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육영재단, 영남학원,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육영재단(育英財團)은 육영수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위해 1969년에 설립한 재단이다. 1969년 4월 14일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해 같은 해 4월 24일 설립인가를 받았다. 육영재단은 사회 일반의 이익에 공여하기 위하여 공익법인 설립 운영에 관한 법률의 규정에 따라 청소년에 대한 투철한 국가관 확립, 과학지식의 보급 및 문화예술, 체위향상과 전통예절교육 등에 필요한 제반 활동과 시설의 제공으로 건전한 민족사상을 함양 고취하고 과학의 생활화 및 정서의 순화와 체력의 보양, 문화창달, 충효사항 고취 등에 기여하여 청소년의 복지증진에 이바지함과 이에 대한 보육 및 적당한 환경 조성으로 심신의 발육을 조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활동으로는 어린이회관 및 부설 유치원 운영,어린이 및 청소년 관련 국제교류사업 지원, 푸른꿈 어린이 축제 등 어린이 및 청소년 관련 행사 주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교육•복지•문화 분야 어린이 관련 연구사업, 난치성 질환 어린이 후원, 불우학생 장학 사업 등에도 주력했다. 1970년 7월 25일 재단의 설립정신에 의거, 서울 남산에 어린이회관을 개관함과 동시에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를 인수하여 발간하였다. 1975년 10월 남산의 회관 건물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이양하고,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18-11 에 새 회관을 지어 이전했다. 어린이 종합교양지《어깨동무》, 미취학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책《꿈나라》, 만화《보물섬》 등 의 어린이 잡지를 발행하였다. 현재는 모두 폐간되었으며, 어린이회관, 놀이공원, 웨딩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회관은 어린이에게 유익한 각종 전시물을 비치하고 문화적인 시설을 갖추어, 어린이에게 보고 듣고, 뛰 놀면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과학관, 문화관, 체육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과학관 안에는 과학전시실(4개)•과학실험실•공작실•천체과학실•시청각실 등이, 문화관 안에는 국제전시실과 무지개극장•도서실•음악실•미술실•무용실 등이 있다. 체육시설로는 대형체육관•사격장•수영장과 야구장 및 각종 놀이시설 등이 있다. 1982년에 박근혜가, 동생인 박근령과의 경영권 분쟁을 겪은 후 1990년에 박근령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08년부터 육영재단은 국가(법원이 선임한 9명의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 운영하는 상황으로서 이사장의 독단적 행정은 통제되는 실정이다. -출처 : 위키메디아 (2016년 12월 2일 (금) 23:13)
현재 육영재단의 자산은 어린이회관의 면적은 약 9만 9173㎡(약 3만 평)가량. 본관인 어린이회관과 예식장, 수영장 등이 들어선 5만 2892㎡(약 1만 6000평)가 있고 이외에 사실상 나대지로 방치되고 있는 4만 6281㎡(약 1만 4000평)가 있는데 이것은 개발이 가능하며 1조원 이상의 개발차익이 가능하다. -출처 : 보도자료 취합 박그네 박근령 그리고 육영재단 1 육영재단을 둘러싼 자매의 갈등
두 자매의 싸움의 발단은 고 육영수 여사가 설립한 육영재단의 운영권에서 비롯됐다. 박근혜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건 1982년. 군대 선배이자 쿠데타의 모델되었던 박정희의 딸에 대한 전두환의 배려였다. 그러나 박근혜 이사장을 바라보는 두 동생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박근혜의 남자’로 알려진 최태민 목사가 박정희의 유산인 정수장학회, 영남학원, 육영재단 등에 깊숙이 관여해 재산을 착취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1990년 8월 14일 두 남매는 박근혜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박근령과 박지만은 장문의 ‘탄원서’를 작성해 당시 노태우 대통령 등 고위층에게 전달했다.
'제1차 육영재단의 난(亂)', 박근혜 패배 근령·지만 승리
"진정코 저희 언니(박근혜)는 최태민씨에게 철저히 속은 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속고 있는 언니가 너무도 불쌍합니다. 대통령의 유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어디에 하소연 할 곳도 없고 또 함부로 구원을 청할 곳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두 남매의 ‘탄원서’는 금전 편취, 유가족 인격 모독, 박정희 부부에 대한 명예 훼손 등 18개 항목에 걸쳐 최태민의 ‘비위 사실’을 적시했다. 탄원서의 요지는 최태민을 무턱대고 비호하는 박근혜의 행동을 저지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 ‘탄원서’가 먹혀들었기 때문일까. 1990년 12월 박근혜가 이사장직을 사퇴하고 쫓기듯 물러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재단 안팎의 반대가 있어 자진 사퇴한 것이라고 하나 사실상은 ‘강제 하차’였다. ‘1차 육영재단의 난’의 진짜 목적은 단순히 박근혜를 몰아내려는 게 아니었다. 박근혜 사퇴 보다 다급한 게‘근혜의 남자 최태민’이었다. 박근혜의 최태민에 대한 ‘무한 신뢰’는 박정희 재임 중 청와대 시절부터 시작된다. 당시 박근혜와 최태민의 밀착은 박정희와 당시 중앙정보부에게도 큰 골칫거리였다. ‘박정희의 유산’에 응당 지분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박지만과 박근령이 자칫 재단이 최태민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일으킨 ‘거사’가 ‘제1차 난’이다.
'제2차 육영재단의 난’, 박근혜·박지만 승리 박근령 패배
박근령으로 이사장이 바뀐 두에도 육영재단의 운영은 방만하고 부실했다. 1994년 서울동부교육청이 육영재단 편법 운영에 대해 조사를 벌였고 2001년 성동교육청장은 박근령 이사장 취임 취소를 결정내렸다. 이 때부터 고소고발이 난무하면서 재단은 만신창이가 된다. 이사장 취임 취소 결정에 맞서기 위해 낸 소송에서 패소했지만 박근령은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이때 박지만이 박근령을 밀어내기 위해 나선다. 1차 난 때 ‘동지’였던 남매가 17년 만에 ‘적’으로 만난 셈이다. 박지만은 1990년대 초반 육영재단에 빌려준 돈의 차용증을 앞세워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임시이사진를 구성해 2008년 서울동부지법의 확인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박근령은 거세게 반발했다. 출근투쟁하며 노조원과 용역직원들을 동원해 재단 사무실을 점거하는 등의 방법으로 박지만이 추천한 이사진과 맞섰다. 결과는 박지만과 박근혜의 승리였다. 박근령의 이사장직 재탈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현재 육영재단은 박지만이 추천한 임시이사 9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박근혜와 박지만이 박근령을 공격한 데에는 박근령과 2008년 결혼한 신동욱이 그 중심에 있었다. 2006년 가을 박근령은 13살 연하의 이혼남 신동욱을 만나 2007년 2월 약혼식을 가졌고 2008년 10월 통일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박근혜와 지만은 신동욱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근령과 신동욱이 약혼한 지 5개월 지난 2007년 7월 중국 칭다오를 방문 중이던 신동욱이 성 매수와 환각제 복용 혐의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두고 신씨는 박지만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국으로 데려와 자신을 납치해 살해하려고 꾸민 일이라고 주장한다. 신씨는 박지만이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마약음모’까지 꾸민 배후에 박근혜가 있다는 글을 지속적으로 인터넷에 올렸다. 검찰은 2011년 8월 신씨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구속 기소했고, 올 2월 법원은 신씨에게 징역1년6월을 선고했다. 신씨도 박지만과 박근혜를 벼르고 있다. 자신을 중국으로 데려간 두 사람이 박지만의 지시를 받아 신씨를 죽이려 했다는 내용의 녹취록이 있다며“필요하면 이 녹취록을 공개해 국민들로부터 심판을 받겠다”고 강변한 바 있다. -출처 : 블로그 뉴턴(2015.01.16. 15:02)
Yeungnam University / 嶺南大學校 학교 상징은 ‘천마’. 청구대학과 대구대학의 통합
자세히 언급하자면, 고려대를 손병희 선생이 최준 선생에게 넘기려고 했는데, 당시 사업을 추진중이라 여력이 없어서 김성수 씨를 추천한다. 그게 미련이 남았는지 광복 후에 대구대를 설립한 것이다. 대구대학은 1945년 10월 대구대학 전신 경북종합대학 기성회 조직했고 1947년 3월 경북종합대학이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하고 1947년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다. 1948년 9월 교사를 대봉동 현 대구중학교 자리로 이전했으며 1951년 4월 교사를 포정동 청구대학 구내로 이전, 향교재단과 합류하여 공동 운영했다. 1952년 5월 교사를 남산동 향교 구내로 이전했으나, 1954년 12월 대명동 신축 교사[5]로 이전했고 1957년 6월 본관이 준공되었다. 하지만 대구대학은 60년대에 재정난에 빠지게된다. 사재를 거의 다 투자했는데, 당시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측에서 5.16 군사정변을 지지하지 않은 지식인들을 압박할 셈으로 대학정비사업을 추진한다. 결국 학생을 그만 받든지[6] 과를 줄이든지, 돈을 더 투자하라고 통보받는다. 이에 결국 최준은 대구대학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 넘겨주었다. 과거 대구대학 교수를 지냈던 신현확 [7] 씨가 시멘트사업으로 확장하여 홍보목적으로 고심하던 이병철 회장에게 대구대학 인수를 제안(이라고 쓰고 명령이라고 읽는다.)하고 이병철 회장은 경주로 내려가 인수하기를 원하게 된 것. 그런데 알다시피 여기서 끝난게 아니다.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사건으로 유명한...) 삼성 사카린 밀수 사건때문에 이병철 삼성 회장이 퇴진하고 2년뒤 현장 복귀하는 조건으로 대학이 통째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넘어가 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대구대를 넘기고 성균관대학교를 받는 조건.
이사장 이동녕(제4,6,7대 국회의원) 이사 이효상(제6,7대 국회의장) 이사 백남억(민주공화당 의장, 제5,6,7,8,9,대 국회의원) 이사 신기석(영남대학교 초대총장, 부산대학교 총장, 국회의원) 이사 서정귀(국회의원, 재무부 차관) 이사 성상영(대성모방 회장) 이사 여상원(대구상공회의소 회장, 대구은행 초대회장) 감사 오일룡(대한상공회의소 회장)
2대 이선근 총장(영남대를 비롯해 성균관대, 동국대 총장을 역임했다. -출처 : 나무위키(최근 수정 시각 : 2016-12-14 17:53:26+0900)
영남학원 상황 1979년 박 전 대통령 사망 후 전두환씨는 같은 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하자 '영남학원 교주 박정희' 딸이라는 이유로 박근혜를 영남학원 이사장으로 임명했다.
-출처 : 프레시안 평화뉴스=김영화 기자(2016.11.23. 10:56:51) 영남대는 1989년 이래 관선이사체제로 운영하다 2009년 재단정상화로 설립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 7명 중 4명을 선임했다. 하지만 재단이 들어선 지 7년 만에 최근 영남대는 400여억 원 적자가 나는 등 재정 파탄 위기를 맞았다. -출처 : 뉴스민 '영남대 구성원들 박근혜 퇴진 공동시국행동 벌여'중 일부 글쓴이 김규현(2016년 12월 1일 | 5:45 오후)
정수장학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수장학회(正修獎學會)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학업과 연구를 할 수 없는 유능한 인재들을 지원하기 위해 세워진 단체이다. 그 전신은 부일장학회로써 1962년에 설립되었으며 원래 명칭은 5·16장학회였으나 1982년 전두환이 박정희의 사후 박정희의 ‘정’과 그의 부인 육영수의 ‘수’를 따와 1982년에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 문화방송 지분 중 30% 그리고 부산일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박근혜씨가 8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최필립 9대 이사장을 이어 김삼천이 10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1] 운영[편집] 정수장학회는 주로 박정희의 친인척과 측근이 운영하여 왔다. 박정희의 동서인 조태호와 딸인 박근혜가 각각 5·8대 이사장을 지냈고, 이후락 전중앙정보부장, 박준규 전부산일보 사장, 진혜숙 전청와대 총무비서 등 측근들이 이사를 지냈다. 정수장학회는 장학 활동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도 구성하고 있다. 장학생들은 대학에 다닐 때는 ‘청오회’, 졸업 뒤에는‘상청회’라는 모임에 가입된다. 1966년 만들어진 상청회는 교수 회원이 400여명이며, 김기춘 전한나라당 의원과 현경대 새누리당 제주도당위원장 등 정치인도 가입되어 있다.[2] [3] 자산[편집] 2012년 현재 정수장학회의 자산은 다음과 같다.
1995년 9월 22일 약 130억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정수장학회는 15년 동안 100억원 가량의 자산이 늘어났다.[4] 이사장[편집] 1962년 7월 14일 설립된 정수장학회의 역대 이사장은 다음과 같다.[5]
논란[편집] 정수장학회의 설립경위 및 실소유주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6] [7] [8] 또한 횡령과 탈세의혹이 일기도 했다.[9] 설립 과정 논란[편집] 5.16장학회의 모태인 부일장학회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과정이 법률적·정치적으로 하자가 없는 ‘기업가의 헌납’이냐, 아니면 ‘권력의 강탈’이냐 여부가 논란이다. 또한 국가로 헌납한 재산을 5.16 장학회로 불법 이전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부일장학회는 김지태의 재산으로 만들어진 장학회였다. 김지태는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재산해외도피 혐의 등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두 달 정도 구금생활을 하다 부일장학회와 부산일보, 한국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등의 운영권 포기각서를 쓴 며칠 뒤 공소취하로 풀려났다. 박근혜는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일장학회의 재산 포기는 헌납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지태의 큰아들 김영구 전 조선견직 회장은 "그해 5월 25일 부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관실에서 아버지가 수갑을 찬 상태로 운영권 포기각서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며 "내가 장남이라 인감 도장을 가지고 가,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5.16 장학회는 김지태가 재산을 '헌납'한 닷새 뒤 설립됐다.[10] 강탈 이후의 행적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부일장학회의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켜야 했음에도 이를 이용하여 정수장학회, 육영재단을 설립하여 재산을 은닉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겉으로는 공익으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이를 사유화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는데, 실제 박근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김영삼은 정수장학회와 육영재단을 '부정축재의 수단'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1] 이에 앞서 2005년 언론노조 정수장학회 공동대책위는, 정수장학회의 문화방송 주식, 부산일보 주식, 영남대, 부동산 등 그 재산을 최소 1조원이라고 추산했으며, 많게는 10조원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12] 국가정보원 조사결과[편집] 국가정보원 과거사건진실규명을 통한발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첫째,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에 의해 수사되었음이 당시 중앙정보부 지부장이었던 박용기씨의 진술에서 확인되었으며, 둘째, 62년 6월 20일 김지태가 구속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작성된 기부승낙서에 서명을 했으나 이마저도 구속 중 기부의 의혹을 지우기 위해 석방 이후인 6월 30일로 변조되었음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감정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셋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구사범 동기인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의 석방을 빌미로한 김지태에 대한 재산포기 종용이 사실로 밝혀졌으며, 넷째, 경향신문의 매각과정에서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앞세워 몇 번의 간첩사건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였음이 확인되었으며, 다섯째, 일련의 과정 속에 중앙정보부와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비롯한 국가 주요기관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졌음이 국가기관에 의해 최초로 사실로 규명되었다.[13] [14] 또한 이와 관련하여 김지태의 차남 김영우는 2010년 6월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2012년 2월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7부(재판장 염원섭)에 의해 5.16장학회의 ‘헌납’ 과정에서 강압이 있었음이 다시 한 번 입증되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김영우가 제기한 과거 부일장학회의 주식반환에 대해서는 공소시효 소멸을 이유로 기각하였다. 이에 김영우는 항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으며, 국가의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 시효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해줘야 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15] 박근혜는 정수장학회를 국가헌납 또는 이사진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정수장학회와 자신은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박근혜는 정수장학회는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이사진이 곧 주인이며, 이미 사회에 환원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6] [17] 하지만 이런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그들 주장대로 공익법인인 육영재단을 두고, 박근혜의 형제들끼리 싸우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박근혜의 인식과 그 가족의 행태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다.[12] 정치 쟁점화[편집]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검증 과정에서 정수장학회 문제가 거론되고 있으며 정치쟁점화되었다. 야권에서 진상규명 요청과 정치쟁점화를 주도하였다. 반대로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 측은 김지태가 친일 행적을 했다고 주장하였다.[18] 김지태씨 유족측은 이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정수장학회 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새누리당의 김지태씨 친일파 의혹에 대하여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한홍구 교수는 친일 문제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상세하게 검토해 봤지만 사실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19] 일부 트위터와 유튜브 등에서는 '김지태를 말하다' '정수장학회 의혹과 진실' '민족수탈자본 부일장학회와 김지태의 친일행적' 등의 제목을 사용하는 동영상과 글들이 올라왔다. 또한 그러한 게시물 중 일부는 새누리당 당직자들에 의해 유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20] 정수장학회 출신 유명 인사[편집] 지난 62년 설립 이후 정수장학회의 장학금을 받은 이들은 3만8000여 명에 이른다. 우선 정계 인물들로는 새누리당에 김기춘, 현경대, 김기도, 강성구 전 의원과 김재경 의원, 손봉숙, 채수찬, 홍창선 전 의원과 오제세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 전 의원 등이 있다. 그중 김기춘, 현경대 전 의원은 상청회장 출신으로 상청회의 양대 축으로 꼽힌다. 두 의원은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으로 활약했었다. 또 법조계에서는 신승남 전 검찰총장, 주선회 전 헌법재판관, 허만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와 성영훈 전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 등이 정수장학회 출신이고, 행정관료계에서는 서석준 전 경제부총리,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임상규 전 농림부 장관 등이 정수장학회 출신이다. 방송·체육계에서도 축구해설가 신문선씨, 양상문 전 프로야구 롯데 감독, 정은아 아나운서 등이 정수장학회 출신이다. 하지만 상청회 회원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영역은 학계다. 상청회 회원 중 약 400명이 현재 전국 각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 교수들 중 몇몇은 자발적으로 청오회 회원들을 지도하며 상청회 회원으로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21] -출처 : 위키메디아(2016년 7월 21일 (목) 1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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