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마음은 쓰일 때는 변하지만 그 바탕은 움직임이 없다

장백산-1 2017. 5. 14. 01:28

不動(부동), 그리고 生命(생명)……?




오늘은 그 동안 한 3개월 전부터 찾아보려고 했던 노스님 한 분을 찾아 뵙기로 하고 


아내와 驛前(역전) 場(장)에 가서 감을 한 박스 사서 집을 나서다. 



스님계신가요 하고 두어 번 외쳤더니 창문을 열고 내다보신 노스님께선 


아내와 날 알아보시고 "오랫만에 오시네" 하시며 어서 들어 오라 신다. 




우리는 스님께 3배 올리고 윗목에 앉자,  "요즈음도 여전히 精進(정진) 잘하느냐"고 물으시기에 


"한다고는 합니다만 아직 멀었습니다"고 했다. 




잠시 몇 마디가 오고 간 뒤에 그 동안 내가 들어왔던 '無字話頭'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부득이 無라고 했을 뿐이지"라고 하시면서 몇 말씀 해 주셨다. 



80이 넘으신 노스님께선 지금도 정정하시고 도통 늙어 가시는 모습을 느낄 수 없는 그런 분이시다.


노스님께선 별로 말씀하시기를 즐겨하지 않으시기에 나는 노스님의 닫친 말문을 열기 위하여 


"粒子(입자)와 波動(파동)이 결국 光子(광자)인 빛"이라는 하이덴베르크의 不確定性(불확정성)의 


原理(원리)를 잠깐 說明(설명) 드렸더니 



노스님의 눈이 커다래지시면서 "動(동)하는 粒子(입자)와 波動(파동)이 빛이란 것"말고 


不動(부동)도 빛이라 한 것이냐고 날카로운 質問(질문)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粒子(입자)와 波動(파동)은 恒動(항동)하는 빛이라고 하나 不動(부동)도 역시 빛인지는 


과학에서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段階(단계)라고 대답했다.




이 대목에서 노스님께서는 "不動(부동)과 動(동)"  그리고 빛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해 주셨다. 


動(동)은 生命(생명)이지만 動(동)이 나온 자리는 不動(부동)이며, 不動(부동)이기에 뭐라고 운운할 수 없다. 


만약 不動에 대해 운운한다면 운운한 만큼 不動의 그 자리는 벌써 不動(부동)과 한참 멀어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不動(부동의 자리)을 일러서 不生不滅(불생불멸)이라고 한 것이며,

 

不動(부동)도 空(공)이고, 動(동)도 역시 空(공)이긴 하지만 動(동)은 곧 不動(부동)에서 나왔으나 


不動(부동)은 나온 곳이 없이 本來如如(본래여여)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스님께선 不動(부동)의 의미를 내게 確實(확실)하게 알려주시고자 눈을 한 번도 깜짝이지 않으시고 


내 눈을 뚫어져라 凝視(응시)하시면서 내가 스님의 눈빛을 보고 뭔가 實感(실감)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힘주어 몇 번이고 말씀해주셨다. 




그러시면서 이 不動(부동)에 대해 實感(실감)하고 確信(확신)할 수 있다면 공부가 절반이상 된 것이다.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修行精進(수행정진) 한다면 공부가 日就月將(일취월장)하리라는 말씀도 하셨다.




動(동)하는 一體(일체),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죽은 것이고, 不動(부동)이 바로 永生(영생)하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動(동)하는 것은 살아 있고, 不動(부동)인 것은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고 하셨다.




動(동)하기 때문에 有限(유한) 한 것으로서 因緣生 因緣滅(인연생 인연멸)하는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죽은 것, 이 세상 모든 것을 쫓아다니기 때문에 인간들 역시 죽은 송장이냐 마찬가지라고도 하셨다. 


修行(수행)이란 結局(결국) 이 不動(부동), 즉 空(공)을 體驗(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도 하셨다.



근 100여분이 지난 것 같아 우리는 스님께 3拜(배)를 올리고 庵子(암자)를 내려왔다.




그 동안 공부를 해 오면서 法身(법신)과 報身(보신), 不動(부동)과 恒動(항동), 生命(생명)과 생명 이전의 


세계에 대해 所見(소견)은 있었지만 確信(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오늘 스님의 맑으면서도 밝고 힘찬 눈 빛 


속에서 흔들림 없는 確信(확신)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