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적조 (寂照)

장백산-1 2019. 1. 9. 17:17

적조 (寂照)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


보이고 들리고 생각나는 모든 현상은 전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이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은 모든 현상이 현상이 아닌 줄 알면 곧 여래(如來)를 보는 것이다.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沆非法(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항비법)


내가 설한 모든 법문은 마치 뗏목 같은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법이라는 방편도 마땅히 버려야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방편이야 말해 무엇하랴?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響味觸法生心 應無所住而生其心(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이생기심)


마땅히 다음과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어 써야하나니... 보이는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소리 냄새 맛 감촉 기분의 만족을 얻기 위해 마음을 쓰지 말며, 마땅히 구하는 바 없는 그런 마음을 써야한다.


-若而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에 형상에 의해서 여래를 보려하거나 음성에 의해서 여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라 결코 여래를 볼 수가 없느니라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여래자 무소종래 역무소거 고명여래)


여래란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고 어디로 가는 곳도 없다. 그러므로 이름하여 여래라 하느니라.


-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이 세상의 모든 현상, 우주삼라만상만물(法, 심리적 현상 물질적 현상, 존재, 것, 대상, 경계)은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은 것이니 이 세상 모든 것을 보고 듣을 때는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니라.


- 心隨萬境轉 轉處實能幽 隨流認得性 無喜亦無憂(심수만경전 전처실능유 수류인득성 무희역무우)


마음이란 세상 온갖 대상을 따라 움직이나 마음이란 것이 움직이는 곳은 실로 고요하고 그윽하다. 마음이 움직이는 곳의 흐름을 타고  마음의 성품을 인식해서 터득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 卽此見聞非見聞 無餘聲色可呈君 個中若了全無事 體用無妨分不分(즉차견문비견문 무여성색가정군 개중얀교전무사 체용무방분불분)


대상을 보고 소리를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그대에게 빛깔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 만일 보고 듣는 중에 전혀 아무 일도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면 체와 용을 나누건 나누지 않건 방해가 없으리라.


- 마음, 마음이 그대로 부처로 우주에서 으뜸가는 영물이거늘 또다시 자재하고 묘한 작용을 구하니 가련하구나.


- 마음의 성품은 본래 생겨남(生)이 없지만 마음의 성품을 찾는 사람을 대신하여 말해 준다. 진리는 본래 이미 얻을 바 가 없는 것이거늘 어찌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이라는 분별을 걱정하랴.


-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취하거나 버릴 것이 없으니 각기 힘쓰라.


- 삼계(三界 : 욕계, 색계, 무색계)가 오직 마음일 뿐이요, 우주삼라만상만물이 마음이라는 한 법(法)에 찍힌 것이다.


- 무릇 모양이 있는 형상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이나, 마음 스스로가 마음이라 말하지 못하므로 형상에 의지해서 마음이 일어남을 아는 것이다.


- 이 세상 모든 것, 우주삼라만상만물은 스스로가 말하지 않나니 공(空)도 스스로 말하지 않고, 현상(色)도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들음’의 성품은 소리를 따라 생겨나지도 않고 소리를 따라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들음의 성품을 깨달으면 <소리의 티끌>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러니 ‘참 들음’은 생겨남과 사라짐이 없고 ‘참 들음’은 가고 옴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 마음이 무엇인지을 알면 무념(無念) 무상(無想)이 되고, 마음의 성품을 알아서 보면 자유인이 된다.


- 이 세상 모든 경계(境界, 대상, 현상, 法, 존재)라는 인연(因緣 : 원인과 조건)은 본래 좋고 싫은 분별이 없건만 경계를 마주할 때 좋아함 싫어함이라고 분별을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 온갖 분별 망상 번뇌와 업장이 본래 공적(空寂)하고, 온갖 인과(因果)가 모두 공적하여 모두 꿈과 같다. 따라서 삼계(三界)를 벗어나겠다고 애쓸 일도 없고, 깨달음을 구하겠다도 애쓸 일도 없다.


- 모름지기 마음의 이 온갖 비춤과 작용(照用)으로 보고 듣는 것이니 이에 맡겨 자유자재하라. 웃고 울고 말하는 것이 모두 <부처 지혜>를 이룰 뿐이다. 이렇게만 이해한다면 한 시도 성불하지 않은 때가 없고, 한사람도 득도하지 않은 이가 없으리라.


- 이 세상 모든 것이 원래가 천진(天眞)이요, (自然)이거늘 조작(造作)함에 무엇하러 상관하랴.


- 몸으로 하는 행동과 입으로 짓는 말과 뜻으로 짓는 생각(身口意)을 굴리는 주재자(主宰者)가 없으니, 따라서 신구의 삼업을  ‘짓는  자’도 없고 그 삼업에 따른 과보를 ‘받는 자’도 없다.


- 한 생각이나마 조작 없는 성품(無作之性)에 맡길 수만 있으면 ‘부처지혜’는 곧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無得無證)> 이것이 바로 부처이니라.


- 지극한 이치(理致, 道)는 문자(文字)가 없고 해탈도 속박도 아니면서 <신령(神靈)하게 통하는 것>이 인연에 응하면서 언제나 눈앞에 코앞에 있다.



- 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신(神)이란 <의지함도 없고 성품 없는 가운데의 ‘큰 지혜’이니>, 생각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으며(作爲) 형상과 성질이 없어서 평등하게 법계에 두루하여 만유(萬有)를 다 환히 아는 것을 이름하여 신(神)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미혹한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곧....


첫째 마음 밖에서 경계를 취하여 생각을 냄으로써 도리를 어기기 때문에 모양없는 마음의 부처를 볼수가 없고....


둘째, 안으로 쌓임(五蘊)의 모양을 취함으로써 제 성품(自性)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마음의 부처를 보지 못한다.


깨침에도 역시 두 가지 마음이 있다. 곧....


첫째,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이요, 이 성품 또한 성품이 아닌지라 모든 망정이 다하여 진리가 나타남을 분명히 알면 노사나(盧舍那; 부처의 진신, 편일체처遍一切處 : 모든 곳에 두루함)의 몸을 보고, 법성에 일치하여 안팎이 없다.


둘째 안으로 오온의 쌓임의 성품과 모양을 분명히 알면 바로 제 마음의 부처와 노사나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을 본다.


- 금강경에서 붓다가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如來)가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바의 이치를 알지 못하였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란 어디에서 오는 바도 없고, 어디로 가는 바도 없으므로 여래라 하느니라’>라고 했다. 따라서 <사람이나 이 세상 모든 것들이나 모두가 일여의 도(一如의 道, 하나와 같은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줄 알 것이다>. 그러면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으로 대하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 ‘제성품의 여여한 부처(自性如如佛)을 보는 것이 아님이 없다. 이것은 <보지 않는 것으로서 참불(眞佛)을 삼고 진실을 보는 것으로써 참 부처(眞佛)를 삼는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 신심명(信心銘)에 이르기를...


* 깨달음(도, 부처, 여래, 본심)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분별하는 마음, 분별심(分別心)이 가로막을 뿐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분별하는 마음(分別心)만 일으키지 않으면 그즉시 깨달음은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 현정선원, 대우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