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과 보(報)의 굴레에서 벗어나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혀 처형된 후에 인류는 본성(本性)의 세계에 들어간 적이 없다. 예수가 우리를 위해 고통을 자처했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실패한 인생을 산 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이후에도 인간의 죄책감, 죄악, 고통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겪은 고통과 죽음은 헛수고가 된 셈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혀 처형된 것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기독교는 단지 믿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동양의 철학은 기독교의 믿음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밖혀 처형된 사건은 예수의 모든 고통이 예수 자신이 지은 축적된 업(業)의 결과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의 마지막 생이었다. 예수는 다시 육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그의 모든 고통은 한 지점에 응축되고 집중되어야 했다. 그 한 지점이 바로 십자가에 매달리는 처형이었다.
예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을 받은 게 아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고통을 받을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르는 결과, 즉 업보(業報)를 받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었고 고통을 받은 것이다. 아무도 예수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른 결과(果報)로 인해서 구속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어떻게 예수가 그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는 예수 자신을 노예로 만들 수도 있고, 자유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해방시킬 수도 있다. 십자가의 처형을 통해서 예수 자신의 업(業)이라는 은행 계좌는 해지가 되었다. 예수는 끝이 났고 예수를 묶어매었던 구속은 종지부를 찍었다. 예수에게 해당하는 모든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과정이 끝난 것이다.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육체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고, 죽은 예수의 영혼은 다른 자궁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았다. 예수가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여러 생 동안 겪었던 이 모든 일들을 고통스러워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그것이 하나의 지점, 하나의 생에 집중되었다.
그대는 업보에 간섭할 수 없다. 그대가 업보에 간섭하면, 그대 자신에게 더 큰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업보를 간섭하지 말라. 업보를 넘어서 업보를 주시하는 주시자(注視者)가 되어라. 업보를 실체가 아닌 꿈으로 받아들여라. 그저 업보를 보고 무관심해져라. 업보에 개입하지 말라. 그대의 육체가 업보에 고통스러워하면 그 고통을 주시하라. 그대의 육체가 행복하다면 그 행복을 주시하라. 그 어떤 것과도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명상의 진정한 의미이다.
- 오쇼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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