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메일

콩국수 한 그릇, 스님의 한 말씀

장백산-1 2019. 7. 28. 23:41


[이문재의 시의 마음] 

콩국수 한 그릇, 스님의 한 말씀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입력 2019.07.28. 20:46



[경향신문] 

스님께서 손수 삶아낸 소면에 진한 콩 국물. 소박한 식탁이었다. 산길을 오른 데다 늦은 점심이어서 바로 젓가락을 들려는데 스님께서 공양게송을 읊으시는 것이었다. “이 밥은 대지의 숨결과 강물의 핏줄, 태양의 자비와 바람의 손길로 빚은 모든 생명의 선물입니다.” 처음 듣는 공양송이었다. 일순, 식탁이 경건해졌다. 콩국수와 김치 한 접시가 놓인 조촐한 밥상에서 나는 지구와 우주를 생각해야 했다.



지난 주말, 공주 마곡사 다녀오는 길에 수경 스님을 찾아뵈었다. 손꼽아 보니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2010년 문수 스님이 4대강 사업을 중단하라며 분신한 직후, 스님은 승적을 반납하고 은둔하셨다. 자신의 몸을 살라 생명의 젖줄을 지키려고 한 문수 스님의 큰 뜻을 종단이 제대로 받들지 못한 것에 대한 항의이자 참회였다. 그 후 스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내가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8년 전, 2001년 5월 초였다. 1960년대 후반 입산한 이래, 산문 밖의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고 정진하던 스님은 천지자연이 성장과 개발 지상주의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목도하고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섰다. 2000년 낙동강 줄기를 답사한 데 이어 이듬해 지리산 외곽을 두 발로 걸으며 생명들의 평화를 기원했다.

2001년 5월 7대 종단이 지리산에 모여 좌·우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거행했다. 여러 종단이 마음을 모은 데다 분단 이후 최초로 군경, 빨치산, 민간인 위패를 한자리에 모신 자리여서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위령제의 일환으로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가 진행됐는데 수경 스님이 순례단을 이끌었고 당시 나는 취재기자 자격으로 순례 전 일정에 참여했다. 함양에서 출발해 산청, 하동, 구례, 남원에 이르기까지 15일간 지리산 둘레를 걸으며 길 위에서 먹고 잤다.

양민 학살 현장과 빨치산이 최후를 맞이한 골짜기에서는 현대사의 비극에 아파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마주친 공사 현장에서는 생명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 산업문명의 탐욕이 안타까웠다. 개인적 깨달음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 밥의 양을 몰랐다는 것이다.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걸을 때였다. 마침 점심시간. 길 위에서 먹고 자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매번 그릇에 밥을 얼마나 담아야 할지 난감했다.

그날도 밥주걱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밥 양 맞추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스님께서 웃으며 한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그거 알면 깨달은 거여.” 다른 지면에도 두어 차례 소개했지만, 그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당시 내 나이 40대 초반. 얼추 셈을 해보았다. 하루 세 끼 곱하기 365일 곱하기 40년. 무려 4만3800끼였다. 그런데도 내가 먹는 밥의 양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다.

18년 저쪽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오늘로 이어졌다. 승적 반납 이후 스님은 더 큰 세계로 나아가셨다. “돌아보니 그간 받기만 하고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어려운 사람, 어려운 곳을 찾아다녔다.” 산티아고 길을 걷고 일본 시코쿠 108사찰 순례길을 걸었다. 국내 폐사지를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얀마의 고아원을 돕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들을 만났다. 하지만 스님은 후원자들이 설립한 비영리단체의 활동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땅과 물, 불과 바람이 함께한 점심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스님께서 공양송이 새겨진 카드와 함께 소책자를 건네셨다. 책 제목은 ‘공양’. 글씨와 그림은 판화가 이철수씨가 새긴 것이었다. 분량이 채 60쪽이 안 됐고 비매품이었다. 제목이 말해주듯 스님께서 행자 시절 겪은 밥에 관한 짧은 글 여섯 편이 실렸다. 맨 앞에 실린 ‘수챗구멍 속의 우주’에 스님의 의중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행자 시절, 남은 음식을 함부로 버렸다가 큰스님께 불려가 쫓겨날 뻔한 뼈아픈 경험담인데 그때 큰스님은 눈물을 흘리는 행자에게 “밥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중 될 자격이 없다”며 엄히 꾸짖었다. 이 한마디가 어린 행자를 선승으로 키워냈다. 수경 스님은 큰스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풀이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자 우주의 은혜를 입는 일이다.”

수경 스님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새만금 개발 반대 삼보일배다. 세 걸음 걷고 엎드려 한 번 절하기. 가장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가장 강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이 삼보일배다. 세간에는 종단을 떠난 이후 스님께서 은둔한다고 알려졌지만 이번에 뵙고 나니 스님은 언제나 ‘신음하는 생명’과 함께 깨어 있었다.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삼보일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마지막 최후’와 마주하고 있다. 기후 역습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이 거대한 위기의 근원은 아마도 ‘밥’일 것이다. 우리가 매끼 식탁에서 기도를 제대로 올렸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우주와 한 몸’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고 천지자연 앞에서 겸손했다면 인류세의 입구가 이렇게 암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밥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생산력 제일주의와 대량 소비사회가 식탁에서 유턴해야 할 때다. 그래야 마지막 최후가 ‘인류 최초의 처음’으로 전환될 것이다. 지난 주말 내가 어두운 귀로 들은 수경 큰스님의 일갈이다.

이문재 | 시인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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