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시민민주주의

'주권자 혁명' 시대로 행진하기

장백산-1 2016. 12. 17. 01:50

[한계레]


'주권자 혁명' 시대로 행진하

입력 2016.12.16 19:26 수정 2016.12.16 23:46 댓글 90
탄핵 주역은 국회 아닌 국민
정치권 셈법에 동요 않고
"대통령권한 즉각 회수" 요구
청와대 정치공작 무력화시켜

"헌재에 맡기자" 견해 옳지 않아
여전히 공은 국민 손에 있어
청와대 축소·인사권 제한 등
주권자 혁명 내용 채워야

[한겨레]

2016년 12월10일 저녁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제7차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광화문 본집회 현장에서 “박근혜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9일 국회에서 가결됐다. 통과되더라도 찬성표가 의결 정족수인 200표를 간신히 넘을 것이라던 일반의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숫자인 국회의원 234명이 찬성했다. 촛불의 힘이었다. 2016년 촛불시위가 가지는 의미와 앞으로의 과제 등에 대해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한 교수는 서울대 인권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주요 저서로는 <인권변론 한 시대> <5·18 재판과 사회정의> 등이 있다.

특별기고/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글자로 있던 헌법 제1조를 이젠 온 국민이 노래 부르며, 온몸으로 써내려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7주간에 걸쳐 서울 한복판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간 촛불시위의 대행진. 국내뿐 아니라 한국인이 있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울려 퍼진 함성의 대열. 이는 1919년 3·1대혁명에 필적하는 세기적 사건으로 봅니다.

샴쌍둥이처럼 일체화된 순실근혜의 국정농단은 보통 시민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엽기적 행각들입니다. 그 때문에 드라마는 죽었고, 영화도 시들합니다. 모처럼 언론들이 진실 폭로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고, 경악스런 뉴스들은 주말 대집회의 동력을 끌어올렸으며, 주권자의 함성은 다시 주간의 정치권과 언론을 강타했습니다. “촛불은 곧 꺼지기 마련”이라는 일각의 기대를 비웃으면서, 국민의 소리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널리 퍼져갔습니다. 두 달 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탄핵안 가결은 국회의원 234명의 작품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역은 바로 우리 국민이었습니다. 그 국민은 시민이나 유권자라기보다는 이번엔 주권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집무실엔 나오지도 않고, 국정농단의 공동정범으로 준동한 경악스런 사태를 깨닫고, 국민은 주권자의 이름으로 대통령의 권한을 회수합니다. 정치권의 복잡한 셈법에 주권자들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주권자들이 한결같이 외쳤던 것은 대통령의 “하야, 퇴진, 즉각 퇴진”이었습니다.

‘87년의 산물’ 헌재, 국민에 응답해야

탄핵의 법적 절차에서 국회는 탄핵 소추를, 헌법재판소는 탄핵 심판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나 탄핵의 진정한 주체는 주권자인 우리 국민입니다. “국민은 명령한다, 박근혜는 퇴진하라”. 이것이 광장의 일치된 구호였습니다. 탄핵의 성사 여부가 국회의원의 손에 있는 듯이 보였을 때, 탄핵의 캐스팅보트는 새누리당 비박계가 쥐고 있었습니다. 비박계는 흥정의 꽃놀이패를 쥔 듯 보였습니다. 대통령의 3차 담화에 정치권이 동요될 때, 주권자는 232만명이라는 고금에 볼 수 없는 절대 인원으로 응답했습니다. 탄핵이 국민이 명령임이 명확해지자, 비박은 잠잠해지고 오히려 친박이 쪼개졌습니다. 통상 대의기관인 국회에 주권자의 권한을 위임하고 그 결과에 탄식이나 했던 수동적인 국민들이 이번엔 전혀 달랐습니다. 국민이 주권자로서 나서자, 청와대의 정치 공작이 무력화되었습니다. 국회는 주권자의 명령을 겸허히 받아들였기에 탄핵 가결의 순간 의원들은 엄숙했습니다. 탄핵의 환호성은 바로 국민의 것이었습니다.

주권자는 촛불을 통해서뿐 아니라 실로 다양한 수단으로 자신의 뜻을 알렸습니다. 의원의 휴대전화가 불나도록 전화를 해댔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우편, 플래카드, 스티커를 통해 뜻을 전달했습니다. 주권자의 탄핵 의지가 국회의 득표수와 일치하는 정도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

핵’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이제 탄핵의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을까요. 9인 재판관의 성향이 거론되고, 탄핵 심판의 일정, 정족수의 문제 등이 복잡하게 꼬여듭니다. 그러나 탄핵이 국민의 명령으로 발의되었고, 탄핵 추진의 힘이 국민이었던 만큼 공은 여전히 국민이 갖고 있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은 국회에 이어 헌재에 심부름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헌재는 전 역량을 모아 국민의 부름에 신속히 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헌재는 1987년 민주헌법 쟁취의 산물입니다. 3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헌법재판소는 주권자의 의지를 존중하여 소임을 다해낼 것으로 봅니다. 다만 이제부터는 헌재가 알아서 할 테니 국민은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국민이 주권자임을 여러 방면으로부터 재확인시켜줘야 합니다.
2016년 12월3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주최 6차 촛불집회 ‘촛불의 선전포고: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에 참가한 시민들이 종로구 청와대 100m 앞에 닿아 경찰 차벽 앞에서 ‘박근혜 탄


촛불은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빛입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일수록 촛불 하나는 어둠을 그만큼 몰아내는 빛입니다. 촛불은 염원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촛불들이 모여들면 흑암의 나라는 광명의 천지로 바뀌어갑니다. 또한 촛불은 작은 횃불입니다. 주권자의 의지가 결연할수록 촛불은 비폭력의 절제로 자기 무장합니다. 주권자의 결연한 촛불 앞에 법원은 금단구역을 점점 좁혔습니다. 경찰은 점점 물러섰습니다. 이렇게 주권자들은 ‘청와궁’에 육박했습니다. 주권자가 어깨를 펼수록 권부(權府)는 점점 고개를 숙였습니다. 만일 국회가 주권자의 탄핵 명령을 거역했다면 그때는 촛불의 인내심이 바닥나면서 1987년처럼 국민저항권의 횃불로 폭발했을지 모릅니다. 200만이 모여도 비폭력으로 일관한 것은 주권자의 자신감의 발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번의 흐름을 “주권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남용되고 농단된 대통령 권한을 회수해야겠다고 결단한 것은 주권자로서의 자각이었습니다. 흔들리는 국회에 대하여 정당, 의원의 뜻대로가 아니라 촛불 민심을 받들라고 명한 것은 주권자의 당당함이었습니다.

대법원장·헌재소장 임명 과정 바꾸자

박근혜 퇴진을 주장한 첫 주인공은 뜻밖에도 “중고생 혁명”의 기치를 내건 청소년이었습니다. 아직 유권자가 아닌 무권자인 중고생부터 시작되었기에 유권자 혁명으로 부를 수 없습니다. 경제사회적 변혁을 전면화하지 않았기에 앙시앵레짐(구체제)을 타파하는 시민혁명의 상을 대입하기엔 뭔가 어색합니다. 우리 국민이 “주권자”로서의 확신을 갖고,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가만있지 말라”는 건 세월호가 우리 모두에게 안겨준 뼈아픈 교훈입니다. 주권자들은 “이게 나라냐”고 거듭 묻고 있습니다. 순실근혜의 국정농단에 대해 주권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핵심 의제의 선정과 진행 과정에도 뜨겁고도 묵직하게 개입했습니다. 그리하여 불가능한 장벽처럼 보였던 탄핵의 일차 관문을 돌파해낸 것입니다.

주권자 혁명이라면 앞으로의 전개도 주권자 혁명의 내실을 채워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만악의 근원이라면 그 ‘제왕’의 왕관을 벗겨내야 합니다. 실은 그 ‘제왕’은 우리 헌법의 문자로도 없습니다. 청와궁을 대통령 집무실로 바꾸고, 대통령 비서실은 그냥 부속실 정도로 축소해야 합니다. 대통령의 업무는 내각과 관료를 통해 이루어지는 게 정상입니다. 경복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청와궁의 위치부터 시민 속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공주”와 “시녀”, “배신”과 “충성” 따위의 왕조적 기풍은 싹부터 도려내야 합니다. 제왕적 대통령을 ‘시민 대통령’으로 확 바꿔놔야 합니다.

주권자 혁명의 효과는 국가의 곳곳에 파급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전횡적 인사권도 큰 문제입니다. 예컨대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은 삼권분립의 국가틀에서 핵심적인 인사입니다. 그런데 이들 대법원장, 헌재소장의 임명은 오로지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습니다. 대법관만 해도 후보추천위원회를 통해 추천된 복수 후보 중에서 선정하는데 말입니다. 우리 헌정사에서 내내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만 하더라도 대법원장은 법관회의의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대통령이 사법부 수장의 임명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내년 초에 닥칠 헌법재판소장의 임명만 하더라도 대통령의 일방적 지명이 아니라 각계 인사로 제청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법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대통령의 인사권에는 직간접의 국민 참여와 사후 통제를 거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이 탄핵될 만한 사유가 드러났다면 그 책임은 대통령 1인의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잘못 보좌한 총리와 내각은 총사퇴해야 마땅합니다. 내각 인사부터 최순실의 입김이 가득합니다. 최순실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모르쇠와 방패막이에 앞장선 총리이고 장관입니다.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새누리당 해체하라”는 것 역시 광장의 민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책임져야 할 집권당과 내각은 모르쇠와 적반하장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주권자는 이런 무책임을 준엄히 심판할 것입니다.

주권자 혁명 행렬에 개헌 요구는 없다

주권자 혁명의 내용을 알차게 채워가려면 개헌이 시급하지 않으냐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권자 혁명의 행렬 속에서 개헌 주장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직선제 개헌”을 명시적 목표로 내걸었던 1987년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지금의 헌정 위기는 헌법 탓이 아니라 대통령 탓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탄핵 일정입니다. 박근혜 탄핵은 끝난 게 아니라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 어떤 간계와 술수가 작동할지 공동 감시해야 할 시점에 백가쟁명식 개헌 논의는 불화의 사과를 던지는 꼴입니다. 현재의 열기는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주권자 혁명의 제도화에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확인한 바는 역대 최악의 불통 대통령의 모습입니다. 비서실장, 수석들도 대면 보고 한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장관들은 수첩에 받아적기만 했습니다. 간언(諫言)은커녕 상언(上言)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일반 국민과의 소통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대통령은 그저 최순실의 메시지만 입력하고 그가 시킨 대로 지시했습니다. 이런 불통의 시대는 끝장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주권자가 직접 공직자에게 소통의 압력을 열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제 핸드폰이 뜨거워서 못사용하겠다”(이완영 의원)고 불평할 정도로, 뜨겁게 국민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 일 잘하는 의원에겐 후원금, 군림하고 배신하는 정치인에게는 “18원의 후원금” 등 다양한 지도 편달을 해가야 합니다. 공직자에게 소통과 경청을 체질화하도록 하는 것 역시 주권자의 몫입니다.

1919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오늘날 우리나라엔 황제가 없나요?” 하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곤 “황제란 주권자를 일컫는 이름이니, 대한민국에서는 온 국민이 바로 황제”라 자답합니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다 국민의 노복”일 뿐이니 “군주인 국민은 노복을 선하게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하고, 정부 직원은 군주인 국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일깨웠습니다. 이게 민주공화국의 핵심입니다.

이 주권자 혁명의 시대에 대통령은 섬김받는 존재가 아니라 주권자를 섬기는 노복임을 재확인합시다. 대통령은 “군주인 국민을 섬기는 방법을 연구”하고, “군주인 국민”은 노복인 공직자들을 “선하게 인도하는” 방법을 연구합시다. 때로는 참여로, 때로는 감시로, 때로는 탄핵으로 말입니다. 이번에 국회의원들을 선하게 인도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국민은 주권자 혁명의 정신이 국가 작용의 곳곳에 스며들도록 국가 대개조를 해가야 합니다.

왜냐고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헌법 제1조 2항) 나오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