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도 돌아가는 천년 사찰에서
이오성 기자 입력 2018.08.17. 11:09유네스코로부터 전해진 경사와 달리 지금 한국 불교는 위기에 처해 있다. 기로에 선 한국 불교가 찾아야 할 길도 저 깊은 산사에 있을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호남·충청 지역 사찰을 소개한다.
한국의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기까지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창건 당시 원형의 유지, 교육기관인 선원 운영, 역사적 기록의 신빙성 등 까다로운 심사 기준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와 달리 산에서 수행하는 전통이 지금껏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을 유네스코는 귀하게 봤다(<시사IN> 제567호 ‘’ 기사 참조).
산에서 수행하기 위해 사찰은 대개 그 지역의 가장 풍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진입로는 아름답고, 건물 배치도 자연과 어우러진다. 1000년을 이어온 우리 산사의 이런 특징 때문에 사찰은 훌륭한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여름휴가를 맞은 문재인 대통령이 맨 먼저 찾은 곳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가운데 하나인 안동 봉정사였다.
‘녹시율’이란 게 있다. 어떤 지점에서 눈에 녹색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따지는 용어다. 100% 녹시율을 나타내는 곳은 사찰 숲 말고 찾기 힘들다. 먼 옛날부터 숲을 수행의 공간으로 인식했고, 지금은 문화재관리법 등으로 개발이 엄격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든 곳 또한 숲이었다. 한국에서 불교는 ‘숲의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567호에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등 영남 지역 3개 사찰을 다룬 데 이어 이번에는 호남·충청 지역 4개 사찰을 소개한다. 불교 교리나 문화재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최악의 폭염이 닥친 올여름,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산사는 그 자체로 최고의 피서지이기도 하다.
유네스코로부터 전해진 경사와 달리 지금 한국 불교는 위기에 처해 있다. 추문과 논란 끝에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사퇴하기로 했고, 권력과 돈에 빠진 불교계를 향한 비판이 거세다. 불교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은 “수행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유네스코가 귀하게 여긴 한국 산사의 요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기로에 선 한국 불교가 찾아야 할 길도 저 깊은 산사에 있을 것이다.
■ 울창한 수목원 안 보물창고, 보은 법주사
법주사 일대는 거대한 수목원이다. 법주사 관광지 초입에 있는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을 필두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육중한 나무들이 지천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법주사는 속리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7개 사찰 가운데 유일한 국립공원 사찰이다.
법주사는 문화재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국보 3점과 보물 13점, 지방문화재 21점 등을 두루 간직하고 있다. 문화재 관람은 사찰 입구인 금강문에서부터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금강문-천왕문-팔상전-쌍사자석등-사천왕석등-대웅보전’이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있다. 금강문에 서면 팔상전 안 불상이 천왕문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보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산사지만, 경내는 완벽한 평지를 이루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층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은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유일한 목탑이다. 전체 높이가 22.7m로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높다. 경내에서는 팔상전 각층 네 모서리마다 달린 총 20개 풍경이 바람결에 쉼 없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팔상전 뒤편에 있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은 독특한 조형미를 자랑한다. 사자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 연꽃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 이채롭다.
법주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단연 금동미륵대불이다. 높이 33m의 웅장하고 화려한 불상이지만, 아픈 역사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만 해도 이 불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 지금처럼 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 대원군이 경복궁 축조 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이 금동 불상을 해체했다. 이후 1964년 철근 콘크리트 불상으로 초라하게 되살아났다. 이 시멘트 불상은 25년 뒤인 1989년 청동불이 되었고, 이후 금으로 덧씌우는 작업을 시작해 2002년 지금의 금동미륵불상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금동미륵불의 ‘미륵(彌勒)’은 메시아를 뜻한다. 미륵 신앙은 충청 지역 불교 신앙의 특징이기도 하다. 법주사 교무국장인 무경 스님은 “충청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각축전이 펼쳐진 지역이기에 민중들이 오랫동안 자신을 구원할 미륵을 염원해왔다”라고 설명했다. 언뜻 사치스럽게 보이는 법주사 미륵불상이 그제야 달리 느껴졌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가 창건했다. 조선 중기까지 전각 60여 동과 암자 70여 개를 거느렸으나 임진왜란 때 충청 지역의 승병 본거지였던 법주사와 부속 암자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과거 번성했던 법주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것이 석조와 석옹이다. 석조는 스님들의 식수를 담아두던 돌그릇으로 길이 4m, 폭 2m가 넘는다. 석옹은 절임 채소 등을 보관하던 땅속 항아리로 2m 깊이다.
법주사는 가족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 조선시대 세조가 법주사를 다녀간 것을 기념해 낸 세조길을 비롯해 걷는 길이 여럿 조성돼 있고, 인근에는 어린이를 위한 테마파크도 있다. 수학여행지로 번성했던 곳인 만큼 식당가 메뉴도 선택의 폭이 넓다. 밤이면 속리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낮의 열기를 식혀준다. 열대야 따위 없었다. ■ 물길이 휘감아 도는 절, 공주 마곡사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마곡사가 좋고, 가을에는 갑사가 좋다는 뜻이다. 한여름인데도 이 말을 실감했다. 경내 안팎에 꽃들이 가득했다. 곳곳에 크고 작은 화단이 조성돼 있었다. 봄날이면 마곡사는 흐드러진 꽃 천지일 것 같았다.
법주사가 수목원이라면 공주 마곡사는 정원이다. 그것도 물에 둘러싸인 정원이다. 입구부터 다르다. 다리를 건너야 절에 이를 수 있다. 절 전체를 수량 풍부한 계곡이 ‘U’자형으로 감싸고 돌아간다. 동남아나 일본에서 흔히 보던 ‘해자(성 주위를 둘러 판 못)’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지형에 들어선 사찰이 또 있을까 싶다.
마곡사 터는 예부터 복된 땅으로 불렸다. <택리지> <정감록> 등은 마곡사 지역을 전란을 피할 수 있는 땅으로 꼽았다. 마곡(麻谷)은 사람들이 삼베처럼 빼곡하게 모였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세조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토록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亡之地)’이라며 편액을 하사하고 승려들의 잡역을 면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곡사에도 여러 문화재가 있다. 대웅보전, 대광보전, 영산전 등 보물급 문화재 5점이 있다. 이 가운데 딱 하나를 주의 깊게 봐야 한다면 대광보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보물 제799호)이다. 2층 기단 위에 5층을 쌓고 맨 위에 청동 장식을 올렸는데, 라마교에서 볼 수 있는 풍마동(風磨銅)이다.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에 풍마동을 올린 것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아주 희귀하다. 불교계에서는 마곡사 오층석탑을 국보로 승격시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마곡사는 백범 김구의 은거지로 유명하다. 일본군 중좌를 살해한 혐의로 투옥됐던 백범은 인천교도소를 탈옥해 이곳 마곡사로 숨어들었다. 이곳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해 ‘원종’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삭발했던 ‘김구 삭발바위’가 인근에 있다. 사찰 주변에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1시간이면 완주하는 코스도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의 선방이 있는 해남 대흥사
한여름 땡볕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분명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인데 울창한 나무들이 완벽한 숲 터널을 이루어 햇빛을 막아주고 있었다. 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같은 굵직한 활엽수들이 사천왕처럼 사찰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숲길’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차를 타는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내려서 무작정 걸었다. ‘땅끝 천년숲 옛길’이란 팻말이 보였다. 계곡 너머로 걷는 길이 따로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절 입구가 보였다. 일주문을 지나 해탈문에 들어서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우뚝 솟은 두륜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남도의 맨 끝, 해남이다.
대흥사에서 보는 두륜산은 부처를 닮았다. 오른쪽 봉우리는 부처의 얼굴을 상징한다. 왼쪽 두 봉우리는 왼손과 오른손이다. 부처의 몸이 병풍처럼 대흥사를 감싸고 선 형국이다.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두륜산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해탈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천불전에 이르면 신비감은 더하다. 천불전은 말 그대로 불상 1000개가 있는 곳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19세기 초 경주에서 만들어진 불상 1000개가 해남 대흥사로 향하다 표류해 일본 나가사키 현에 도착한다. 1000개 불상을 발견한 일본인들이 절을 세우려 했지만, 꿈에 불상이 나타나 “조선 대흥사로 가야 한다”라고 말해 무사 귀환했다. 천불전에서는 세 번만 절해도 3000배를 하는 셈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흥사 안에는 표충사란 곳이 있다. 절 안에 웬 절이 또 있나 싶지만, 절이 아니라 사당(shrine)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조선시대 정조의 어명으로 지은 사당이다. 대문은 태극 문양, 편액은 정조의 친필로 이루어졌다. 왕명으로 지은 사당이 있던 만큼 숭유억불 정책을 펼친 조선시대에서도 대흥사의 위상은 남달랐다. 고산 윤선도, 추사 김정희 등 당대 유학의 대가들이 교류하면서 대흥사는 남도 정신문화의 총화라는 평가까지 얻는다.
표충사 옆에는 동국선원이라는 그리 크지 않은 선원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다. 1978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곳 7번 선방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본래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람들이 하도 문의하는 바람에 대흥사 측에서 ‘26세 청년 문재인 염원의 결실을 이룬 곳’이라는 안내판까지 세워두었다. 동국선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
대흥사 대웅보전의 위치는 독특하다. 경내 왼쪽 계곡 건너편에 외따로 있다. 대웅보전 안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863호)은 조선시대 불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라나 고려시대 불상에 비해 온화하다. 숭유억불 시대를 버틴 조선 불교의 표정이리라. 계곡 앞에는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라는 화엄경 글귀가 있다. 이 글귀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 ‘뒷간’에 드디어 가보다, 순천 선암사
어쩔 수 없다. 숱하게 인용된 시건만 또 부른다. 정호승의 시 ‘선암사’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 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선암사는 가본 적 없이 시만 외우고 다녔다. 승선교 아래서 바라본 풍경이 세상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아름답다는 것도 말로만 들었다. 기대가 컸기에 조금 두려웠고, 많이 망설였다. 가보고야 알았다. 왜 세인들이 선암사에 빠져들었는지.
선암사는 순천 조계산 동쪽 귀퉁이에 폭 내려앉은 절이다. 명성에 비해 아늑하고 호젓하다. 입구에서 1㎞ 남짓 울창한 숲길이 이어진다. 얕은 오르막길에 다다르면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가 시선을 붙잡는다. 승선교(보물 제400호)다. 다리를 건너면 번뇌를 씻고 선계로 간다는 의미다. 사진으로 숱하게 보았던 그 풍경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곡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다리 아래로 강선루(降仙樓)가 보인다. 신선이 내려온 누각이다. 별나게도 일주문 밖에 누각을 따로 두었다.
선암사는 안동 봉정사와 함께 ‘산사’에 가장 가까운 절이다. 산의 경사에 비례해서 건축물 배치도 따라간다. 야생 차밭이 있는 뒤편 언덕에 서면 단아한 절집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빛이 바랜 단청은 퇴색한 채로 내버려두었다. 세월의 더께가 은은하게 쌓여 있다.
선암사에서는 갈색 법복을 입은 ‘행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스님이 되기 전 3개월 동안 교육을 받는 이들이다. 선암사는 승려 교육기관으로도 이름 높다. 1913년 현대식 교육기관으로 재편된 선암사 승선학교는 이후 호남 지역 승가 교육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유네스코 역시 선암사의 이런 역사에 주목했다.
정호승 시인이 노래한 ‘해우소’는 귀하신 몸이다. 화장실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됐다. T자형 목조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한쪽은 여자, 반대쪽은 남자다. 칸막이는 턱없이 낮고, 아래는 재래식으로 훤히 뚫렸다. 요즘 사람들이 보면 기겁할 화장실이다. 선암사 해우소에서 정월 초하루에 똥을 싸면 섣달그믐에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시인은 선암사 ‘뒷간’에서 번뇌를 떨치라고 노래했다. 눈물이 나다가도, 선암사 해우소에 가면 키득키득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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