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흐름에 따라 흐르되 흐름에 맡기지 않는다

장백산-1 2017. 9. 19. 16:22

흐름에 따라 흐르되 흐름에 맡기지 않는다


무심히 반영하면서도 그 반영에 사로잡히지 마라


원문: 배휴가 물었다. “세속제란 무엇입니까?”


마음엔 모양과 형체 없어 다만 감수작용만 있을 뿐

힘든 고난에 맞닥뜨리면 관조해 흘러가게 두어라


선사가 말했다. “갈등을 설해서 무얼 하겠는가? 本來 淸淨한 것이거늘 어찌 언설로서 묻고 답하랴! 다만 일체의 마음이 없는 것을 무루지(無漏智)라고 할 수 있다. 그대가 매일 앉고 서고 누워있을 때나 어떤 말을 할 때도 단지 有爲法에 집착이 없다면, 말을 하고 눈을 깜빡이는 모든 움직임이 분별 망상 번뇌가 없는 경지[無漏]이다. 말법시대로 접어든 지금, 선도(禪道)를 배우는 자들이 온갖 소리와 색깔에 執着하고 있으니, 어찌 자신의 마음과 더불어 눈을 뜰 수 있겠는가? 마음이 虛空과 같고, 古木이나 돌덩이 같으며, 다 탄 불씨와 같아야 한다. … 그대가 다만 유상(有想)ㆍ무상(無想)의 제법(諸法, 우주만물)을 여의었다면, 마음은 항상 태양이 허공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光明은 자연스럽게 비추지 않아도 비추인다. 그러니 굳이 인위적으로 힘쓰지 않아도 된다! 여기에 도달하는 때 머무를 곳이 없으니, 곧 모든 행이 제불의 행이다. 응당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


해설: 별도로 수행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별 망상 번뇌를 그치기만 하면, 바로 그 자리가 무루지 경지이다. 그래서 움직이고 말하는 일상의 행위 자체인 상태가 바로 부처인 것이다. 차별심이나 분별심이 없는 淸淨心이라면 굳이 수행이라는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어록에서 말하고 있다. 이런 청정한 마음에 머물러 있으므로 그 자리는 무상정등정각인 최고의 경지이다.


원문에서 세속제(世俗諦)란 유위법(有爲法)이다. 반대 개념인 무위법(無爲法)은 열반 세계를 향한, 적멸(寂滅)의 眞理를 지칭한다. 진제(眞諦)라고도 할 수 있다. 유위법은 속제라고 통칭하는데, 형체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말하며, 조건 지어서 형성된 것으로 중생을 윤회토록 하는 법들이다.


‘유마경’에 제시된 유위법과 무위법을 보기로 하자. ‘제자품’에서는 출가에 대해 언급하면서 ‘출가에 공덕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유위법이고, 무위법 입장에서는 출가에 이익도 공덕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참 출가는 공덕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분별심이나 차별심ㆍ집착심이 없는 無心의 경지여야 하는데, 이를 無爲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보살품’에서 ‘중생을 교화하되 공적(空寂)한 마음 바탕에서 유위법조차도 버리지 않고 무상(無相)을 추구해야 眞正한 무위법의 경지이고, 이것이 참 중생교화’라고 하였다. 한편 깨달음의 보리에는 과거ㆍ현재ㆍ미래 시간이 없듯이 無爲法 境地인 眞理에는 과거ㆍ현재ㆍ미래가 끊어진 것으로서 眞如인 法身은 오고가는 시간적인 거래가 없다고 하였다.


원문에서 ‘여기에 도달하는 때, 머무를 곳이 없으니[無棲泊處무서박처]’를 보자. 무서박처는 분별하거나 집착하거나 인위적으로 쓸데없는 힘을 쓸 필요없이 임의자재한 것을 말한다.


원문에서 ‘곧 모든 행이 제불의 행이다. 곧 응당히 주하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고 한 부분을 보자. ‘應無所住 而生其心’은 이 어록에서 두 번 나오지만, 유사한 의미가 여러 곳에 있다. 이 구절은 6조 혜능이 주막집에서 듣고 출가하게 된 것인데, ‘금강경’이 선종의 소의경전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심(其心)이란 청정심(淸淨心)ㆍ無心을 말한다. 게송을 한번 보자.


마음은 수많은 대상 경계를 따라 변화면서 흘러가고, 변화하면서 흐르는 곳은 참으로 유깊고 적막하다. 흐름을 타고 흐름의 근본성품을 알게 되면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다.(‘경덕전등록‘에 서천 조사 23조 학륵나존자 게송)


마음에는 모습이나 형체가 없다. 다만 감수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느끼는 데에 마음이 존재한다. 마음은 쓴 곳에 있다. 흐름에 따라 흐름은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분별 망상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유현하다’는 말은 미묘하다는 말(眞性甚深極微妙)이다. 무심히 만 가지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면서도 미(美)ㆍ추(醜), 시(是)ㆍ비(非) 등에 일체의 분별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만 흐르는 데에 물의 유현하고 미묘한 맛이 있다. 곧 무심이다. 분별 망상 번뇌의 근원을 분명히 알면, 기쁠 때는 단순히 기뻐하고, 슬플 때는 단순히 슬퍼하면서 마음을 조용히 흐르게 그냥 놓아둔다. 그래서 ‘흐름에 따르되 흐름에 맡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때, 세상의 힘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 혹 힘든 고난에 맞닥뜨려 있으면, 그대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조해서 그냥 흘러가게 놓아두어라. “이 마음 또한 지나갈 것이다.”


정운 스님 saribull@hanmail.net

 


[1407호 / 2017년 9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