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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 국방부 원광사 환송법회 법문-1

장백산-1 2018. 12. 11. 04:08

법상스님 국방부 원광사 환송법회 법문-1(2018. 12.09) 녹취 by하이얀마음


제가 원광사에서 한 말들은 어찌 보면 모든 말이 '하나'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 불이법(不二法)이라는 불이중도(不二中道)라고 하는 '하나', 진리(眞理)를 설명한 방편(方便)이지만, 그 하나, 불이법, 불이중도, 진리를 현실적인 본상(本相)에서 본다면,  이렇게 나누어서 방편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애요. 그래서 오늘은 좀 총정리를 해드리는 마음으로 또 이제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내서 사는 게 좋을지. 그러면 지금까지 이렇게 이야기 했던 내용들을 어떻게 기억해서 어떻게 현실적으로 실천하면 좋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총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법요집에도 법회보에도 적어놓았는데요. 그 동안 했던 얘기를 정리해보면 다섯 가지 정도로 압축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거는 이제 생활 속에서 하는 마음공부의 어떤 본상(本相)에서 제가 다섯 가지라고 말씀을 드렸고, 제가 했던 얘기 중에 가장 많이 했던 게


첫 번째가 받아들임입니다. 섭수한다. 수용한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오늘 따라 특별히 원광사 종무소장님께서 환송법회 사회 보는 거 처음 봤네요.(웃음) 당신이 직접 오늘은 사회보신다고 하셔서. “영광입니다. 종무소장님”


법신부처님(法身佛), 우리들 모두는 그 한명 한명이 육신(肉身)을 가진 존재지만, 사실 우리들의 진실은 법신불(法身佛)이라고 제가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만 얘기를 한 게 아니라 모든 경전을 보면 우리는 지금 여기 이대로 아무 문제도 없는 법신 부처님(法身佛)이라는, 하나의 오롯한 진실. 이것만을 끊임없이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이대로 아무 문제없는 나라고 하는 법신(法身), 나라는 법신불(法身佛), 하나의 부처(一佛), 하나의 일불승(一佛乘), 이 하나의 부처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해석하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그럼으로써 자꾸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내가 더 부자냐 가난 하냐, 더 능력 있느냐 없느냐, 내가 잘 살았냐 못 살았냐, 과거보다 더 나아졌느냐 못하느냐, 지금보다 미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없을까? 이런 남들과 온갖  비교, 과거와의 비교, 또 미래에 대한 기대 추구,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다 보니까, 그 분별 망상 번뇌를 분별심, 식(識), 알음알이, 육식(六識, 눈의 의식, 귀의 의식, 코의 의식, 혀의 의식, 피부의 의식, 생각의 의식인 여섯 가지 의식), 이렇게도 표현을 하는데요. 그 분별심(分別心)이 지금 여기 눈앞에 드러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볼 수 없게 가로막고 있었던 거지요. 마치 깨끗한 거울에 때가 끼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보자마자 해석하고 분별하는데 아주 능수능란한 선수입니다. 그걸 언제부터 했느냐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평생토록 우리가 해온 것이 세상을 보자마자 해석하는 거, 그래서 세상을 좀 더 많이 아는 거, 대상을 아는 거, 대상을 잘 파악하는 거, 그래서 대상을 아는 마음(心)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알 식(識)자를 써서.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더 많이 알기 위해서 애쓰는 겁니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직업적인 성취를 많이 하려면 직장에서 다양한 어떤 전문 지식을 많이 알아야만 성공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뭔가 판단할 때도 이 판단이 옳은지 틀린지를 잘 알아야지만 잘 판단할 수가 있고요. 사람도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아야 내편으로 만들지 적으로 만들지를 분간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람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온 유일한 분별심(分別心)이 뭐냐 하면, 내 눈앞에 등장한 일체 모든 대상을, 일체 모든 내밖에 있는 경계를 대상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해서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내편인지 내 편이 아닌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끊임없이 둘로 나눠놓고, 내 편과 네 편을 둘로 나눠놓은 다음에, 또 좋은 거 나쁜 거를 둘로 나눠놓은 다음에, 좋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고 집착하고 애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 머릿속으로 만들어놓은 추구심,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돈을 얼마만큼 벌어야 내 인생은 행복할 거야’ 그렇게 정해놓은 다음에 그 돈을 못 벌면 불행하다고 이제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채 그 불행이라는 생각에 갇혀서 내가 만든 불행에 갇혀서 한없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내 아들은 서울대나 연대, 고대는 가야 돼’ 이렇게 딱 생각을 정해놓은 다음에 거기를 못 가게 됐을 때 혼자서 막 한없이 괴로워하는 것이지요. 그 대학의 비중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이 처음 태어날 때, 뱃속에 있을 때, 이 아이가 태어나서 공부를 잘할지 못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지요. 왜냐하면 부모님이 공부를 잘해도 자식이 못할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거든요. 삶은 누구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이제 살다보니 점점 더 잘하는 거 같고 그러니까 점점 욕심도 생기고 그러니까 더 큰 욕심과 욕망이라는 환상(幻想)을 나 스스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없는 진리(眞理), 일승(一乘), 불이(不二), 중도(中道), 부처를 상대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없는 일체 모든 삼라만상을 상대로 끊임없이 좋다 나쁘다, 맞다 틀리다, 하면서 내 취향대로 내 생각대로 꿰어 맞추려고 애써오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아이는 그냥 해맑게 태어나서 마음껏 뛰어놀았고 자연을 사랑하면서 즐거워했고 친구들을 좋아했고 그냥 마음껏 삶을 즐기며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러고 학교 다닐 땐 학교공부도 했고 그러다가 또 사회 나와서는 사회에서 자신의 길을 저마다 가는 것이지요. 또 그 사회의 길을 가다 보면 때로는 성공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좌절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아프기도 하고 또 때로는 건강하기도 하면서 삶을, 인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가 있습니다. 


성철스님인가요? 어떤 큰 스님께서, 서암 스님인가요?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열반할 때 그런 말을 남기셨는데. 잘산 것도 없고 못산 것도 없습니다. 성공한 삶도 없고 실패한 삶도 없습니다. 그냥 누구나 그 어떤 사람들의 편견, 분별에 입각한 색안경으로써 단죄 받아야 될 사람, 혹은 판단 받아야 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가면 그뿐입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내 앞에 드러나고 있는 이 삶을 그냥 살고 있을 뿐이지 잘 사는 것도 없고 못사는 분별이 없습니다.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사는 게 잘사는 거야’ 라고 정해서 나는 그 정도까지 갔으니까 나는 인생 잘 살았다고 뿌듯해 해도, 그것도 자기 생각일 뿐이고, 나는 원하는데 까지 못 갔으니까 내 인생은 망쳤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도 그것도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성공이라는 것도 하나의 개념일 뿐이고요. 실패도 하나의 개념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생각일 뿐이고 분별심일 뿐입니다. 이 세상은 생각이 만들어낸 거대한 환상세계, 생각이 구축해놓은 것들이 바로 이 세상이고, 이 지구의 역사입니다.


지난 주 이제 우리 성보회 마지막 법회를 하러 계룡대를 갔더니 그 계룡대 법사님께서 법문을 하시는데 인류 역사를 가만히 되짚어보니까 인류 역사에서 만들어놓은 수많은 것들을 되짚어보니까 '딱 하나'더라는 겁니다. 딱 하나 ‘생각’ 인류가 만들어놓은 것들 그게 진짜가 아니라 생각이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神? 신이라는 것도 생각이 만들어낸 관념이고 또 모든 개념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생각으로 우리는 인류 역사를 만들어 왔어요. 그래놓고 이러이러한 역사를 허망하게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겁니다. 이러이러한 역사는 옳았다. 이러이러한 역사는 틀렸다. 그런데 보통 ‘역사는 승리한 자를 기억한다’라는 말도 있듯이 승리하고 나면 승리한 자의 그 역사가 아름답게 기억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봤을 때는 뭐 어떤 알라 이슬람교가 됐든, 아니면 뭐 전혀 다른 한번 불같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신흥 종교가 되었든, 그런 것들을 그냥 우리 눈으로 봤을 때는 그냥 어떤 종교가 일어났다 사라졌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종교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내 종교에서 내 인생 최고의 진리를 만났고 그것이 최고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은 아마 우리 불자들을 보고 ‘야 저 사람들은 불교에 빠져가지고 불교에 집착하는 이런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저마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생각이라는 거대한 어떤 생각의 잣대, 틀,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판단하면서 그러면서 살아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게 진짜 옳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신념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신념도 갖지 말고 살라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신념은 당연히 있고, 옳고 그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념의 뿌리를 봐야 되는 것이지요. 그 생각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의 근원(根源)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리 옳은 생각도 바다 위에 등장하는 파도일 뿐입니다, 아무리 삿된 생각도 바다 위에 등장하는 파도입니다. 꿈속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은 그냥 하나의 꿈, 환상일 뿐입니다.


그 모든 것은 생각과 개념이 만들어낸 허상을 우리는 진짜라고 여기면서 좇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마다 저마다 다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게 다 다르거든요. 생각으로 만들어 논 개념, 허상, 환상 그걸 향해서 우리가 목숨을 바치고 사니까. 그러고 또 다 좋다는 것이지요. 단, 개념, 허상, 환상 그것이 100% 진실이라고 그것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사로잡히면 아무리 좋은 개념, 환상, 허상에 사로잡히든, 아무리 나쁜 개념 허상 환상에 사로잡히든, 사실은 모든 개념, 허상, 환상은 바다애서 일어나고 꺼지는 하나의 물결일 뿐입니다.


바다는 전혀 맛보지 못한 채 어느 물결이 옳으냐 어느 물결이 틀리냐, 좋은 물결이든 나쁜 물결이든 결국에는 바다에서 나온 것일 뿐인데 본래 어디서 나왔는지 물결의 근원 뿌리는 전혀 한 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겉에 드러난 물결이 아름다운 물결 안 좋은 물결이다 따지고 시비걸고, ‘나는 그래도 좋은 인생을 살았어’ ‘나쁜 인생을 살았어’ 그렇게 분별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실(眞實)은 물결과 같은 모든 생각들 너머에 있습니다. 생각 너머의 세계를 불교에서는 무분별(無分別)이라고 하고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하고 무분별지(無分別智)라 하고, 법신(法身)이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분별지(分別智)거든요. 이것과 저것 중에 어느 게 나으냐를 선택할 줄 아는 지혜, 이 종교와 저 종교 중에 어느 종교가 더 옳으냐 선택할 줄 아는 지혜 그걸 분별지(分別智)라고 하는데요. 불교는 무분별지(無分別智)입니다. 분별은 물결이기 때문에 무분별지는 분별인 물결이 아닌 바다 그 자체를 얘기합니다. 겉에 드러나는 여러분 인생이라는 파란만장한 이 장엄한 삶을 지금까지 살아오셨잖아요. 그 삶에 그 어떤 시비도 붙을 필요가 없습니다. 잘살았다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도 분별심, 중생심이고 망상, 환상입니다. 열등감을 느끼고 못살았다고 자책감을 느끼는 것도 분별심, 중생심이고 망상 환상일 뿐입니다. 둘 다 똑같은 분별심, 망상,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는 그 어떤 해석 불가한 하나의 존재일 뿐이고,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본다면 나라는 존재를 그저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해석하고 분별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저 내 인생을 볼 수 있다면 이걸 나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개념(槪念)이거든요. 그냥 이 삶을 그냥 그저 바라볼 수 있다면, 내가 과거에 잘못한 거에 전혀 발목 잡히지 않고 과거에 잘못한 거는 실체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가지고 잘못이라고 개념을 지은 뒤 그걸 지금까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분이지요. 그런 생각, 환상 망상에 전혀 빠져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냥 지금 여기 이대로의 진실, 완전한 삶의 진실인 여러분은 단 한명도 죄인일 수가 없고 잘못 산 인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잘 산 인생 잘못 산 인생이라는 것은 바다위에 출렁이는 그냥 하나의 물결일 뿐이지. 그 물결은 결국에 바다로 돌아가면 그저 하나의 일불승, 하나의 바다일 뿐이거든요. 거기에 좋다 나쁘다는 분별은 그냥 하나의 물결일 뿐입니다. 좋고 나쁜 게 본래 없습니다. 옳고 그른 것도 본래 없습니다. 그러니 내 인생에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도 어리석고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이지요.


그냥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볼 수 있다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벌어지고 있는 이 삶에 대해서 그대로 허용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법신부처님(法身佛)을 수용신(受用身)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것이지요, 허용해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이지요 그 어떤 해석과 분별을 하지 않고. 제가 받아들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좋고 나쁜 걸 나눠놓고 그 중에 좋은 것만 받아들여라 이런 얘기가 아니고 삶을 인생을 통째로 허용하고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삶을 통째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존재의 실상(실상,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허용하라는 것이지요. 괴로움이 올 때는 괴로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거움이 올 때는 즐거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즐거운 일이 오는 것은 세속적으로 내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기회거든요. 그런데 괴로움이 오는 것은 출세간에 비로소 눈뜰 수 있는 작은 하나의 기회들을 이 세상에서 선물해주는 것이 아니고, 저 너머의 세계에서 출세간이라고 하는 저 너머의 근원의 세계에서 바탕의 배경의 세계에서 바다라는 그 본질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겁니다. 놀랍고도 장엄한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즐거운 일도 있지만 괴로운 일도 반복하면서 교차하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반복되는 삶에 즐겁고 괴로운 일들에 대해서 괴로운 일이 벌어질 때는 인생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면서 ‘내 인생은 이거밖에 안 되는 가’ ‘나는 왜 이런 삶밖에 못살지’ 하고 괴로워했단 말이지요. 


불자가 된다는 것, 불교공부를 한다는 것,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그러한 괴로움에 딱 마주쳤을 때 혹은 내 마음대로 세상이 풀려가지 않는 현실에 마주쳤을 때 나는 이런 걸 뜻하고 있는데 그대로 벌어지지 않았을 때, 그때 이제 이 사람이 수행자인가 아닌가가 딱 판가름 나는 것이지요.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느냐, 그대로 수용해주느냐, 그게 지관(止觀)입니다. 소승(小乘), 대승(大乘) 모든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 지관(止觀), 지(止)는 생각 분별 망상 번뇌를 멈추라는 것이고요, 관(觀)은 그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겁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그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그냥 공(空)입니다, 말 그대로 공(空).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텅~비어서 뭐라고 표현 조차 할 수 없는, 말 한 마디도 붙을 필요가 없는, 그런데 이공(空)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삶은 이대로 완전하다.” 라고 얘기 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 라고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삶은 지금 여기 이대로 완전하다 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경전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光佛華嚴經) 에는 이 삶이라는 이 법계(法界)라는 것에 장엄한 아름다움, 하나의 한 송이 꽃과 꽃밭과도 같은 장엄한 이 세계가 모든 어떤 꽃들이 피어나고 있는 장엄한 연꽃의 꽃밭이다 라고 해서 놀랍게 아름답게 묘사를 하고 있기도 하고요. 


또 공(空)사상을 펴고 있는 대승의 금강경(金剛經)이나 반야경(般若經) 같은 곳에서는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기도 하는 겁니다. 화엄경 금강경 그 두 가지 다 어느 한 쪽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방편(方便)을 지은 것이지요. 그러나 실상(實相 세상의 실제 모습)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입니다. 괴로운 일이 일어날 때도 사실 아무 일이 없고, 즐거운 일이 일어날 때도 사실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부처로서 한 분의 아무 일없는 부처로서 왔다가 그냥 부처로 삶을 경험하다가 부처로 돌아가는 것 뿐이에요. 꿈을 꾸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꿈 깬 자가 되듯이, 꿈속에서야 무슨 좋고 나쁜 게 있었던 큰 상관할 바가 아니듯이, 꿈에서 깨고 보면 이 세상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 라는 사실을 그때 가서는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첫 번째가 법신부처님을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하듯이 삶을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허용해준다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다 라고 하는데 이런 말도 아주 오염된 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선사 스님들은 부처다 라는 것도 저 화장실에 있는 똥 막대기와 똑같다 이런 식으로 말씀합니다. 부처라는 그것도 하나의 분별의 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아무 일이 없습니다. 이걸 좀 장점을 극대화시켜 표현을 한다면 우리의 삶은 여러분의 삶은 언제나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그거는 그때 어떠어떠한 인연이 모였다가 그 인연이 흩어졌을 뿐입니다. 그걸 내가 ‘그때 그 행동을 했던 게 나야’ 라고 생각해서 ‘그 내가 지금까지 이어져 와서 지금의 내가 있어’ ‘그러니까 그 잘못이 내가 과보를 받아야지만 없어질 거야’라고 하는 생각은 그냥 생각, 허상, 망상, 환상일 뿐입니다. 생각이 만든 망상입니다. 그 생각이 그러한 것을 끌어들이지요 의업(意業)이 되어서 말입니다.


‘난 옛날에 나쁜 짓 했으니까, 나쁜 과보를 받을 걸’ 이런 생각이 그와 같은 현실을 끌어들인다니까요. 소금물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악업을 지으면 악업이 이렇게 소금으로 쌓인다는 거지요, 내 그릇에. 내 그릇 위에 소금이 잔뜩 악업으로 쌓입니다. 쌓여서 결국에는 이 소금을 다 먹어야지만 나는 업장이 소멸되는 겁니다. 해탈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 소금물이 이만큼 쌓였어요. 그래서 과보를 받을 땐 소금물을 먹어야 되니까 너무 짜게 너무 짠 소금물을 먹는 거지요.


그런데 그릇을 키우는 사람은 수행을 하고 복을 짓는 사람, 그래서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은 두 가지가 훌륭하신 분이다. 복과 지혜, 지혜가 증득되거나 아니면 복덕을 많이 쌓거나 하는 사람은 그릇이 커지기 때문에 큰 그릇에 이 소금을 타서 또 좋은 인연을 맺으면 불을 켜서 끓여가지고 김치도 넣고 양념을 해서 밥이랑 먹게 되면 아주 맛있게 소금물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이 소금물의 비유를 부처님께서 드신 것처럼 악업을 지었다고 해서 악의 과보로서 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악업을 지었지만 내가 마음공부 열심히 하고 복을 짓고 산다면 좋게 받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악업을 지었으니까 반드시 받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건 분별 망상 허상 환상입니다. 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한 생각에 모든 죄업이 없어질 수 있다는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 의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여기 이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히 자유롭습니다.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할 것이 없는 그 어떤 것도 추구할 것조차 없는 지금 여기 이대로 원만 구족한 존재, 청정법신(淸淨法身)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 원만 구족합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문제가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없어진 다음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문제가 있는 그대로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냥 그 문제와 함께 살고 그 문제를 사랑해주고 그 문제를 그대로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제가 자연이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해 지는 풍경, 해 떨어지는 풍경에 대한 아름다움들을 종종 말씀드리는 이유는 사람들의 집착과 욕망이 내려놔진다면 '지금 이 자리'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되고,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게 되면 지금 여기 있었던 것들이 ‘이렇게 장엄한 아름다움이었구나’ 라는 것에 비로소 눈 뜨게 됩니다. 없었다가 생겨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미 있는데 우리는 장엄한 아름다운 세상 그것을 누리고 만끽하고 감동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생각 때문에, 분별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여기는 맘에 안 들고 내일을 향해 미래를 향해 추구해야지만 될 것 같은 이 착각 때문에 지금 여기 있는 장엄한 아름다운 세상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에게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지만 그런다고 해서 원하는 걸 이루지 말라는 얘기도 아니고, 미래를 추구하지 말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불자들이 질문도 많이 하고 많이 오해를 하시는데, 추구하되 추구한 바가 없는 거예요. 욕망하되 욕망한 바가 없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 삶을 살되 결과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겁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야하지요. 그런데 결과는 맡겨버리는 겁니다. 어디다 맡길까요, 삶이라는 놀라운 진실에 맡기면 됩니다.. 진실(眞實), 진리(眞理)는 멀리 어디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여러분이 바로 진리(眞理)이고, 지금 여러분의 삶이 바로 진실(眞實)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진리(眞理)를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언제나 진리(眞理)가 지금 여기 삶으로서, 지금 여기 나라는 존재로서, 매순간 이렇게 100%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겼을 때 진리에 맡기면 되거든요 내 생각에 맡기지 말고. 어떻게 하면 진리에 맡기게 될까요. 그냥 진리에 모든 것을 턱 내맡기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떤 인연이 주어졌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 내 마음 속에서 뭔가 가슴 뛰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하면 그것도 인연입니다. 그러니 인연 따라 그것을 해야지요. 그것을 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에 내 부처를 구현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의 삶을 사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뭔가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걸 하면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뭔가 추구하고 싶으면 그것을 추구하면 됩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순간 그것을 하고 싶으니까 할 뿐이다. 최선을 다해 할 뿐이다. 그런데 결과는 내 영역이 아닙니다. 결과는 진리의 영역이지요. 그러니까 결과는 그냥 삶이라는 진리에 맡겨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애쓸 일이 없어져요, 내가 굳이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고.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집착을 내려놓은 사람은 아마도 경험해보셨을 겁니다. 막 집착하면서 뭔가 성취하려고 애쓸 땐 그렇게 힘들다가 집착을 탁 내려놓고 나서 했는데 오히려 더 쉽게 되는, 그게 무위법(無爲法)이라는 삶의 진실입니다. 진짜배기 진실은요 여러분이 아무리 성취하려고 해도 죽어도 안 되는 것이, 될 때가 되면 시절인연이 딱 계합을 하면 전혀 노력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주어집니다. 진짜배기 생생한 나의 진실은요, 저절로 주워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저절로 주워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노력했으니까 됐다, 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저절로 주어진다 라는 말도 “아 나는 분명히 노력했으니까 수능만점이 주어졌지 않겠습니까?” 노력했다, 라는 것을 무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러분 삶이 이렇게 피어나는 것이 신기하게도 하나의 뭔가 어떤 각본 같지 않습니까? 삶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 지점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까’


공간을 1분, 2분만 그 사람을 못만났으면 그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수 있거든요. 이 우주법계의 변화 움직임이 아주 놀랍게 정교합니다. 우주법계의 변화 움직임의 정교함 그것을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나라는 어리석은 아상(我相)이 있기 때문에 착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고 가슴 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착 없이도, 결과에 대한 부담감 없이도, 애쓰는 마음 없이도, 모든 노력을 다 할 수 있어요.


애쓰지 않을 때 진정 강력한 힘이 주어집니다. 강력한 힘 그걸 보고 이제 법력(法力)이라고 불러요. 법(法)에 모든 것을 턱 내맡겼을 때 일어나는 진정한 힘, 법계(法界)의 에너지에 내맡기고 살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게 이제 제가 네 번째 이야기했던 내맡김입니다, 내맡김. 모든 것을 내 근원에 내맡기라는 것이지요. 사량분별하는 내 머리에 내맡기라는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내 가슴에 내맡기라는 얘기입니다. 분별심이 옳다, 라고 생각해서 분별심을 좇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분별 너머에 무분별지(無分別智)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무분별지,분별하지 않는 지혜, 즉 불성(佛性)에서 나오는 지혜, 그것이 우리들 안에 있다는 거지요. 애써서 노력해야지만 될 것 같은 그런 추구심이 끝나는 자리에 추구를 놓아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삶을 더 에너지 넘치게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더 천진무구하지만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노력하고 삶을 살아갑니다. 근원의 지혜에 모든 것을 내맡기라는 것이지요. 이게 사실은 교회에 가도 하나님께 모든 걸 맡겨라 이렇게 설교를 하거든요. 뭐랄까, 굳이 차이를 제가 얘기를 한다면 아마 그런 얘기들도요. 모든 종교니, 진리니 하는 모든 것들은 근원에서 이 진리를 이렇게 터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진리를 종교인들이 자기 식대로 해석해가지고 잘못 해석하면 거기서부터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내 바깥에 어떤 부처나 하나님이나 절대자나 누군가가 있다, 라고 생각해서 바깥에 있는 저 분이 나를 어떻게 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깥으로 향하는 거잖아요


내 안에 있는 진짜 부처, 진짜 하나님을 놓치고 바깥을 좇아가는 겁니다.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목사님들 중에도 참 바르게 공부하시는 분들은 자기 안에 있는 신성(神性), 자기 안에 있는 영성(靈性),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이다. 사람들 각각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다.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의 부처에게 모든 것을 턱 내맡기라는 것은 결과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고 최선을 다 하면서도 그냥 맘 편히 살아도 좋다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어떤 분들이 집에서 이제 이 말과 같이 연습을 하시다가 한두 달 있다가 와가지고 이제 그래요


“아 그런데 이렇게 팔자 편하게 살아도 될까요.” “지금까지 저는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뭐 속편하긴 한데 진짜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모르겠다할 정도의 마음 편안하게 사는 게 삶의 진실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는데, 우리는 기를 쓰고 노력해야만 잘 산다, 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두 번째는 놓아버린다 다른 말로 방하착(放下着)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놓을 방(放)자를 씁니다.


왜 이런 얘기를 굳이 또 하느냐면, 받아들임과 방하착 이게 같은 얘기에요. 받아들인다는 게 놓아버린다는 얘기에요. 놓아버린다는 표현을 다시 쓰는 이유는 우리는 평생 쥐고 사니까. 생각도 쥐고, 더 좋은 진리도 쥐고, 돈도 쥐고, 명예도 쥐고, 모든 걸 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갇혀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쥘 수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놓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죽을 때가 그 때이지요. 만들어낸 모든 것은 반드시 허물어질 때가 있습니다. 생겨난 모든 것들은 반드시 소멸합니다.


그게 생멸법(生滅法) 생사법(生死法)입니다. 생겨난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결정코.. 젊음도 없어집니다. 건강 반드시 사라집니다. 건강이 조금씩 사라져갈 때 문제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자연스러운 겁니다. 죽음도 반드시 찾아옵니다. 반드시 찾아오는 것들이거든요. 이 세상에 생겨났다가 사라지지 않는 게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가 목숨 거는 살면서 중요하다, 라고 여겨서 심각하게 여기면서 열심히 그걸 향해 노력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생멸법(生滅法), 즉 생겨났다 반드시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생겨나면 사라지는 허망한 겁니다. 거기 목숨 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불교의 진실은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에 있습니다. 생멸하는 법, 생멸하는 존재, 생멸하는 모든 것들은 진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제 여러분들 연세도 이제 좀 드신 분들도 많이 계시는데 내 인생으로 증명을 하셨잖아요. 내 인생으로 증명하면서 젊은 날을 보내면서 돈 명예 권력 지위 뭐 사랑 뭐 모든 걸 다 가져보기도 했어요. 또 어느 정도 잃을 만큼 잃어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이제 나이도 들어가고 있고, 죽음이라는 것도 점점 코 앞에 찾아오기 시작하고 있고, 이 경험을 이 정도 해봤으면 충분할 법 한데,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내가 죽는 건 못 믿겠다’ ‘내가 늙는 거 못 믿겠다’ ‘내가 건강하지 않은 거 못 믿겠다’ 하고 ‘뭔가가 또 있을 거야’ 하고 이 생멸법(生滅法) 가운데 나를 충족시켜줄 뭔가를 지금까지 좇아왔는데, 그게 다 실패했다, 라는 걸 뻔히 알고 있고 주변 사람을 통해서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실인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을 안 믿는 겁니다.


생멸법(生滅法)에 뭔가 있을 거야. 그래서 끝까지 챙기고 쥐고 모으고 벌고 이 짓을 끝까지 하는 거지요. “내가 죽고 나면 남은 것은 자식에게라도 가겠지요.”라는 생각 이것도 큰 착각입니다. 내가 내 자식에게 물려준다. 오히려 그걸 물려줘가지고 자식들이 더 재산으로 싸우고 난리가 날 수도 있지요. 실제 보면 제가 수많은 사람들 상담하고 만나보지 않습니까. 보니까, 수억 이상의 재산이 있는 분들은 자식들이 늘 사이가 안 좋아요. ‘그걸 어떻게 하면 내가 좀 더 받을까’ 자식들 다 그 재산과 싸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남겨줄 재산이 없는 분들이 계세요. 저희 부모님 같은 분들은 아무것도 없으세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집에 한 번씩 가면은 제 부모님은 밖에 나가서 음식을 사드시지 않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안 사드시니까 ‘어떻게 하면 자식들이 조금씩 더 용돈을 드릴까’ ‘어떻게 하면 좀 맛있는 거 사드릴까’ ‘어떻게 하면 좀 좋아하시는 걸 사드릴까’ 늘 그런 생각들을 많이들 해요. 왜냐하면 자식들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사먹을 수 있는 걸 부모님은 못 드시니까. ‘어떻게 하면 가서 좀 사드려야지’ 용돈을 드리면 또 안 사드시니까. 그리고 ‘용돈은 용돈대로 또 얼마나 드릴까’ 그런 생각들을 자식들이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왜냐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죽고 나서 한 100억 남겼다 생각해보세요. 자식들이 ‘내가 좀만 소리 높여 목청을 높이면은 내가 좀 더 받을 수 있는데 ‘ 한 십억, 이십억이 왔다 갔다 할 텐데’ 원수 될 수 있다는 거지요. 뭐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뭐 내 단편적인 얘기에요. 그렇게 물려준다고 그걸 가지고 잘 살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생각이에요. 허망한 망상, 환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뭔가를 쥐고 살고 많은 걸 얻어야 된다. 뭔가 챙겨야 된다. 내 것을 늘려야 된다. 내 것을 늘려가는 삶이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나라는 게 없는데, 무아(無我)인데 내 거라는 게 실효성이 있겠습니까?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검증한 거예요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분 주변에 친구 분들 뭐 선배들 한 분 두 분 돌아가신 분들 계시잖아요. 그런 걸 보면 ‘아, 나도 이제 저렇게 되겠구나’ 이런 걸 느끼면서 뭔가 암담하잖아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거거든요. 그러면 결론은 딱 나왔습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미리 선배로써 인생 선배로써 사람들에게 밝혀주셨단 말이지요. 부처님이 항상 하신 말씀이 “봐라, 사람은 생(生) 노(老) 병(病) 사(死) 하지 않느냐.”


“태어나서 결국 늙고 병들어 죽지 않느냐.” “너희가 쥐고 있는 잡고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데 반드시 쥐려고 막 욕심 부리고 남들을 밀쳐내서 내가 더 높은 자리 가고, 저 사람 가진 거 뺏고 그래가지고 더 많이 쥔들 반드시 사라진다.” “그러고 그런 짓들이 복덕을 까먹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래서 생겨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거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 진짜를 얻어야 되지 않겠느냐.” 이 얘기를 한 겁니다 부처님께서. 그 불생불멸법 진짜는 뭐냐? 불생불며럽 진짜는 사람들이 생각으로 단 한 번도 인식해보지 못한 겁니다.


알 식(識), 의식(意識)을 가지고는,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 진짜를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즉 여러분은 깨달음이라는 자리,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한 자리, 그 자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보니까, 지금 이 자리에 드러나고 있는, 여러분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가 부처를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면서 부처를 보고 있어요. 그런데 부처가 아닌 법상 스님을 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분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죽비를 칠 때 나는 이 소리를 들을 때 그냥 소리가 아닌 죽비소리를 듣고 있단 말이에요. 그게 분별하고 듣는 것이지요. 그런데 죽비소리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이 소리를 듣고 있는 놈이 있어요. 죽비소리라고 해석하기 이전에 들을 수 있는 그 놈, 그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佛心)입니다. 볼 때 보자마자 ‘저게 누구구나’ 라고 해석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보고있는 그 놈,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 놈, 그 마음 이거를 순수의식(純粹意識)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분별하기 이전 자리, 첫 번째 자리, 제일의제(第一義諦),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보고 있다, 듣고 있다, 깨닫고 있다, 느끼고 있다, 그런다면 내가 부처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우리는 생멸법만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생멸법 그게 진짠 줄 알고. 그게 내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고 굳게 믿으면서. 돈이 수천억이 있다고 내 인생이 가치가 높아질까요? 수천억이 있어도 죽고 나면 끝입니다. 아무리 뭔가 생멸법에서 많은 걸 가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죽고 나면 내가 수 조원을 벌었는데 그것을 버는 게 확정된 날,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그 돈이 아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삶을 살아보니 아, 이거 검증됩니다. 아 내가 이렇게 생멸법,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 생겨났다가 반드시 언젠간 소멸되는 것들에 목숨 걸 필요가 없구나. 30억짜리 아파트를 몇 채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요즘에 세계적인 대형 재난이 많이 발생하잖아요. 30억짜리 아파트 몇채도 지진이 한번 일어나서 확 무너져버리면 방법이 없겠지요. 전쟁이 한번 나도 방법이 없어집니다.


모든 것을, 뭐 그럴 것까지도 없지요. 누구나 이제 죽으면 모든 게 끝나지니까. 그래서 아 이 생멸법에 내가 목숨 걸 필요가 없다 라는 걸 빨리 자각하셔야 됩니다. 빨리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이제 불생불멸법(不生不滅法)인 참된 진실, 참된 진리,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자리.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에 유일한 가치구나’ 그 사실에 눈뜨는 것이지요. 그 사실에 눈뜨고 나면 마음공부가 시작됩니다. 그걸 발심(發心)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제 세간법이 아니라 출세간법, 분별법이 아니라 무분별법, 생멸법이 아니라 불생불멸법, 이것이 진짜구나 라는 사실을 안다면 ‘나 이제 진짜인 출세간법, 무분별법, 불생불멸법 거기에 마음을 둬야 되겠다’ ‘내가 마음공부 하는데 뜻을 둬야 되겠다’ 하고 발심을 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금강경에 염불해라, 기도해라, 독경해라, 절해라, 좌선해라, 간화선 해라, 화두 들어라, 이런 얘기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금강경에 처음부터 끝까지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 마음을 내라’ ‘마음을 발심해라’ 이 얘기만 지속적으로 나옵니다. ‘발심을 해서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라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진리에 따라서 마음 낸 대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