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출범

길고 깊었던 어두운 박정희시대 그림자 딸과 함께 막 내리다

장백산-1 2017. 4. 3. 00:24

박정희시대 길고 어두운 그림자, 딸과 함께 막 내리다

등록 :2017-04-01 16:51수정 :2017-04-01 17:17



박근혜 전 대통령 영욕의 삶
박근혜 전 대통령이 31일 오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검찰 차량으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떠나 자신이 수감될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이 31일 오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검찰 차량으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떠나 자신이 수감될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은 31일 새벽 서울중앙지검 유치시설에서 대기하다가 구속영장 발부 소식을 듣고 화장실로 가 직접 올림머리에 꽂은 핀들을 뽑고 메이크업을 지웠다. ‘여왕’이라 불리며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가, 파면에 이어 구치소로 향하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를 챙긴 것이다. 처절한 몰락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의 구속수감은 ‘첫 여성 대통령’의 추락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짓눌러온 ‘박정희 시대’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기도 하다. 박 전 대통령은 산업화 세대의 박정희 향수, 대구·경북을 기반으로 한 지역감정, 강력한 반공정서 등에 힘입어 정계에 진출해, 줄곧 화려한 경력으로 한국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박근혜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던 김재원 전 의원의 말처럼, 그는 국회의원과 대통령 시절 유신시대의 가치관을 정치와 국정에 투영하며 끊임없이 퇴행을 시도했다. 그가 구치소에 수감됨으로써 ‘비로소 개발독재 시대가 끝났다’는 평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 현대사 짓눌러온 ‘박정희 향수’
아버지 후광으로 1997년 정치 입문
유신공안독재시대 가치관 투영하며 퇴행

2004년 ‘차떼기’ 한나라당 구해내며
‘보수 구원투수’ 선거판 휩쓸었지만…

대통령 된 뒤 불통 · 무능 · 인사참사
국정농단까지 드러나며 국민 분노
결국 탄핵당한 뒤 수감자 신세로

1997년 대선 직전, 그는 오랜 은둔을 끝내고 화려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뒤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던 그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고, 같은 해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그리고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곤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정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서 박정희·육영수를 보는 회고적 보수층이 뿌리 깊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불법 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명실상부하게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등판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총선에서 121석을 건졌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하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쪽의 갈등은 고조됐다. 2008년 총선 때 친이명박계의 ‘친박 학살 공천’ 논란과,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대립으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년 12월,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재등판한다. 박 전 대통령은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 외연 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 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하고,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취임 뒤 잇따른 인사 사고와 불통 논란, 2014년 세월호 참사 및 2015년 메르스 사태로 ‘무능함’을 드러냈다. 임기 중반 이후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내 비박근혜계 지도부와 충돌을 빚었다. ‘레임덕’에 대한 불안은 박 전 대통령을 스스로 폭주하게 만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 찬반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을 밀어붙이며 ‘국론 분열’에 앞장섰다.

지난해 가을부터 드러난 ‘최순실 국정농단’ 충격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5% 밑으로 추락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한꺼풀씩 벗겨질수록 국민들은 경악했고, 촛불민심에 떠밀린 국회가 지난해 12월10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이후 92일 만인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내렸고, 검찰 조사(3월21일)와 구속영장 청구(3월27일), 영장실질심사(3월30일)가 급박히 이어졌다.

30일 오전 굳은 얼굴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선 박 전 대통령은 결국 서울 삼성동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등록 :2017-04-01 16:51수정 :2017-04-01 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