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실지견(如實知見), 부처(佛)란 뭣인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마음은 그대로 영원히 생겨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不生不滅) (常住不滅) ,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부증불감/不增不減) 불심(佛心)입니다. 불심(佛心)이 우리들의 마음(心)입니다.
인간의 육신(肉身)은 뭣인가? 육신(肉身) 이것도 역시 무시무종(無始無終), 불생불멸(不生不滅), 상주불멸(常住不滅), 영원불멸(永遠不滅)하는 마음(心) 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형상(形象)입니다. 몸(身)은 풀 위에 맺혀있는 이슬 같은 아침에 낀 안개 같은 것입니다. 또는 봄날에 저 멀리 끼어있는 아지랑이 같이 이렇게 고정된 실체가 없이 끼어 있는 이것이 우리 몸이란 말입니다. 산골짝기에서 메아리가 울리지만 그 메아리 소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듯이 우리 몸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 때문에, 병을 앓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 잘못보기 때문에 내 몸은 이것이다, 네 몸은 이것이다, 저 사람은 미운 사람이다, 이렇게 분별을 해서 보는 것이지 분별을 해서 보는 이런 것들은 아지랑이나 또는 산골짝기에서 울려퍼지는 메아리 소리와 똑 같은 실체가 없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몸이나 메아리를 실체로 착각한단 말입니다. 허상(虛像)을 사실로 착각합니다.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은 딴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바른 철학(哲學), 바른 가치관(價値觀)을 갖지 못한데 있습니다. 실체가 없는 허상(虛像)을 사실(事實)로 영원불변(永遠不變)하는 고정(固定)된 실체(實體)로 보는 것이 불행(不幸))의 원인(原因)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스러운 누군가가 특별히 어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가 밉다고 해서 미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실체(實體)가 아닌 허상(虛像)을 자꾸 부풀려서 미운사람은 더욱 더 밉게 보이는 겁니다. 좋은 사람은 더욱 좋게 보인단 말입니다. 이런데 사람들의 불행(不幸)이 있습니다.
돈, 지위, 권력, 명예, 사회적 영향력 등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투 이것도 역시 허상(虛像)이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공연한 감투 때문에 성불(成佛)해야 할 우리 생명(生命)을 헛되이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생에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우리가 본래 부처(本來佛)이기 때문에 꼭 부처(佛)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부처(佛)의 길로 일로매진(一路邁進)해야 쓰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사실 있지도 않은 행복, 되지도 않는 감투에만 헛되게 시간과 생명을 허비하니 말입니다.
돈이나 물질(物質)이나 감투가 사람들 한테 행복(幸福)을 주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물질이나 재물은 어느 한 때 사람들에 게 충분한 한도도 못되고 최소한도의 행복(幸福)만을 맛보게 하는 것입니다. 재물, 물질 이것은 본래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있지가 않은 물질, 재물이기에 사람들에게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겁니다. 산도 냇물도 또는 황금도 다이아몬드도 물질이 아니란 말입니다. 다만 황금 같은 나이아몬드 같은 모양을 지금 냅니다. 돌 같은 모양을 냅니다. 그런 것이지 그것이 실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모두가 다 영원성의 무시무종, 불생불멸, 상주불멸, 영원불멸하기에 낳지 않고 죽지 않고 늙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무시무종으로 영원히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있는 불성(佛性)이 그때 그때 전자(電子)도 되고, 불성(佛性)이 그때그때 진동(振動)해서 전자같이 보이고 양자(陽子) 같이 보이고 한단 말입니다. 불성(佛性)이 그때그때 진동해서 산소같이 보이고 금(金)의 원소가 모이면 금 같이 보이는 것이고 또는 탄소가 모이면 탄소가 결정(結晶)되면 다이아몬드 같이 보이는 것일 뿐이지 이런 물질들이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는 현미경으로 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육안으로 봐서 빛나면 금이다 뭣이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허상(虛像) 때문에 사람들이 공연스레 고통을 받는단 말입니다. 금배지가 없어도 우리가 절대로 불행하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본질적(本質的)으로 살 시대입니다. 허망하게 허상(虛像)에 붙잡혀서 살 시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허상(虛像) 때문에 자신도 고통을 받고 사사람끼리 싸운단 말입니다. 지금 인류는 지금 현대문명은 정말로 예수가 간 길, 석가모니가 간 길, 공자가 간 길 그런 길 쪽으로 궤도(軌道)를 수정(修正)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인류의 불행(不幸)은 절대로 면치 못 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선택(選擇)을 할 때입니다. 인류가 불행해 하다가 같이 멸망당해야만 할 것인가 말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보십시오. 대권(大權)은 하나인데 대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낭비합니까. 대권 그것은 뭣인가? 대권 그것도 하나의 허상(虛像)일 뿐이란 말입니다. 꼭 예수나 석가모니나 공자나 그분들만이 인생을 바로 본 분들이라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진리(眞理) 그대로 사실대로 인생을 바르개 보신 분들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알아 생활해야 될 시기란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다 사람들 누구나 불행합니다. 항상 불안하고 불행하고 남한테 존경은 커년 배려도 못 받습니다.
옛날엔 수승한 것을 잘 몰랐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행동도 비판도 잘 못했지마는 지금은 정보화(情報化)시대가 되어 사람들이 그냥 다 알아버린단 말입니다. 지금은 어디에 숨을래야 숨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비밀스럽게 뭘 할 수도 없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성자(聖者)같이 행동해야 남한테 존경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못 하면 누구한테나 존경을 못 받습니다. 부처(佛)란 이치(理致)가 아니라 한 생명(生命)입니다. 한 생명이니까 생명은 생명으로 구해야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佛)을 생명으로 알아서 생명으로 구해야지 이치로 구해서 끙끙 앓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보면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염불(念佛)의 뜻은 뭣인가? 시비 분별 좋아하는 사람들,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漢文)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들은 염불(念佛)은 저 아래 하근기 중생(下根機 衆生)이나 할 것이지 똑똑한 사람들과 상근기(上根機) 사람은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염불(念佛)을 멸시합니다. 염불(念佛)은 생각 염(念)자, 부처 불(佛)자의 염불(念佛)입니다. 부처(佛)란 뭣인가? 부처(佛)란 내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인 동시에 우주(宇宙) 생명(生命)의 본질(本質)을 뜻하는 말입니다. 말을 달리해 말씀드리면 천지우주(天地宇宙) 그대로가 부처(佛)란 말입니다. 천지우주, 우주만물 그대로가 부처(佛)입니다. 부처(佛)를 생각(念)하는 것이 염불(念佛)입니다.
우리들 중생이 부처(佛) 그 자리를 잘 납득을 못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방편(方便)으로 부처는 저 하늘 어디엔가 있다고 하듯이 부처는 저 하늘에 있다가 사람들이 애쓰고 부르고 외우고 생각을 하면은 사람들을 돕는다 이렇게 방편(方便)으로 말하는 것이지, 염불(念佛)의 본뜻은 바로 내 생명(生命), 우주생명을 내가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바로 우주의 본질(本質)을 생각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주문(呪文)을 하거나 경(經)을 읽는 것이나 또는 화두(話頭)나 어떤 것이나 따지고 보면 다 염불(念佛)입니다. 또는 동시에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나 경을 보는 것이나 모두가 다 염불(念佛)의 뜻입니다.
어떤 화두나 부처가 뭣인가? 본래면목(本來面目)이 뭣인가? 그렇게 아니 된 화두가 있습니까? 달마(達磨)스님이 서쪽에서 온 뜻은 뭣입니까? 이것도 역시 우리가 부처(佛)가 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을 열어 버리면 결국은 부처 하나란 말입니다. 그런데 부질없이 자꾸만 필요없는 에너지를 소모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방(禪房)에서도 부질없는 분별 번뇌 망상(妄想)을 굉장히 많이 합니다. 부처라고 하나 이뭣고 라고 하나 또는 무(無)자라고 하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나 결국은 다른 것이 아닌 염불(念佛)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부질없는 소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아까 제가 모두에 말씀드린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여실하게 모든 것은, 우리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한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나요 너요 또는 금이요 은이요 라고 분별(分別)을 하는 것이지 성인(聖人)이 본다고 할 때는 지금 여기 드러나 있는 현상(現象) 이대로가 곧바로 부처(佛)의 성품(性品), 즉 불성(佛性)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어떠한 것이나, 우주삼라만상만물 모두가 부처(佛)가 드러난 장엄(莊嚴)한 모습입니다. 강도나 징그러운 독사나 부처(佛)가 드러난 장엄(莊嚴)한 모습입니다. 강도나 독사 이것도 역시 상(相, 모습, 모양, 형체)만 그런 것이지 본바탕인 부처(佛)는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의 장엄스런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에서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해서, 천지우주가 사람들이 다시 만들어서가 아니라 생긴 이대로 의 천지우주가 이미 벌써 장엄스러운 찬란스러운 부처(佛)의 세계(世界)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공부를 이렇게 해서 부처(佛)를 알아버리고 마음으로 안심(安心)을 딱 해버려야 쓴단 말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에 죽어도 그림자 같은 본래 없었던 메아리 같은 형상(形象)만 바뀌는 것이지 죽음(死)은 없다, 죽을 때 아프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이치는 그런 겁니다. 우주의 도리(道理)는 그런 것이니까 우주의 도리가 사실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우주의 도리를 저 같은 시원찮은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나 달마스님이나 거짓말 않는 공자나 또는 예수나 그런 분들이 한 말입니다. 그분들이 무슨 억하심정으로 거짓말 하겠습니까.
따라서 그분들 말씀을 믿는 것이 신심(信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을 딱 믿어버리면 우리가 불안한 의식 때문에, 불안한 마음 때문에 이 더위에 더욱 더위를 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생고해(人生苦海)인데 그렇지 안 해도 실패도 많이 하고 여의치 않은 일이 많이 있는데 더욱더 고생이 심각하니 더 고생스럽게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정말로 100%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는 불행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행복하게 되는 것은 가장 쉬운 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우주 도리에 따른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도리(道理)란 뭣인가?
우주의 도리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이, 우리가 보고 안 보고 상관없이, 천지만물(天地萬物)은 오직 영원한 부처님(佛)의 불성(佛性), 즉 자비 지혜 행복 능력을 다 갖추고 있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실생명(眞實生命)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완전하고 진실한 생명은 온전히 모든 것을 전부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나무도 풀도 돌도 모래도 다 완전하고 진실한 생명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은 사람들은 깨달은 그 순간 책상머리에서도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빛납니다. 또는 간시궐(幹屎厥)이라, 똥 마른, 똥 묻은 마른 막대기에서도 금색광명(金色光明)이 빛난단 말입니다.
우주의 도리, 즉 부처(佛) 란 그와 같이 완벽(完璧)하고 진실(眞實)한 생명(生命)인지라 귀머거리도 아니고 소경도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행동을 바르게 하면 진실생명 자체인 부처님은 우리를 훤히 보신단 말입니다. 우리가 행동을 잘 못하는 것도 훤히 보십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부르면 오, 주여! 하고 부르거나 또는 알라를 부르거나 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거나 이 뭣고 화두(話頭)를 하거나 우주의 진실생명인 동시에 내 생명인 우주의 도리, 부처는 모든 걸 다 보고,모든 걸 다 듣고, 모든 걸 다 아신단 말입니다.
또한 우주의 도리, 즉 부처님(佛)은 무량의 신비로운,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하고 절대적으로 가능한 그런 자리이기 때문에 모든 능력을 다 갖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을 꼭 내가 봐야 쓰겠다, 내가 부처를 못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부처님이시여 저한테 신심(信心)을 좀 돋우기 위해서 꼭 모양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빈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날 불현듯이 부처님 광명(光明)이라든가 훤한 빛이 분명히 옵니다. 부처님이 소경이 아니고 바보가 아니거니 우리 정성에 안 통할 수가 있겠습니까. 안 통하면 그때는 바보 부처(佛)이겠지요. 꼭 우리가 부처(佛)를 정말로 구한 만치, 구한 만치 거기에 대한 부처(佛)의 응답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 바이블을 보십시오. 바이블도 그야말로 참으로 두드리면 문이 열리고 맙니다. 그만치 간절하게 구하면은 꼭 응답이 꼭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제가 좋아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대의 손과 그대의 발이 죄(罪)를 범하면 곧바로 찍어 내어라." 도끼나 칼이나 톱이나 그런 걸로 바로 찍어 내란 말입니다. 그대의 눈이 죄를 범하면 그대의 눈을 떼내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대가 병신인 채로 천국에 가는 것보다 그대가 죄(罪)를 범한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훨썩 더 불행하니라. 종교나 또는 철학이나 신앙이나 모두가 다 무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에게 너무나 나쁜 습관이 많이 붙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중생은 없는 것을 보고 분명히 있다 고 한단 말입니다. 미운 것도 없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너무 좋다고 그래서 좋아 하는 그것도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런단 말입니다. 자기 권속(眷屬)만 좋은 것도 아닌데 우리가 좋다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본래로 없는 것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죄(罪)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이 잘 못보고 우리 손이 지금 잘못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그 잘못 본 자기 눈깔을 그냥 떼내버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결단, 그런 정도의 결단이 있어야 씁니다.
아무튼 나라는 환상(幻想), 허망한 자기(自己)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 분별 번뇌 망상(妄想)이 가시지 않고서는 우주의 대도(大道), 부처(佛), 깨달음을 터득하지 못 합니다. 우주의 대도(大道), 부처(佛), 깨달음은 귀머거리가 아니고 소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구하면 구한 만치 우주의 대도(大道), 부처(佛), 깨달음이 얻어집니다. 행복하기는 참 쉽습니다. 천지우주의 도리, 부처(佛), 깨달음을 따르면 행복(幸福)하게 됩니다. 사실대로 보고, 사실대로 알고, 사실대로 느끼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事實)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란 이 세상에 우주만물 중에 우주의 대도(大道), 부처(佛), 깨달음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참선도 염불도 사실(事實)대로 그렇게 해야지 화두를 애쓰고 의심한다고 하면서 옆에 사람이 부스럭거려도 기분 나빠서 시비하고 그러면 그거 참선 태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라는 교만심(驕慢心)이라든가 분별 시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순(矛盾)을 버리고 버려야 마음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애쓰고 공부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모서리가 떨어진단 말입니다.
아까 영운스님도 30년 동안이나 분별 시비도 많이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모두 했겠지요. 그러나 공덕(功德)이 쌓이고 쌓여서 그 쌓인 공덕이 성숙되니까 어느 날 30번이나 보고 느끼고 했던 그런 복숭아꽃이 핀 봄으로 인해서 퍼뜩 깨달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공덕만 쌓아두면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만 배불리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자기만 배불리 먹고 이웃사람이 굶는 것을 보는 것은 이것도 역시 잘 못 보는 것이고 잘 못 행동하는 것입니다. 천지우주의 도리, 부처(佛), 깨달음은 조금도 사(私)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 옷을 잘 입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르게 살때는 아까 스웨덴보리나 헬렌 켈러가 다 본 바와 같이 우리도 사(私)만 떠나면 천사가 보이는 것입니다. 호법선신(護法善神)도 보이고 귀신도 우리한테 와서 꾸벅꾸벅 절하고 우릴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천지신명(天地神命)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이고 본질적(本質的)인 생명(生命)인 우주의 대도, 부처(佛), 깨달음은 오죽 우리를 돕지 않겠습니까.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즉 념불(念佛) 하면 부처(佛)는 언제나 곧바로 우리를 보고 우리를 도와줍니다. 이렇게 해서 우선 꼭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바른 견해(見解), 바른 철학(哲學), 바른 가치관(價値觀)이 지금 꼭 필요한 때입니다. 바른 철학이 없으면 어느 분야에서나 바르게 하지 못 합니다. 공장도 바르게 운영하지 못 하고 기업도 바르게 경영하지 못 합니다. 다 바르게 하지를 못 합니다.
바른 스승, 바른 부모, 바른 친구, 바른 남편, 바른 아내, 바른 어버이, 바른 자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실지견(如實知見), 진리(眞理)에 맞게끔, 우주의 도리(宇宙의 道理)에 맞게끔, 부처(佛)에 맞게끔 바른 지혜(智慧)를 가지셔야 됩니다. 이렇게 바른 지혜(智慧)를 갖추셔서 이번 생에 꼭 본래(本來) 갖추고 있는 그 자리, 꾸어온 것도 아닌 것이고 돈 주고 사온 것도 아닌 본래 그 자리, 부처, 본래의 나, 텅~빈 바탕,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의 현전(現前)을 성취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청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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