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뭔가 하고 있을때 그냥 하라

장백산-1 2019. 12. 19. 18:56

가 하고 있을때 그냥 하라    / 숭산 스님  


법화경은 중국말로  “실상묘법경(實相妙法經)”이라고 부른다. 실상(實相)은 “참(眞)”이라는 뜻이고 

묘법(妙法)은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참으로 신비한 법문”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마음(不動心)을 유지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무한대의 시간과 공간

을 얻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경전이다. 


법화경(法華經 ; 妙法蓮華經)은 완벽한 적정(寂靜)의 마음, 적멸(寂滅)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해 가르

친다. 사실 완벽한 적정(寂靜)의 마음, 적멸(寂滅)의 마음은 본래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레 얻어야 할 마음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분별의 틀인 한 생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본래마음,

완벽한 적정(寂靜)의 마음, 적멸(寂滅)의 마음을 잃어버린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여러분의 

완벽한 적정(寂靜)의 마음, 적멸(寂滅)의 마음을 휙휙 훑고 지나가는 망상(妄想, 허망한 생각)들을 좇

아가면 여러분과 나는 완벽하게 분리(分離)된다. 그러나 분별의 틀인 모든 생각을 끊어서 단지 내 말을 

듣고 있는 놈, 즉 완벽한 적정(寂靜)의 마음, 적멸(寂滅)의 마음, 텅~빈 바탕마음으로 돌아오면 완벽하게 

나와 여러분들은 하나가 된다.  


분별의 틀인 생각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내 말과 내 말을 듣고있는 여러분들의 귀는 완벽하게 일치한다.

말하는 행위와 듣는 행위가 둘이 아니요, 그것이 이미 부처님이고 예수님이다. 이것은 한국 사람만 경험

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이나 독일, 중국 사람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남자만 경험하는 것도, 여자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때때로 이것을 “원점”(primary point)이라고 부른다.


몇년 전 파리에 있을 때 프랑스 신부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얘기가 끝나갈 무렵에 신부님들 일행 중 한 명이 전날 나의 법문을 듣고 의문이 생겨 밤을 

꼬박 새웠다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선사님께서는 ”원점(primary point)“이 무한대(無限大)의 시간(時

間)과 공간(空間)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원점(元點, primary point)과 하느님의 창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때 나는 지금처럼 법상(法床)을 “쿵”쳤다. 그게 내 대답의 전부였다. 몇 초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그 

신부님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느님의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분별의 틀,

생각입니다. 그러나 법상(法床)을 치는 것은 분별의 틀인 생각 이전의 텅~빈 바탕자리, 텅~빈 바탕마음

에서 하는 행위입니다. 쿵하고 법상(法床)을 치는 행위는 예수님과 부처님 이전입니다. 우주 이전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이전입니다. 당신이 분별의 틀인 생각 이전의 텅~빈 바탕자리, 텅~빈 바탕마음 그 지점을 

볼 수 있다면 신(神)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신부님이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선사님은 신을 볼 수 있습니까?"라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신부님이 입고 계신 셔츠가 까만 색이군요." “법화경은 ‘쿵!’ 이 지점이 어떻게

우리들의 근본성품(본성, 本性)이고 모든 현상(現象)의 본질(本質)인지 깨닫게 해준다. 또 이 경지를 

완벽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이 미래 생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한다. 


아주 재미있는 대목이다. 그것은 이번 생 아닌 다른 생에서 깨달음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음 생은 

실제 다음 생이 아니다. 이것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을 어떤 단어로 설명하기 위해 나온 분별일 뿐

이다. 실제 우리들은 바로 지금(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장소(바로 여기 이 자리)가 아닌 때와 장소

(場所)에서는 부처(佛), 근본성품(본성, 本性), 분별의 틀인 생각 이전의 텅~빈 바탕자리, 텅~빈 바탕

마음, 참나, 본래의 나가 되지 못한다. 부처가 되는 것은 어떤 다른 장소, 어떤 다른 시간에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가 되고 싶으면 단지 지금 여기서 수행하면 된다. 바로 지금 수행한다면 “다음 생”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된다. ‘쿵!’ 여러분은 단지 지금 이 순간을 가질 뿐이다. ‘다음 생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뭔가를 하겠다’고 일으킨 마음, 발심(發心)이 이미 부처의 마음(佛心)이다.

부처의 마음(佛心)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불심은 미래의 어느 순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부처의 

마음(佛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안과 밖이 없고, 주체나 객체가 없이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을 말한다. 오직 수행하라. 그러면 부처가 된다.  


일본 일련종(日蓮宗)의 추종자들은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암송한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이것이 일본의 법화경 제목이다. 일본 일련종 추종자들은 이 주문,

나무묘법연화경을 열심히 외우면 아름다운 집과 훌륭한 아내를 얻는다고 믿는다. 그 어떤 것도 가능하

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치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해주는 도깨비 방망이의 진언 같다. 그런 수행이 나쁘

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한마음’을 유지하는 것일 뿐이다. 뭔가 얻고 싶다면 이것이 

좋은 방법이지만 그러나 올바른 불교 공부나 참선 수행은 어떤 것도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이것은 

나무묘법연화경 뿐만 아니라 모든 진언 수행의 최종 목표이다. 어떤 종류의 진언도 똑같다. 심지어 

‘코카콜라. 코카콜라, 코카콜라’하고 계속 열심히 외우더라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분별의 틀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떻게 공(空)의 

마음, 분별의 틀인 생각 이전의 텅~빈 바탕자리, 텅~빈 바탕마음, 참나, 본래의 나을 유지할 것인가? 

그것이 절대의 상태이며, 우리가 원점(元點, primary poin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점(元點, primary 

point)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근본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근본 원인이 제거되면 우리의 환경이 바뀌어 

좋은 결과를 얻는다. 고통도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자비심과 행복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연기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어떻게 근본 원인을 제거할 것인가? 단지 하나의 마음을 가지면 된다. 뭔가를 할 때 그냥 하면 

된다. 단지 그냥 하면 된다. 이 그냥 하는 마음에는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안과 밖이 하나가 된다.

그 결과 우리는 우주에너지와 연결 될 수 있다. 우리는 우주에너지와 연결 그것을 원점(元點, primary 

point)이라고 부른다. 원점(元點, primary point)을 유지하면 차츰 근본 원인이 사라진다. 모든 분별의

틀인 생각이 원인(原因)을 만들뿐이다. 그러므로 분별의 틀인 생각을 끊으면 근본 원인은 태양열에 

증발하는 수증기 처럼 자연스레 사라진다. 열심히 수행하면 이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자꾸 생각을 하면 그것은 우리의 업(業)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업(業)은 태양을 가려 결국 

근본 원인인 물은 증발 할 수 없게 된다. 어떤 수행을 하든지 커다란 의심을 가지고 그냥 행하라. 노력

하는 마음과 오직 한가지의 의문을 가지면 어떤 종류의 수행이든 본성(本性)을 깨우치는데 도움을 주며 

모든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냥 하라. 이것이 법화경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