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적을수록 좋다.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목적은 삶의 태도를 개선하고 그릇된 생활습관을 고쳐 청정한 본래의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신앙의 목적이 이와같은데도 ‘백천만겁에 만나기 어렵다.’는 올바른 가르침을 만나고서도 자기개조가 없다면 그는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명색이 불자라고 말하면서 불자 아닌 사람보다도 훨씬 옹졸하게 처신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든지 목격 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남의 일에 그토록 참견하기를 좋아하는가? 소인배들의 속성인 시기와 질투는 열등감의 소산임을 심리학을 들출 것도 없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자기는 남들 처럼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처지에 놓여있지 못하니까 배 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적인 결점은 너나없이 누구한테나 있다. 청정한 생활규범을 가지고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으면 신앙의 문에 들어선 것이고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면 어두운 업(業)만 더욱 쌓여갈 뿐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항상 자기 코끝의 뾰족한 것만 보고, 남의 눈동자 모난 것은 묻지 말라. 만일 이와 같이 수행해 간다면 어디를 가나 도량 아닌 곳이 없으리라."
타인에 대한 비난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로 항상 제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인간은 늘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인간을 함부로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다. "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눈 속의 대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또 서양속담에 남의 한 가지 허물을 숨겨주면 신은 너 의 두 가지 허물을 용서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지당한 말씀이다. 인간에게 있어 으뜸가는 덕(德)은 관용(寬容)이기 때문이다.
총에 맞은 상처는 나을 수 있지만 사람의 입으로 입은 마음에 난 상처는 두고두고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도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하신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말 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는다. "그렇기 대문에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말만을 하라고 타이르신다.
옛 어른들께서 이런 말도 남기셨다 “남을 헐뜯는 소리를 듣게 되거든 남을 헐뜯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지 말라. 누가 남의 허물을 들추거든 끝까지 들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들은 것은 잊도록 힘쓰라. 그 대신 남의 좋은 일에 대한 말을 듣거든 마음속에 새겨두고 이야기 하라.”
좋은 친구란 말이 없어도 넉넉한 사이를 말한다. 말을 빌리지 않고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친구 사이다. 친구 사이는 그만큼 서로가 맑고 투명해야 한다. 그들은 귓속의 귀로 소리 없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하나임을 거듭거듭 확인한다. 불필요한 말이 많고 허망한 생각, 즉 망상(妄想)이 많으면 청정한 본래의 나, 진리(眞理),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의 현전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말과 생각이 끊어지면 어느 곳엔들 통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말은 적을수록 좋다.” <신심명>에 있는 말씀이다.
출처 : 법정 스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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