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어록과 마음공부 (국방부 원광사 법상스님 아카데미-18.9.21)-2 녹취 by 하이얀마음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전통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은 어떻게 깨달았어요? 수행(절, 독경, 사경, 주문, 참선)해서 깨달은 게 아닙니다. 수행은 그 당시에 인도에 하도 요가, 고행주의, 선정주의가 유행하다 보니까 인도에서 수행자라 하면은 요가나 고행 선정하지 않으면 그런 수행자는 수행자로 보지도 쳐주지도 않는 문화가 있으니까 그 당시의 유행 그거를 거부해버리면 전법을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그 당시 요가, 선정주의, 고행주의자들 그들이 하는 어떤 것도 다 깨지는 않아요 그들과 함께 가지요.
막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너희들이 하는 요가, 고행, 선정은 완전 잘못된 거고 석가모니부처님이 하는 것만 훌륭한 거야’ 라고 하지 않았지요. 그러다 보니까 방편상으로 요가, 고행, 선정을 어느 정도 허용을 했던 것이고 그러면 기왕 요가하고 고행하고 선정을 할 거면 제대로 해라. 어떻게 하는 게 요가, 고행, 선정을 제대로 하는 거냐? 신수심법(身受心法)을 있는 그대로 관(觀)해라. 그게 위빠사나거든요. 신수심법을 분별(分別)해서 보지 마라, 신수심법을 해석(解析)해서 보지 말고, 신수심법을 판단(判斷)해서 보지 말고, 신수심법을 생각(生覺)해서 보지 말고, 신수심법을 비교(比較)해서 보지 말고, 신수심법을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봐라. 그렇게 얘기하니까 스님들이 또 힘들어 하는 거예요. 뭘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더 쉽게 그래 그러면은 몸(身)을 관찰해라. 신념처(身念處), 들어어고 나가는 숨을 관찰해라. 이렇게 앉아 있으면 숨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거 오로지 움직이는 거는 호흡밖에 없잖아요. 호흡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내가 보잖아요.
그럼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呼吸) 그걸 있는 그대로 봐라. 그 어떤 의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 생각하지 말고 호흡을 그냥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만 해라. 호흡을 지켜보는 호흡관(呼吸觀)이 신념처(身念處)에 속하거든요. 숨이 들어올 때 아랫배가 올라가고 숨이 나갈 때 아랫배가 꺼지는 걸 관찰하든지? 뭐 다리가 불편하면 불편한 그 느낌을 관찰하든지? 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는 것이 신념처(身念處)입니다.
수념처(受念處)는, 느낌 감정이 일어날 때 그 느낌 감정(受念處)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내 느낌 감정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 그 당시 스님들도 재가자도 마찬가지로 온갖 느낌 감정에 휘둘리잖아요. 느낌 감정에 휘둘리다 보니까 탐욕심, 분노심,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그래서 느낌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도록 함으로써 그 느낌 감정은 실체(實體)가 없는 허깨비, 그림자 같은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도록 이끄는 것이지요. 느낌 감정은 실체가 없는 비실체성이라는 사실을, 공(空)하다 라는 사실을, 정해진 것이 없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또 심념처(心念處), 마음에서 일어나는 오만가지 생각들 분별심들 망상들 번뇌들 관념들 개념들 등 이렇게 일어나는 온갖 생각(生覺)들을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지켜봐라. 마음, 생각, 분별심, 망상, 번뇌, 관념, 개념을 따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온갖 그 마음 개념 생각 분별을 따라가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지켜봐라. 그것들을 분별하지 말고 많이 지켜보라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법(法), 근본바탕, 근본성품이 드러나게 돼요. ‘아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이것들은 본래 실체가 없었구나’ 라는 그리고 ‘본래 영원하지 않은 것이구나’ 실체가 없는 이것들을 내가 막 쥐고 있고 집착하고 그것들이 진짜라고 여기고 살 때는 허깨비 그림자 같은 그것들을 꽉 쥐고 살다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아 이것들이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언젠가는 사라져버리는 거구나’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를 깨닫게 돼요. 이게 법념처(法念處)입니다.
삼법인(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을 깨닫게 되고 저절로 사성제(고, 집, 멸, 도)를 깨닫게 되고 저절로 법(法)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념처(四念處)라는 것, 위빠사나라는 것은 특별한 수행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유행하는 지금의 위빠사나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위빠사나를 통해서 깨달은 도인이 많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위빠사나 수행 방법을 체계화(體係化)시키고 개념화(槪念化)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 남방불교에 가면 위빠사나 수행 방법을 1단계 2단계 3단계 요렇게 닦으면 뭐가 되고 뭐가 되고 앉아서 몇 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또 몇 시간은 경행을 하고, 또 할 때는 어느 위빠사나 센터 가면 아랫배를 집중해야 된다. 어느 위빠사나 센터에 가면 코끝을 집중해야 된다. 또 어느 위빠사나 센터를 가면 신념처에 집중하는 위빠사나 센터도 있고요. 다 다른 개념을 어떻게 체계화시켜 놓고 그거를 딱 중심을 잡아서, 그 스님들이 하는 얘기는 다 뭐냐면 “다른 방법 보다 이 방법이 최고다.” “위빠사나 이걸 해라.” 위빠사나를 체계화시켜요.
그리고 이제 쉽게 말해 남방불교 스님들이 저한테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어떤 스님이. 아유 법상스님이야 뭐 이런 저런 하는 게 많으니까 잘 알겠지만, 그래도 자기가 조언을 한다고 하면서 법상스님 이제 나가서 절을 운영하시려고 한다면 그냥 대충하면 안 되고 미리 준비를 해놔야 된다 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됩니까?” 물었더니 위빠사나 수행법을 체계화시켜야 된다는 거예요, 제 방식대로 체계화시켜서 신도님들에게 1단계 요걸 딱 갖고 나면 이제 2단계 갖고 나면 또 3단계 이래서 명상수행 기도나 수행 명상을 이렇게 체계화시켜서 점 점 점 단계가 높아가게 체계화시켜 놔야 신도님들도 1단계 하고 나면 빨리 2단계도 해야지. 3단계도 해야지. 이런 어떤 신심도 더 나고 그게 되게 좋은 방편이다.
맞는 말이지요, 좋은 방편으로써는. 그리고 법문도 쉬운 법문에서부터 요렇게, 요렇게 해야 되고 또 실제 요즘에 절이나 포교당을 선방을 새로 차리는 스님들도 보면 다들 이렇게 단계, 단계 시스템이 있어요. 공부해가는 시스템이 있어요, 그게 이제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방편으로써는 좋은 방법이에요. 그런데 수행 시스템 그것이 좋은 방법이긴 하나 그 시스템에 과도하게 사로잡히게 되면 그것도 안 되는 것이지요. 수행 시스템 그것이 옳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그러니까 위빠사나 수행 시스템이 방편에 치우친 오류를 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느 정도 방편은 필요하지만 방편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필요한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사실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문하신 것은 깨닫는 방법 그러면 성문(聲聞)이었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이 하시는 법문(法門)을 출가자나 재가자가 듣고 깨닫는 거였어요. 경전을 보세요. 전부 다 매일매일 부처님이 법문하세요 그럼 재가자들 또 신도님들, 스님들을 모아놓고... 탁발 후에 법문하고 오후에는 신도님들 모아놓고 법문하고 그러고 법문 듣고 법문 끝나자마자 그 중에 몇 명이 깨닫고 몇 명이 아라한과를 증득했고. 심지어는 도적떼 500명을 데려다 놓고 법문을 하셨고 몇 명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뭐 이런 얘기들이 경전에 늘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위빠사나를 열심히 수행하다가 깨달았다, 이런 얘기는 없고 뭐가 있냐면? 어떤 질문을 했고 거기에 부처님이 이러 이러한 법문을 했고, 그 법문 끝에 몇 사람이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이게 초기불교의 니까야, 아함경의 전형이거든요. 법문(法門) 듣고 깨닫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부처님은 한 분인데 인도 전역에서 우리나라 몇 개 모아놓은 것 같은 넓은 땅덩어리를 부처님이 돌아다니면서 법문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석가모니 부처님 법문을 계속 들으려면 출가하는 방법밖에 없었던 겁니다. 요즘같이 인터넷이 있었으면 그렇게 많이 출가 안 했을 텐데.(웃음) 인터넷이 그 당시 없으니까 석가모니부처님을 이곳 저곳 그냥 쫓아다니는 방법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어느 지방으로 가시면 1,250 명이 따라가요. 왜냐면 스님들이 기왕 출가한 거 부처님을 계속 쫓아다녀야 법문을 계속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쫓아다녔던 겁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10대 제자도 그렇고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 못지않은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이 생기고 나면서부터 이제 절(사찰)을 짓는 것을 허락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 절에서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법문을 하게 되고, 그러니까 이 법당에 스님들이 모이고 저 법당에 스님이 모이고 또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법을 전하다가 또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전통이 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모르긴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까 그래서 석가모니부처님도 계율이나 이런 것들을 정해놓지만, 모든 제도나 계율이나 이런 것들은 시대가 바뀌면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걸 끝까지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그걸 끝까지 고집하는 건 불교의 근본정신이 아닙니다. 아마 지금 같은 시대였다면 그렇게 많이 출가 안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그래도 출가한 사람이 많이 있긴 했었을 겁니다, 아마 그것은 발심(發心)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집에서 인터넷 tv 틀어놓고 불교 방송 tv 틀어놓고 법문 들을 때 하고 여기 국방부 법당에 와서 앉아 들을 때 하고 주의 집중도가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1시간 10분 녹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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