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영지(空寂靈知) 공공적적(空空寂寂) 소소영령(昭昭靈靈)
천도(薦度)는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추천해서 인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천도를 하느냐,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그게 자손도 되고 일가친척도 되고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 또 살아있는 사람들의 온갖 마음을 행복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천도입니다.
그럼 천도는 뭘로 하느냐? 첫번째로 오직 신심(信心), 믿는 마음으로 천도를 합니다. 그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정심(決定心) 딱 결정을 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心> 딱! 정定해져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 그게 신심입니다. 그래서 신심이라는 것은 결정심(決定心) 부동심(不動心)이라.
결정 못하는 건 신심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건 신심아니예요 부동(不動)의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신심입니다, 그게 바로 믿는 마음이예요. 그럼 무엇을 믿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면 첫째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믿으라 그랬어요.
인생(人生)이라는 게, 이게 이 세상에 태어나기는 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입니다. 난 날은 아는데 죽는 날은 아무도 몰라요. 이게 참 아주 허망하고 답답한 건데 우리 중생들은 그 생각을 잘 안 하면서 삽니다. 저기 형벌을 받아 사형을 언도 받아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 사형을 집행할 것이다 그걸 알고는 있어요.
그런데 우리 보통사람은 죽기는 틀림없이 죽는데 언제 죽는지 모르는 사람이요 그래서 신경을 안 씁니다. 이게 아주 어리석은 겁니다. 태어났으면 죽는 거 외에 다른 일 없습니다 죽는 일 하나있는 거예요. 그게 인생무상이야 살아있는 동안 그걸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그냥 생각 없이, 철없이 살아가는 게 우리 중생입니다 그래서 인생무상을 첫째 믿어야 됩니다.
그럼 두번째로 인생이 어떻게 무상(無常)한가,『금강경金剛經』마지막에 보면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무상(無常)한 거예요,
일체유위법은 다른 게 아니고 인간의 몸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물질적 정신적 현상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과 몸이 꿈과 같고(夢), 허깨비와 같고(幻), 물거품과 같고(泡), 그림자와 같다(影) 또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다 이것이 인생의 무상(無常)을 여섯가지로 비유한 것입니다.
뭐가 무상(無常)인가? 몽(夢) 환(幻) 포(泡 ) 영(影) 로(露) 전(電)이 무상이다. 우리 몸이 무상인데 몸이라는 것은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번개같고 이슬과 같은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다. 이런거죠 그래서 옛말에 이르기를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 하죠. 초로인생이 얼마나 잠깐 있다 가느냐, 풀끝에 매달려있는 이슬(草露).. 아침에 영롱한 이슬방울을 보면 참 보기 좋죠.. 근데 한나절도 못 버티고 해가 터억 올라가면 이슬은 그냥 없어져버려요. 인생이 그와 같다는 거예요 초로인생(草露人生)이라고, 근데 요새 젊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도대체 믿지를 않아요.
거참 이상해 나이 먹으면 믿으니. 나이 많아서 믿어 뭐해요 젊었을 때 믿어서 늙음에 대비해 죽음이 없는 길을 닦아야하는데 젊을 땐 하나도 안 믿고 온갖 딴 수작을 하다가 이제 나이 다 들어서 닦을라 하니 닦아지나 중생이 이렇게 어리석어요.
인생이 여초로(如草露)다. 인생이 풀끝에 맺혀있는 아침이슬과 같다.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요. 인생이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 초로(草露)와 같다는 것은 한평생 다 살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 아니면 잘 알 수가 없어요. 할머니 돌아가시는 것을 봐도 모르고, 부모님 돌아가시는 거 보고도 몰라 그게 인생이야,
또 인명여전광(人命如電光) 강력개귀사(强力皆歸死)라.『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말인데 사람의 생명이 번갯불과 같다. 사람의 생명이 순간 일어났다 찰나에 사라진다. 힘이 강한 것도 전부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잠깐 머물다 가는지 번갯불과 같다 목숨이 번개같이 찰나에 금방 지나간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번갯불 없어지잖아 그게 인생무상이야. 그런데 무상하면 뭐 어릴 때 뭐했든 전생에 뭐했든지 아무 흔적도 자취도 없으면 차라리 낫겠는데 또 아니야 인과(因果)는 역연<歷然 분명하고 또렷>해요.
어릴 때 어디 다치면 그게 평생가요. 어릴 때 무슨 사고가 한번 있으면 그 사고에 대한 생각이 평생가요. 그거 참 희안한 일이에요 . 인생은 무상(無常 : 항상함이 없음)한데 인간은 역연(歷然)하다. 이게 이치예요. 어릴 적부터 글 배운 사람은 나이 들어도 글을 알고 어릴 적부터 일 배운 사람은 나이 들어도 일을 아는데 글만 배우고 일 안배운 사람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밥을 못하고 또 밥하는 것만 배우면 아무리 나이 들어도 글을 못써. 이게 인과(因果)입니다. 이건 역연(歷然)한 거예요.
천 년 전에 우리 조상이 한 것을 우리 후손이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이게 인과이고 역연입니다. 또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몇 만년 뒤에까지 우리 후손들이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이게 인과입니다 인과는 아주 분명한 거예요
인생은 무상하니까 이 무상(無常 : 항상함이 없음)한 인생을 가지고 좋은 종자(種子)를 자꾸 심는 그게 중요합니다. 그걸 공덕(功德)이라고 하고 그걸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 법문들은 사람하고 한 시간 잡담한 사람하고 한 몇 십년 후에 계산해보면 그게 환히 드러나요 그만큼 다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무상(無常 : 항상함이 없음)한 인생을 간과하거나 아예 모르고 삽니다.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걸 역연(歷然)이라고 하는데, 이 분명하고 역연한 인과(因果)를 몰라서 아무 생각 없이 욕망의 노예로 허송세월하다가 그냥 죽음을 터억 맞이한다.. 이게 보통 사람들의 인생이에요. 그래서 분명하고 역연한 인과(因果) 이걸 딱 믿고 아주 신심을 가지고 더 늦기 전에 죽기 전에 마음공부를 해야 된다. 우리가 마음을 닦아야만 살아있는 사람들도 천도가 되고 죽은 조상도 천도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안 닦고서는 자기 천도도 안 되고 조상 천도도 안 된다. 이것이 인과법(因果法)이죠. 그래서 인과법(因果法) 이걸 믿어야 되지 인과(因果)도 무상(無常)도 안 믿으면 이거는 천도가 될 길이 없어요.
그리고 세 번째는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게『마음』이거든요. 그러면 마음이 뭐냐.. 이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는 것도 마음이고, 인생이 무상(人生無常)함을 아는 것도 마음이고, 공덕을 닦는 것도 마음이고, 조상과 모든 사람들을 천도하는 것도 마음입니다.
그러면 대관절 마음이란 어떤 건가?
마음은 단지 방편상(方便上)으로 사용하는 명칭일뿐이예요 이름일뿐입니다.. 그런데 방편의 이름인 그 마음의 실체는 알 수가 없어.. 마음의 실체를 알 수가 없는데도 우리는 마음을 그대로 항상 쓰고 있어요. 그래서 이걸 경지가 높는 스님들이 말씀하시기를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공공적적(空空寂寂)하다. 마음은 아무리 아무리 찾을 래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공공적적(空空寂寂)하다. 텅~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하다. 이게 마음이야. 찾을 래야 찾을 수 없고 볼래야 볼 수 없는 게 마음이다. 그런데 마음이 공공적적(空空寂寂)하기만 하느냐 하면 그게 아니라 마음을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마음으로부터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는 게 마음이다.
볼래야 볼 수 없는 게 마음이지만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게 마음이야. 그래서 마음을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다 그랬어요. 공공적적(空空寂寂)하고 소소영령(昭昭靈靈)하다. 밝을 소(昭) 신령스러울 영(靈) 소소(昭昭)하고 영령(靈靈)하고 공공(空空)하고 적적(寂寂)한 것이 마음(心)이다 이 말입니다.
요즘 사람을 보면 뇌(腦)하고 마음을 혼동해요. 뇌는 물질이에요. 마음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 아닌 것도 아니고 심법(心法)이요. 뇌는 색법(色法)이요. 뇌라는 것은 머리를 수술하다 보면 뇌(腦)가 나오잖아요. 그건 단백질이지 그 단백질 그게 마음이냐 말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은 머리에 있다고 하는데 그건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을 몰라서 그래요. 마음이 눈에 보이면 그게 어떻게 공공적적(空空寂寂)해요. 마음은 머리를 갈라 보아도 안 보이니 어떤 사람은 마음이 가슴에 있다고 합니다. 가슴을 갈라 봐요 가슴에 마음이 있는가?
찾을 래야 찾을 수 없고 볼 래야 볼 수없는 것이 마음(心法)이기 때문에 공공적적(空空寂寂)이라 그랬어요. 텅~ 비고 비고 고요하고 고요하다. 그런데 마음은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게 마음이기 때문에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다. 소소(昭昭) 밝고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靈靈) 이게 방편으로 말하는 ‘마음’입니다. 이걸 합친 게 영지(靈知)에요 신령스럽게 안다. 적지(寂知) 라고도 그래요. 고요하면서 알고 알면서 고요한 것 이게 적지에요. 마음은 첫째 고요한 거예요, 둘째 아는 거예요 고요하기 때문에 찾아보면 없어요. 알기 때문에 일체 안 하는 일이 없어.. 이것 공적영지《空寂靈知》를 확실하게 보는 게 그게 천도예요.
이 소소영영하고 공공적적한 마음을 확실하게 보는 게 그게 깨달음이에요. 다시는 의심 없는 그게 성불(成佛)이에요. 공적한 것이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도 타는 게 아니고, 물에 들어가도 젖는 게 아니고, 커도 큰 게 아니고, 작아도 작은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이게 공공적적(空空寂寂), 소소영영(昭昭靈靈), 공적영지《空寂靈知》한 마음이에요.
큰 데 가서는 커지고, 작은데 가서는 작아지고, 밝은데 가서는 밝아지고, 어두운데 가서는 어두워지고, 일체 하지 않는 게 없는 게 그게 마음이야. 공공적적(空空寂寂), 소소영영(昭昭靈靈), 공적영지《空寂靈知》한 게 마음이요. 이런 법문을 턱~ 들으면 전생부터 많이 닦았으면 금방 깨달아요. 이게 언하대오言(下大悟)라. 이게 상근기(上根機)에요. 그냥 말하자마자 깨닫는 게 상근기입니다.. ‘공공적적 소소영영한 게 마음이다’고 말하면 그냥 단박에 깨달아요. 이게 언하대오라고 언하(言下)는 뜻이 없어요. 말하자마자 깨닫는다 직하대오(直下大悟)라 이게 상근대지요. 상근대지는 직하(直下)에 대오하고 언하(言下)에 대오한다.
육조스님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집착하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낸다. 딱 이 한 마디 듣고 그냥 깨달았잖아요. 머무는 바 없는 마음 집착하는 바 없는 마음 그게 공공적적(空空寂寂)이요, 소소영영(昭昭靈靈)이요, 공적영지《空寂靈知》라 이게 직하대오 언하대오하는 거예요. 이게 상근대지(上根大智)요,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춘광(春光)은 평등이나 춘천(春天)은 차별이라. 춘광은 봄빛이에요. 빛은 이 풀에 비춰진 빛이나 저 풀에 비춰진 빛이나 평등해요. 근데 풀은 다 달라. 이게 인과란 말이죠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아프고 저렇게 아프고 오늘은 오늘 대로 아프고 내일은 내일대로 아프고 이게 봄풀과 같다.
그런데 봄풀이 빛을 여의고 있는 게 아니에요 풀이 아무리 자라라도 봄빛은 그냥 있거든요 그 봄빛을 확실하게 믿는 게 신심이고(비유로 말하자면) 봄빛을 확실하게 보는 게 증득이에요 그게 깨달음이예요.
풀이 아무리 무성하게 나도 봄빛은 나는 게 아니고 풀이 사라져도 봄빛은 가는 게 아니라 이게 불생불멸(不生不滅) 속에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그대로 하는 거에요. 이렇게 터득하는게 깨달음이에요.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을 여의고 있는 게 아니요.
그래 어떤 도인 스님에게 죽지 않는 주인공이 있습니까? 물으니. 있다!.. 뮙니까? 아야 아야!~ 이랬습니다 카~~ 멋짓 법문입니다. 아야 아야!~ 이런 걸 들어놓으면 다 죽을 때 또 생각날 거요 이거.. 아야 아야 ~~ 그 법 멋진 법문 이예요 그 몸은 죽어도 아야 아야~ 이거 알거든요. 그러면 아야 아야~~하는 그 ‘마음’은 머리를 갈라 봐도 머리에 없어요 배를 갈라 봐도 배에 없고 팔다리를 갈라도 없어 공공적적(空空寂寂)하지만 소소영영(昭昭靈靈)한 공적영지《空寂靈知》그거란 말이지요.. 바로 그게 우주삼라만상만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래서 원효元曉스님이 도를 통하실 때 법문이 ‘마음이 생기면 세상 모든 것이 생겨난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 從從法生)이라. 똑같아요 그리고 그 삼삼조사卅三祖師라고 있는데 인도印度에서부터 달마達磨까지 내려오는데 28조 라 그러고 중국에 6조祖가 있어서 33조사祖師다. 그래서 달마스님이 인도에서는 28조이고 중국에서는 초조(初祖 초대 조사)이기 때문에 34대지만 사실은 33대입니다. 33조사 중에 17대 조사가 있어요 승가난제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가야사다라고하는 제자를 만났어요. 그 가야사다Gayashata라는 제자가 아주 훌륭한 제자에요. 승가난제Samghanandi께서 가야사다라고하는 18대 조사스님 될 스님께 물어요. 하루는 법당 추녀 끝에 요령을 하나 달아놨는데 바람이 부니까 덜그렁 덜그렁 소리가 났습니다. 그니까 그 승가랑제는 가야사다에게 물었어요.
야 저게 바람이 우는 것이냐 요령이 울리는 것이냐? (영명야 풍명야 鈴鳴耶 風鳴耶) 물으니. 바람이 우는 것도 아니고 요령이 울리는 것도 아닙니다. (동자운비풍령명 童子云非風鈴鳴). 그럼 뭐냐? 아심명야(我心鳴耶)라 즉, 나의 마음이 울고 울리는 겁니다.
이게 자연(自然)의 법문(法門)이에요. 보통 풍경이 울리면 바람이 부니까 바람이 풍경을 움직여서 울린다 이러잖아요. 이걸 혼미한거라 그래요. 풍경소리 이게 공공적적하고 소소영령한 마음인 줄 꿈에도 모르는 중생의 생각이에요 다 그렇죠 다.. 그런데 아심명야(我心鳴耶)라 나의 마음이 울릴 뿐이다 그랬어요. 옳다!.. 너에게 법을 전하겠다. 그래서 전법을 해서 가야사다가 18대 조사가 된 거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산을 보면 저게 산이지 나하고 관계없는 줄 알지만.. 저 산이 내 마음이요. 허공을 보면 허공이 나하고 관계없는 줄 알지만.. 허공이 내 마음이요. 꽃을 보면 이걸 꽃이라고만 알지 꽃이 내 마음인 줄은 꿈에도 몰라요.. 하 ~~ 이게 이게 불교에요 불교..
그러면 17대代 조사만 그런 게 아니라 33대代 혜능선사가 홍인스님으로부터 법을 다 인정을 받고 16년 동안을 수행을 했어요, ‘이걸’ 깨닫고 나면 그걸로 다 끝나는 게 아니라 깨닫지 못했을 때 버릇들이 남아있어요. 이걸 다생습기라고해요. 언하대오 후에 다생습기가 완전히 녹아지도록 수행하는 걸 부잡용심(不雜用心)이라고 그러는데.. 잡되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이 기간이.. 이게 오후수행(悟後修行)이예요.
마찬가지로 어릴 때 부모 밑에서 어리광부리고 의존하여 살다가 이제 장가들면 어른이 됐단 말이에요. 그럼 전에 부모에 의존하는 습관을 딱 끊어 버려야하는데 이 녀석이 장가는 장가대로 가고, 부모한테 계속 의지하면 이거 못 쓰는 거다. 이말이죠
도(道), 깨달음도 마찬가지예요. 언하에 대오해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마음의 도리를 확실하게 깨달았는데 그 불생불멸의 마음 도리를 깨닫기 전에 생로병사의 습기가 남아있다. 이렇게 돈오頓悟는 수동불雖同佛이나 돈오는 비록 부처님하고 같으나 다생습기심多生習氣深이라 다생습기가 깊다.
그래서 죽는 거 걱정하던 아무 쓸데없는 습관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닦는 게 오후(悟後)수행이에요. 그래서 조주趙州 스님같은 분도 깨닫고 나서 30년을 닦았고, 육조六祖스님도 16년 닦았어요 그래서 16년 뒤에 이 세상에 나온 거예요 이게 닦음이 없이 닦는 거예요. 꿈을 꾸다가 꿈 깨고 나면 밝은 세상이 확 펼쳐졌는데 눈앞에는 딴 세상이 펼쳐졌는데 이상스럽게 꿈꾼 기억이 머리에 남아있거든.. 요거에요 요거 바로.. 그래 눈에는 세상이 보이는데 그 꿈꿨던 기억이 이상해서 그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고 요게 있다. 그래 그런 것이 삭~ 없어져서 그 꿈의 기억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롭게 보인 세상에서 마음대로 노니는게 그게 완전히 성불(成佛), 완전한 깨달음이다 이 말이죠. 원각대지(圓覺大智)가 낭연독존(朗然獨存)이라. 즉 크게 깨달은 지혜가 환하게 홀로 있다 이걸 바로 성불이라고 그래요.
육조(六祖) 혜능 스님이 그랬단 말이죠. 조주 스님이 남전 스님 밑에 깨닫고 30년 동안 스승을 모시고 그 다음 몇 십년을 여러사람 찾아다니면서 탁마를 했어 이걸 행각이라고 그래요 그러고 나서 사람들을 맞이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거야, 바로 이런 거야 도(道)라는 게.. 해탈(解脫)이라는 게.. 깨달음이라는 게...성불(成佛)이라는 게...
그 혜능스님이 16년 세월을 겪고 나서 첫 번째 한 법문이 뭐냐면 바로 지금했던 그 법문과 똑같애요 법성사 앞에 오니까 학승들이 다퉈요. 막 깃발이 펄럭펄럭하니 다툰단 말이야,
한 학승은 깃발이 움직인다 그러고, 다른 학승은 바람이 움직인다 그러고 있을 때 그때, 이제 육조 스님이 딱 보고 야야!~ 그런 게 아니다. 뭐라 그랬죠? <마음이 움직인다 라고 대답함> 잘 아시네 ^^*~ 고걸 바로 증득하면 되요.. 그거 바로 증득하면 그게 깨달음, 성불, 도, 해탈이에요.
불시풍동(不是風動) 바람이 움직이는 게 아니요불시번동(不是幡動) 깃발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인자심동(人者心動) 그대의 마음이 움직이는 거니라. 요게 해탈이고 요게 깨달음이예요. 이 꽃이 꽃인 줄만 알지 마음인 줄 모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그 마음을 믿는 겁니다. 그 마음을 척~믿으면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어(心外無法) 마음밖에 없어.. 그게 마음으로 마음 찾은 거니까 얼마나 쉬우냐 이 말이에요.
뭐 백사장에 가서 금 찾는 거 아니고 산에 가서 산삼 찾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마음 찾은 거니까 해탈법이 얼마나 쉬운 법입니까. 다만 믿지 못해서 어렵다. 믿지 못해서.. ‘마음밖에 법이 없다’이를 아주 철저히 믿으면 바로 보여요 그런데 안 믿어..
이게 꽃이라는 건 믿는데 마음을 안 믿어. 그래서 마음과 부처님과 중생이 또 뭐라 그랬지? 60권 화염경(華嚴經)에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랬거든,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이 차별 분별 구분이 없다 이랬어요. 그런데 본인이 중생이요? 부처요? 물으면 중생이라고 그래.. 본인이 중생이라고 믿느냐고 하면 맞다고 그래.. 본인이 부처라고 하니까 안 믿어.. 중생이라 하면 다 믿는데 부처라고 하면 안 믿더라고.. 그것도 참 희안한 일이에요.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고 그랬으니까 중생이 바로 부처거든 마음이면 바로 부처고..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신심이 없는 거예요
고려시대에 보조지눌(普照知訥) 스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유명한 수심결修心訣을 지었거든요 그 수심결에 법문이 있어요. 여하시불(如何是佛)? 도대체 부처님가 무엇입니까? 이랬거든요 귀종화상이. 그랬더니 보조스님이 하~ ‘부처가 무엇인지 내가 바로 가르쳐 줄 수는 있는데 혹시 네가 믿지 못할까 걱정이 된다’ 이랬거든요 . 아이~ 스님 말씀을 제가 왜 못믿습니까. 확실히 믿을 테니까 가르쳐 주세요 하니까, 즉여시(卽汝是) 네가 바로 부처다 이랬어요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거에요, 이게 부처님 가르침하고 조금도 다름이 없잖아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 그랬으니까 또 마음이 있다고 그러니까.. 자네가 바로 부처다 그러니까 여하보림(如何保任)이닛고, 즉 그러면 나의 부처를 어떻게 지켜야겠습니까? 이게 상근대지(上根大智)여. 나의 부처를 내가 어떻게 지켜야되겠습니까 여하보림(如何保任)입니까 물었거. 든 이 또한 멋진 법문이야~
일예재안 공화난추(一翳在眼 空花亂墜 翳 : 日傘, 몸가리개, 방패)한 가림이 눈을 막으면 허공에서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느니라.
조금이라도 의심이들어서 탐욕심. 분노심 이런게 생기면 그냥 거꾸러지는 거에요. 탐욕과 분노는 마음밖에 법이 있다고 의심하는데서 생기는 거예요‘마음밖에 법이 없다’라는 게 확실히 보이면 탐욕과 분노가 안 일어나.. 그런데 그걸 알기는 ‘아는 것’가지고는 소용없어요 증득을 해야 해요 증득을 완전하기 전에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마음밖에 법이 없느니(心外無法),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 해봤댔자.. 말 한 마디 요만큼 들어도 화가 막 일어나거든 이게 정신이 혼미(昏迷)한 거예요.
이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마음을 확실하게 증득하고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몸소 뼛속까지 증득했으면 화낼이 없어.. 원통할 일이 없거든, 두려울 일이 없고, 그러니까 이게 중요한 거죠. 그러니까 믿고 완전히 얻어야 된다. 믿지 못하고 얻지 못하면 자기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어.. 쓰지를 못해..
그래 부처님 법을 이렇게 만났으니까 첫째는 확실하게 믿는 거예요 무얼 믿느냐?. 산山도 내 마음의 산이고 꽃도 내 마음의 꽃이고 죽음도 내 마음의 죽음이다. 태어남도 내 마음의 태어남이고 남자도 내 마음의 남자, 여자도 내 마음의 여자, 요새 사랑하는 사람이 그거 아나?. 자기自己가 예쁘다고 봐서 예쁜 건데 그건 꿈에도 몰라요 아..어떻게 어떻게 생겼으니까 이쁘고 뭣이 어쩌고 어쩌고.. 그래서 내가 물어요. 지금 사랑하는 그 모습이 10년만 지나가면 없어지는데 10년 뒤에 어떻할래?. 10년 후에는 예쁜 걸로 사는 게 아니라 정情으로 산다 그래요. 마지못해 사는 소리 같애..어떤 사람은 그땐 새 사람 찾으면 안 됩니까 이런 소리하는 사람도 있고.
이러나 저러나 다 내가 예쁘다고 봐서 예쁜 건데 자기 마음에 의해서 예쁜 건데 그건 까맣게 잃어버리는 거예요. 다 내 마음의 산이요 바다요 허공이요. 내 마음의 사랑인데 그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전부 마음 바깥에 있는 걸로 아는게 그게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이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마음에 의해서 나왔다는 걸 모르는 게 어리석은 거고.. 그러니까 좋은 걸 보면 자꾸 구하는게 탐욕심이 일어나고, 구해도 구해도 안 구해지니까 그냥 원통해서 잠을 못 이루고 화가 나고, 그게 바로 진노 분노(忿怒)입니다.. 이게 중생이에요. 그러니까 이 탐진치에 물들어서 고생하는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해탈하고 어떻게 하면 천도가 되겠습니까.
이제 결론인데 결론은 바로 그거에요. 첨에 뭐라 그랬죠 인생이 무상(無常)함을 믿어야 되요. 인생이 이게 오래가는 게 아니고 눈깜짝할 새에요. 인과가 분명함 역연(歷然)함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백년탐물이 하루아침에 티끌이요(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라 욕심부려 백년동안 모아둔 재물은 하루 아침에 티끌이 되고, 삼일동안 마음 닦은 공덕은 천년동안의 보배라. 이게 전부 헛소리가 아니에요. 인과가 역연하지 않으면 삼일동안 마음 닦은 게 천년 보배가 될 수가 있어요? 이 얼마나 대단한 법문이요 이게.. 신심信心이에요. 그래서 이걸 얻을 때까지 인생무상(人生無常)하고 인과역연(因果歷然)하는 것을 조금도 흩트러뜨리지 말고 닦고 또 닦고 닦고 또 닦으면 언젠가는 털거덕 마음의 눈이 열려 가지고 환 할 날이 오고, 업장소멸이 다 될 때까지 다 닦아서 아직도 전생 전생에서부터 많은 어머니요 아버지요 다 일가친척의 중생들이 이 해탈법.. 생사 없는 법(不生不滅法)인 마음을 보지 못하고 낮이나 밤이나 고통 속에 사니 그런 중생들을 제도하려고 원(願)을 세워서 중생을 제도하는 거 이게 불교입니다.
법문(法門) 잘 새겨 들으시고 그렇게 믿고 잘 닦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종범스님 2009년 6월 파계사 설법전(把溪寺 說法殿) ♧ 출처: 불교방송 http://www.b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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