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와 현자의 차이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적 삶의 양식’보다 자신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존재적 삶의 양식’이 매우 소중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존재적 삶의 양식'은 트리나 폴러스의 저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 속에 등장하는 두 마리 애벌레의 여행담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예컨대 끝없는 생존경쟁의 대열보다는 나뭇가지에 고치를 짓고 자유로운 나비의 삶을 꿈꾸는 두 마리 애벌레의 최후의 결단은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의 삶의 좌표와 예지를 엿보게 해준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내적이고 평화로운 삶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 그것은 자칫 현실도피적인 처세나 소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오해될 소지도 있다. 그럼에도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은 일상적인 자신의 삶에서 감정이나 생각의 노예가 아닌 감정이나 생각의 주체로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행복한 삶은 현대사회에서 경제적 기반의 중요성을 무시한 채, 단순히 정신적 위안이나 마음의 평화만을 추구하자는 삶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한 삶은 요즈음 유행하는 일견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자는 소확행(小確幸)의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현대사회에서 일상적인 삶에서 추구하는 작은 행복이나 지혜로운 삶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대한 지적인 성찰과 연기적(緣起的) 통찰을 일상선(日常禪)의 차원에서 몸, 느낌, 마음, 현상을 알아차리는(sati) 능력을 계발하고 생활화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인식의 구조 중 자신의 감정이나 인식과정에 대한 명확한 연기적(緣起的) 이해와 감정이나 인식과정에 대한 연기적(緣起的)이고 지적(知的)인 통찰이 될 때 소확행의 삶이 가능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윳타니카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두 번째 화살의 비유를 통해 일상적인 삶의 행복을 상징적으로 설한다. “비구들이여, 지혜롭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그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정신적으로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지혜롭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에 의한 이중적인 고통을 겪는다. 비구들이여, 지혜롭지 못한 범부의 경우는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에 맞았는데,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또 다시 맞는 것과 같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한 범부는 두 번째 맞은 화살로 인해 초래되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다 겪게 된다.”
여기서 첫 번째 맞은 화살은 실질적으로 외부세계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정적인 자극이나 괴로움이 발생하는 제1차적인 조건을 말한다. 이러한 첫 번째 화살은 현실세계를 사는 실존적인 존재인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두 번째 맞은 화살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정신적 고통, 즉 첫 번째 맞은 화살에 집착하여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부차적인 고통에 지나지 않기에 두 번째 화살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인식과정에 대한 연기적 혹은 지적 통찰이 부족한 범부들은 두 번째 화살도 맞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범부들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는 자아(自我)와 동일시(同一視)하는 자동화과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혜로운 자(현자)들은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지혜로운 성스러운 사람은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고통)을 겪더라도, 정신적으로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고통만을 경험할 뿐이며,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결코 정신적인 괴로움을 겪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첫 번째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첫 번째 화살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만을 겪는 것이다.”
요컨대 현자는 실존적으로 누구나 겪게 되는 부정적인 제1차적인 조건, 즉 일상적인 외부세계나 내면세계의 부정적 심리 현상에는 노출되지만, 그로 인한 정신적으로 2차적으로 격게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는 자아(自我)와 동일시(同一視)하는 두 번째 화살은 지혜롭게 피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범부와 현자의 차이는 두 번째 화살을 계속 맞느냐 아니면 두 번째 화살을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그 여부에 달려있다고 본다.
김재권 동국대 연구교수 marineco43@hanmail.net
[1472호 / 2019년 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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