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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어록과 마음공부

장백산-1 2018. 12. 8. 18:52

선어록과 마음공부 (원광사 아카데미-18.9.28)-3|법상스님 법문 녹취  by 하이얀마음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의도(意圖)를 냈거나 아니면 내가 나쁜 짓을 해가지고 세상을 등쳐 먹어서 ‘나 혼자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生覺)을 했어도 그런 의도나 생각은 인연 따라 만들어진 색 수 상 행 식 오온(五蘊) 중에 행온(行蘊)입니다, 오온이 개공(五蘊皆空)이라 행온 그건 진짜 내가 아니에요. 그래서 사실은 이 세상에는 죄인도 없고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는 것이지요. 인연 따라 흘러가는 어떤 하나의 꿈만이 있을 뿐입니다. 


물결은 인과를 따라 움직이는 것과 같거든요. 바람이 불면 물결이 크게 솟구쳤다가 크게 떨어졌다가 인과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은데, 물결은 그냥 물결일 뿐이지 꿈은 그냥 꿈일 뿐이지 물결이나 꿈 거기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꿈 같은 물결 같은 인생,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엄청 좋아하면서 삽니다. ‘내가 잘 살았어’ 내가 죽기 전에 눈 감기 전에 “그래도 내가 인생 잘 살았노라고 한 마디 해주세요.” 라고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래도 당신은 정말 잘 사셨습니다.” “인생을 참 행복하게 사셨습니다.” 라는 그 말 한 마디를 듣고 죽는 게 소원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죽기 전에 전 재산을 기부하거나, 갑자기 좋은 일을 하고 죽거나 하는 이런 분들이 많아요. 왜냐하면 죽기 직전에 내 의식(意識)에서 ‘내가 잘못 살았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떠나기가 싫은 거거든요. “왜 그럴까요?” 그게 다 의식이 만든 환상(幻想)입니다. 의식으로 나 스스로를 잘 살았다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나라고 내세울 만한 뭔가 정해진 실체로서의 정해진 나는 아닙니다. 그냥 무아(無我)입니다 무아. 내가 잘 살고 내가 못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인연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연 따라 살아지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은 어쩌면 우리를 되게 절망스럽게 만들어요. 내가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남들 보다 나는 잘 살고 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런데 또 내가 못사는 사람이나 좌절감 느끼는 사람에게는 ‘아 내가 그렇게 산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구나’ 이게 사실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즉 근원(根源)에서 보면 삶은 하나하나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잘못되고 있는 삶조차도 그냥 근원에서 일으키고 있는 삶인 거예요. 삶은 근원에서 일으키는 꿈인 거예요. 삶은 부처가 꾸고 있는 한 편의 꿈, 참나가 만들어 상영하는 한 편의 영화인 겁니다. 내가 살고 있는 게 아니고요. 그래서 지옥 갈 내가 없는데 여러분들이 지옥갈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내가 죽어 지옥 간다 치더라도 내가 지옥 가는 게 아닙니다 지옥 가는 보(報)는 있을 지언 정.. 지옥 갈 업(業)을 지었으면 지옥 갈 보(報)를 받기는 받지요. 업에 대한 보를 받기는 받는데, 지옥 간 그 놈이 내가 아닙니다. 작자(作者), 업을 지은 자도 없고 보를 받는 자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업보(業報)라는 에너지의 흐름은 있는데 업보라는 에너지는 어떤 실체가 없어요. 아까 처음에 타든 초가 나중에 지금부터 한 시간 전에 타든 초와 지금 타고있는 초가 같은 건가요? 다른 건가요? 분명히 아까 그 초가 지금도 계속 타고 있거든요. 이게 업보(業報)라는 에너지의 흐름은 있는 겁니다.


연결된 뭔가는 있습니다. 여러분의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때도 나 인거 같고, 지금도 나 인거 같잖아요. 10년 전의 나외 지금의 나 사이에는 연결된 뭔가는 있어요. 약간 비슷한 특성은 있잖아요. 연결된 뭔가는 있는데 그때 10년 전 그게 진짜 나 인지, 지금 이게 진짜 나 인지, 이게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이게 되게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찌 보면 듣고 싶지 않은 소리이기도 하면서 어찌 보면 우리를 너무나 죽는 고통과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라는 개인적인 고유한 특성을 가진 어떤 자아(自我)가 아닙니다. 개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하나의 부처가 꾸는 꿈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런 저런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잘 살았다 못살았다 판단할 필요가 있을까요? 잘 산 것도 없고 못 산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부처만이 있을 뿐이에요. 하나의 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완전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의 놀라운 장엄한 불국정토의 아름다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인연 따라 생각, 말, 행동이라는 세 가지 행위가 일어나고 거기에 따른 결과가 일어나고 있을 뿐이에요. 거기엔 나라는 게 붙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붙을 수가 없습니다. 삶은 오직 하나의 부처가 벌이는 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어진 삶을 애쓰면서 살 필요도 없습니다. 애쓰지 않을 때 저절로 순수한 애를 쓰게 돼요. 애씀이 없는데 가볍게 모든 것을 다 하게 됩니다.


애쓰지 않으면 삶을 막 살 거 같지만 정말 에너지 넘치게 살 게 돼요. 애쓰지 않아도 순수하게 할 거 다 잘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럴 때 더 큰 열정과 더 큰 에너지가 붙어 살게 됩니다. 나라는 것을 내려놓았을 때 오히려 더 진실 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아 이거 내가 사는 게 아니다’ ‘하나뿐인 부처가 그냥 알아서 하는 것이다’ 하고 턱 내맡겨버리고 모든 것은 진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모든 것은 놀라운 아름다움이고 모든 것은 정확히 부처님이 꾸는 꿈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진리로써 받아들이는 것. 이 모든 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가슴을 열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살아주는 것 주어진 삶을 살아주고 주어진 삶속에 뛰어들고 그것을 경험해주는 것. 그게 내가 해야 될 전부입니다. 거기에 나라는 걸 개입시키지 않으면, 사람을 그냥 해석하지 않고 받아들이게 돼요. 잘했다 잘못했다, 라고 판단하지 않고 그냥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부처만이, 하나의 꿈만이, 하나의 마음만이, 하나의 불성만이, 하나의 자성만이 영원히 언제나 그냥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연 따라 꿈을 꿀 수는 있어도 그 꿈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바다에서 물결은 칠 수 있지만 물결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바다가 진짜잖아요. 수도없이 많은 물결이 치지만 하나의 바다와 같은 하나의 부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황벽(黃蘗) 희운(希運)은 바다와 같은 것을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마음. 하나의 마음밖에 없다.


모든 부처와 일체 중생이 오직 하나의 마음일 뿐, 다른 법(것)은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2)


여러분들이 모두 제각각 너와 나, 잘살고 못살고 등 모든 것을 분별(分別)하며 살지만 그런 분별 차별이 없습니다. 그냥 부처든 중생이든 일체 중생과 일체 부처가 전부 다 그냥 하나의 마음일 뿐, 다시 다른 법(것)은 없습니다.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은 하나의 진리가 다양한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냥. 하나의 바다가 다양한 물결을 인연 따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 뿐이지 거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습니다. 하나의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뭘 해도 하나의 마음이 하는 거고 내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근심 걱정 두려움도 죽음도 아무 문제가 될게 없는 겁니다.


'마음', 진리, 부처, 불성, 본성, 참나, 본래면목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인 '이것'은 처음부터 생겨난 바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으며, 푸른색도 아니고 누른색도 아니며, 모양이나 형상도 없고,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마음 이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오래된 것도 아니며, 길지도 짧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일체의 모든 한계와 이름과 분별과 자취와 상대를 벗어났다. 지금 이대로가 그대로 진실하다.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곧 진실에서 어긋난다. 마음이라 부르는 '이것'은 마치 허공(虛空)과 같아 그 끝이 없으며 분별하고 헤아릴 수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2)


마음이라 부르는 '이것'은 처음부터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들, 즉 생사법(生死法) 생멸법(生滅法)은 잘살다가 못살고, 젊었다가 늙고, 건강하다가 아프고, 성공했다가 실패하고, 태어났다가 죽고 변하잖아요. 몸은 생겨나고 늙고 병들고 죽잖아요(生老病死). 감정은 생주이멸(生住異滅),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 하잖아요.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잖아요. 이걸 생멸법이라 한다고 그랬어요.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사라집니다. 그런데 생겨났다 사라지는 생멸법은 다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생멸법 그건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이 세상 그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직 하나의 바탕, 하나의 배경, 하나의 바다, 하나의 마음만이 진짜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의 바다,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진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본성, 여러분들이라는 하나의 부처는 생겨난 바도 없고 사라진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어쩌지’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죽어도 죽을 수가 없어요. 이 빈껍데기 몸만 죽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마치 허망한 망상이 일어났다가 망상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몸도 그냥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거품 같은 겁니다. 특정한 감정 때문에 막 괴로워했다가 다시 좋은 생각 좋은 마음이 생겨서 좋은 감정으로 기뻐하는 것처럼, 이 몸뚱아리도 그냥 인연 따라 생겨났다 인연 따라 사라지는 겁니다. 색 수 상 행 식이 똑같아요. 감정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 의지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인식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 다 똑같습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갑자기 ‘나는 너무 명품백을 하나 가지고 싶었어’ 백에 빠져가지고 막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거 하나 갖는 게 소원이라서 수 십 만원 어렵게, 어렵게 벌어가지고 그 백을 하나 샀을 때 너무 기뻤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참 웃겼네. 이렇게 어이없게 느껴지듯이 삶 자체에 사로잡혀있을 때 집착해있을 때는 삶이 진짜라고 느껴지지만 진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의 본성(本性)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니까, 여려분들은 죽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본성은 죽으려해도 죽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성, 마음, 진리, 부처, 불성, 본래면목은 죽을래도 죽을 수가 없어요, 수 상 행 식이라는 가짜 중생심 말고 진짜 마음, 여래심, 본래심, 본래 마음은 죽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 마음, 본성은 나고 죽는 게 아니라는 거지요. 본성은 푸른 색깔도 아니고 누른 색깔도 아니고, 이 색깔 저 색깔, 이 모양 저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나 형상도 없고 있고 없음에 속하지도 않는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잘 사는 내가 있다 못 사는 내가 있다. 외모가 잘 난 모양의 내 얼굴이 있고 못생긴 내 얼굴이 있고, 잘 사는 인생이 있고 못 사는 인생이 있고. 내 인생은 청명한 하늘같다 내 인생은 우울한 어둠 같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이미지, 개념(槪念)을 짓잖아요. 우리들의 본성에는 이미지 관념 개념 그런 게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전부 다 오직 하나의 본성이기에 누렇거나 푸를 수 없고, 하얗거나 검을 수도 없고, 내 인생이 암담한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밝은 것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일 뿐이에요. 


본성은 모양이나 형상이 없습니다. 잘살았다 못살았다 이런 분별 없습니다. 있고 없음,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어요.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오래된 것도 아니고, ‘야, 불성은 본성은 하나의 마음은 새로 뭔가를 얻어야 되는’ 그런 거 없습니다. 여러분의 본성은. 우리의 본성은 일체 모든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無限)입니다 무한.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입니다. 이름으로 구속시킬 수도 없고 자취 흔적이 없다. 상대할 만한 견줄만한 뭐가 없어요. 상대할 만한 견줄 만한 뭔가가 있어야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나야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깨달아야지’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잘살아야지’ 하는 비교할 대상이 없단 말이지요. 상대가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하나. 


지금 여기 이대로가 그대로 진실하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 이대로 진실합니다. 여러분은 잘 산 것도 아니고 못산 것도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가 언제나 진실할 뿐입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가 그대로 진실하다. 지금 여기 이대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가 그대로 진실할 뿐 그대로 부처, 진짜 마음, 본래면목, 본성, 불성, 진리일 뿐이고. 나는 그 어떤 죄를 지을 수 없고, 그 어떤 우월감에 빠질 수도 없고, 열등감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의 진실만 있을 뿐, 하나의 부처만 있을 뿐, 하나의 법만 있을 뿐, 그냥 하나의 진리만 있을 뿐, 하나의 장엄한 아름다움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곧장 어긋납니다. 생각을 움직이면 생각은 항상 둘로 나누거든요. 내가 잘했나 못했나, 잘 났나 못났나, 등의 생각을 움직이기만 했다하면 바로 중생으로 떨어져요. 생각이 일어나면 무조건 중생으로 떨어집니다. 그런데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즉 무심(無心), 무분별심(無分別心)이면, 지금 여기 그대로가 바로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 진리자리, 본성자리, 참나자리, 본래면목자리, 불성자리, 진짜 마음자리, 참나자리입니다.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 그 끝이 없으며 헤아릴 수 없다.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그 끝도 없고 헤아릴 수 없다. 결코 헤아릴 수가 없다. 오직 하나의 마음 이것을 일심(一心)이라고도 하고, 한마음이라고도 하고, 자성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 하고, 참나라고도 하고,  열반, 해탈, 본래 면목, 주인공, 불성, 여래장, 원각, 대아(大我), 하느님, 신, 불성, 신성, 반야 등 모든 말로 바꿔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음(一心)이 부처이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전혀 차별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2)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전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바로 부처란 말이지요. 아까 제가 앞 시간에 여러분이 부처가 돼도 지금 여기 이대로 사는 거라고 하니까 되게 절망스러웠겠지만, 그 말은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부처란 소리예요.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인생을 살려고 애쓰잖아요, 더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애쓰고, 더 인정받는 삶을 살려고 애쓰고, 더 부자가 돼서 살려고 애쓰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면 지금 여기 이대로 완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애를 쓰면서 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미 아까 말한 것처럼 어떤 도그마(독단적인 신념)에 빠져있는 사람, 예를 들어 이단 사이비종교에 빠져있는 사람 그래서 전 재산을 이단 사이비종교에 헌납할 뿐 아니라 그곳에 가서, 그곳에 잡혀 가서 잡혀간 줄도 모르고 거기서 평생을 헌신하면서, 심지어 그 교주가 뺨을 때리면 그것도 기쁘게 맞으면서, 욕을 하면 그것도 기쁘게 들으면서, 그래서 평생을 헌신하면서 살고도 본인이 죽을 때 ‘아 나는 잘 살았다, 그래서 나는 천국 갈 거야’ 하고 죽은 사람이 있다 치잔 말이지요. 도그마에 빠진 그 사람은 자기 의식이 만들어놓은 정의감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우리가 그런 사람을 보면 ‘야, 어떻게 저렇게까지 어리석을 수가 있지’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도그마에 빠진 사람처럼 우리들 모두가 그 사람과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도그마에 빠진 사람과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제각각 저마다 생각(生覺)이라는 관념(觀念)이라는 개념(槪念)이라는 감옥, 도그마에 빠져서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해서, 그걸 위해 평생 목숨을 바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위해 평생 목숨을 바칩니다. 보살님들은만약에 여러분 아들, 딸이 정말 어디에 갇혀가지고 내가 구하러 거길 가야 되는데, 내가 구하러 뛰어들면 무조건 내가 죽는 게 확실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사람들의 협박을 받으면서 온갖 고문을 겪으면서 칼로 난도질을 당하면서 너무 큰 두려움과 무서움에 시달리고 있다. 그게 번한 줄 알면 당연히 뛰어들죠. 사람들은요,


뭐를 위해 사느냐면 자기 머릿속에서 자신이 만들어놓은 생각 개념 개념을 위해 평생을 살아갑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정의감이 무엇인지, 정의감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요. 그런데 내가 만들어놓은 정의감이 진짜 정의감이라 생각해서 그 정의감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하고요. 내가 만든 종교적인 도그마에 갇혀서 ‘이것만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가치야’ 라고 생각해서 그걸 위해 평생을 바치기도 하고요. 종교가 마약과 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어찌 보면 종교처럼 무시무시한 게 없지요. 


여러분 딴 데 가서 돈 십 원 한 장 안 주고 평생 일하라면 뭐 1년, 2년 아침부터 일하라면 하겠습니까? 월급도 조금 주면서 하라면 욕하고 윗사람을 욕하면서 월급은 요거밖에 안 준다면서 막 뭐라 그럴 겁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서 절에 와서 ‘야 이거 좋은 일이니, 내가 좋아서 한다’ 하면 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주 열심히 합니다.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옳다’, 라고 여기는 생각, 관념, 개념을 향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향해서 살아가요. 이게 조금 더 옳을 수도 있고 조금 더 틀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꿈일 뿐입니다. 좋은 꿈 나쁜 꿈일 순 있지만 어쨌든 의식(意識)의 세계는 전부 다 꿈입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도 어차피 꿈 꾼 거고. 나쁜 꿈을 꿔서도 어차피 꿈을 꾼 겁니다.


불교는 꿈에서 깨어나자는 겁니다. 꿈에서 벗어나자 라는 겁니다. 꿈을 깨자 라는 겁니다. 좋은 꿈만을 꾸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분들은 꿈을 깨기 위해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꿈에서 깬다는 이런 얘기가 남들이 듣기에는 정말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일 수가 있어요. 남들은 더 좋은 가르침 더 좋은 사상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저 사람들은 그 어떤 사상으로부터도 자유로우니까 모든 것에도 자유로우니까 모든 것으로부터 취하지 않으니까 집착하지 않고 사로잡혀 있지 않으니까. 불법자체도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불교 그 자체에 대해서도 놓아야 되고. 그래서 깨달음을 놓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깨달음을 얻으려는 스님들이 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반드시 깨달아야 되겠다’ 는 그 마지막 남은 집착을 버리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수행 열심히 하는 스님들에게 하는 얘기들 중에 뭐가 있냐 하면, “야 너는 모든 집착을 다 놓았구나.” 정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는데, 그 모든 집착을 다 놓은 대신 마지막 하나 깨달아야 되겠다는 집착, 그 집착 하나를 쥐고 있어서 안 된다.” 그것까지만 놔버리면 좋겠는데, 그걸 놓지 못하니까 그걸 쥐는 거나 세속을 쥐고 있는 거나 똑같은, 쥐는 건 똑같다. 쥐고 있을 동안 깨달음은 없다. 


그래서 “스님들이 어떨 때 깨달아요?” 수행을 열심히 하는 동안은 못 깨닫습니다. 죽어라고 달려가는 동안은 못 깨닫습니다. 죽어라고 수행하다가 아무리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난 안 되나보다 하고 그냥 확 놔버리고, 나는 깨달음이고 뭐고 난 포기해야 되고 난 안 되는구나 하고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확 놔버렸을 때, 그때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때 딱 깨달음이 드러나는 겁니다, 


부처님처럼 6년 동안 그렇게 노력했을 땐 안 되다가 그 모든 걸 탁 놔버려서 허탈한 마음으로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탁 놔버렸을 때 7일 만에 깨달음을 탁 얻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쥐고 집착하고 있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부처님이 선정주의를 쥐고 있을 때도 안 됐잖아요. 고행주의를 쥐고 있을 때도 안 됐습니다.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라는 그 틀을, 모든 걸 놔버려서 도대체 어떻게 될지를 모를 때, 그때 깨닫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이 공부가 얼마나 정말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공부인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너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 말을 해버리면 ‘ 따라오는 사람은 괜찮은데, 전법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은 오히려 잘못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적나라한 말이 어찌 보면 칼의 양날과도 같은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거든요. 여러분 제가 하는 얘기가 이해가 안 될 때는요, ‘언젠가 이해되겠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그걸 보고 뭐라 그러냐면 겸손이라고 부르고, 그러고 하심이라고 불러요. 자기를 비우고 내려놓눈 하심(下心) 하는 사람만 마음공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면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구나’ ‘난 아직 모르는 것이구나’ 해야지 공부가 됩니다. 그런 전제하에 제가 이렇게 적나라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그냥 자라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법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공덕이 있습니다. 아까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공덕이 있다 그랬잖아요. 그냥 아무것도 몰라도 알아들을 수 없어도 그냥 이 법문을 ‘그냥 나는 아는 지도 모르겠고 모르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발이 가니 어쩔 수 없이 가긴 가는데, 내가 지금 잘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고 법회에 나오더라도 그냥 와서 법문 듣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공덕이 있습니다. 


ㅂ법문을 듣는다는 참 이런 표현을 방편으로 얘기를 한다면 정말 수 억 겁을 공부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복을 짓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그거 아니겠어요. 칠보로 금은보화로 어마어마한 보시를 실천하더라도 금강경 사구게 하나를 공부하는 것보다 못하다. 여러분들이 수백 수천 억 수 조원을 벌어가지고 남들에게 보시하는 것이 법문 한 구절 듣는 것보다 못할 수도 있고요. 불교에서도 수많은 방편의 가르침들 손가락만 가리키는 말만을 계속 듣는 것보다 달 자체를 가리키는 말, 때로는 내가 이해가 안 될지라도 바른 법을 듣기만 해도 놀라운 공덕입니다. 이건 엄청난 공덕입니다. 왜? 죽을 때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거든요. 누구나 자기 머릿속에 있는 개념 속에 빠져가지고 그 개념 속의 생각을 가지고 평생을 살잖아요. 그러다 죽는 거 아니겠어요.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죽지요.


그런데 ‘아, 이것이 도그마일 수도 있겠구나’ ‘내가 어딘가에 갇혀있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사실은 모두가 다 갇혀있구나’ 라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만으로도 사실 되게 무서운 이야기이고, 되게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아주 정말 엄청난 공부이기 때문에 이게 엄청난 공덕이 있습니다, 정말로. 


산술적인 그 어떤 비유를 가지고 그냥 얘기해봐야 다 필요 없다. 법문 하나 제대로 듣는 게 사구게 하나 제대로 소화하는 것 이게 더 큰 공덕이다, 라는 애기를 경전에서 ‘야 이렇게까지 오버를 했지’ 싶을 정도로 비유를 들잖아요. 어마어마한 공덕입니다 이런 법문 하나 듣는 것이. 그래서 이해가 안 되시더라도 하여간 이거 듣는 것 자체가, 여러분들 쉽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 원광사에서 법문 한 시간 듣는 게 내가 삼천 배, 한 백일기도 열 번 했다, 스물 번 했다, 평생 했다는 생각보다 훨씬 더 공덕이 있는 것이고 내가 참선, 참선을 내가 십 년 동안 하루에 3시간씩 십 년 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의 마음이 부처인데, 중생은 모습에 집착하여 밖으로 구하니 구할수록 더욱 잃게 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구할수록 잃어버립니다. 


부처가 부처를 찾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잡으려 하니, 아무리 오랜 겁(劫)을 지나더라도 끝내 얻을 수는 없다. 생각을 쉬고 분별을 잊으면 부처가 저절로 눈앞에 현전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사람들은 위에 말씀을 꿈에도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막 깨달음을 구하고 있잖아요? 구하는 그 마음이 부처인데. 눈으로 뭐하는 것 보고 있잖아요. 눈으로 눈을 보려고 눈을 새빨갛게 뜨고 눈을 감지도 않으면서 눈으로 눈이 어디 있지? 하고 찾지만, 보고 있는 그것이 눈 인줄 모르고. 눈으로 보려고 애쓰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지요. 이미 보는 그것이 눈인데.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인데, 그걸 모르고 부처를 찾고자 하니까 끝끝내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그러니까 ‘부처님께 모든 걸 맡겨라’ 하고 ‘내가 바로 부처다’ 하고 그냥 탁 맡겨 라는 것이, 하나의 좋은 방편수행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중생일 때도 이 마음은 줄지 않고, 부처일 때도 이 마음은 늘지 않는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중생일 때도 여러분이 부처임에는 변함이 없고 여러분이 부처라는 사실은 요만큼도 변함이 없습니다. 부처는 절대 줄어들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죽을 죄를 지어서 ‘나는 지옥 갈 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도 여러분은 결코 지옥과는 무관한 부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육도만행(六道卍行)과 갠지스 강의 모래알 같은 온갖 공덕을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있으니 수행에 의지하여 무언가를 더 할 것이 없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육바라밀 수행을 끊임없이 닦아가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수없이 많은 수행법들을 갈고 닦는 것, 그것을 만행(卍行)이라고 합니다. 육도, 스님들은 우리나라 곳곳을 다니면서 만행을 하잖아요. 그런데 육도만행,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수라 천상을 육도윤회, 윤회하면서 만행을 한단 말이에요. 만 가지 수행을 하고 육바라밀을 닦아가면서 온갖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수행법을 다 닦고 닦는 것을 육도만행이라고 하고.


또 갠지스 강의 모래알 같은 온갖 공덕을 닦고 닦고 닦으려고 애쓴들 그게 이미 본래 구족되어 있는데 육도만행이 본래 구족되어 있고 갠지스 강의 모래알 같은 모든 공덕이 스스로 본래 구족되어 있는데, 그것이 이미 구족되어 있는 걸 수행을 통해 갈고 닦으려고 하면 갈고 닦아집니까? 갈고 닦을 필요가 없는 건데, 이미 본래 청정한 것인데, 본래 구족된 것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린 본래 부처(本來成佛)입니다. 깨달았던 깨닫지 않았던 누구나 본래 부처입니다. 


그렇다면 본래 부처가 죽고 나면 뭐가 되겠어요? 본래 부처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스님들은, 야, 참 불법은요?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괴롭게 살아가느냐? 그러니까 불교의 목적이 뭐라 그랬어요. 중생이 괴롭게 사니까 괴롭다, 라는 망상에 시달려 사니까 괴롭다고 착각하는 분별 번뇌 망상을 깨주는 게 불법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공부를 안 하는 사람도 본래 부처라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괴로우니까 죽을 때까지 괴롭게 살 거니까 안쓰러우니까 부처님께서 괴롭게 살 필요 없다 본래 부처니까. 그래서 불교에서 믿음이 중요하다, 라는 얘긴 내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입니다. 내가 본래 부처라고 믿고 부처에게 모든 걸 턱 맡기고 사는 겁니다. 아, 삶은 아무리 최악의 순간조차 장엄한 아름다움이고 완전히 옳고 완전히 그른 건 없습니다. 그냥 무작정 옳은 거밖에 없어요. 무작정 좋은 거밖에 없습니다. 무조건 부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무언가 더 할 것이 없다. 여러분은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대로 그냥 충분합니다. “뭐만 하면 돼요?” 인연을 만나면 베풀고 인연이 없으면 고요히 쉴 뿐. 사람 만나면 대화 나눌 게 있으면 대화 나누고, 대화 나눌 때 될 수 있으면 나쁜 얘기 안 하고 좋은 얘기하면서 베풀면서 살아라 하는 거예요. 인연 따라 살아 라는 겁니다. 인연이 동(動)하면 인연 따라 사는 거예요. 인연 따라 그냥 살면 됩니다, 그냥. 나에게 아직 주어지지도 않은 인연을 막 애써 잡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아직 오지도 않은 돈을 더 많이 자지려고 막 기를 쓸 필요도 없고, 돈은 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갑니다. 돈이라는 자기 법칙에 의해서 왔다 가지. 내 법칙에 의해 왔다가 가지 않아요. 돈은 내가 원한다고 오고 안 원한다고 안 오는 게 아니에요. 그럴 거 같으면 사람들 전부 다 빌 게이츠 같은 부자가 되잖아요.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삶은.


돈은 인연 자체의 법칙에 따라서 오고 가는 건데, 그냥 올 때가 돼서 왔는데 내가 머리를 써가지고 내가 잘해서 됐지. 이렇게 착각하는 거예요. 자식이 서울대 가고 싶다고 가집니까? 부모님이 열심히 노력하니까 갔다? 그 다 뻥입니다.(웃음) 요즘은 부모가 열심히 하면 자식도 좋은 대학 간다?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자식이 어느 정도 공부 잘 할 머리가 있어야 그것도 되는 거지. 자식이 공부 잘 할 두뇌가 없는데 부모가 아무리 노력한들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또 ‘숙명론인가’ 이렇게 생각해요. 숙명론 아닙니다. 이거 저거 정해진 뭔가가 아니에요. 그러나 삶은 지금 여기 이대로 아무 문제 없이 장엄합니다 내가 해석하고 분별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그냥 인연 따라 살면 됩니다. 인연을 받아들이고 살면 됩니다. 주어진 인연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가장 최적화 된 부처님의 삶이구나. 그래서 인연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수행이에요. 내가 부처니까 부처가 부처 인연 따라 살겠다. 그게 수행입니다. 


아무 할 일 없는 것. 그게 바로 한가한 도인(閑道人) 할 일 없이 쉬는 도인입니다. 그냥 쉬고 살면 돼요. 인연을 만나면 인연 따라 살면 돼요. 직장을 얻었으면 직장 생활 열심히 하면 되고, 할 일이 생겼으면 그 일 열심히 하면 되고, 그 일을 통해서 누군가에게 뭔가 베푸는 삶을 살면 되고, 그러다가 인연이 사라지면 그냥 쉬면 돼요. 내가 주부인데 그래도 내가 일을 하고 싶어. 그러나 일이 안 와? 그럼 그냥 쉬면되고, 일이 생겼으면 그 일을 하면 되고.



만약에 이것이 부처임을 확실히 믿지 못하고 모습에 집착하여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난 못 났어 난 잘 났어. 난 더 잘 살아야 돼. 더 못 살았으니까 더 잘 살아야 돼. 이렇게 모습에 집착하고 수행함으로써 공덕과 효과를 바란다면 전부 망상일 뿐, 도(道)와는 서로 어긋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뭔가 수행을 해야만 내가 부처가 되지 않을까’ ‘열심히 살아야지만 내가 더 부자가 되지 않을까’ ‘수행을 하지 않으면 내가 깨닫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공덕과 효과를 바란다면 전부 망상일 뿐, 도(道)와는 어긋난다.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같이 많지만, 도를 깨닫는 자는 쇠뿔처럼 드물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13)


소 뿔은 두 개밖에 없지요. 소 털은 무수히 많잖아요. 도를 지견으로 생각으로 구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만, 진짜 도를 깨닫는 자는 쇠뿔처럼 얼마 없는 것처럼 불법(佛法)은 알음알이 분별심(分別心)으로 헤아리려고 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불교처럼 간단하고 쉬운 공부가 없습니다. 할 일이 없는 공부니까. 그런데 공부하면 할수록 할 일이 없어지는데 놀랍게 편안해집니다. 쉬어집니다. 내 자존감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본래 부처니까. 내가 본래 부처고 ‘내가 여태까지 못산 게 아니구나’ 라는 게 확실해지니까.


살면 살 수록 점점 더 미래가 두려웠는데 ‘아 나는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구나’ 아무리 살아도 미래라는 건 없고 오로지 부처로서 살 수밖에 없구나. 죽었다 깨어나도 부처는 부처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다른 그 뭐가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법문, 안심법문(安心法門)이지요. 법문은 안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은 내가 나쁜 놈도 될 거 같고 죽으면 지옥 가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과보를 받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상(幻想)이고. 그냥 부처 본래 부처인 우리는 부처밖에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마음밖에 없으니까, 하나의 부처밖에 없으니까. 완전히 안심해도 좋다는 것이지요. 걱정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인연 따라 살면 됩니다. 


부자면 부자로 살고, 가난해지면 가난하게 살고, 할 일 있으면 할 일 있는 대로 살고, 할 일 없으면 할 일 없는 대로 살고, 자식이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감사합니다.” 하고 살고, 못 되면 못 되는 대로 “이것도 잘 되느라 못 되는 것이지.” 하고살고, “그것도 못 된다는 내 생각일 뿐이지, 이게 잘 되고 있는 걸 거야.” 하고 살고. 잘 된다 못 된다는 게 없고 ‘다 잘 되는 거구나’ 하고 살면 그냥 잘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심플하고 단순한 게 불법입니까? 


(이어서 1시간 52분 녹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