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는 동시이다
-인과(原因과 結果)는 동시(同時)이다
많은 선지식의 말씀을 늘 대하면서도, 대부분 수행자들의 마음 한 구석에 거의 예외 없이 뿌리박고 있는 '옹이' 하나가 있다. 마음속 그 옹이가 바로 "그래도.. , 그렇지만․․․"이라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업식(業識)의 항거이다.
수행자들은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인연(因緣)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심리적 현상으로 깨달음도 이혹함도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그림자 놀이일 뿐이라는 사실을 늘 듣고 늘 되뇌이면서, 먼저 미혹했다가 나중에 깨닫는 거라면 그건 분명히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현상, 즉 '생사법'(生死法) 생멸법(生滅法)이요, '무상법'(無常法)임이 틀림없다고 다짐한다.
수행자들은 늘 그렇게 다짐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어떤 논리도, 심지어 석가 세존의 '권위'를 갖고도 어찌할 수 없는 완강한 업의 항변, 옹이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만․․․"이라는 옹이.."그래도, 그렇지만"이라는 옹이가 마음 속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은 한 마디로 선지식의 말씀이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어리석게도 수행자들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은 계속되고, 지금도 여전히 결정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맞기 위한 온갖 유위행을 쉬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큰마음을 내서 한 번 이 마음공부 길에 들어선 수행자라면, 또한 선지식의 말씀이 정말로 옳다는 확신이 선 수행자라면, 당장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서 "그래도, 그렇지만 ․․․" 이라는 끈적거리는 업(業)의 저항, 즉 옹이를 과감히 뿌리를 뽑아 내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결국에는 나 아닌 그 누구도 '깨달음의 길'에 도움을 줄 수도 없고, 또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앞으로는 도착해야 할 '마을'에 아직 도착하지 못했고, 뒤로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 '마음의 고향'에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로 '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에서 몰록 깨달음을 터득해야 한다」고 하신 선지식의 말씀이 절실한 순간이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이다.
'깨달음의 길'은 물론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오직 제 자신이 영겁 전에서부터 일찍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를 따나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 자리'를 떠나는 일이 없을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같은 깨달음이 바로 <'정각'을 이룬 '때'>이고, 영겁의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간'이 바로 <'정각'을 이룬 '때'>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가 또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온갖 <시간의 본체>이고, '깨달은 때'와 '깨닫지 못해 미혹한 때', '성불한 때'와 '성불하지 못해 미혹한 때'가 모두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을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 이대로가 정각(正覺)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박이나 분별 망상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속박이나 분별 망상 번뇌의 '원인'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뿌리채 끊어버려야 속박이나 분별 망상 번뇌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같은 착각은 인연법(因緣法)의 '생겨남(生)이 없는 도리, 無生의 도리)'를 통찰하지 못한 결과이다.
붓다의 <지음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에 의지하는 '일승(一乘)'은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이 둘이 아니라는 경지(不二法)에서의 '분별 망상 번뇌 없음'(無漏)>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범부의 일상생활은 모두 <세간법, 생멸법을 따르는 유위행일 뿐>이고, 삼승(三乘 :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도 오직 <세간법, 생멸법을 여의는 유위행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일승(一乘)'은 <'세간, 현실세계'도 아니고 '출세간, 본질세계'도 아닌 것>이다. 즉, 일승(一乘)은 현실세계와 본질세계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이는 능히 이 '세간'을 따르면서 두루 일상생활을 하지만, 분별된 현실세계를 살면서도 전혀 분별세계에 끄달리거나 물드는 일이 없는, 이른바 '보현행'(普賢行) 즉, 두루두루 지혜로운 행위를 갖추었기 때문에 일승(一乘)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삼계'(三界), 즉 '탐욕이 치성한 세계'(欲界)와 '미묘한 형색의 세계'(色界) 그리고 '순수한 정신만의 세계'(無色界) 등은 삼계 전부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思議法)으로 유위행이요, '삼승',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 보살(菩薩) 등도 역시 마찬가지로 유위행이니, 그것은 이들 모두가 전부 <얻을 바가 있는 법>(有所得法)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승(一乘)의 지혜 경계'는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不思議法)이니, 일승(一乘)은 바로 <얻을 바가 없는 법>(無所得法)이다. 즉, '일승의 지혜'는 이 세상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한 마음 한 바탕 한 근본'으로 같이 하면서도, 전적으로 제각각의 '마음'이 보고 듣고 하는 바에 맡기는 것이니, '깨달은 사람'에겐 진리가 본래 이와 같아서 마음의 작용이 가고 옴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릇 진실한 존재는 '제 모양'을 버리고 '다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정각' 아닌 것>(不覺)을 버리고 <평등한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룬다면 이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니라.』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씀은 모든 중생이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이대로> 모두 '깨달음의 자리'(覺位)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결코 '불각'(不覺)에서 벗어나서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즉 이 현실세계 모든 것은 항상 '정각(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있고, '불각'일 때가 없는 것이다.
- 완전한 이해에 자취가 없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요즘 그대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티끌만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습니다.』그러자 스승은 제자를 호되게 한 방 때렸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스승에게 그때 그렇게 말한 제자를 때린 까닭을 물었더니, 그 스승이 말하기를, 『만약 그때 내가 그 제자를 때리지 않았으면, 내 '견해'가 그 제자의 견해와 같다고 사람들이 잘못 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불법에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수행자라면 「'이 세상 모든 법(法, 존재, 현상, 것, 대상, 경계)'」은 그 어느 것도 본래 진리 아닌 게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말의 참 뜻을 깊이 알지 못하고 소리만 외고 다녀서 그들의 공부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경우가 많다. 선지식들이 하는 다양한 방편의 말은 '본질은 하나' 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선지식들의 방편의 말씀이나 각각의 실제적인 상황들을 접하게 되면, 그것들을 처음 대하는 묘하고 새로운 경험쯤으로 여기고는 또 다시 본질이 아닌 방편에 대한 새로운 지식만을 쌓아 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대다수 수행자의 모습이다.
태어나 자라면서부터 철저히 세상을 분별(分別)하는 이분법(二分法)의 생각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또한 늘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이른바 '소속감'에서 모종의 안정감을 찾는 사람들에게 선지식의 말씀이 절실하게 와 닿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의심과 깊은 참구가 따라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세상 모든 법(法, 존재, 현상, 것, 대상, 경계)'은 그 어느 것도 본래 진리 아닌 게 없다,」는 말씀을 늘 되뇌이고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에 속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이 말은 그에게 있어서 짊어지고 다녀야 할 또 하나의 짐이 될 뿐이다.
현재 사람들 각자가 전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일체의 것, 즉 국가, 민족, 종교, 철학, 직장, 학교 등, 심지어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해있다 라는 사실에서 조차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는가? 이는 결코 그것들과 결별하고 반대하라는 것이 아니다. 만약 반대하고 멀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는 것이다.
즉, 나의 불찰로 인해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나머지 반쪽을 회복함으로써 원래의 '완전한 마음'을 되찾으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비록 마음에 합당한 것이건 아니건, 또한 좋은 것이건 싫은 것이건, ― 아직은 온전히 바닥을 사무치지 못해서, 여습(餘習)이 남아 있더라도, ― 그 모두를 평등하게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본래 완전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 완전한 마음', '마음의 고향'을 회복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본래 완전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유위(有爲)의 억지놀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의 '생겨남(生)이 없는 도리(無生의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無自性의 도리)'를 철저히 사무침으로써, 일체의 분석적 분별적 지견이 다했을 때, 그 '본래 완전한 마음'은 저절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 성상(性相, 성품과 모양)이 함께 머무른다
불자(佛子)이건 불자가 아니건, 배운 사람이건 못 배운 사람이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심지어 새장 속의 앵무새조차도 되 뇌일 수 있을 만큼 흔한 말이 되어버렸지만, 억겁을 통해 형성되어 온 중생의 업(業)은 너무도 뿌리 깊고 견고해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본 뜻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체의 변화하고 움직이고 하는 형상(形相, 모양)은 모두 인연 따라서 마치 거울에 비친 '빛의 그림자' 같은 것으로, 실제로는 전혀 오고 감이 없고 자취가 없는 허깨비 같은 것이며, 또한 신령스러운 '진여법성'(眞如法性)은 스스로는 조금도 변하고 움직임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하여 우주삼라만상만물, 이 세상 모든 것을 두루두루 나툴 뿐이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이 이 '진여법성'에 비춰진 것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뭇 생령(生靈)과 뭇 생령들의 온갖 생명활동,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간에 어느 것 하나 빠뜨림이 없이 고스란히 진리의 몸(법신 法身)의 천 백억 분신(化身)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경지에서 누가 '깨달은 사람'이며, 무엇이 '깨달은 바'이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모두 티끌 먼지도 남김없이 '불사'(佛事, 진리의 몸이 하는 일) 아닌 게 없고, 진리 아닌 게 없는, 그야말로 통틀어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 진여법성(眞如法性)이 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본래 이미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진리'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지금에서야 새삼스레 '진리' 되기를 바랄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은 그저 지금 여기 있는 이대로 '진리'이다.」 즉 '먼저'는 '먼저'이고,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이라고 하건, 또 한 생각을 더 굴려서, 이 모두가 '동시'라고 하건, 이와 같은 말들이 다 '빈 말'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말에도 구속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하는 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에 물드는 일이 없어야 진정으로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함을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이르기를,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始成正覺)고 하는 말은,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온갖 삼세고금(三世古今)의 법이 '한 생각' 가운데 있어서, '오래 된 것'이라거나 얼마 되지 않은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된 '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한 생각' 가운데 또한 일체중생의 <삼세(三世)와 멀고 가까운 겁(구근법 久近劫)을 분별하는 지혜와, 온갖 차별된 지견의 지혜를 허물지 않음>을 증득하는 것이니라』라고 한 것이다.
- 인과법의 실상
흔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연기법(緣起法)의 깊은 뜻을 살필 때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른바 인과법(因果法)이나, 또 물리학에서 말하는 인과율(因果律)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물의 존재성에 대하여 사람들이 외통수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절감하게 해 준다.
그 한 비근한 예로, 세속에서 가끔 논란거리가 되곤 하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웃지 못할 '말장난'을 떠올리면서 쓴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고리' 속에서 그 끄트머리를 좇으면서 요즘도 가끔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닭'과 '달걀'을 구체적인 고유의 실체성을 갖고 있는, 이른바 <존재론적인 실체>로 오인하는 데서 기인하는 부질없는 관념놀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금방 "닭과 달걀이 실체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따지고 들 게 뻔한데, 사실은 이 대목이 바로 <속인>과 <올바른 수행자>의 안목이 결정적으로 갈리는 사고(思考)의 분수령이 된다. 때문에 불가에서는 연기설을 가르쳐서 우매한 중생들의 존재에 대한, 즉 그 골치 아픈(?) 이른 바 '경계(境界, 대상, 현상, 존재, 법, 것)'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갖추게 함으로써 천년 묵은 분별하는 속성의 기운을 벗어 던질 수 있는 훌륭한 계기로 삼는 것이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다. 고 하는 이치가 인과법(因果法)이다. 그렇다면 '결과'라는 것은, ―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질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것은 모두 '자신의 성품'이 없는, 마치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가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고정된 실체성이 없는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원인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는가?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결과와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의식, 인식' 작용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應酬)할 수 있겠는가? ․․․ '닭'도 '달걀'도 모두 '빈 이름 뿐'인 허깨비인 것이다.
이것은 '인과법(因果法)'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한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것이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에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연(緣)이라는 조건을 만나 '결과'를 낳는 계기가 되어 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분명한 사실은,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금의 것'이 옛날로 돌아간 일도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착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자체의 성품이 없는(無自性) 허깨비와 같은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존재가 결코 존재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존재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야기되는 이른바 무명(無明)의 방황인 것이다.
'원인'이건 '결과'이건, 다 '빈 이름(허명 虛名)'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는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는 게 진실이라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우주삼라만상만물은 그것들이 생각이 있는 것이건 생각이 없는 것이건 간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심, 분별하는 생각에 의지해서 분별심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마치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메아리, 이슬, 번개 같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인데, 그 '원인'이 현재로 온 것이 없고, 따라서 '결과'도 과거로 간 것이 없다면, 이 어간에서 전혀 아무것도 가고 오고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진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바로 <옮김 없는 이치>(불천론 不遷論)이며, 「강물은 끊임없이 도도히 흐르는데 일찍이 한 방울도 흐른 일이 없다」고 하는, 얼핏 듣기에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이 있게 된 논거(論據)인 것이다.
따라서 진실을 알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항상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뒤가 항상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과 뒤에 이어 닿는 것이 없으니, 거기에 무슨 '문제'가 따라 붙을 여지가 있겠는가? 결국 이 세상 삼라만상만물 모든 것은 일체의 시비 분별 비교 판단 해석과 '이름'이 붙을 여지조차 없는, 그야
말로 우주삼라만상만물 그 자체로서 스스로 텅~비어 청정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실상의 해탈'(實相의 解脫,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의 본래 모습, 근본, 본질, 본바탕을 터득해서 자유인이 됨)을 얻는 첫걸음이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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