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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의 몰락, 김기춘의 '폴더 인사'에서 예고됐다

장백산-1 2016. 12. 29. 22:14

박근혜의 몰락, 김기춘의 '폴더 인사'에서 예고됐다


[김당의 나까프 ⑥] '신(新) 김기춘뎐' 1-1 : 70년대 유신극장 '신 스틸러'의 종말

16.12.29 10:59l최종 업데이트 16.12.29 10:59l





김당의 나까프'에서 '나까프'는 '나쁜X 까발리기 프로젝트'를 줄인 말입니다. 여기서 'X'는 '놈'일 수도 있고, '짓'일 수도 있습니다. '나까프'의 대상은 공인 중의 공인인 전-현직 국회의원과 장-차관급 공직자들입니다. 나아가 무력을 가진 군과, 공권력을 가진 이른바 4대 권력기관(검찰-경찰-국세청-국정원) 그리고 갈수록 힘이 세지는 대기업 회장들도 당연히 '나까프'의 대상에 포함됩니다. [편집자말]


 (서울=연합뉴스) 안정원 기자 = 2013년 비서실장으로 임명될 당시 김기춘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2013년 비서실장으로 임명될 당시의 김기춘.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거제도는 진해만(灣)에 위치한 경상남도 거제시에 속한 섬이다. 옆에는 통영시, 북쪽 육지 쪽에 진해시와 마주 보고 있다.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교통이 불편했다. 1971년 연도교(連島橋)인 거제대교가 개통되어 통영시와 연결되었으며, 1999년 제2의 거제대교인 신거제대교(왕복 4차선)가 개통되었다. 지금은 거제와 부산(가덕도)을 잇는 거가대교가 생겨 거제-부산 거리가 140km에서 60km로 단축되고 육지 왕래가 한결 편해졌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거제 주민들이 진해나 부산을 왕래하려면 2차선인 거제대교를 통해 통영을 거쳐 멀리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거제주민들은 진해-마산-부산을 왕래하는 배편을 이용했다. 거제도 북단의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이 장목면(面)이다. 장목면 출신의 대표적 정치인이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다. 두 사람은 경남고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소년 급제'한 것도 공통점이다. 

김영삼은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만 26살에 금배지를 단 최연소 국회의원이다. 김기춘은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인 1960년 제1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최연소(만20살) 합격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963년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5.16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정되어 2년간 장학금을 받았다. 그와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김기춘은 뒤에 정수장학회 장학금 수혜자들의 모임인 상청회 회장(1991~1997년)을지냈다.


박정희-박근혜와 첫 인연은 5.16장학생... 신직수와 중정의 '풍년사업'

 1974년 4월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중간수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1974년 4월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중간수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의 공직 경력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신직수(1927~2001년) 전 법무장관이다. 갑종사관 출신으로 군 법무관이었던 그는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집권하자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을 거쳐 서울중앙지검 검사로 보임되었다. 이후 중앙정보부 차장(1963)을 거쳐 ▲ 11대 검찰총장(1963~1971)▲ 22대 법무장관(1971~1973) ▲ 7대 중앙정보부장(1973~1976)을 역임했다.

신직수는 군 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검찰총장에 기용되어 사법시험 기수가 생명과 같은 검찰조직의 수장을 7년이나 지냈다. 임명권자와의 개인적 인연(박정희 사단장 시절 법무참모)을 빼놓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또한 군 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으로서 검찰총장, 법무부장관, 그리고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5.16장학회 설립에도 깊이 관여했다. 

신직수는 1971년 5.16장학생 출신으로 평소 눈여겨봐 온 서울지검 검사 김기춘을 법무부로 데려왔다. 한홍구 교수(성공회대)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관운이 제일 좋다는 소리를 들은 신직수는 법무장관, 중앙정보부장, 대통령특보 등 자리를 옮길 때마다 김기춘을 데리고 다니며 오늘의 그를 만들어준 후견인이었다. 신직수가 검찰-법무부와 정보기관을 오가며 출세한 경력은 김기춘의 경력과 오버랩된다. '권력자의 눈에 드는 법률 기술자'로서 신직수의 경력관리는 피후견인이었던 김기춘에게도 자연스레 롤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락 6대 중앙정보부장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를 당선시키고 이후 유신헌법을 만들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꾀한다는 내용의 정치 공작을 '풍년사업'이라는 암호명으로 추진했다. 부지런하면서도 두뇌 회전이 빠르고 보안에 철저한 법무부 검사 김기춘은 풍년사업의 설계도인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데 뽑혔다. 그의 후견인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으로 쿠데타를 합법화하는 데 기여했다면, 그는 박정희 독재를 가능하게 한 유신헌법을 합법화하는 데 기여한 셈이다. 한홍구 교수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 시절 찾아낸 보고서를 근거로 '풍년사업'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 판단기획국 부국장을 팀장으로 하는 5명(1명은 브리핑 차트 제작을 담당하는 필경사)의 비밀공작팀은 궁정동에 둥지를 틀고 1972년 5월부터 대통령의 비상대권과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는 새로운 헌법의 골격을 짜기 시작했고, 박정희는 거의 매주 이후락, 김정렴 등과 함께 이를 검토했다…(중략)…궁정동 팀이 마련한 초안은 신직수가 장관으로 있던 법무부로 넘어갔다. 법무부에서는 박정희가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만든 5·16장학회의 첫 수혜자인 엘리트 검사 김기춘 등 10여명의 실무진이 궁정동 팀의 초안을 '헌법'의 형식에 맞게 만들었다."(한겨레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③공작명 '풍년사업', 2012. 2. 25)

김기춘과 박정희-박근혜 부녀의 두 번째 운명적 사건, 육영수 피격 사건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당시 육영수 피격 모습을 담은 현장 영상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당시 육영수 피격 모습을 담은 현장 영상
ⓒ 국가기록원


궁정동에서 시작된 중정의 정치공작은 5·16장학생 김기춘을 거쳐 유신헌법으로 완성되었다. 그의 역할은 긴급조치권-국회해산권 같은 핵심조항이 담긴 유신헌법 초안 작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유신헌법 홍보에도 적극 나섰다. 1972년 12월 대검찰청이 발행한 <검찰> 48호에 '유신헌법해설'을 기고해 3권 분립을 무력화한 유신헌법을 이렇게 옹호했다.

"유신헌법은 우리의 현실에 가장 알맞은 민주주의 제도를 이땅 위에 뿌리박아 토착화시키는 일대 유신적 개혁의 시발점이다.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구국영단을 강력히 지지하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결단에 의하여 확정을 보게 됐다."(오마이뉴스, 평검사 김기춘은 어떻게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나 http://omn.kr/3lx5)

박정희는 유신을 선포한 뒤에 그간 악역을 맡아온 이후락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법무참모 신직수를 앉혔다. 신직수 부장 재임기간(1973.12~1976.3)에 벌어진 중정의 대표적인 사법공작이 바로 민청학련 및 2차 인혁당 사건이다. 시국사범을 간첩으로 조작해 사법살인으로 이어진 2차 인혁당 사건은 김기춘이 중정에 부임하기 몇 달 전에 발생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의 사법처리 절차는 그가 부임한 이후에 진행된 점을 감안하면, 법률보좌관인 그가 직무상 직간접으로 관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법률 기술자 김기춘은 유신헌법이라는 시제품을 만드는 데 참여했을 뿐 아니라 '법률 A/S'(홍보)에도 가세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고시 동기생들을 훌쩍 뛰어넘어 법무부 과장(부장검사)으로 승진하게 된다. 신직수는 이런 김기춘 과장을 정보부로 데려갔고, 부장검사 김기춘은 1974년 8월 그곳에서 박정희-박근혜 부녀와의 두 번째 운명적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분노한 재일동포 문세광이 8.15 광복절 행사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한 와중에 육영수가 피격 사망한 것이다.

김기춘은 묵비권을 행사한 문세광의 말문을 열게 하라는 신직수의 지시로 수사팀에 합류했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드골 프랑스 대통령 암살을 다룬 <자칼의날>이라는 소설을 읽었느냐고 물어 문세광의 말문을 열게 했다고 한다.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맞았는지, 경호원의 총에 피격되었는지 지금도 의문이 제기되지만, 조총련을 배후로 한 문세광을 범인으로 특정해 사형케 한 5.16 장학생 김기춘은 박근혜에게 '어머니의 원수를 갚아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김기춘이 거제도 가면 군수-경찰서장이 도열... 유신체제 드라마의 '신스틸러'

김기춘은 그 공로로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으로 승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정 대공수사국은 대공 수사 외에도 대통령 특명사안(고위공직자 감찰)도 수행했다. 35살의 나이에 국가체제와 정권을 보위하는 중추조직인 중앙정보부 핵심부서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대공수사국장 시절의 대표작이 1975년 11월 22일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학원침투북괴간첩단' 사건이다. 일본에서 부산대로 유학 온 여학생 김오자 등은 중정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한 끝에 간첩으로 조작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지역은 향후 4년간 데모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을 만큼 학생운동 조직이 박살났다고 한다. 그 시절 그가 수행한 악역은 최승호 PD가 만든 다큐영화 <자백>에 잘 드러나 있다.

대공수사국장으로 근무한 70년대 중반 그가 고향을 방문할 때면 거제군수와 경찰서장이 장목항에 도열해 마중할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다. 이런 광경을 본 거제도 학생들은 김기춘 같은 검사가 되는 '청운의 꿈'을 키웠다. 실제로 김기춘 검사는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5공 때 잠시 한직에 머문 시련도 겪었지만,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지낼 만큼 법률가로서 승승장구했다. 이런 엘리트 코스 이력은 모든 예비 법조인들의 롤 모델이기도 했다.

'풍년사업'을 진행한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는 1979년 10월 박정희가 제8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궁정동 안가다. 친위쿠데타의 시종(始終)이 같은 장소에서 여일(如一)하게 끝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와 이후락-신직수가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의 주연이라면, 김기춘은 박정희 체제를 떠받친 10월 유신이라는 1972년에 제작된 막장 드라마에서 '주연 이상으로 주목을 받은 조역'을 의미하는 '신 스틸러'였던 셈이다.

바로 그 '72년 체제의 숨은 조력자'인 김기춘의 '흑역사'를 상징하는 역사적 장면은 2004년 3월12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뒤 헌법재판소에 탄핵안을 접수시킨 것이었다. 김기춘은 당시 탄핵소추를 주도한 국회 법사위원장이었고, 법사위 여당 간사는 경남 합천 출신의 김용균이었다. 군법무관 임용시험 출신으로 헌재 사무처장을 지낸 김용균은 16대 국회에 제출된 친일진상규명법안을 극력 반대했다. 


 12일 오후 김기춘 국회법사위원장(가운데)과 김용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오른쪽), 함승희 민주당 법사위 간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했다.
  12일 오후 김기춘 국회법사위원장(가운데)과 김용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오른쪽), 함승희 민주당 법사위 간사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했다.
ⓒ 권우성

공교롭게도 두 탄핵 주역의 부친은 각각 일제때 일본군 헌병과 면장으로 일해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친일과 유신을 청산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법이 어떻게 친일과 독재의 도구가 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장면이기도 했다. 한홍구는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설파했다.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고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러 간 자들은 친일과 유신과 5공과 지역감정의 화신들이었다. 김기춘과 김용균이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시키는 사진은 온 나라를 뒤흔든 탄핵사태의 본질이 '과거 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였다는사실을 웅변해준다."

☞ 이어지는 기사 : 3년 전 오늘, 박근혜-김기춘의 세 번째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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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국가정보원 대외비 자료와 직원 인터뷰를 토대로 '국정원 흑역사'를 파헤친 <시크릿파일 국정원>(메디치미디어, 2016)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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