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자체가 자연(自然)입니다. / 설정스님
눈발 흩날리는 밤길을 달려 당도한 능인선원의 새벽. 절집은 사바세계보다 훨씬 일찍 깨어나 어두운
산 아래 사바세계로 불빛과 목탁소리를 내려보내고 있었다.
설정스님은 “하안거 동안거 결제철에는 부모가 돌아가셔도 선원 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선방의
불문율이지만 이번에 그 철칙을 깼다”며 “망가지는 환경을 복구하는 일은 수행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설정스님은 “평소에 자연(自然)을 아끼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재앙이 없었을 것”이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리, 지질적 환경뿐만 아니라 사람이나·사물의 저절로 생겨난 본성(本性)이 자연(自然)입니다. 그러니
마음(心)과 자연(自然)과 불법(佛法)이 다르지 않습니다. 친자연, 친환경이라는 말을 따로 떼어내어 말할
필요도 없어요. 본래적인 마음(心)과 자연(自然)과 불법(佛法)을 사람의 욕심으로 오염시키면 안됩니다.”
덕숭산(495.2m) 정상 부근에 있는 능인선원은 100여년 전 만공스님이 ‘금선대’라는 초가를 지으며 시작
됐다. 근대 선의 등불을 밝힌 ‘한국불교의 태산’ 경허· 만공 선사와 선농일여(禪農一如)를 실천한 벽초,
현재의 방장인 원담스님의 선맥을 잇는 ‘선지종찰’의 대표적인 선원. 격외(格外)의 조사선과 선농일치의
덕숭문중 법맥과 가풍을 잇는 중심에 수좌(首座·선원을 이끄는 선승) 설정스님이 있다.
“이곳 능인선원은 구참 수좌들이 주로 방부를 들이는 곳입니다. 하루 8시간으로 참선을 짜놓았지만
스스로 발심을 해서 열네 시간, 열다섯 시간씩 참선하는 스님도 많습니다. 죽비를 치지 않아도 새벽
2시쯤이면 모두들 일어나서 자발적으로 공부를 합니다.”
올해는 전 종회의장 지하스님, 약천사 주지를 지낸 혜인스님 등 법랍 50년의 스님들도 방부를 들였다.
스님들은 3개월 동안 선방에 들어앉아 화두만을 참구한다. 하루에 아침·점심만 먹고 저녁은 거르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을 한다. 능인선원에서는 울력(노동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겨울철은 일이
적지만 여름에는 농사일을 함께하는 자급자족이 생활화돼 있다. 이날은 초엿새, 스님들이 삭발 목욕을
하고 포행을 하는 날이다. 스스로를 산문(山門)에 묶어 가두고 정진하던 스님들이 삼삼오오 덕숭산을
오른다.
“마음속에서 일체의 분별 번뇌 망념을 자르는 지혜의 칼을 만드는 것이 선(腺)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다른 말로 중도(中道)라고도 하지요.”
스님은 “중도(中道)라는 것 자체도 부득이해서 한 방편의 말일 뿐 그냥 견진번뇌가 다 떨어진 청정하고
무구한 상태”라며 “깨달음 그 자체가 중도(中道)”라고 말했다. 상대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편견없는 마음을 실천하면 그것이 생활 속의 중도(中道), 생활 속의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물질
만능의 시대에 불가피한 경쟁은 또 어찌하란 말인가. 세상 모르는 산중 스님의 말씀 아니냐고 찔러봤다.
“아닙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중생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지요. 탐(욕심), 진(성냄), 치(어리석음),
만(오만함), 의(의심)가 중생을 그대로 중생에 가둬버리는 근본 무명, 근본 번뇌입니다. 이 번뇌 때문에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 국가끼리도 원망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하는 불행이 일어납니다.”
스님은 “지금의 세상은 탐, 진, 치, 만, 의가 쏟아내는 오물로 뒤덮여 있다”며 “국민과 민족을 위해 멸사
(滅私)해야 할 정치인들이 특히 그렇다”고 경책했다. 화제는 자연스레 대통령 선거로 넘어갔다. 스님은
“정치인들이 근본 번뇌에 휘둘려 자기 개인의 명예와 이익만 좇아 처신하는 데서 우리 사회에 정치적
불신이 극에 달했다”며 “특히 자신과 주변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도려내서 수행하듯 독하게 새출발
해야 민심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설정스님은 대통령 당선자와 정치인들이 마음 깊이 새길 금언으로 ‘진실불허(眞實不虛)’를 들었다. 오직
진실할 뿐, 남에게나 자신에게나 속지도 속이지도 않는 것이 진실불허(眞實不虛)의 뜻이다.
스님은 열세살 때 아버지를 따라 수덕사를 찾았다가 돌연 출가했다. 현재 덕숭총림의 원담 방장이 설정
스님의 은사다. 출가한 지 2년 되던 추운 겨울날, 일을 하다가 도반과 다퉜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은 제자들
앞에서 옷을 훌훌 벗었다. 장삼, 가사만 걸친 스승은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서 절을 하기 시작했다.
원담 스승의 모습은 그에게 평생의 가르침이 됐다. 법랍 50여년을 ‘무(無)’자 화두를 들고 올곧게 수행했다.
설정스님은 수월선사를 닮고 싶다고 했다. 만공의 사형인 수월은 늘 머슴처럼 일만 했다. 그러나 밤에
아랫마을에서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올 정도로 방광(放光, 빛이 남)을 일으키곤 했다. 설정스님 그는
평생 방일(放逸,나태함, 게으름)을 경계해 왔다고 한다. “쉽게, 편하게 사는 것이 쉽고 편한 것이 아닙니다.
방일하면 오욕(5가지 욕심 ; 재물욕, 색욕, 수면욕, 명예욕, 장수욕)에 빠지기 쉽지요. 힘들고 어려운 것을
선택하면 스스로 당당할 수 있어요. ‘범유하심자 자귀의만복(凡有下心者 自歸依萬福)이라 했어요. 무릇
자기를 능히 낮출 줄 아는 사람에게 모든 복덩이가 저절로 굴러온다는 뜻이지요.”
‘하심(下心)’은 비굴과는 다르다. 자기를 사정없이 낮추면서 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고 위하고, 좋은 일에는 함께 기뻐하고 나쁜 일에는 함께 진심으로 가슴아파 하는 것이 하심이다.
“하심(下心)’ 자체가 복짓는 일입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잖아요. 관계가 원활하고 아름다우면 사회
전체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부부간, 부모자식 간에도 하심해야 합니다. 무상(無常)을 알면 저절로 하심
하게 됩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다고 해서 제멋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이 무상
(無常)하므로 인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하심(下心)과 무상(無常)은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이지요.”
스님은 충실한 삶보다는 그저 쉽고 편한 생활만을 좇는 속세인을 꾸짖는다. 설정스님은 환경운동을
펼치는 수경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는 서울 수유동 화계사의 회주이기도 하다. 화계사를 기반으로 평생
해외포교에 힘쓰다가 입적한 숭산(崇山)스님의 유지를 잇는 일도 그의 몫이다.
“생명(生命)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면 수행할 필요도 없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정토가 됩니다.
마음을 청정하고 바르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하면 갈등이 생길 일이 없습니다. 이미 ‘나’에게 행복, 공덕,
위신력은 다 갖춰져 있어요. 그것들을 그냥 꺼내서 실행하면 됩니다. 그런 마음만 모으면 전쟁, 굶는문제
환경문제도 다 해결됩니다.”
스님은 올해 시끄러웠던 불교계를 향해서도 한마디 했다. “수행자로서 제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본질
에서 벗어나니까 사고가 생기는 겁니다. 출가자 본연의 자리를 항상 살필 일입니다.”
설정스님은 새해의 법어로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말했다. 어디에 있든 당당한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중국 임제선사가 남긴 수처작주(隨處作主)의 뒷말은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서있는 곳마다가 전부 다
진실하다는 말이다.
“살다보면 좋은 때도 힘들 때도 있어요. 좋을 때도 도취하지 말고 나쁠 때도 낙심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죠. 그러려면 인생의 주인으로, 우주의 주인으로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처: 다음카페, 가장 행복한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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