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如是如是是如是 (여시여시시여시)

장백산-1 2019. 4. 12. 13:44

如是如是是如是 (여시여시시여시) 


모두가 노릇합니다   -  - 몽크원제 ・ 2018. 3. 27. 13:18

 

오늘 아침에 소변을 보러, 해우소로 가는 길에 도랑에서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를 버리면 모두를 얻는다.” 

  

***

  

공부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도반들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부처(佛)라는 환영(幻影), 환상(幻想)에서 벗어나야만 해요...”

  

말했듯이 아무에게나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십 수년을 같이 공부한 몇몇 가까운 도반스님들에게 이 말을 하면 곧잘 알아듣습니다. 절 바깥의 머리 기른 도반들도 짐짓 고개를 끄덕입니다. 말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말 뜻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제 도반들은 이렇게 공부를 잘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고,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제 말만 듣고, 제가 부처가 환영(幻影)이라고 했다 해서, 제가 부처님을 무시했다고, 제가 부처님을 내버렸다고, 승가의 외도라고, 스님도 아니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어쩌면 계실지도 모릅니다. 말을 들었을 뿐이지, 사람을 보지 못하고, 삶을 같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생각보다 괜찮게 사는 스님인데 말이죠. 하하하!!! 여하튼, 그러면 한편으로는 안타까우면서도, ‘뭐 그런가보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과정들을 치러 내야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말이라고 주절거리는 입장에서, 굳이 한마디 보태보자면, 환영(幻影)이라는 말에 집착함은 하나만 알아듣고, ‘하나’는 모르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 이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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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 저는 불단 앞에서 원력을 다집니다. 부처님 앞에서 어떠어떠한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제 네 가지 원력을 고하고 이를 다지는 겁니다. 사시 때에는 부처님 마지를 모시고, 법당에 올립니다. 깨끗한 청수도 올리고, 가지런히 가사도 입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예불을 올립니다. 아시는 분만 아시겠지만 제가 얼마나 열심히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는데요. 하하하!!! 부처가 환영이라고 말한 제가 어떻게 이렇게 성실히도, 열심히도 사는지 이해하지 못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환영이라 말함은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부정하여 버리는 것 또한 아닙니다. 

  

원제 노릇하는 겁니다. 원제라는 인연에 맞게 성실히 상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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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취할 줄 밖에 모릅니다. 하나만 취하고 하나는 버립니다. 진짜라는 게 따로 있어서 이것만 취하고, 환영은 가짜이기에 버리려는 겁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고 했습니다. 일체의 모든 벌어지는 일들이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꿈이 어떻습니까. 꿈은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있으면 잡고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 데 그럴 수 없고, 없으면 어떻게 그렇게 나타날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벌어지는 것을 두고 드러난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2600년전도 드러나 일이고, 인도의 카필라국도 드러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드러나 시간과 공간에서 태어나셨다는 부처님은요? 예외가 없습니다. 부처님 또한 드러난 일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세상도 사람도, 그 모든 사건들도 다 드러난 일인 겁니다. 근원을 살펴보면 아무것도 없는데, 그 모든 것으로 생생하게 다 드러난 일인 겁니다. 이를 두고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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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은 이 드러난 대상을 두고 실체화합니다. 드러남에는 있고 없음, 진짜 가짜, 옳고 그름이 없건만, 다만 근원 없음에서 이렇게(如是) 생생하게 드러나는 일이건만, ‘나’를 실체화하는 착각을 인연으로, 그 모든 대상과 일들을 실체화합니다. 시간도 공간도 세상도 사람도, 그것들이 벌어지는 일들도 다 드러난 것인데, 이것을 실제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드러남에 없는 진위를 따지고, 시비를 가르고, 유무를 나눕니다. 단지 이러함(如是)으로 드러난 일인데, 이러함으로 본래 부족함이 없는 건데, 이를 그냥 놔두지 못하는 겁니다. 그게 모두 다 나 때문입니다. 나를 실체화하는 그 탓에 그렇습니다. 

  

나를 실체화하는 것을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모두를 버리고, 모두를 얻습니다. 버리고 얻음이 동시의 일입니다. 하지만 버린 바도 없고 얻은 바도 없습니다. 버린 바가 없음으로 버리고, 얻은 바가 없음으로 얻는 겁니다. 이럴 때 집착 없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실체가 사라질 적에 비로소, 그 모든 인연에 알맞게 상응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상응을 저는 노릇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벽암록에 황벽스님의 노릇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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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11칙 황벽주조한(黃檗酒糟漢)의 평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예불하는 황벽스님을 보고서 대중-당 현종(憲宗)의 아들인 선종(宣宗)-이 물었다.

“부처님에게 집착하지도 말고,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대중에게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예배를 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부처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대중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항상 이처럼(如是) 예배를 하느니라.”

“예배를 해서 무엇 하려구요?”

황벽스님이 갑자기 빰따귀를 후려치자, 대중이 “몹시 거친 사람이군”이라고 하자, 황벽스님은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느니 가늘다느니 지껄이느냐?”며 또다시 한 차례 빰따귀를 쳤다.

  

대중이 제법 들은 바가 있고, 아는 바도 있으니 황벽스님에게 저런 질문이라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대중은 어리석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듣고 아는 바가 있었지, 듣고 아는 바가 없음은 없었습니다. 있고 없음이 모두 있어야 했는데, 있음만 있었지, 없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있음과 없음이 반대가 되었습니다. 예배를 함과 예배를 하지 않음이 반대로 나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황벽스님이 “부처에게 집착하지 않으며, 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대중에게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항상 이처럼(如是) 예배를 하느니라.” 라는 대답을 곧장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如是)이라는 드러남은 있고 없음을 버리지 않고, 있고 없음을 잘 쓰는 것입니다. 인연에 맞추어 잘 상응함이 있고 없음을 잘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중은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은 겁니다. 한 차례 어긋나자 황벽스님은 대중을 위한 간절한 마음에 뺨따귀를 후려쳤지만, 대중은 황벽스님을 거친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두 번째로 어긋나버립니다. 그럼에도 황벽스님은 더더욱 간절했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거칠다느니 가늘다느니 지껄이느냐?”라고 얘기했습니다. 그건 바로 알아들으라고, 바로 들어오라고, 바로 깨치라고, 그렇게 간절한 노파심으로 뺨따귀를 때린 것입니다. 하지만 대중은 단지 맞기만 했을 뿐입니다. 맞은 바가 없음은 몰랐습니다. 결국 대중으로선 세 번이 어긋났습니다. 하지만 황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 번이나 합당했습니다. 이는 뺨을 때린 행위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합당(合當)의 뜻은 ‘어떤 기준, 조건, 용도, 도리 따위에 꼭 알맞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이나 알맞았다는 말입니다. 

  

***

  

한다 안한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이런 모든 분별을 넘어서는 것, 분별없는 것이 바로 이처럼(如是)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분별되지 않는 것을 그냥 놔두려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느 하나로 귀속시켜서 이를 평가하고 선택하려고, 나머지 하는 배척하고 몰아세웁니다. 백봉 선생님은 금강경의 법회인유분 첫 시작인 여시아문如是我聞에 대해, 이런 게송을 남기셨습니다. 


如是如是是如是 (여시여시시여시) 

如是外別無如是 (여시외별무여시) 

世人不知是如是 (세인부지시여시) 

右往左往覓如是 (우왕좌왕멱여시) 


이러히 이러히니 이것이 이러히네 

이러히 밖에따로 이러히 없는거이 

사람은 모른고야 이것이 이러힘을 

이저곳 헤매이며 이러힐 찾는고야

  

수행과 노력을 다하면서 진리를 찾아나섰는데, 결국에 찾게 되는 것은 이러함(如是)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이러함(如是)은 절대로 머리를 굴려서 생각으로 알아지게 되는 게 아닙니다. 금강경을 백만번 읽고, 거꾸로 외워도 안됩니다. ‘이러함(如是)이 뭐지?’하고 생각하면 이미 틀렸습니다. 이러함으로 이미 ‘이러함(如是)이 뭐지?’라고 했는데, 이러함을 찾다니 말이 되겠습니까. 이러함(如是)이라는 온전함은 그 언제나 확인되는 것이지, 이러함은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구하려는 ‘내’가 따로 있어서 안 되는 겁니다. ‘나’를 실체화하는 그 실수에서 그 모든 분별이며 착각이 다 일어나는 겁니다. 금강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의 시작은 바로 여시아문如是我聞입니다. 여시(如是)이 두 글자로 사실상 모든 경전의 설법 내용을 비밀스럽게, 그러나 이미 공개적으로 다 말해버렸습니다. 여시(如是)로 설법은 다 끝났습니다. 하지만 ‘나’를 실체화한 까닭에, 이를 곧장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뒤로 내(我)가 나서게 되고, 들음(聞)이 있게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경전을 대하고 내가 경전을 보는 것이지만, 경전이라는 이야기에서 아난이라는 중심인물이 나오고 들음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모두가 ‘나’로부터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하지만 나를 실체화한 나머지 이를 명백하게 알지 못하여, 2600년전이라는 시공간이 ‘지금 여기’와 다른 곳으로 펼쳐지고, 나와는 다른 경전 속에서 부처님과 아난이 따로 생기고, 그 모든 대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 모두가 ‘나’로부터 벌어지는 일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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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부터 벌어지는 환영과 같은 일들이라고 해서 버리는 게 아닙니다. 이 환영을 알맞게 대응하고 적극적으로 쓰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용무생사(用無生死) 즉 생사없음으로 생사를 쓰는 겁니다. 실체화하는 착각과 그 분별 집착만 벗어난다면, 그 모든 드러난 일들에 합당하게 응할 수가 있는 겁니다. 유마거사는 이 응함을 두고 “무위에 머무르지 않고, 유위를 다하여 끝나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응함을 저는 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랑은 졸졸졸 흐르며 도랑 노릇을 잘 하고 있고, 까마귀는 하늘에서 까악까악하며 까마귀 노릇을 잘 하고 있으며, 황벽스님은 뺨따귀를 짝 때리며 황벽스님 노릇을 잘 하고 있고, 반야는 용맹한 용에 아랑곳없이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며 반야 노릇 잘 하고 있고, 법당에서는 천년 넘은 비로자나 부처님이 부처님 노릇하며 잘 앉아 계시고, 법당 안의 목탁은 또록또록 소리내며 목탁 노릇 잘 하고 있고, 그 법당에서 원제는 ‘서가모니불~ 서가모니불~’ 염불하며 원제 노릇 잘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잘 응하고 있고, 모두가 잘 노릇하고 있고, 잘 살고 있습니다. 하하하!!!

  

***

  

이러함(如是), 이와 같음으로 지금 여기가 본래 이미 완전무결하게 완성되어 있는 일이고, 

이러함(如是), 이와 같음이기에 지금 여기가 본래 이미 완벽한 행복한 세상입니다.


[출처] 모두가 노릇합니다|작성자 몽크원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