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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다만 아무 분별(分別)없이 비추어 보라

장백산-1 2021. 7. 4. 16:41

이 세상을 다만 아무 분별(分別)없이 비추어 보라.  - 법상스님

 

이 세상을 분별(分別)하지 말고 다만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모든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와 마주치게 됩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六根)이 각각 색 성 향 미 촉 법(六境)이라는 경계(대상)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육근이 육경을 마주치게 되면 사람들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과거에 경험했던 나의 기억들 이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마주하는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이나 업식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색안경(色眼鏡)과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 이 순간의 경계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색경)을 보면서 옛날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지금의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사람들 마음 속에서는 모르는 처음 보는 사람을 충분히 분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하는 이유는 업(業)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법문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한 분의 스님을 박이나 천의 스님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한 분의 스님을 업식(業識)이 비춰주는 한 한 분의 스님에 대해 끊임없이 많은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제가가각 나름대로의 업식(業識)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점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자신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마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業識)인 것이지요. 사람들은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경계와 마주치더라도 자신의 업식(業識)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을 하고 분별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업식(業識)이 행하는 병통(病痛)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業)의 시작입니다. 업(業), 업식(業識)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하고, 또 그 분별은 또 다른 업의 씨앗이 됩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분별과 업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흔히 말하는 지독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입니다.

 

수행은 바로 이 분별(分別)로 인한 지독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는 것입니다. 분별(分別)을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業)을 짓지 않도록 하고, 안에서 올라오는 업(業)의 그림자인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마주치는 순간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分別)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싫다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곧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맛을 보았을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히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분별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분별하는 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선업과 악업의 씨앗으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마주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육근과 육경을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分別을 멀리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서는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만큼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분별을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지은 업(業)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분별을 잘 비추어 보아 분별을 잘 관하라는 말입니다. 분별하지 않으려면 분별을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모든 분별을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사람들은 막연하게 지금 분별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나중은 없어요. 분별을 비추어보는 오직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만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의 자리, 진짜나의 자리, 본래면목의 현현(現顯)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 부처(佛)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이며,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부처 마음으로 우주를 이 세상을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충만한 우주법계를 자유(自由)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自由自在)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애를 쓰면서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해서 언젠가는 깨닫겠다, 언젠가는 부처가 되겠다 그러면 마음공부 못합니다. 마음공부는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고, 부처가 되는 것도,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강조해서 말하건데 인위적으로 애쓰지 마세요. 인위적으로 깨닫겠다고 애쓰지 말고, 부처(佛)가 되뎄다고 노력하지 마세요.
분별을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가 자성불자리, 본래자리입니다.