죠. 다음으로 ‘말’의 통제인데, 손님(차 주인)에게 먼저 말을 거는 대리기사는 없습니다. ‘네, 맞습니다’라는 대답만 하죠. 마지막으로는 ‘사유’의 통제인데 주체적으로 행위하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유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김씨는 “우리는 마치 차의 주인인 것처럼 질주하고 있지만, 대리기사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의지와 욕망은 통제돼왔다”며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대리인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분노는 주체로서 바로 서지 못하고 최순실의 ‘대리인간’일 뿐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씨는 “광장에 모인 수백만의 촛불은 ‘대리대통령’의 ‘천박한 욕망을 더 이상 대리하지 않겠다’는, 국가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선언”이라고 말했다.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버티는 동안 그는 낚시로 세월을 보낸 중국의 강태공이 아내에게 그랬듯 자신의 아내에게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아내는 강태공의 부인처럼 나를 떠나지 않고 대학에서 보낸 ‘유령의 시간’을 견뎌준 사람”이라며 “요즘은 아내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줄 때 ‘뽀로로 인형은 1대리, 농구대는 3대리’ 이런 식으로 화폐 단위를 원이 아닌 대리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학을 나온 처음 3개월은 막막하고 외로웠지만 지금이 훨씬 행복해요.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는 대학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요. 앞으로는 사회의 균열에 대한 얘기를 쓸 생각입니다. ‘대리사회의 괴물’은 어떻게 개인을 통제하는가를 탐색하기 위해 계속해서 손님의 운전석에 앉을 겁니다.”
<이명희 기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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