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현대인이 불행한 건 나를 아는 법 배우지 못했기 때문

장백산-1 2020. 2. 2. 22:51

영축총림 통도사 서축암 감원 우진 스님


“안다는 오류에서 벗어나 스스로 조절하는 열정적 삶 살아야”


현대인이 불행한 건 나를 아는 법 배우지 못했기 때문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나를 만날 기회 사라져

숫자는 허상일 뿐…망상의 작동을 멈추어 속지 말아야


우진 스님은 “스스로 생각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필요하다”며 “인생을 위한 법문을 듣고 열정으로 자신을 조절해 나가라”고 당부했다.


‘화엄경’의 ‘아승지품(阿僧祗品)’은 굉장히 길이가 짧습니다. 숫자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승지에서 ‘아’는 없다는 부정사입니다. ‘승지’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수(數)입니다. 아승지는 곧 무수(無數)라는 뜻입니다. 무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숫자가 없는 것 또는 아주 많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승지는 ‘무수히 많아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에서 부처님은 단 두 품을 말씀하셨고, 나머지는 보살님이 부처님을 대신해 설하십니다. ‘아승지품’과 ‘여래수호광명공덕품(如來隨好光明功德品)’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내용입니다. 왜 이 두 품을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범할 수 있는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안다’고 하는 오류입니다. 보통 “나이를 먹으면 다 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은 안다는 착각에 빠집니다. 도(道)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수행하는 사람도, 도를 닦는 사람도 범하기 쉬운 것이 다양성에 대한 이해 부족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 이해하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수준으로 제 말을 듣습니다. 제 수준으로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분을 안다고 생각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전혀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왜 부처님께서 이 세상이 ‘아승지’이고 ‘불가설’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인식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내가 전체를 알 수 없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 자신을 계발하거나 새로운 나를 만날 기회는 사라집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많다’고 하는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것은 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를 보지 못합니다. 큰 것을 보지 못합니다.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작은 것도 보지 못합니다. 역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안다’ ‘본다’고 하는 범위는 정해져 있습니다. 어디에 정해져 있는가 하면 스스로 생각에 들어갈 때만 ‘안다’ ‘본다’고 느낍니다. 나의 인식 범주에 들어오지 않으면 알지도 보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식분별’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안다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망상이 작동된 상태입니다. 큰 것을 못 본다고 하는 것이 ‘아승지품’이고, 작은 것을 못 본다고 하는 것이 ‘여래수호광명공덕품’입니다.


저는 얼마 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허망했는지 모릅니다. 3년 만에 인도를 갔는데 인도에 화폐개혁이 일어나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인도 돈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가이드가 한국은 구권도 은행에 가면 바꾸어주지만, 인도에서는 그 돈을 쓰는 순간 경찰서에 간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내가 믿었던 수는 우리 믿음 속에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는 금을 화폐로 바꾸어주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모든 것이 신용화폐입니다. 신용화폐라는 것은 개념상의 돈일뿐입니다. 개념상의 돈일뿐이라는 것은 그냥 있을 때는 모릅니다. 외국여행을 가려고 환전할 때 환율이 들락날락합니다. 환율이 바뀌는 것은 돈이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실제가 아닌 허상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허상으로 보지 않고 실제로 봅니다.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무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이 많은 것입니다. 모두 허상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중생은 늘 ‘하나’ ‘둘’ ‘셋’ 이렇게 헤아리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 ‘둘’ ‘셋’은 없습니다. ‘불가설’입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생은 수없이 살아가는데 수없이 반복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스스로 자기 오류에 빠지기를 반복합니다.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자기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오류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옳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른 것도 아닌 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생각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짓는 오류로부터 속지 않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방법으로, 제가 인도에 가서 본 글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15년 만에 인도 콜카타라는 지역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자이나교의 성지로 무척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15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 보게 되었습니다. 자이나교의 특징은 철저한 계율과 불살생입니다. 그리고 무소유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자이나교 성지에서 이러한 문구를 보았습니다. ‘Four great things.’ 네 가지 위대한 일에 대한 기록이었습니다. 이 종교에서 말하는, 아주 희유한 일이며 이 세상에 살아있는 존재로서 가장 숭고한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생명으로 가장 위대한 가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법문을 듣는 것’입니다. 화엄산림에서 법문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네 가지 위대한 일 가운데 두 가지가 벌써 해당하는 셈입니다. 법문을 듣는 것이 왜 위대한 것일까요? 법문이 아닌 것은 다 먹고 사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세상의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법문입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유한합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먹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없으면 가르치지 않습니다. 제 학창시절 유명한 학교는 기술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이름 자체도 없어졌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르침입니다.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법문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술과 돈벌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문을 듣는 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법문은 돈벌이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인생을 가르치는 것이고, 내 삶이 아름다워지기 위해, 내 인생이 허전하지 않기 위해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무엇인가 허전해서 여기 오셨을 것입니다. 젊은 분들이 많지 않은 이유도 사실상 나이를 먹기 전에는 그 허전함을 알기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진짜 가르쳐야 할 것이 법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젊은이들이 불행한 이유는 사회생활을 하는 기능, 돈을 버는 기능만 배우지 스스로 아는 법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이를 먹고 스스로 인생을 아름답게 살려면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젊어서 인생에 만족이 없거든 법문을 들어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경제를 성장시키는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빼앗았다는 건 기성세대가 짊어져야 할 도덕적 책임입니다. 현대인들은 나이를 먹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법문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들은 법문에 대해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신앙’입니다. 내가 배운 이 법에 대해 믿음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수행한다’ ‘깨달음을 얻는다’ 함은 조금 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을 불자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처님의 아들, 딸이 되려면 부처님 법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갖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루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 믿고 있습니까? 무엇을 믿습니까? 저 천장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믿습니까? 그래서 여기 앉아 계신 것입니까? 매달린 전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 현수품’에서 ‘믿음을 성취하면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했고, ‘법성게’에서 ‘초발심시변정각, 믿음이 시작이고 믿음이 끝’이라는 표현했습니다. 내가 믿고 있으면 나의 인생은 나의 신념대로 사는 것입니다.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내 인생의 가치체계이고, 내 삶의 행동체계입니다. ‘나는 이런 가치를 위해, 이러한 행동의 삶을 살겠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삶의 신념이 서게 되면 행동이 바뀝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신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념은 어떻게 갖게 되는 걸까요? 믿고 시작한 수행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속하면 됩니다. 아미타불에 관한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아미타불을 계속 부르면 됩니다. 관세음보살에 관한 믿음이 왔다 갔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을 계속 부르면 됩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스스로 믿음이 생깁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이 믿을 수는 없습니다.


네 번째는 ‘열정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조절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자이나교에서 이야기하는 네 가지 위대한 삶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부처님 가르침에도 있습니다. 제가 자이나교 이야기를 빌린 이유는 여러분이 새롭게 듣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다 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들려드리면 ‘저 이야기 또 한다’ ‘저번에 한 이야기를 또 한다’ 이렇게 한 귀로 듣고 흘리실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다른 종교를 통해 이야기하면 ‘아승지품’은 전혀 새롭게 들릴 것입니다.


‘아승지품’은 처음 말씀드렸다시피 모두 숫자 이야기입니다. 숫자는 일, 십, 백, 천, 만, 그리고 만부터는 천의 배수로 나갑니다. 그 다음이 억, 조, 그다음을 ‘불가설’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숫자를 ‘안다’라고 하지만 아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숫자라고 하는 것은 허상일 뿐입니다. 내가 속지 말아야 할 것이 많다는 뜻입니다. 많다는 것에 속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합니다. 절대 많은 것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떠난 열은 없습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아승지품’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수에 속지 마라”는 당부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두 가지 오류를 범하기에 ‘아승지품’ 그리고 ‘여래수호광명공덕품’을 설하신 것입니다.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우진 스님이 2019년 12월17일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봉행된 ‘제49회 영축총림 통도사 화엄산림 대법회’ 제21일차 법회에서 ‘아승지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522호 / 2020년 1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