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31일 오전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검찰 차량으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을 떠나 자신이 수감될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아버지 후광으로 1997년 정치 입문
유신공안독재시대 가치관 투영하며 퇴행2004년 ‘차떼기’ 한나라당 구해내며
‘보수 구원투수’ 선거판 휩쓸었지만…대통령 된 뒤 불통 · 무능 · 인사참사
국정농단까지 드러나며 국민 분노
결국 탄핵당한 뒤 수감자 신세로1997년 대선 직전, 그는 오랜 은둔을 끝내고 화려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뒤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던 그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그는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를 통해 금배지를 달았고, 같은 해 한나라당 부총재로 선출됐다. 그리고 2002년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9개월 동안 ‘외도’한 것을 제외하곤 언제나 보수정당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가 정계에서 화려한 이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서 박정희·육영수를 보는 회고적 보수층이 뿌리 깊게 존재했기 때문이다.2004년 한나라당 ‘차떼기’(불법 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빠지면서, 박 전 대통령은 ‘구원투수’로 명실상부하게 당의 중심에 섰다. 당 대표로 등판한 그는 정당 역사상 유례없는 ‘천막당사’를 발판으로 총선에서 121석을 건졌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년3개월 동안 지방선거와 각종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을 상대로 ‘40 대 0’의 완승을 거두며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박 전 대통령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이명박 후보와 경쟁했지만 패했다.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고 선언하며 차기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부터 양쪽의 갈등은 고조됐다. 2008년 총선 때 친이명박계의 ‘친박 학살 공천’ 논란과,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대립으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다.‘여당 내 야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얻은 그는 2011년 12월,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 파문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붕괴되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재등판한다. 박 전 대통령은 김종인·이상돈·이준석 등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 외연 확장을 모색했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꿨다. 당헌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추가했다. 이듬해인 2012년 4월 총선에서 과반 의석(152석) 확보에 성공하고, 12월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당선됐다.하지만 그는 대통령 취임 뒤 잇따른 인사 사고와 불통 논란, 2014년 세월호 참사 및 2015년 메르스 사태로 ‘무능함’을 드러냈다. 임기 중반 이후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 등 여당 내 비박근혜계 지도부와 충돌을 빚었다. ‘레임덕’에 대한 불안은 박 전 대통령을 스스로 폭주하게 만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12·28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합의, 개성공단 폐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등 찬반이 첨예하게 맞붙는 사안을 밀어붙이며 ‘국론 분열’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