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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또래는 三國志를 읽어서 망했다

장백산-1 2017. 6. 30. 10:09

조선일보

우리 또래는 三國志를 읽어서 망했다

어수웅 기자 입력 2017.06.30. 03:05



[나의 사적인 서가] 소설가 김훈
내 '길티 플레저'는 군사 깡패 '삼국지'
정신에 미친 해악 적지 않지만 알면서도 재미있어
잠자리 책?
책, 책 하지 마라 고요히 누워서 회음에 집중하라
일러스트=안병현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 더 내밀한 책 고백은 어떨까. '나의 사적인 서가'를 시작한다. 당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독서 리스트. 첫 회는 최근 '남한산성' 100쇄 특별 한정판을 찍은 소설가 김훈(69)이다.

1. 당신의 잠자리를 함께하는 책은

"요가는 인간의 육신과 영혼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서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연다. 살아있음은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의 세계이다. 엘리아데의 '요가'는 요가가 생명 속에서 작동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요가는 수련과 실천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삶의 경지이고, 요가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은 요가가 아니다. 요가뿐 아니라 다른 많은 일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사람들아, 책을 읽더라도 너무 책, 책 하지 마라. 잠자리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좋다. 고요히 누워서 정신을 회음에 집중하고 몸이 텅 빔으로 충만할 때 경건한 마음으로 잠을 모셔라."

2. 최근 읽은 책 중 당신을 울게 만든 책

"김수영 산문집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그는 머리통으로 바위를 들이받듯이 글을 써나간다. 그는 자유의 창공을 날아가는 꿈의 힘으로 악세(惡世)의 뻘밭을 허우적거리며 기어간다. 그의 가난, 그의 짜증, 울분, 신경질, 자기 학대, 그의 술주정, 그의 구공탄 가스중독, 병들어서 죽은 그의 닭들, 포즈와 속물근성에 대한 그의 증오…. 그가 자기검열 없이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읽는 나는 신나고 또 눈물 난다. 50년 전에 그의 번역 원고료를 떼어먹은 출판업자들을 나는 지금도 미워한다. 그는 자유가 부재하는 시대의 고통을 절규함으로써 자유를 이행했고, 그 자유의 길을 '온몸으로' 밀고 나갔다."

3.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웃게 만든 책은

"김수영 산문집을 읽다가 나는 혼자서 낄낄낄 웃는다. 그는 치열한 생활인이었다. 그는 생계비를 걱정하고, 양계에 들어가는 비용을 걱정하고, 아이들의 학비를 걱정하고, 학업 성적이 떨어진 아이를 때려주고, '구걸 번역' 일거리를 구하러 거리로 나선다.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번번이 주저앉지만, 몽상이나 서정 속으로 달아나지 않는다. 그는 끝까지 맞선다. 주저앉은 그가 그 놀라운 정직성으로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대목에서, 나는 낄낄 웃는다. 그럴 때, 그는 천진하고, 겁이 없다. 나는 웃기는 웃지만, 웃고 나면 슬프고 분하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문학관에 가면 그의 체취의 편린들을 볼 수 있다."

4. 당신이 받은 책 선물 중 잊을 수 없는 책

"정수일 선생이 주신 '실크로드사전'과 '해상실크로드사전'은 늘 가까이 있다. 수천년 전에 멸망한 대도시들, 범선을 몰아서 미지의 대양을 건너가는 대항해 시대의 사내들, 수많은 항구, 오아시스, 시장 거리, 성벽, 전쟁, 별자리, 등대, 운하, 영웅, 노예, 언어, 문자, 선박, 지도, 무기, 유적, 뱃길 등속들이 이 책 속에 기술되어 있다. 인간은 쉴 새 없이 이동하고 쉴 새 없이 뒤섞이며 살아왔다. 아마도 실크로드를 개척한 힘은 이윤이었을 것이다.

문명과 교류는 그 이윤 위에 얹혀서 따라간 것인데, 교역과 약탈은 선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화려했던 도시들이 불타고 제국이 멸망해도, 그것들은 증발하지 않고, 문명의 역사 속에서 습합되고 공유된다. 이 책은 과학자의 책인 동시에 몽상가의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 오래전에 나의 DNA 속에서 지워진 유목적 본능의 아우성을 듣는다."

5. 죄책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남몰래 즐기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는

"나와 내 또래 남자들은 '삼국지'를 너무 많이 읽어서 이 모양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고등학교 때는 모여 앉으면 '삼국지' 얘기만 했고, '삼국지'를 모르는 애들은 왕따 되었다. 연의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호걸은 대부분이 군사 깡패다(공명만 빼고). 그들은 의리를 명분으로 작당하고, 배신하고 합치고, 옆구리 찌르고, 속고 속이고, 속는 척해주면서 뒤통수 친다. 그들은 전쟁과 살육이라는 그 비극적 현실 자체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들은 싸움만 알았지 미래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지'는 재미있다. '삼국지'가 동양 남자들의 정신에 미친 해악은 작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또 '삼국지'를 읽는다."

6. 당신 책장에 있다면 사람들이 놀랄 책

"'중장비의 구조와 기능'과 '경호 사격술'은 나에게도 낯설다. 내가 이런 책을 구해서 읽는 이유를 나는 잘 설명할 수가 없다. 이 책은 언어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는 이 책이 처해 있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중장비는 포클레인과 불도저, 페이로더 같은 것인데, 땅이나 구조물을 갈아엎어서 개조하는 기계다. 이것들은 삽날을 주무기로 삼고 있는데, 인간의 손, 두더지의 앞발, 멧돼지의 코와 비슷하다. '경호 사격술'은 고난도 권총 사격술이다. 그 조준선 위에서 생사는 명멸한다. 군대에서 사격을 배울 때, 무기는 언어도단의 세계라는 걸 알았다. 나는 사물과 사물이 맞닿는 접촉면에 관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