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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본체(法身)는 이름이 없고, 참된 이치(眞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장백산-1 2018. 11. 15. 17:39

선어록과 마음공부 (법상 스님 원광사아카데미-18.9.21)-1, 녹취 by 하이얀마음


오늘은 백장회해(百丈懷海) 백장어록(百丈語錄) 193쪽입니다.


"어떻게 허공(虛空)을 징으로 쪼아 조각해서 부처 형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어떻게 허공(虛空)을 푸르다, 노랗다, 빨갛다, 희다고 분별을 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법(法, 진리)은 비교할 대상이 없다. 법(法)은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도 없다. 법(法), 법신(法身)은 무위(無爲)일 뿐이기에 어떤 헤아림(思量分別)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다음 같이 말한다.


“성스러운 본체(法身)는 이름이 없고, 참된 이치(眞理)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193)


조각가가 징으로 바위를 쪼아 어떤 형상을 조각하듯 허공(虛空)을 징으로 쪼아 부처 형상이나 어떤 모양을 조각할 수 없는 것처럼 또 허공에 대해서 뭐 누렇다 푸르다 붉다  희다 라고 분별을 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허공(虛空)은 허공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 눈에 이렇게 구체적인 형상으로 보이거나 그런 게 아니다 보니까, 허공은 어떤 상(모양 모습 형체 형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虛空)을 징으로 쪼아서 형상을 만들 수도 없고 또 이렇다 저렇다 모양을 분별해서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법(法), 법신(法身), 진리(참된 이치, 眞理), 부처(佛), 해탈 열반, 본래면목, 참나, 주인공, 불성, 진공묘유(眞空妙有), 공적영지(空寂靈知, 주인공, 여사인(呂舍人), 관세음보살, 아미타불, 본래성품, 근본성품, 본래의 나, 신, 하느님, 하나님, 여래, 진여, 전시안(全視眼, 모든 것을 다 보는 눈), oneness, 일자(一者), 삼신할머니 등의 이름이라는 것도 말로는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사성제(四聖諦)라고 석가모니부처께서 말씀하셨는데, 고집멸도(苦集滅道),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소멸(滅) 그게 불교의 전부이니다. 즉 중생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냐? 고통의 원인을 12연기(十二緣起)를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괴로움(고통, 苦)의 원인 핵심을 얘기하면 분별(分別)하기 때문에 괴롭워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생각으로 분별 망상 망념 번뇌라는 허깨비, 환상(幻想)을 조작해냈기 때문에 그 환상으로 인해서 허망하게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이라는 환상,분별 망상 망념 번뇌를 소멸시키면 곧바로 해탈 열반이 드러난다. 이게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이제 해탈 열반이라는 것은 분별 망상이 사라진 상태, 괴로움이 사라진 그 자리를 가지고 해탈 열반이라고 가명(假名, 가짜 이름, 임시방편의 이름)으로 가짜로 임시로 방편으로 이름 붙인 겁입니다. 그래서 열반은 열반이 아니라 이름이 열반이다. 해탈은 해탈이 아니라 이름이 해탈일 뿐이다. 법은 법이 아니라 이름이 법일 뿐이다. 라고 금강경에서도 항상 강조해서 얘기하는 이유가 열반 해탈이라는 뭔가가 참나, 본래면목, 주인공, 부처, 반야, 열반, 해탈, 법, 도, 진리, 주인공, 신, 하느님, 이런 이름들은 실체가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임시방편상의 이름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잡을 수 있는 뭔가가 있어서 붙여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환상도  완전히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본래 괴로움이 없던 상태가 된다. 언젠가 분별심이 처음 일어났을 거 아니에요. 분별심이 처음으로 일어나면서부터 괴로움이 시작됐습니다.


그렇다면 분별심(分別心)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거지요.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 괴로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그냥 아무 일이 없었다. 그냥 아무 일도 없던 자리, 그 자리를 해탈, 열반, 반야, 뭐 부처, 법, 도, 선, 본래면목, 참나, 근본성품 등의 이름을 붙여놓은 겁니다. 그냥 아무 일이 없는 자리, 그래서 ‘텅 ~비어 공(空)하다’라고도 하고 허공(虛空)과도 같다고도 하고, 허공성(虛空性)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요.


나는 지금 중생이고 내가 지금 중생이니까 뭔가 열심히 찾고 찾아서 갈고 닦아서 ‘내 안에 있는 부처(佛), 도, 법, 법신, 본래의 나, 근본성품, 본래면목, 본래마음,여래, 하나님, 신을 찾고야 말리라’ ‘부처(佛)라는 뭔가를 내가 반드시 쥐고야 말리라’ ‘얻고야 말리라’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지요. 왜냐면 애초부터 부처(佛)라는 그런 뭔가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를 찾고 부처를 얻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해서 삿된 것을 깨부숴버리면 저절로 현정(顯正), 바른 것이드러난다. 그러니까 바른 것을 드러내려고 애쓸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삿된 것을 깨부숴버리기만 하면 이미 본래 부처(佛)였던 것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얘기를 하면 사람들 가운데는 허망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거예요. ‘부처(佛)가 없단 말이야’ ‘열반, 해탈, 참나, 도, 본래면목, 근본성품이 없다는 말이야’ , ‘이게 너무 허망한데’ 이렇게 착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허망하다는 병에 빠지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괴로움을 없애라는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부처(佛)를 찾아라.” “부처를 확인해야 한다.” “견성(見性, 성품을 보다)해야 한다.”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리고 이렇게 얘기를 하지요.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생멸법(生滅法)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 또 귀에 들리는 소리, 코를 통해 맡는 냄새, 혀를 통해 보는 맛, 피부를 통해 느끼는 촉감, 생각을 통해 분별하고 헤아릴 수 있는 모든 대상들 그것들이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모든 것들이잖아요. 그래서 이 모든 것들 이걸 12처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들, 일체(一切)는 12처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일체는 12처다 라고 초기불교경전에 항상 나오거든요. 일체 모든 것, 사람들이 삼라만상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은 12처입니다. 12처는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 즉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 코를 통해 맡아지는 모든 냄새, 혀를 통해 맛보아지는 모든 맛,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모든 촉감, 생각을 통해 헤아려지는 모든 것들 그것들을 법경(法境)이라 이름합니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생각 상상의 존재, 또는 물질적인 존재, 이 모든 존재를 법(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요. 사람들은 12처 외에는 다른 것들을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12처, 18계만이 사람들이 마주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12처가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 12처를 세간(世間)이라고도 합니다. 12처를 세간상(世間相)이라고도 하는데, 법(法), 부처(佛), 도, 진리,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 본래의 나, 근본성품은 12처 너머의 것이지요. 법(法), 부처(佛), 도, 진리, 본래면목, 주인공, 차만, 근본성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맡고, 맛보거나,  감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은 의근(意根)이 법경(法境)을 접촉해서 의식(意識)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12처 18계라는 불교교리에서는 그렇게 설명을 하거든요. 즉 내 생각이 오만 것들을 생각하잖아요. 이 생각을 의근(意根)이라고 하고 생각할 수 있는 오만가지 모든 대상들 그걸 법경(法境)이라고 불러요.


이 세상 모든 것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내 방식대로 생각해서 의식으로 조합하는 거지요. 그걸 이제 의식(意識)이라고 부릅니다. 즉 사람의 생각은, 사람의 의식은, 의식이 생각할 수 있는 대상만을 생각할 수 있잖아요. 생각되는 것들을 다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법(法), 진리(眞理), 부처(佛), 도, 본래면목, 참나, 근본성품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이것'은 12처가 아니라는 거지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触法)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이러잖아요. '이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아니고, '이것'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아니고, '이것'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触法)도 아니고, '이것'은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도 아니고, '이것'은 눈으로 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생각도 아니고, '이것'은 귀로 듣고 나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의식도 아니고, '이것'은 생각해서 떠올릴 수 있는 의식도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의 목적은 '이것'이라는 법(法), 진리, 도, 부처(佛),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 근본성품을 확인하는 거잖아요. '이것'을 확인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파사(破邪)의 방법과 현정(顯正)의 방법 두 방법입니다. 파사(破邪)의 방법은 분별 번뇌 망상을 자꾸 깨뜨려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세워놓은 모든 논리 이런 모든 개념, 관념들을 다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두번째 방법은 논리 개념 관념들을 너무 빼앗아버리기만 하면 너무 공허해하니까 사람들에게 자꾸 주는 방법입니다.


빼앗아버리는 방법은 다 쳐내는 거예요. 무아(無我)다 나는 없다, 법상(法相)도 없고 법(法)도 없다, 진리도 없고 열반도 없고 해탈도 없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분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触法)등의 반야사상(般若思想)이 전부 다 빼앗아버리는 거지요. 삼법인(三法印)도 없고 사성제(四聖諦)도 없고 뭐 육근 육경 육식 12처 18계도 없고 심지어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즉, 지혜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이게 다 전부다 빼앗아버리는 방법 그게 파사(破邪)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파사(破邪) 이 대승불교의 방법이 다 빼앗아버리는 방법이다 보니까 좀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지요. 다 빼앗아버리니까 이게 너무 공허한 겁니다. 그래서 이제 선(禪)이 등장을 한 것입니다.


선(禪)에서는 논리 관념 개념들을 사람들에서 빼앗아버리는 방법도 쓰지만 좋은 걸 하나 줍니다. 본래면목이 있다. 아주 좋은 본래면목이 있으니까, 불성이 있고, 부처(佛)가 있고, 도가 있고, 진리가 있고,  주인공이 있고, 근본성품이 있고, 참나가 있으니까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달으라고 '이것'을 쥐어주겠다, '이것'을 확인하라고 하는 방법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지면 바로 완전한 해탈이거든요. 해탈은 해탈이라는 뭔가가의 실체가 있는 게 아니라 해탈이라는 말 자체가 묶여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해탈과 고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같은 얘기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삿된 것을 빼앗아버리는 방법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면 너무 공허하다고 느껴니까 법(法), 진리, 부처(佛),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 등 뭔가 좋은 걸 쥐어주는 겁니다. 자녀한테  “너 공부 잘못하면 혼난다.” 이래가지고 공부시키기도 하지만 “너 이번에 시험 잘 보면 맛있는 거 사줄게.” 아니면 뭐 “스마트폰 사줄게.” 뭐 이래가지고 애들을 꼬시기도 하잖아요. 그와 똑같이 중생들에게 석가모니부처님이 당근과 채찍을 다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양한 방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부처(佛), 법, 진리,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라는 근사한 뭔가를 쥐어주는 것처럼 해서 그것을 확인하라고 하는 것이 이제 선(禪)의 방법인데 선(禪)에서도 그렇게 얘기하지만 부처, 법, 도, 진리, 본래면목, 주인공, 참나, 근본성품이라는 뭔가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그러면 뭐냐?” “그러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겁니까?”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면서 육근을 사용해서 세상 모든 것들을 파악해서 육식으로 헤아려서 아는데 내가 의식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건 다 세속, 세간입니다. 12처 18계라는 일체법, 생사법,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 세간 안에서의 문제는 꿈속에서의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이 법(法), 부처, 진리,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 근본성품, 도는 육근의 대상, 경계가 아닌 거지요. 경계를 버려라, 이러잖아요. 경계에서 끄달리지 마라, 이러잖아요. 이 법, 부처, 진리,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 근본성품, 도는 육근(눈, 귀, 코, 혀, 피부, 뜻)의 대상경계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이 헤아려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사람들의 안식이 의식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는 미래를 꿈꿀 수도 있고 좋은 상상을 할 수도 있고 머릿속으로 ‘부처는 이런 걸 거야’ ‘내가 부처가 되면 이렇게 될 거야’ ‘내가 부처가 되면 이렇게 되겠지’ ‘저렇게 되겠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그거는 부처가 아니라는 거지요. 아무리 기가 막히게 생각을 해서 부처를 딱 체계화시켜놓아도 그거는 육식으로 만들어놓은 실체가 없는 허상이잖아요. 의식으로 만들어놓은 실체가 없는 개념이잖아요. 그건런 개념 허상은 부처(佛), 도, 참나, 근본성품, 본래면목, 주인공, 법이 아니지요. 그거는 12처 18계에 속하는 거니까. 핵심은 '이것', 즉 부처, 진리, 도,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이라는 것은 결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 말은 여러분들이 제 말을 듣고 아무리 머리를 잘 굴려서 법, 부처, 도,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제아무리 멋지게 체계화시키고, 교리를 체계화시키고, 깨달음은 ‘이런 걸 거야’ 라고 그림을 그려놓아도 그것은 전혀 법, 부처, 진리, 도,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 등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는 어긋나고 그것이 불교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뒤에도 나오는데요. 법, 부처, 진리, 도,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설하되 설한 바 없이 설한다고 하고 '이것'을 들을 때도 듣는 바 없이 들어야 된다고 그럽니다.


'이것'은 쥐면 안 되는 공부기 때문에 바로 잊어버려야 되는 공부입니다. 왜냐면 쥔다는 거는 육식으로 뭔가를 헤아려서 내 머릿속에 오늘 배운 것을 정리하겠다는 거잖아요. 받아 적는 것도 머릿속에 정리하겠다는 거잖아요. 그건 다 12처 18계 육식 의식 세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의식을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법, 진리, 도, 부처,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깨달을 수가 없다. 생각으로 의식으로 조작해가지고는 도저히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기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지요. "허공을 징으로 쪼아서 부처 형상을 만들 수 없고 허공을 누렇다 붉다 희다 푸르다고 할 수 없다"고.


부처, 법, 도, 진리,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 참나를 허공성(虛空性)이라는 비유를 들고 있는데 부처, 법ㅂ, 도, 진리,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어떤 형상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이렇다 저렇다, 이 색깔이다 저 색깔이다, 크다 작다, 어떻게 말할 수 없다. 이런 말은 의식이 하는 거니까. 부처, 법, 도, 진리,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에는 비교할 대상도 없다. 왜냐면 의식이 대상을 인식하려면 항상 대상을 비교를 통해서 인식하는 겁니다. 


“그 사람 어때?” “아 그 사람 인물도 좋고” 이러면 인물이 좋다는 게 사람마다 다 달라요. 인물 좋다 그래가지고 좋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아니예요.(웃음) 소개팅 시켜준다고 할 때 “야 잘생겼어.” “멋있어.” “예뻐.” 이렇게 했는데, 본인 기준에선 잘 생겼는데 저 소개받는 사람이 워낙 눈이 높아서 막상 만나보니까 그 사람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 우리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 머리로 인식하는 모든 것은 분별해서 인식합니다. 그래서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을 분별식(分別識)이라고도 부르고 분별심(分別心)이라고도 부릅니다. 그 분별하는 마음을 중생심(衆生心)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그래서 의식(意識)이 곧 분별(分別)입니다, 즉 생각(生覺)이 분별(分別)이고 중생의 마음(衆生心)이 분별(分別)입니다. 중생심이라는 마음이 분별인거지요. 그러니까 분별은 비교해서 알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부처, 법, 진리, 도,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을를 설명하면 중생과 비교해서 부처, 법, 진리, 도, 참나, 주인공,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개념 지어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념상의 그건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이 아니라는 거지요 비교해서 이해하면....


옛날에 참선을 하다가 명상을 하다가 어떤 좋은 체험을 했어요. 어떤 삼매 체험을 했거나 이런 좋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말하면 ‘아 그때 그 체험과 비슷하겠지’ 라고 헤아려서 이해를 하는 것이지요. 전혀 그것은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이가 아닙니다. 비교해서 체계화 하는 것은 전혀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이 아닙니다.


비교할 수 있는 뭔가는 생각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에, 생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것과 저것을 비교해서 인식하는 게 분별심이고 중생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것'이라는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은 비교할 수 있는 대상 경계가 아니다.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설명할 수도 없다. 설명하는 건 전부다 말로 하는 거잖아요. 말로 설명된 건 전부다 생각을 가지고 설명된 거잖아요. 어떻게 말로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말 너머 의식 너머 생각으로 개념 지을 수 있는 것을 넘어가는 것인데,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법문은 설명할 수 없는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어거지로 설하고 있는 거기 때문에 입을 뻥긋했다면 사실은 똥물을 끼얹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써요. 법문을 하는 것 자체가 벌써 똥물을 자기 스스로 에게 끼얹는 것이고 딴 사람들에게 똥물을 끼얹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방편상으로 법문을 그렇게 한다.


그래서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을 설하지만 설한 바 없이 설해야 되고 부처, 법, 도, 진리,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에 대해 하는 말을 듣지만 들은 바 없이 들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에 대해 들은 바 없이 들으면 '이것'에 묶이지 않고 매이지 않고 쥐지 않고 들으면 수백 수천가지 법문을 해도 괜찮고, 하루 종일 법문을 설해도 '이것'에 대해 설한 바가 없기 때문에 상관없다. 그러나 설하는 사람도 '이것'에 대해 설하면서 그 상에 빠지고 듣는 사람도 그 상에 빠져서 쥐고 이렇게 되면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오물을 끼얹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이것'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념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이라고 증득해서만 아는 부처, 법, 진리, 도, 주인공, 참나, 본래면목, 근본성품이지, 그 전에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 들을 때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내 머리를 가지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나올 때는 그냥 ‘모를 뿐’ 해야지. ‘모를 뿐’ 하고 그냥 넘어가야지, 얼마나 좋은 공부입니까.


세간의 공부는 이걸 이해할 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마음공부는 그렇게 하면 공부를 잘못하는 거예요. 모를 때는 그냥 ‘모를 뿐’ 내가 알 수 없는 거야. 내가 깨달으면 그때 가서 아는 거지. 지금 내가 알 수 없는 거를 억지로 알려고 머리를 굴리고 굴려서 아는 걸 개념으로 허망하게 체계화시키는 거지요. 공(空), 공(空)은 알 수 없습니다. 공(空)이 뭔지를 진정으로 맛볼 수 없어요.


그런데 수많은 불교학자들이나 뭐 스님들이나 신도님들이나 모든 분들은 공(空)을 자기 식대로 체계화시켜 놓지요. 그거는 진짜 공(空)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모를 뿐’ 진짜 공(空)이 뭔지 모르겠다. 대충 설법을 들으니까 ‘이런 거겠지’ 하는 생각은 일어나지만 그 생각을 쥘 필요도 없고 그러나 공이 뭔지 정확히 나는 모른다, 이같은 자세가 제일 중요한 자세입니다. 이 얘기가 되게 파격적인 얘기에요.


불교공부를 하면서 불교교리를 가르치고 연기법을 가르치고 중도를 가르치고 무아를 가르치고 공을 가르칩니다. 무아를 가르쳐요. 공을 가르쳐요. 그런데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해요. 오직 모를뿐이라고 합니다. 무아를 명확히 알 수 있을까요? ‘이 몸뚱이 여기 있는데 어떻게 내가 무아냐’ 이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무아를 그래도 알게 체계화시켜 주려고 하다보니까 어쩔 수 없이 뭐 양자물리학이 어떻고 뭐 중성자가 어떻고 이렇게도 가르쳤다가 “과거의 몸이 지금의 네 몸이냐?” 뭐 이렇게도 가르쳤다가 “도대체 어디까지가 네 몸이냐?” “오온이 몸뚱아리가 몸이냐?” “뭐 생각이 몸이냐?” “나냐?” “감정이 나냐?” “의식이 나냐?” “의식도 계속 바뀌는 것이 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방편으로 가르치고는 있는 것입니다. 


불교공부는 확실히 알고 넘어가면 큰일 납니다. 대충 알고 넘어가야 돼요. 확실히 알고 넘어갔다가는 큰일 납니다. 머릿속에 자꾸 체계화시키는 거니까. 대충 연기 공이라는 것이 뭔가 진리를 가르치는 거 같은데 내가 정확히는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깨닫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거다. 내가 안다고 하면 어긋나는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이 공부가 얼마나 좋은 공부입니까.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이 불법입니다. 어디 하나에 뿌리내리지 않는 것, 아 이거 참 불교공부를 하면 할수록 요, 알 수 없지만 이 알 수 없음에서 오는 정말 놀라운 지혜는 진짜 우리 머리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리로 알 수 있을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 되더라고요. 저는 정말 공부하면 할수록 옛날에는 너무 쉽게 큰스님들을 막 욕을 했는데 정말 공부하면 할수록 ‘야 정말 나의 무지를 탓할 수 있을 지언 그럴 수가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제는 큰스님들이 대사회적인 문제에 말을 안 해버리는 경우도 많아요.


왜냐면 말을 하면 저 위 출세간의 차원에서 얘기하는 건데, 이게 꿈속에서 사람들이 꿈을 바꾸려고 하잖아요. 꿈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에게 꿈 깨는 사람의 입장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분명히 꿈속에서는 나쁜 꿈꾸는 거보다 좋은 꿈꾸는 게 좋으니까 거기 집착해 있으니까 자기 편들어주길 바라거든요. 


사람들에게 잠깐 신심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본래면목은 분명히 있어.” “본래면목을 확인해야 돼.” 라고 딱 잘라서 얘기를 해놓고 나서 반드시 “본래면목은 본래면목이 아니라 이름이 본래면목일 뿐이야.” “본래면목이라는 거에도 붙잡히면 안 돼.” “사로잡히면 안 돼.” 라는 말을 반드시 합니다.


자기 알음알이로 불교를 정리해놓고 그걸 확실하게 자기가 아는 것인 양 큰스님들의 법문을 비판하는 사라들도 있습니다.그러면서 알음알이 불교 그게 확실히 옳다, 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견이 강해요. 법견, 법이 옳다 여기에 대한 견해가 워낙 강합니다. 자신만만하지요. 그런데 큰스님들일수록 어떠냐면 하심 합니다, 겸손하지요.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교수님들과 큰스님들이 논쟁이 붙으면 큰스님들이 질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 이러고 말거니까, 아마도. 


법신(法身)은 무위(無爲)다. 유위(有爲)가 아니다 어떤 헤아림, 사량분별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신을 성스러운 본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요. 본체는 이름이 없고 참된 이치는 말로 설할 수 없다.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37분 20초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