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자유롭고 행복한 삶 어떻게 기도(祈禱) 할 것인가?

장백산-1 2020. 2. 2. 19:25

자유롭고 행복한 삶


어떻게 기도(祈禱) 할 것인가?  - - 법륜스님 


기도가 수행의 방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기도(祈禱)에는 네 가지 종류의 기도(祈禱)가 있습니다. 


- 첫 번째 기도(祈禱)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성취하려고, 사람들이 뭔가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

각자의 소원(所願)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기도(祈禱)입니다. 이 기도(祈禱)가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기도(祈禱)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祈禱)를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이 기도(祈禱) 합당치 않은 기도(祈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그것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은 데 다른 사람이 그렇게 

기도(祈禱)하는 것을 옆에서 볼 때는 ‘기도해서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사람들 모두가 기도(祈禱)

하지 어느 누가 일 하겠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첫 번째 기도(祈禱)는 바람직한 신앙은 아닙니다. 

이 첫 번째 기도(祈禱)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지혜(智慧)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점점 더

어리석게 만들고 요행을 바라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祈禱)는 사실은 재앙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이 첫 번째 기도(祈禱)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두 번째 기도(祈禱)는 바라는 것 중에도 욕심(欲心)이 아닌 것, 어떤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어떤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간절하게 하는 기도(祈禱)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기도(祈禱)도 바람직

하지 않은 기도(祈禱)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바라는 바가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간절하게 기도하면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있을 수 없는 일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 기도(祈禱)를 간절하게 해서 그래서 병(病)이 치료될 때도 있고,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기도(祈禱)에는 그 진행 과정에 수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관에서 그만둬 버립니다. 그런데 간절함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두 번째 기도(祈禱)를

계속하게 만듭니다. 지극정성으로 하게끔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이 감동합니다. 하늘이 감동한

다는 말은 사실은 그 사람이 간절하게 하는 기도(祈禱) 행위를 보고 주위 사람이 감동한다는 얘깁니다. 


하늘이 감동을 하는 기도, 주위 사람들이 감동을 하는 기도 이것은 부처님을 믿던지 예수님을 믿던지 

하나님을 믿던지 용왕님을 믿던지 간에 부처님, 예수님, 하나님, 용왕님이라는 대상이 핵심이 아니고 

얼마나 지극한 정성이었느냐, 얼마나 간절한 기도(祈禱)였느냐에 따라서 일어나는 현상(現象)입니다. 

그런데 욕심(欲心)으로 하는 기도(祈禱)는 절대로 이렇게 하늘이 감동할 만큼의 정성이 기울여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이 있어 기도(祈禱)를 할 때는 바람직하지 않은 

기도(祈禱)는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나름대로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처해서 기도를 한

다면 목숨을 버릴 만큼 간절하게 해야 됩니다. 


이 두 번째 기도(祈禱)는 설령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인과법칙(因果法則)을 따르게 됩니다. 

인과법칙(因果法則)을 따른다는 말은 반드시 소원이 성취된 빚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윤회

(輪廻)의 세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 표현으로 하면 비록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그 복이 다하면 

다시 이 세상에 떨어진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즉 육도윤회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해탈지도(解脫

之道)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두 번째 기도(祈禱)도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법(佛法)은 윤회(輪廻)의 세계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기도(祈禱)는 무엇이냐? 어떤 욕구 어떤 바람을 갖고 몰두하는 기도(祈禱)가 아니고 욕구 바람

을 놓아버리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하는 기도(祈禱)입니다. 이것을 선정(禪定)

에 든다고 하는 겁니다. 이 세 번째 기도(祈禱)부터는 기도(祈禱)라는 이름을 기도(祈禱)라고 하지 않고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수행(修行)에는 여러 가지 방법, 방편, 수단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소위 아나빠나, 즉 수식관

(數息觀)이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수식관은 자세를 똑바로 하고 눈을 감고 자 호흡(呼吸)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호흡(呼吸 : 들이마시는 숨 내쉬는 숨)을 알아차린다는 말입니다. 자세를 똑바로 하고 마음을 

얼굴 전면에  집중시켜서 특히 코끝에 집중시켜서 숨이 들어갈 때 들어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숨이 나갈 

때는 나가는 숨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니고 호흡을 자연스럽게 놔둡니다. 호흡이 가쁘면 가쁜 대로, 길면 긴 

대로, 고요하면 고요한 대로, 들떠있으면 들떠있는 대로 그대로 자연 상태로 맡겨놓고, 들어오는 숨

나가는 숨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숨이 들어오는구나, 숨이 나가는구나, 숨이 길구나, 숨이 들떠있구나 

하는 것을 그냥 사실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아주 깊은 선정에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느 정도로  집중돼야 하는가 하면 천개의 벼락이 쳐도 꿈쩍도 안 할 자세로 집중돼야 

합니다. 이것은 두 번째 기도의 원하는 것이 있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과는 약간 다릅니다. 

집중이라는 면에선 같은데 앞에는 욕구가 기초가 돼있고 이것은 욕구가 기초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욕구가 기초가 안돼야 선정(禪定)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수식관(數息觀)을 할 때도, 관세음보살 정근을 할 때도, 독경을 할 때도, 염불을 할 때도, 일체 마음이 

의도·욕구가 개입되면 안됩니다. 그렇게되면 대상(對相) 경계(境界)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대상(對相) 

경계(境界)에 끄달리지 않게 됩니다. 


만일 선정(禪定)을 닦을 때 경계(境界)에 끄달린다면 ‘아 내가 경계(境界)에 끄달렸구나’ 알아차리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합니다. 경계(境界)에 끄달렸구나’ 알아차리는 것을 놓쳤을 때 ‘나는 왜 안 

되나’, ‘나는 왜 놓치나’ 이러면 안 됩니다. 그건 공부법이 아닙니다. 경계(境界)에 끄달렸구나’ 알아

차리는 것을 놓쳤을 때는 다만 놓쳤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됩니다. 

후회하거나 절망하거나 낙담하는 것은 이미 욕심(欲心)이 개입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정(禪定)을 닦을 때 경계(境界)에 끄달린다면 ‘아 내가 경계(境界)에 끄달렸구나’ 알아차리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꾸준히 하는 것은 두 번째 기도할 때 간절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그것보다 더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지난 생으로부터의 

지금에 이르도록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한량없는 업(까르마)들이 계속 방해를 합니다. 이것을 

마장 또는 마구니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6년 고행하실 때 그리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정진하실 때 그만두고 싶은 그것이 

마왕의 목소리로 계속 반복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이것을 뛰어넘는 것을 일러

대결정심(大決定心)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이 “내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일어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 대결정심(大決定心)입니다. 


그러므로 호흡(呼吸) 관찰하는 것을 놓치면 다만 원위치로 돌아갈 뿐이지 어떤 회의가 오고 번뇌가 

일어나도 꾸준히 지속돼야 합니다. 밥은 안 먹더라도 이것은 해야 됩니다. 이렇게 대결정심을 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흡관찰 수행도 소승수행(小乘修行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자신은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지도 않지만 이것이 타인에게 어떤 특별한 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성문, 

연각이라고 말합니다. 


- 마지막으로 소위 대승(大乘)의 수행법(修行法) 즉, 해탈지도(解脫之道)는 어떤 것이냐? 마음의 원리

를 따라서 마음의 원리를 이해하고 마음의 원리에 맞춰서 공부해가는 방법입니다. 이 마음 원리가 

바로 법(法), 진리(眞理), 선(禪), 도(道), 불(佛), 심(心), 깨달음, 본래면목, 본래의 나, 본래성품,

근본성품이라는 방편의 말들이 가리키는 '이것'입니다. 불법!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말씀은 

사실은 '마음 작용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마음 작용의 원리' 이것을 법(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을 하고자 하는 자는 법(法), 즉 '마음 작용의 원리'을 이해해야 됩니다. 그 다음 그 법칙

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안 되고 그 법칙을 자기해탈에 자기고뇌를 벗어나는 데 적용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법칙을 연기법(緣起法)이 무엇인지 해석해서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 마음의 법칙을 

마음의 원리를 예를 들어 한 가지만 말해보겠습니다 


여성 분들을 중심으로 얘기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고 늘 취해서 들어온다면 

술 마시는 것도 문제지만 돈 쓰고 건강 해치고 온 가족 불편하게 만들고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무엇 때

문에 하나 이렇게  따져보면 남편의 행위가 이해가 안 됩니다. 부인이 남편의 행위가 이해가 안 되면 

부인의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부인의 마음이 괴롭습니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 만나고 친구와 

어울려서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왔는데 그런 행위가 잘못됐다면 남편이 괴로워야 되는데 왜 부인이

괴롭워합니까?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불법(佛法)은 인연과보법(因緣果報法)이잖아요? 인연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잖아요? 그러면 지금 누가 인연을 지었어요? 남편이 인연을 지었지요, 그러면 과보는 남

편이 받아야 되죠? 그런데 인연을 남편이 지었는데 왜 과보를 부인이 받습니까? 그러면 인연과보가 안 

맞는다는 얘기잖아요? 그러면 뭐가 잘 못됐을까요? 


마음이라는 것은 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먼저 답답해지는 성질이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지면 

괴로워집니다.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인연입니다. 그것의 과보가 바로 답답해서 괴로워지

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인연과보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부인이 괴로워지는 것은 남편이 술 먹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일입니다. 즉 ‘과(果)’는 답답해지는 것이고 ‘보(報)’는 괴로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 어떨까요? 마음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마음이 밝아지고 시원해집

니다. 위의 예에서 알고 봤더니 남편이 예전에 정말 어려울 때 신세진 사람을 만나서 어쩔 수없이 술을 

마시게 됐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목소리도 틔어서 나오고 얼굴도 밝아지고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이것이 인연과보법(因緣果報法)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나한테 이롭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바로 

법(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타인을 

이해하라고 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먼저 남을 이해하라고 가르친 것이지 

타인을 위해서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리(自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남편에게도 이익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타

(利他), 남편에게도 공덕(功德)이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중생을 구제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법(法)에 의거해서 상구보리(上求菩提), 즉 깨달음을 얻는 길이 바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길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남편을 이해한다하는 것은 남편을 구제하는 행위입니다. 남편을 구제하는 마음을 

내면 내가 먼저 이로워집니다. 그러므로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속에 보리(깨달음)가 증득되는 것입

니다. 이것이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며 동시에 대승(大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자기해탈의 길과 가정의 화목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열심히 정진하려 하는데 남편

이 방해를 해서 못하겠다는 말은 소승적(小乘的) 관점의 수행입니다. 대승적(大乘的) 관점의 수행법은 

법(法)의 원리에 따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앉느냐, 서느냐, 소리를 내느냐, 이런 형식이 문제가 되지 않

습니다. 이렇게 얻어지는 해탈의 길을 복(福)으로 말한다면 앞에서 윤회의 세계 안에서 우리가 말하는 

복(福)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중생에게 보시한다 하더라도 그 보시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마음하고는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씌어 있잖습니까? 바로 현실에 있는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행하면 여러분들이 바로 가피를 입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가피입니다. 

법(法)에 귀의했을 때 일어나는 해탈(解脫)이야말로 가피(加被) 중에 최고의 가피입니다. 이것을 여러

분들이 다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륵보살의 원(願)이 나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어(法語)를 들을 수 없다면 저 천상의 복

(福)이라도 나는 마다하겠으며 부처님의 법어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저 지옥이라도 기꺼이 머물겠노라.

”하신 것입니다. 해탈지도를 구하는 사람은 천상이냐 지옥이냐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것이 참다운 복(福)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기복(祈福)은 재앙을 자초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인연과보로 갚아야할 복(福)이라면 

미륵보살의 원(願)은 인과의 법칙이 끊어져버리는 해탈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사회에 

실천 활동을 하면서 그 사회적 실천 속에 자기 수행이 되고 자기 수행이 되는 만큼 바로 사회적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예불문에 나오는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자리이타(自利利他),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말은 모두 똑같은 말입니다. 이렇게 돼야 우리의 신앙심이 아주 굳건해지고 이런 불자

들이 자꾸 늘어야 불자가 느는 만큼 세상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법에 귀의하는, 부처님을 

찬탄 공경하는 그런 신앙을 숭산 큰스님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이고 그것에 따라서 또 수경스님께서 실천

하고 계시니까 여러분들도 그런 가르침에 귀의해서 정진하는 불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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