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체(體)이다
차의 근본은 기(氣)이다. 차의 색(色) ·향(香) ·미(味)는 차의 외연(外緣)으로 氣의 적합성을 가름하는 잣대이다. 차의 진수(眞髓), 다시 말해 차의 기운, 즉 色, 香, 味는 물을 만나야지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물은 차의 진수를 담아내는 그릇(體, 바탕)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물에 대한 탐구는 다서(茶書)의 중요한 절목(節目)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특히 초의 스님은 차와 물에 대한 상관관계를 이렇게 정의 하였다.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체(體)이다(茶者水之神 水者茶之體)/
좋은 물이 아니면 (차의)색향기미를 드러내지 않고(非眞水莫顯其神)/
잘 만들어진 차가 아니면 (물의) 본질을 엿볼 수 없다(非眞茶莫窺其體)
물은 차의 체이다. 차는 물을 통해서만 자신의 세계를 현현하므로, 물을 차의 체(體)라 하는 것이다. 차는 물에 의해 자신의 실체를 현현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한 것. 물에 의해 드러난 차의 색과 향과 맛과 기운이 용(用)인 셈이다. 따라서 잘 만들어진 차와 좋은 물이 융합되어야 오묘한 차의 진수를 드러낸다. 선인들의 차와 물에 대한 탐구는 이런 이치를 터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의가 “옥화(차) 한 잔을 마시니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일어나고,
가벼워진 몸은 이미 신선의 경계를 건넜다(一傾玉花風生腋 身輕已涉上淸境)”
고 한 것은 바로 차를 마신 후, 맑고 가벼워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이리 표현한 말이었다. 이러한 차의 경지를 초의보다 앞서 말한 이는 노동(盧仝 795~835)이다. 그는 ‘주필사맹간의기신차(走筆謝孟諫議寄新茶)’에서 차의 진유(眞)를 마신 후 변화를 이렇게 읊었다.
중략…/
푸른 구름 바람결에 끊어질 듯 피어나고(碧雲引風吹不斷)/
엉킨 하얀 (차)거품, 찻잔에 어렸네(白花浮光凝茶碗)/
첫잔은 입술과 목젖을 적셔주고(一椀喉吻潤)/
둘째 잔은 고민을 없애주네(二椀破苦悶)/
셋째 잔은 삭막해진 마음을 더듬어(三椀搜枯腸)/
오천권의 문자를 떠오르게 하고(惟有文字五千卷)/
넷째 잔을 마시니 살짝 땀이 나는 듯(四椀發輕汗)/
일상의 미덥지 않던 일, 땀구멍 사이로 사라지네(平生不平事盡向毛孔散)/
다섯째 잔은 몸을 맑게 하여(五椀肌骨淸)/
여섯째 잔을 마시니 신선과 통하네(六椀通仙靈)/
일곱째 잔은 마시지도 않았는데(七椀吃不得也)/
겨드랑이 사이로 맑은 바람이 스물스물 이는 것을 알겠구나(惟覺兩腋習習淸風生)/
중략…
노동은 차를 마신 후, 변화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자세히 서술했다는 것 이외에도 예술적인 안목으로 차의 경지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후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후일 이 시는 ‘다가(茶歌)’ 혹은 ‘칠완가(七椀歌)’로 약칭되었고,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조선 사대부들이 애송했던 시이다.
특히 그가 세 번째 차를 마신 후, 만권 장서의 문장이 다시 생각난다는 말은 차를 마신 후, 머리가 맑아진 상태를 이리 표현한 것으로, 그의 섬세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더구나 차를 마시면 살짝 땀이 나는 현상을, 일상의 나쁜 일들이 땀구멍 사이로 흩어진다고 한 표현이야말로 차의 진정성을 이해한 자만의 드러낼 수 있는 멋이다.
스물 스물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이는 차의 경지는 차와 물의 조화가 드러낸 세계,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초의의 노력은 ‘품천(品泉)’과 ‘탕변(湯辨)’으로 요약된다. ‘품천’은 어떤 물이 차에 잘 어울리는 것인지를 분별하는 법이고, ‘탕변’은 끓는 물의 상태를 분별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그의 설명 다음과 같다.
물은 진수를 얻어야하며(水得其眞)/
물을 끓이는 법은 중도를 얻어야(泡得其中)/
물과 차가 서로 어우러져(體與神相和)/
차의 건영이 어울려 드러난다(健與靈相倂)
포법(泡法)은 대략 물의 선택과 물 끓이기, 차 우리기로 나눈다. ‘다신전(茶神傳)’의 ‘탕변(湯辨)’, ‘탕용노눈(湯辨老嫩)’, ‘포법(泡法)’장은 모두 물 끓이기의 적합성과 차 우리기의 시의성(時宜性)을 밝힌 것이다. 차의 건영은 차의 진유(眞)를 말한다. 초의는 물 끓이기의 선행조건을 화후(火候)에 두었다. 화후는 숯의 선택, 그리고 은근한 불과 화력이 센 불의 조화로 나눴다. 다시 말해 불에는 은근한 화력을 지닌 문화(文火)와 화력이 거센 무화(武火)가 있다. 문무화(文武火)의 조화를 강조한 초의는 ‘다신전’의 ‘화후(火候)’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은 진수를 얻어야 하며, 물 끓일 때는 중도가 핵심,
제다·포법의 오묘한 경지, 초의 안목서 다시 피어나
화로의 숯불이 붉어지면, 주전자를 (화로에)올려 놓고, 가볍고 빠르게 부채질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이 끓는)소리가 나면 점점 빨리 부채질을 하는데, 이것이 은근한 불과 센 불이다. 약한 불에서 오래 (물을)끓이면 물이 힘이 없어지고, (물이)유약하면 (차의) 맛이 드러나지 않는다. 센 불에서 (물을) 끓이면 불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차가 물에 제압된다. (이는)모두 조화로운 차 맛을 내기에는 미흡하다
(爐火通紅 茶瓢始上 扇起要輕疾 待有聲稍稍重疾 斯文武之候也 過於文則水性柔
柔則爲茶降 過於武則火性烈 烈則茶爲水制 皆不足於中和)
중화(中和)는 다도의 정수이다. 이는 차 만드는 법과 포법(泡法)에서 초의가 일관되게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화는 초의의 다도사상은 아니다. 그가 “물을 끓이기”에 있어 불의 세기의 적합성을 강조한 것은 결국 순숙(純熟)의 상태로 물을 끓이기 위한 법도이며, 절차였다. 순숙은 차를 우리기에 가장 알맞은 물의 상태를 말한다. 문무가 잘 조화된 불에서 끓인 물은 온화한 차의 건령을 드러낸다. 이런 차에서는 활기찬 원기가 살아있고, 눈이 환해지며, 온 몸을 따뜻한 온기로 감싸게 한다.
그의 ‘봉화유산(奉和酉山)’에서는 '하나의 이치'를 터득하면 모든 사물의 이치에 회통된다는 견해를 이렇게 말했다.
물외의 맑은 빛은 뽐낼 게 없어(物外淸光未足誇)/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경계 없는 것을(一家知後更無家)/
의심나는 먼 일이랑 중금탁에 담아두고(疑遙事在中金)/
숨길 수 없는 향기 소계화가 전한다네(無隱香傳小桂花)/
보통 사람이야 누가 물과 우유를 분간하리(凡手誰當分水乳)/
영특한 사람, 모래 속에서도 황금을 가린다네(靈眸人可辨金沙)
초의는 모래 속에서도 황금을 찾아낼 수 있는 눈 밝은 이였다.
포법의 오묘한 경지는 초의의 안목에서 다시 피어났다.
박동춘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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