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과 마음공부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

장백산-1 2020. 3. 27. 16:52

사람은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   - - 월호스님                       


<그릇 이론>은 일단 사람마다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고 가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릇은 일종의 

자기 한계(限界)로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스스로 규정(規定)지은 한계(限界)를 말합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규정(規定)지은 자기 한계(限界)인 그릇 자체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릇 이론>을 5 단계로 살펴봅시다. 


하나, 그릇 비우기 : 참회를 통한 자기정화 


수행을 향한 첫걸음은 참회입니다. 예를 들어 그릇에 어떤 것들이 이미 가득 채워져 있다면 더 이상 

그릇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듯이 내 마음의 공간도 이미 분별 망상 번뇌로 가득 차있으면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마음 공간에 담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참회를 해서 마음 공간에 가득 차있는 

분별 망상 번뇌들을 마음 공간 밖으로 끄집어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겁니다. 죄의 반연이란 욕심부리는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무지의 마음이라는 삼독심(三毒心), 즉

나를 죽이는 3가지 독(毒)이 되는 마음인 나쁜 인연(因緣)을 말하는데, 만약 당장에 본래의 성품을 찾고

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심(三毒心)의 악연을 마음 공간 속에서 씻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삼독심(三毒心)을 어떻게 마음 공간에서 씻어낼 것인가? 일단 삼독심((三毒心)을 충분히 인정해 

주는 겁니다. 삼독심(三毒心)을 내가 스스로 만들었음을 인정하고 느껴서 하나 하나씩 씻어내는 겁니다. 


참(懺)은 종신토록 잘못을 짓지 않는 것이요, 회(悔)란 과거의 잘못을 아는 것입니다. 삼독심(三毒心)의 

잘못을 알고(인정하고) 나서 다시는 삼독심(三毒心)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함으로써 마음 

공간에서 삼독심(三毒心)을 씻어내는 겁니다. 


이러한 참회는 결국은 진정한 자기 자신, 본래의 나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진정한 참회를 통하여 

자기 정화(淨化)를 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지금 여기 있는 내 모습도 나의 작품이며 따라서 다름 아닌 

내가 나를 바꾸어나갈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 그릇 채우기 : 발원(發願)에 의한 자기전환(自己轉換) 


참회를 통하여 마음 공간에 있는 분별 망상 번놔가 어느 정도 비워진 후에는 발원(發願)을 해야 합니다. 

집중적인 참회를 통하여 일시적으로 마음 공간이 비워지기는 하였지만, 비워진 그릇을 그대로 놔두었다

가는 무시(無始) 이래로 굳어진  습기(習氣 : 습관적인 기운)로 인하여 금방 예전과 같은 삼독심(三毒心)

으로 가득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발원(發願)은 자기전환(自己轉換)의 출발점입니다. 발원(發願)은 업생(業生 : 업의 기운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원생(願生 : 발원의 기운으로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첫 단추인 것입니다. 업생이란, 어디서 왔는

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과거의 지은 바 업(業)의 기운에 따라 이끌려 살다 죽는 것

입니다. 원생이란, 스스로가 스스로의 삶을 지혜롭게 갈무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방향을 설정

해서 과거에 지은 업(業)을 벗어나 새롭게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원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적

으로 발원(發願)을 해야 합니다. 발원(發願)을 해서 삶의 패턴, 사고의 방향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발원(發願)은 '부처님, 이렇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부처님,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원(發願)을 통하여 자기 변화의 가능성을 신뢰하게 되고, 막연한 인생의 목표에 대한 

재정립과 함께, 정합이 되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좀더 구체적으로 목표에 다가서게 됩니다. 


셋, 그릇 키우기 : 기도에 의한 자기확장(自己擴張) 


참회를 통해 비운 마음 그릇에 발원(發願)을 채움으로써 자기전환(自己轉換)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보다 강력한 자기확장(自己擴張)을 경험할 순서입니다. 즉, 마음 공간, 마음그릇 자체를 키우

겁니다. 작은 마음 그릇에 안주해있던 스스로를 과감히 바꾸어 커다란 그릇으로 대치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선지식(善知識 : 훌륭한 가르침)과의 만남이 절대적입니다. 자기 혼자 궁리하고 

분별해봐야 스스로 규정지어 논 자기한계(自己限界)를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선지식(善知識)과의 만남을 통해서 기존의 나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좀더 확장된 나와의 만남이 가능

해지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선지식(善知識)과의 만남을 포괄적 개념(槪念)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이란, 앞선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남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을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내 

마음을 열어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저누 다 선지식(善知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경전의 가르침, 풀, 나무, 돌, 강, 산, 해, 달, 별, 땅, 바람 같은 자연(自然) 역시 선지식(善知識)이며, 무엇

보다도 독경, 염불, 주력 등의 수행을 통해서 자기 마음 속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것은 머리를 굴리는 생각을 굴리는 궁리나 분별을 떠남으로서 가능해집니다. 

선지식(善知識)은 본래 이미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있습니다. 마음의 저장 창고에는 본디부터 모든 것을 

구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식(善知識)을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 위해서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충분히 경험되어져야 해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지식(善知識)이란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식(善知識)과의 만남이 바로 기도(祈禱)입니다. 일체의 망념과 시비분별을 본래의 나에게, 다라니에, 

경전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적 변화를 몸소 체험함으로서, 기존의 소아(

小我), 가짜 나에 대한 그릇된 집착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강력한 우주의 에너지를 체험

하고,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넷, 그릇 부수기 : 참선에 의한 자기확인(自己確認) 


마음 그릇을 아무리 키운다해도, 결국 마음 그릇이 존재하는 한, 분별심인 마음 그릇 안과 마음 그릇 밖이 

있습니다. 나와 남이 있고, 선과 악이 일어납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를 체득코자 한다면 시비 분별 바교 판

단 해석이 쉬어져야 하고, 일단 마음 그릇이 완전히 부서져 버리는 체험이 필수적입니다. 참선은 바로 그

릇 부수기입니다. 


참선을 통하여 달성하고자 한 무념(無念) 무심(無心)이란, 시비 분별 바교 판단 해석이라는 허망한 생각,

즉 망념(妄念)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시비 분별 바교 판단 해석이라는 허망한 생각, 즉 망념(妄念)에 집착

치 않고 자기의 성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성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말하되,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자기의 

성품을 온전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궁리 분별함이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입니

다. 특히 유념해야 할 것은 세상만사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이 끊어지도록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념(無念) 무심(無心)은 '사유의 정지', 혹은 '의식의 끊김'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적 자각'의 상태

입니다'


무념(無念) 무심(無心) 이것은 분별심을 떠나 보고 듣고 사유함을 의미합니다. 나 너, 잘 낫다 못 낫다는 

분별을 하는 생각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바깥 경계를 대하되, 안

으로 마음이 바깥 경계에 머무름, 집착함이 없어야 합니다. 바깥 경계 모든 형상들이 실체가 없는 허망한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임을 직시하고 안으로 머무름이 없으면 무념(無念) 무심(無心) 은 달성됩니다. 


따라서 화두(話頭)가 필요한 겁니다. 화두를 제대로 잡고있으면 시비 분별 바교 판단 해석이라는 허망한 

생각, 즉 망념(妄念)은 저절로 사라져버립니다. 아니, 비록 시비 분별 바교 판단 해석이라는 허망한 생각, 

즉 망념(妄念)이 일어날지언정 더 이상 망념(妄念)에 집착하거나 걸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을 통해서 아상(我相 : 나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 생각)이 희석되어,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의식이 적어

지고 점차 세상을 자신의 주관적 판단이 아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보는 안목이 열립니다. 모든 현상을 

성품 자리에 입각하여 바라보게 됩니다. 


다섯, 그릇 만들기 : 행불(行佛) 실천에 의한 자기창조(自己創造) 


행불(行佛)은 부처의 행을 실행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행이야말로 부처입니다. 부처가 따로 있어 부처

의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의 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부처 입니다. 부처의 행이란 자신이 본래 부처

라는 자각(自覺)에서 시작합니다. 나 스스로가 불성을 지닌 신성한 존재임을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

것은 자신이 곧 자신의 창조자임을 믿는 것이며,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인생이란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연출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누구인가를 

참구하는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자의 삶입니다. 창조자의 삶은 ' ∼때문에' 가 아니라, ' ∼에도 불구하고'의 삶입니다. '재산

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에 다소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타 어떠한 사유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사할 줄 아는 삶이 자기창조(自己創造)의 삶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창조자는 언제나 머무르지 않는 

삶. 즉 더불어 생동하는 삶, 지금 여기를 사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일체가 '나'이며 '부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근원에 대한 물음은 항상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항상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삶을 사는 것은 판사가 아니라 관찰자로서 일체 중생을 자비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섯 단계의 <그릇 이론>을 살펴봄으로써 항상 바로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는 삶을 구현하게 될 

입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와 이웃 나아가 우주를 밝혀 나갈 것이며, 아울러 평생 도반으로서의 행불

(行佛人)으로 맺어질 것입니다. 행불(行佛)하십시오.


...... 


손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발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말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그리하여 자기 

생각 마음이 잘 절제되어 있는 사람, 그는 내적인 평온에 이르렀나니, 외로이 혼자가 되어 바람같이 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진정한 수행자라 한다.  -『법구경』,「比丘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