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나이에 유통기한이 있는 걸까요?"
정이숙 입력 2017.09.03. 14:43
무심코 유튜브를 보다 가슴을 쿵 울리는 카피를 들었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겐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걸까요?’ 부모 품에 안긴 아기들의 영상 위로 흐르는 내레이션이었다. 마침 광고인으로서 나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출근길 지옥철에 오를 때마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화장품 브랜드 SK-II의 2017년 캠페인 영상은 서울과 상하이, 도쿄에서 여자 아기가 태어나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갓난 아기들의 팔뚝에는 생년월일인 1987/08/30과 30년 후인 2017/08/30이라는 숫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아기들은 소녀가 되고 처녀로 자라면서 팔뚝 위의 숫자를 자꾸 의식하고 가리려고 애쓴다. 호감 가는 남자와 있을 때나 친척이 모인 자리에서 또는 결혼한 친구를 볼 때, 나이 들수록 그녀들은 점점 위축된다. 마침내 2017년, 결혼하지 못한 채 만 서른 살이 된 세 나라, 3명의 여성들은 절망하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편견을 깨겠다는 힘든 결심을 하고 소매를 걷어 당당하게 팔뚝의 숫자를 내보인다. 그러자 문신처럼 새겨있던 숫자들이 스르르 사라진다.
이 영상은 사회가 암묵적으로 여성의 결혼 적정 연령을 규정하고 있음을 환기 시키고, 누구도 나이로 여성을 재단하고 평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카피를 보자.
자막) 1987년 서울
1987년 상하이
1987년 도쿄
여O.V)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겐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걸까요?
처음엔 희미한지만, 나이가 들수록 선명해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행동을 틀 안에 가두며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도 망설여지게 하는
나이로 나를 판단하는 타인의 시선들…
나이에 정말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결혼, 출산. 특정 나이 전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편견들.
아니면 우리가 바꿀 수 있을까요?
자막) 2017년 도쿄
2017년 상하이
2017년 서울
여O.V) 나이에 대한 편견에 굴하지 않고
내가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결정한다면
그리고 그 결심을 모두와 나눈다면
운명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자막) 나이에 유통기한은 없다.
늦으면 안 된다는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마세요.
(SK-II_영상 캠페인_운명을 바꾸다(changedestiny)_2017_카피)
팔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지워버린 영상 속 여성들 위로 오랜 친구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친구는 30년을 꼬박 고등학교 교사로 일하다 지난 달 말 명예퇴직 했다. 그리고 앞으로 시골로 터전을 옮겨 농사를 짓겠다고 공표했다. 그녀는 진작에 ‘토종학교’에 등록해 토종 씨앗으로 농사짓는 법을 배웠고, 몇 년 동안 텃밭을 가꾸고 농부들과 교류하며 실전연습을 하고 있다.
그녀의 은퇴 기념 파티 초대 카드에는 연필로 꾹꾹 눌러 쓴 문장이 적혀 있었다. ‘풀을 이길 수 있으면 농사 짓고 아니면 꿈도 꾸지 말라던데 전 풀이 좋습니다.’ … 손으로 그린 카드는 풀잎 모양을 낸 노끈으로 묶여 있었다. 풀과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농사를 짓겠다는 다짐으로 보였다.
기꺼이 친구의 은퇴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장의 친구는 새 출발의 꿈에 부푼 새내기처럼 행복해 보였다. 타인의 시선, 집과 직장의 의무감을 모두 벗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심을 주변과 나누’는 친구에게 나이나 직업의 유통기한 따위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의 유통기한에 대해 생각했다. 몸담은 조직과 맺은 계약의 유통기한은 맘대로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내 안팎의 고정관념이 만들어낸 유통기한들은 모두 필요 없는 것들이다. 하고 싶은 일 유통기한, 연애 유통기한, 여자 유통기한, 여행 유통기한, 모험 유통기한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 무엇보다 이 가을에는, 행동하기도 전에 자꾸 머뭇거리게 하는 ‘나이 유통기한’을 없앨 수 있었으면 좋겠다.
SK-II_영상 캠페인_운명을 바꾸다(changedestiny)_2017_스토리보드
SK-II_영상 캠페인_운명을 바꾸다(changedestiny)_2017_유튜브링크
(친구의 은퇴 기념 초대 카드)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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