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통일

민족통일이나 반공통일은 그만 말하자

장백산-1 2017. 3. 28. 12:12

한겨레

[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민족통일이나 반공통일은 그만 말하자

정의길 입력 2017.03.27. 17:46 수정 2017.03.27. 18:56


[한겨레]


북한을 통일이나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생존을 추구하는 국가로 인정해야 한반도 외교 안보의 현실주의가 시작된다. 민족을 위해서, 반공을 위해서 통일을 해야 한다는 이상주의가 지금의 남남갈등, 남북갈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립무원이 된 한국의 처지를 만들었다.

국제정치에서 두 가지 접근은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현실주의(리얼리즘)와 이상주의(아이디얼리즘)이다.

현실주의는 국제정치가 궁극적으로는 세력과 생존을 추구하는 국가 사이의 항상적이고 필연적인 갈등의 장이라고 본다. 국가에 생존과 세력 추구는 궁극적인 목적이며, 이를 위해서라면 타협과 협상, 동맹, 전쟁을 가리지 않는다. 반면 이상주의는 국가는 특정한 가치를 대외정책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전파나, 과거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추구했던 세계 공산주의 혁명이 대표적이다.

국제정치와 각 국가의 외교안보 정책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복합물이자 갈등의 산물이었다. 이상적으로 말하면, 국가의 외교안보는 이상주의를 내걸고는 현실주의로 작동해야 한다. 20세기 이후 국제사회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 재앙은 과잉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가 초래했다.

1차대전 뒤 미국의 이상주의에 바탕한 베르사유 체제는 패전 독일에 지나친 응징을 가하면서도, 실제로는 독일을 유럽에서 지정학적으로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이미 유럽에서 현실적 세력이 된 미국은 자신이 주도한 국제연맹을 의회에서 비토하고, 다시 아메리카대륙으로 철수했다. 러시아는 볼셰비키혁명으로 자발적으로 국제체제에서 철수했다. 영국은 힘이 빠진데다, 유럽대륙에 대한 ‘영예로운 고립’ 정책을 고수했다. 1차대전 뒤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세워진 동유럽 소국들이 독일에 접경했다.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할 유일한 세력은 허약한 프랑스뿐이었다. 그 결과는 나치 독일의 탄생이었다.

냉전에서 소련이 붕괴한 것은 사회주의로 포장한 그들의 지나친 현실주의가 낳은 재앙이다. 서유럽 열강의 침략에 시달린 소련은 2차대전 뒤 동유럽 국가들을 자신들의 방역선, 즉 안보완충 국가군으로 만드는 데 집착했다. 이는 미국 등 서방의 공포를 자아내, 대소련 봉쇄망을 불렀다. 소련은 동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봉쇄망을 뛰어넘어 제3세계까지 진출하는 국력의 과잉전개를 펼쳤다. 소련 붕괴의 근본원인 중 하나이다. 소련이 2차대전 뒤 동유럽 국가들을 핀란드 식의 중립화 국가로 타협했다면, 소련의 체제 부담은 훨씬 경감되고, 미국과의 지나친 대결을 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냉전에서 소련에 승리한 주춧돌은 리처드 닉슨의 현실주의가 놓았다. 닉슨은 반공도미노 이론에 기초한 베트남전 개입 등 미국 국력의 과잉전개가 부른 재앙을 직시했다. 그는 반공 매파였지만, 중국과도 화해하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였다. 이는 소련을 고립시키는 냉전의 지정학적 혁명이 됐다. ‘제국주의 원흉’ 미국보다는 소련이 안보 위협이라고 본 마오쩌둥, ‘흑묘백묘’론을 주장하며 체제 개방을 밀어붙인 덩샤오핑의 현실주의가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은 없다.

우리는 왜 통일을 해야 하나? 진보 진영에선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수 진영에선 북한의 공산체제 타도를 위해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칠고 단순한 구분이지만,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 안의 두 가지 근본적 접근이다.

민족통일이나 반공통일은 지나친 이상주의이다. 민족이나 반공이라는 가치에 현실을 맞추려는 것이다. 재야나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역시 이런 이상주의에 기초한다. 통일지상주의,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 북한붕괴론, 북한흡수론 등은 모두 이런 이상주의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사드 배치를 놓고 벌이는 갈등과 대결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드가 북한 미사일을 막는 효과가 확실하다고 해도, 그 부정적 효과가 더 클 수 있음을 따져야 한다. 외교안보는 무기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드 배치를 놓고 우리는 중국을 견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북한은 통일해야 할 대상, 타도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존에 몸부림치는 국가적 실체로 인정해야 한반도 외교안보의 현실주의가 시작된다. 통일은 무조건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한 방편으로 통일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얘기를 하면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돌팔매를 맞는 현실이 지금의 남남갈등, 남북갈등,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고립무원이 된 한국의 처지를 만들었다.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