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
2장 깨어있음
(법구경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
(법구경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런 수행자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법구경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음은 바로 매 순간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연소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매 순간 순간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성취된 순간만이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 현재를 관(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매 순간 순간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깨달은 자는 매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을 즐기는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순간 완성되어 있다. 삶은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것은 수행(修行)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에서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智慧)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분별을 하는 생각이나 분별을 하는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방황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라는 순간(瞬間)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몸과 마음과,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觀察)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修行) 방법의 핵심(核心)이다. 다만 그것들을 관찰(觀察)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을 수행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찰(觀察)하라.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몸과 마음과,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觀察)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글허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을 관찰(觀察)하려고 하면 마음이 쉬지않고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은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날뛰는 마음을 고요히 관찰(觀察)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찰(觀察)하라. 흩어져 날뛰는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自覺)으로 삶을 관찰(觀察)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平和)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禪定)과 삼매(三昧)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분별 망상 번뇌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자유(自由)로운 해탈 열반이라는 세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인도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시녀를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석가모니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 왕비를 죽게 만든다.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 왕비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觀修行)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사건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 왕비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인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 왕비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이 일을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사마와띠 왕비의 죽음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前生)을 말씀하셨다. 그녀들은 전생(前生)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붓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붓다를 화장을 해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 왕비는 이번 생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 왕비는 죽었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분별 망상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 열반이라는 세상에 이른다.
2009.03.12 글쓴이 :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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